제25장 요출괴몰(妖出怪沒) (1)
여인의 아름다운 손을 섬섬옥수(纖纖玉手)라고 한다. 섬섬은 가늘고 고운 비단이니 손가락을 형용하는 말이요, 옥수는 옥으로 빚은 손이니 하얗게 윤기 나는 피부를 가리킨다.
옥 같은 손의 비단 같은 손가락.
봉대저의 손은 그리 빠르지도 않게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다가왔고, 나긋하게 세운 검지도 한들한들 장난치는 듯.
하지만 해원기는 그 손가락에 자신의 콧잔등을 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깨가 살짝 흔들리며 의자가 한 치쯤 밀려나고, 오른손이 날벌레를 쫓든 가볍게 움직였다.
역시 느긋한 속도, 손가락도 마찬가지로 검지 하나.
팟.
봉대저가 뭐에 걸린 것처럼 손을 움찔하더니 얼른 거두어들였다.
“어머, 매정해라. 뭐가 묻은 것 같아서 떼주렸더니.”
손을 오므리며 흘겨보는 눈에 풍정(風情)이 뚝뚝 떨어진다.
해원기가 오른손을 펴 수염이 거뭇한 입가를 쓱 문질렀다.
“막 식사를 마쳤습니다. 워낙 게으른 성품이라. 그렇다고 처음 뵙는 낯선 이에게 못난 꼴을 보일 정도는 아니죠. 더구나 얼굴이 온통 찢겨나가는 걸 어찌 참겠습니까?”
봉대저의 흘겨보던 눈이 확 커졌다.
“찢기다니? 해 소제는 이 누님을 그렇게 흉악한 사람으로 봤어? 이거 섭섭하네.”
원망스럽게 여덟 팔자를 그리는 눈썹. 남들이 봤다면 진짜 오래 사귄 사이로 알겠다.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가 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별별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손을 탁자 위에 내리며 정색했다.
“보자마자 수옥지(漱玉指)로 긁고, 손톱에는 미혼분(迷魂粉)까지 끼워 넣은 사람을 누님으로 모신 기억은 없습니다. 누구십니까?”
봉대저의 손가락을 일지광한으로 봉쇄하고, 입가를 쓱 닦으면서 어떤 공격이었는지 이미 간파했다.
봉대저의 토라진 듯한 표정이 비로소 굳어진다.
뜻밖이었나. 가만히 해원기의 눈을 들여다보듯 바라보다가 왼손이 가만히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과연. 하긴 이 정도 되어야 이 누님이 나올 만하지. 흐음, 나는 그냥 봉대저라고 부르면 되고, 해 소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어.”
해원기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스르르 풀리는 표정, 그리고 은근히 보내는 눈웃음.
참으로 난감한 여인이다.
“누가 그런 부탁을 했을까요?”
“글쎄. 그건 밝히기 어려워. 그런 조건이었거든.”
“뭘 알아보라는 부탁이었습니까?”
“뻔하지. 해 소제의 출신, 내력, 사문, 무공 수준, 가족은 몇이고 친구는 누구며, 애인은 있는지. 아니.”
물어보는 대로 답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는 모습도 교태가 넘치는데.
문득 말을 끊더니 묘한 웃음을 머금는다.
“결혼은 했을까? 설마 애까지 있는 건.”
“이렇게 허튼 얘기만 계속할 셈입니까?”
수옥지로 얼굴을 찢고 미혼분으로 혼절시키려던 암습이 전부 탄로 났건만, 봉대저라는 이 여인은 무슨 담량으로 이렇게 여유를 부리나.
자신이 암습을 시도한 것 따윈 잊어먹고서 한가하게 얘기나 나눌 셈인가.
봉대저가 눈을 깜빡이다가 객잔 안쪽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당가의 오매불망, 황보세가의 장권쌍절? 애송이들인데 뭘. 아, 해 소제랑 같이 다니는 꼬맹이는 좀 다를까나. 이상하게 어울리게 되었다며?”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
증명단과 동행하게 된 발단을 아는 듯하니. 그렇다면.
“반룡령에서 왔습니까?”
칼로 자르듯 묻는 말에.
봉대저가 비로소 느긋하던 얼굴을 찡그렸다.
“잉? 눈치 챘어? 겉보기완 다르네.”
얼굴에 감정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걸 ‘손으로 움켜쥔 듯’하다고 말한다. 소용가국(笑容可掬)이니 수용가국(愁容可掬) 같은 표현이 그렇게 생겼는데.
봉대저의 찡그린 얼굴이 딱 그 표현에 걸맞다.
나이에 어울리게 느슨하면서 풍정이 넘치다가, 어떤 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워서.
상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겉보기와 다르다’니. 해원기가 내심 쓴웃음을 삼켰고.
