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의운중중(疑雲重重) (4)
식사를 마치니 간밤의 피로가 밀려든다.
소식을 받기까지 예상한 시간은 반나절.
아침나절에 든 손님이 객잔에서 잠시 눈 붙일 곳을 찾는 건 흔한 일이라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진 후에 해원기만이 남았다.
탁자에 남은 건 다 식어버린 두부 몇 조각과 만두 한 개.
해원기가 손으로 만두를 조금씩 찢어 입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흑목이라는 왜인에게 얻은 정보는 함부로 공개할 수 없고, 당령의 설명도 충분치는 않다.
‘가출한 당가의 막내를 찾으러 그 누이가 나선 건 당연하지만, 그 이후의 얘기에는 감춘 부분이 꽤 있다.’
말썽꾸러기 남동생이라도 다음 대를 이을 소가주랬다.
당령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녀 혼자서, 그리고 가까운 사이의 황보세가 공자가 뒤쫓아 왔다니. 더구나 당규가 가문의 정수인 독경까지 지녔거늘.
‘일부분이라고 얼버무렸지. 그런데 저 두 사람만 내보냈을 리가.’
독경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라도 가문의 정수라면 당가의 가주가 직접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내막이 있다.
물론 당가의 집안일에 외부인인 해원기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으나. 그다음에 이어진 당령의 독에 대한 강의, 그건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음을 의미했고.
‘독경약전에서 약전은 잃고 독경만 남았다. 그런데도 동전의 양면이란 표현을 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복원의 실마리를 찾은 듯. 그리고 그 삼재금독에 관한 얘기는 간단치 않은 도리를 품고 있다.’
폭신폭신한 만두.
찰진 반죽에 적당한 숙성, 갓 쪄낸 만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촉감이다. 음식으로 소문난 객잔답게 평범한 만두에도 정성이 담겨서, 한 겹 한 겹 손으로 찢어낼 수 있고 드러나는 속살도 새것처럼 뽀얗다.
당령이 서슴없이 집안의 기밀을 밝힌 건 해원기와 증명단의 목적지가 약왕당인 걸 안 이후.
당규의 뒤를 쫓아 하남까지 왔으면서, 약왕당이란 이름이 나오자 동행을 청했다.
함부로 남을 의심하지 않는 해원기지만, 당령의 언행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보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전문적인 지식. 그러면서도 삼재금독을 정확히 설명하진 않았어. 먼저 화합독술을 입에 올렸기 때문일 수도.’
사신공멸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은 삼화검. 그 피를 뒤집어쓴 서시 분장의 인물은 아무도 모르게 전신이 녹아버렸다.
음독이니 양독이니, 배합조제로 화합독술이란 게 발동하고 그 원리가 바로 당규가 가출할 때 지닌 독경 일부분에 적혔다고 했었다.
그런데 객잔에서 새로 가르쳐준 삼재금독.
천재독이 시독이요, 지변독이 이독이라면, 인앙독은 화독(和毒)으로 불렸을 터.
천시지리인화(天時地理人和)에서 글자를 땄다면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아까 증명단이 천재지변과 재앙에서 갖다 붙인 이름이라고 툴툴댄 것처럼 이 삼재금독의 명칭은 영 유치하지만.
만약 인앙독의 별칭이 정말 화독이라면 또 화합독술과 겹친다.
‘독.’
이 분야만은 아는 게 별로 없는 해원기다.
그가 익힌 신왕공이 본래 모든 독을 거부하는 힘을 지녔고, 자연스레 발현되는 제탁지검으로 어떠한 탁기도 베어낼 수 있기에.
사부도, 두 분 사모도 독에 대해선 알려줄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독도 어차피 하나의 이치, 박대정심을 목표로 하는 해원기는 당령의 말을 통해 어느 부분이 모호한지 찾아냈다.
당령과 황보관. 가출한 당규를 찾는 게 거짓은 아니겠으나, 그 안에 다른 곡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백여 년 전에 이단이 만든 인앙독의 이름이 망령칩독인 것도 알잖나.
“후.”
식은 두부 한 점에 떫은 차 한 모금.
뒤늦게 젓가락을 놓은 해원기가 배부른 듯 숨을 내쉬는 소리에, 문가에 앉은 점소이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부귀한 집안의 젊은 여인들이 남장하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당령의 말쑥한 외모와 황보관의 한눈에 드러나는 늠름함, 게다가 증명단은 검은 피풍에 어깨 위로 검이 삐죽 나왔으니 보통사람들이 아닐 거다.
그에 반해 평범한 흑의 경장에 더벅머리. 쉬러 들어가지도 않고, 식사도 혼자서 남은 음식으로 때우니 다른 셋을 모시는 아랫사람으로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눈을 감는 해원기가 안쓰러웠나. 아니면 비슷한 처지로 여겨 동정심이 들었나.