봉대저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한다니까. 해 소제가 먼저 말했으니 괜찮겠지. 그 반룡령이 부탁한 거야. 그런데 부탁이 너무 엉터리라, 겨우 따라잡았다고. 아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지친 시늉까지 한다.
해원기가 봉대저의 연기에 상관없이 잠깐 염두를 굴렸다.
증명단과 일행이 된 건 제남으로 들어가는 관도에서부터. 그리고 대명호에서의 싸움, 황부를 거쳐 태산. 악송령이 일행이 된 후에는 태안현. 개봉에서 여기 장갈로.
제남으로 들어가는 관도를 막아섰던 반룡령은 태안현을 떠나자 탈명궁사와 강설궁진으로 기습을 가했었다. 백문량이라는 소령주가 주동이 되어서.
‘그러고 보니 그때 도주한 자들이 개봉에서 회합한다고 인색이귀가 말했었지.’
잊고 있었다. 개봉의 응방원에서 풍진삼우와 재회하면서 아무래도 좀 들떴었던가. 용문세가의 이가주가 오보혜를 맞으러 온 덕에 보호의 책임을 벗었다고 홀가분했었나.
백문량과 반룡령의 수하들. 개봉에서 그 흔적을 찾는 걸 깜빡했다.
해원기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봉대저가 또 입을 놀렸다.
“여자 둘에 남자가 둘이었다, 셋이었다가. 인상착의가 영 맞지 않는 중에 꼬마 여검사를 데리고 다니는 더벅머리 총각을 찾으라는 게 말이 되냐고? 나 참.”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달라는 건가.
종알종알 혼잣말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해원기를 빤히 쳐다보는 눈.
가을바람에 물결이 찰랑거리듯. 소위 추파(秋波)를 보낸다는 게 이런 눈인가 보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해원기가 일부러 표정을 더 딱딱하게 굳혔다.
“반룡령의 부탁이라. 이익을 위해 그 밑에 들어가면 어차피 한통속이잖습니까. 그럼 동창의 주구로 봐야겠군요.”
인색이귀도 재물에 홀려 참가한 자들. 아직 반룡령의 구조를 알진 못하지만, 이 봉대저의 부탁이란 말을 믿을 수는 없다.
더구나 반룡령이 동창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혐의가 있기에. 슬쩍 넘겨짚자 봉대저가 대뜸 코웃음을 쳤다.
“흥, 듣기 거북하구먼. 이 봉대저가 누군데 남의 사냥개 노릇이나 하겠어. 뭐, 그렇게 여기고 싶으면 그러라고. 어차피…….”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 불쾌하게 반박하다가 말을 끊더니.
“호호, 해 소제, 정말 보통이 아니라니까. 자자, 그러지 말고 이 누님 좀 도와주라. 응? 응?”
미묘한 웃음과 함께 도로 교태 섞인 응석을 부린다.
해원기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이 희한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수옥지는 독특하고 궤이(詭異)한 지법. 부드러운 형태 속에 금석도 찢는 신랄함을 숨긴 독한 무공이지만, 딱히 사도(邪道)나 마공(魔功)으로 치부하긴 어렵다.
오랜 연원을 지녔고 연성하려면 상당한 고련이 필요해서 그 비결이 거의 잊혔건만.
나이가 많다고 해봐야 삼십 후반일 봉대저가 섬섬옥수로 보이려면 대성(大成)했다는 뜻. 그런데도 손톱 밑에 미혼분을 넣은 건 상식 밖이다.
해원기를 시험하려고 했나.
게다가 처음부터 기루의 기녀 뺨칠 온갖 교태를 다 부리고,
반룡령의 사주를 받은 게 밝혀졌는데도 뻔뻔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들러붙는 듯 끈끈한 언행.
해원기로선 영 거북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바로 손을 써서 제압하기도 어정쩡하다.
요사스러운 느낌은 분명히 있는데,
그 속내를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어때? 해 소제가 궁금한 걸 나에게 묻고, 나도 해 소제를 하나씩 알아가고. 서로 교환하는 거야. 괜찮지 않아?”
봉대저의 이어진 제안에 해원기의 미간이 움직였다.
어지간히 해원기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 그게 반룡령의 부탁이라고도 했다.
반룡령이나 동창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해원기는 성급하지 않았다.
“그다지 궁금한 게 없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 의심스럽고 믿음이 가지 않는데 뭐하러…….”
“에이, 그러지 마. 이 누님이 얼마나 기막힌, 그래, 미리 선심을 쓰지 뭐. 까만 피풍을 걸친 꼬마 여검사랑 제남을 떠날 때는 넷이었지? 두 쌍의 남녀. 그러다가 태안현에 왔을 때는 칼잡이 덩치 하나가 늘었고. 소령주가 나름대로 이것저것 끼워 맞춰 봤는데 자꾸 어긋나더래. 개방이 숨겨놓은 고수? 비천무영의 지인? 혹시 흥륭황가가 초빙한 구주정문의 고인? 감이 잡히지 않는 거지. 그러다가 개봉 부근에서야 두 쌍 중에 한 쌍이 바뀐 걸 알았다네. 어설프기도 하지. 겨우 여기까지 듣고서도 이 누님이 부랴부랴 뛰쳐나온 거거든. 구란와자의 흔적을 찾는 이가 있다는 소식 하나만 가지고.”
도톰한 입술이 잘도 떠들어댄다.
지금까지 이어진 해원기의 행적을 주르르 읊어대면서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스대는 봉대저.
해원기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태안현이라면 조양신문과 노문기, 개봉 부근에서 겪은 구란와자라는 이름도 댔다. 해원기 일행을 계속 주시했다는 뜻이고.
그건 반룡령이 전부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봉대저의 수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개방이 숨겨놓은 고수? 흐흥, 그건 아마 신비의 순행장로라는 유룡개를 가리킬 텐데, 개봉까지 동행한 준수한 귀공자가 아닐까. 거지가 거지로 보이지 않으면 신비한 순행장로에 어울리잖아. 그럼 비천무영의 지인? 비천무영이 얼마나 거만한지 몰라서 그래. 당세에 알려진 뛰어난 고수 중에 비천무영과 가까운 이가 몇이나 될까. 독불장군인 성격이라서 만약 멀쩡했다면 개봉까지 직접 나섰을 거고. 딱히 부탁할 안면도, 시간도 없는 양반이거든. 그리고 흥륭황가는 그 비천무영 하나 믿고 버텨온 터에 성질 건드리면서 다른 고수를 초빙할 리 없지. 더구나.”
잠깐 말을 끊은 건 입술이 말라서가 아니다.
해원기의 눈치를 살피는 봉대저의 눈이 고양이처럼 요요한 빛을 머금고,
“해 소제가 쓰는 수법.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검법으로 보인다더군. 그런데 검은 없다? 호호, 이거 진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검’이란 단어에 언뜻 바뀌는 해원기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반응이 있으면 기운이 나는 법.
“당세에 대체 누가 검법을 수공(手功)으로 변환할 경지에 이르렀을까. 화산파 장문인인 화산검협? 종남파 장문인인 청령선고? 청성과 아미에도, 아니, 이곳들은 너무 멀어. 해 소제는 산동에서 출발했으니까. 물론 산서 남쪽에도 수상한 소문이 있고, 꼬마 여검사가 그쪽에서 온 것 같기는 하지만. 용문세가의 지낭과 헤어지고서도 계속 남쪽이라면 혹시 소림이나 무당일 수도 있지. 더 밑으로 강남은, 에, 그러면 아주 골치 아파지니까 이쯤에서 끝낼게. 어때?”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까불거리는 머리. 긴 머리칼이 다시 출렁거리는데.
새삼스럽게 봉대저를 똑바로 보는 해원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정밀하고 합리적인 분석과 그 분석의 바탕이 되는 광대한 지식.
보통이 아닌 걸 넘어서서,
엄청난 여인이다.
기다려도 그저 묵묵히 보기만 하는 해원기. 봉대저가 결국 혀를 차며 두 손을 들었다.
“치잇, 뭐야, 사람 민망스럽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따져볼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이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봐, 호되게 당한 반룡령이 가만있겠어?”
그럴 리 없다. 백문량이 활과 화살로 야습한 것만 봐도.
봉대저가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이 누님만 찾았을까나. 이 누님에겐 비할 수 없지만, 그럴듯한 작자들이 꽤 있고. 개중에 어떤 작자는 거친 짓도 태연히 저질러. 이 누님이 혼자서 찾아온 심정을 알아야 해. 해 소제는 뭔가 엉뚱하게 휘말려서 억울할 것 같았단 말이야.”
해원기가 상대해주지 않으니 지쳐서 물러나려나. 그러면서도 끝까지 누님을 자처하며 남동생 해원기를 걱정하는 척.
그런데.
“개봉까지야 용문세가 때문이라고 여기겠으나. 지나치게 여기저기에 끼어들면 의심이 더 진해지는 법이거든. 당장도 당가의 추문(醜聞)에 어쩌자고 동행해서…….”
뒤를 흐리는 말에 해원기의 시선이 확 따라붙었다.
그러나 봉대저는 이미 긴 머리칼을 크게 흔들며 몸을 돌린 후.
“되도록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걸. 이 누님이랑. 또 봐.”
헐렁한 장포가 걸을 때마다 펄럭인 건 이 봉대저가 과하게 둔부를 흔들어서였다.
해원기에게 뒷모습을 강조하려는 의도인지, 몇 걸음 걷다가 왼손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겨 늘씬한 목선까지 보이더니.
휙.
돌연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놀라운 신법. 객잔에 들어올 때 해원기가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