점소이가 커다란 차호(茶壺)를 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손님은 여기서 그냥 쉴 셈이요?”
해원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이 들었을 리 없다. 신왕공은 언제 어디서도 운용할 수 있고, 그 바탕은 스스로 깊이 침잠하는 잠심침령. 대강 생각을 정리한 후에는 잡념을 싹 지우고 호흡을 다스리는 데 집중했었다.
당연히 점소이가 다가오는 것도 미리 알아챘다.
“부탁한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요. 마침 뜨거운 차가 생각났는데. 고맙군.”
내미는 찻잔에 점소이가 차를 따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혼자만 고생이신데. 그게 그리 쉽진 않을 겁니다. 대충 있다가 방에 들어가시구려.”
낡은 객잔이라 점소이도 꽤 나이가 든 편. 해원기가 비슷한 나이라고 신경을 써주나 보다.
“에, 허창 성내의 장건마(張健馬) 소개로는 이 부근이 빠삭하다던데?”
건마라는 별명을 지닌 허창 쪽 쾌체. 객잔을 소개한 그를 들먹이며 슬쩍 속된 표현을 섞자 점소이가 피식 웃었다.
“아까 들어서 알지요. 하지만 장건마라고 해도 제대로 소식을 얻으려면 며칠은 걸릴걸. 손님이 언제 소개받았는지 몰라도, 요새는 좀 달라졌거든요.”
해원기가 뜨거운 차를 후후 불다가 고개를 들었다.
“달라졌다고요?”
기껏 특이한 물자나 극단과 얽힌 소식 따위를 알아보려고 부탁했었다. 이 지역 인맥을 통한 수소문에 불과한데.
점소이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
“일 년쯤 됐나. 역참과 마방 사람들이 싹 바뀌었거든. 뒷배가 든든한 이들이 새로 일을 맡아서, 뭐, 우리 장갈은 더 좋아졌달까. 근데 그렇게 되면서 씀씀이는 나아져도 어째 인정은 말라가는 게. 관가(官家) 양반들이 뒤를 봐준다는 소문도 돌고. 아문의 어르신들이 슬슬 피하는 걸 본 사람도 있고. 예전처럼 서로 소식을 알리기보다는 입 꾹 다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지요. 소식이나 소문이 다 돈이 된다고 하면서리.”
해원기의 수더분한 대응에 마음을 턱 놓았는지. 슬그머니 맞먹는 말투까지 쓴다.
해원기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어디서나 생길 법한 변화. 이 장갈이라고 새 물주가 새 장사를 시작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면서 점소이의 수다가 수다로 들리지 않는다.
역참과 마방.
덕주에서 겪은 하오문과 금의위. 규모는 덕주에 비할 수 없어도 장갈 또한 물자의 이동이 빈번한 곳.
전보다 잘살게 되었지만, 소식이나 소문의 가치를 알게 되어서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관가가 개입되었다면.
“그럼…….”
“어이쿠. 어서옵셔!”
자세히 물어보려는데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 입구로 달려가는 바람에.
해원기의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손님이 들어서니 점소이가 반사적으로 환대하는 것이지만,
해원기는 감지하지 못했다.
남장여자.
부귀한 집안 여자들이 남장하는 게 유행이라지만. 그것도 나름 귀공자로 꾸미는 것인데.
객잔에 들어온 여인은 그저 남자들이 입는 장포를 걸쳤을 뿐이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이 어깨를 덮고 허리까지 내려왔고, 허리띠도 매지 않아서 걸을 때마다 헐렁한 장포 자락이 펄럭거린다.
얇게 그린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고, 짙은 눈매가 긴 속눈썹 사이로 그윽하며, 도톰한 입술의 양쪽 끄트머리는 웃는 듯 당겨졌다. 정성 들여 분을 발라 백옥처럼 광이 나는 피부, 긴 목선이 선명하다.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 오뚝한 콧날과 갸름한 턱을 쳐들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도도한 중년 미부(美婦).
입을 딱 벌린 점소이를 보고 빙긋 웃더니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괜찮은 안주 몇 가지, 그리고 여기서 가장 좋은 술을 가져와.”
“네?”
간단한 주문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점소이.
탁.
중년 미부가 은원보를 두 개나 탁자 위에 놓자, 그제야 부리나케 주방으로 뛰어간다.
기묘한 손님이지만, 요리와 술을 시키는 데 넘치는 돈이다.
해원기가 이 특이한 중년 미부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게 되었다.
아침이 막 지난 시각이니 객잔이 한산할 때. 식탁에 앉은 이는 해원기 혼자뿐이다. 사방에 빈 탁자들이니 새로 들어온 손님은 보통 좀 떨어져 자리를 잡기 마련.
그런데 이 중년 미부는 바로 곁의 탁자에 앉았고, 그것도 해원기를 정면으로 보는 자리다.
주문을 시키고 나선 빤히 해원기를 보는 시선.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찾았던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본다.
처음 보는 사람.
원숙한 아름다움과 노련함이 엿보이는 얼굴이 웃는 듯 마는 듯.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해원기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는데,
“이른 시간이지만, 나랑 술 한잔할래요?”
중년 미부의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콧소리가 살짝 섞인 낭랑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질이고, 말하면서 살짝 가늘어지는 두 눈이 매력적이다.
접대부를 고용한 싸구려 술집도 아니고, 탕녀가 사내를 유혹하기에도 적당한 시각이 아니다.
해원기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저를 아십니까?”
어깨를 추스르며 두 손을 펴 보이는 중년 미부.
“아니, 몰라요. 여기엔 지금 당신밖에 없잖아요. 혼자 마시는 술은 맛이 없어서, 인연이라 여기고 술친구가 돼줘요.”
나이답지 않게 귀여운 동작과 응석 섞인 요청. 그게 또 의외로 어울린다.
해원기가 미간을 모았다.
“술은 가려서 마시라고 배웠습니다. 부인 말씀대로 술을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고, 술친구의 초청도 인연으로 여기긴 어렵군요.”
완곡히 거절하면서도 해원기의 시선 역시 중년 미부를 향한 채.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요, 술친구를 찾는 것도 아니다.
중년 미부는 분명 목적을 갖고 객잔으로 들어왔고, 해원기에게 일부러 합석을 권하고 있다.
무슨 의도인가.
중년 미부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긴 머리칼.
동작 하나하나에 교태가 넘친다.
“칫, 무뚝뚝한 사낼세. 그래도 쬐끔 매력은 있어 보이고. 할 수 없지.”
드륵.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더니 서슴없이 해원기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아침 식사 때에 황보관이 앉았던 자리.
앉자마자 얼굴을 내밀어 턱을 괴고.
“큰 무대를 옮길 만한 마차, 극단에서 쓸법한 도구. 그런 걸 찾는다면서요?”
객잔 주인에게 부탁한 소식을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중년 미부가 묻는다.
해원기가 가까워진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누구십니까?”
“어머, 낯선 여자에게 대뜸 이름을 묻다니요. 실례에요, 실례. 그쪽부터 알려주는 게 맞지.”
해원기가 음성에 무게를 실었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해원기를 탓하는 중년 미부는 여전히 여유만만. 보통내기가 아니다.
해원기가 좁혔던 미간을 풀고 두 손을 모았다.
“저는 해원기라고 합니다.”
“아항, 나는 봉, 봉대저(鳳大姐)라고 부르면. 혹시 이름을 속인 건 아니죠?”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흘기지만, 해원기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앉았다고 성을 바꾸고, 일어섰다고 이름을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호오, 꽤 옛날 어투를 쓰네. 그럼 해 소제(小弟)는 어디 출신이야?”
‘대저’는 큰 누님. 자신이 봉대저니까 해원기는 소제가 되나. 당장 반말로 바뀌었다.
해원기가 포권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객잔. 주방으로 달려간 점소이도 다시 나오지 않는다.
“혼자서 온 건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까?”
객잔 안을 둘러본 게 아니다. 잠심침령으로 객잔 주위에 특이한 동정이 없는 걸 확인했다.
중년 미부, 봉대저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머리를 젖히고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해 소제는 대단하네. 호호호호.”
방울이 짤랑거리는 듯 경쾌한 웃음. 턱을 괴었던 손이 부드럽게 해원기를 향하면서 봉대저의 웃음 띤 얼굴이 돌아왔고.
“그럼 해 소제는 일행을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이 있어?”
부드러운 손길이 장난치듯 얼굴로 다가온다.
애교를 담아 코라도 튕기려는지.
절령제육(節令第六) 곡우(穀雨)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는 ‘우생백곡(雨生百穀)’, 즉 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살린다는 의미이다. 뚜렷하게 많아진 비, 그 수분이 대지를 적셔 윤택하게 하므로 오곡이 두루 생장한다.
다만 남방에서 일어난 따뜻한 기운이 북방에 머무는 차가운 기운으로 밀려가니, 남쪽에선 이때를 모춘(暮春)이라 하고, 북쪽에선 이때를 종상(終霜)이라 부른다.
하여 한쪽에선 늦은 봄이라 버들개지 다 지고 두견이 울어댈 때, 또 한쪽에선 서리 멎은 어두운 하늘에 첫 우레가 울리도다.
유서비락(柳絮飛落)이든 초뢰은명(初雷殷鳴)이든. 생명은 변화를 원하고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마침내 여름을 부르기 시작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