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95화 (96/410)

제24장 의운중중(疑雲重重) (3)

강호의 만남이란 게 워낙 돌발적이고 묘한 법이라, 그게 좋은 인연이 될지 혹은 끔찍한 악연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무인에겐 특히 그 결과가 극단적으로 나타나기 일수. 복성고조(福星高照)라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입을 수도, 원가로착(寃家路窄)이라 꼼짝없이 피를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살피며, 성격과 기질이 맞는지 추측한다. 같이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중에.

당령이 젓가락을 놓고 차를 들며 맞은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예쁘장한 소녀와 더벅머리 청년.

쾌활한 소녀는 항산파의 장문제자요, 고강한 실력을 갖춘 사내는 그녀와 의로 맺은 오라버니란다.

당령의 집안이 있는 사천과 항산이 소재한 산서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 이십여 년 전 중흥한 당가와 백 년 전에 사라진 항산파와는 어떤 연관도 찾기 어렵다.

비록 구란와자 때문에 도움을 받았고, 동행을 결정할 만큼 믿음직하다고 여겼지만. 이렇게 아침 식사를 같이하면서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이 기묘한 오누이는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저, 항산이 다시 문호를 연 것도 처음 알았는데, 어쩐 일로 약왕당에 가시는지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이미 식사를 끝낸 해원기가 바로 얼굴을 돌렸다.

“조금 복잡한 얘기라. 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무고한 백성들을 해친 흉수, 그 단서를 찾기 위해서랍니다.”

가장 늦게 시작했으면서 자신이 추천한 음식을 충분히 즐기지도 않았다. 젓가락은 증명단에게 음식을 놓아주느라 더 바쁜 편.

어지간히 다정한 오라버니 노릇을 하던 해원기가 표정을 바꿔 대답하자, 증명단의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젓가락도 멈추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그 사연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한 당령이 화제를 살짝 비틀었다.

“그 단서가 독과 관계가 있군요.”

무고한 백성들이 그냥 해를 입었다면 굳이 대별산까지 갈 필요가 없을 터.

“그렇습니다.”

“혹시 어떤 독인지…….”

“전혀 모릅니다. 독에는 무지해서 알아볼 도리가 없었죠. 그저 시신에 남은 독상(毒狀)만 기억해서. 음.”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당령을 바라보았다.

사천당가의 다섯째, 양손에 끼었던 기이한 수투. 그녀였다면 알아보았을 수도.

앞에 놓인 접시와 찻잔을 옆으로 밀었다.

“잠이 든 것처럼 죽었습니다. 스물네 명이. 나중에 도착한 셋까지 중독되었고요. 그리고 또 그곳을 거친 자들이 한참 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여독이 비를 타고 흐를 지경이라 불을 놓아 태워야 할 정도였지요.”

증명단이 서둘러 입을 닦고, 황보관 역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당령이 미간을 모으며 뭔가 생각하다가.

“지효성(遲效性)의 독은 대단히 다루기 어려운데. 죽은 이들의 무공은 어떤가요?”

과연 독을 아는 사람. 질문이 다르다.

“스물네 명은 그냥 화전민. 나중에 도착한 셋은 아문의 포쾌, 한참 후에 죽은 건 장풍무명 진자현이에요.”

성질 급한 증명단이 먼저 답하자 황보관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장풍무명? 그런 자가 왜.”

의외였던 듯. 황보관의 말투가 진자현을 아는 것 같아서 해원기가 시선을 돌렸다.

“그를 아십니까?”

황보관이 생각에 잠긴 당령을 힐끗 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장풍보는 새북, 사천과는 아주 멀죠. 그저 저번에 종남산에 갔을 때 들은 얘기가 있어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상당히 괴이한 집단이더군요.”

종남산이라면.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들었다는 거다.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소민에게 들었던 얘기가 기억났다. 취개 단삼육과 화산파 장문인이 장풍보의 뒤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고.

그러고 보니 개봉에서 취개를 만났을 때 왜 그걸 물어보지 않았을까. 서로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푸느라 막상 필요한 얘기는 나누지 못했다.

‘독에 관해서만 생각하느라 또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장풍보를 깜빡했구나. 이렇게 얽히는 것도 평범하지 않고.’

당대의 화산파와 종남파는 모두 사부와 인연을 맺은 이들.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는 구주정문이 아직은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으나, 그들이 미심쩍게 여겼다면 그만큼 구린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원기가 계속 쳐다보자 황보관이 말을 이어갔다.

“화산파 장문인께서 자리를 마련해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도울 여력이 안 되어서 참가하지 못했다고. 그냥 일반적인 흑도(黑道)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당규 때문에 찾아뵌 터라.”

다른 문제에 얘기를 길게 끌었을 리 없다.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섬서의 화산파와 종남파. 지리적으로 새북에 가장 가까우니 나중에라도 사정을 알아보자.’

그쯤 생각하고 황보관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설마!”

당령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해원기가 황보관과 대화하는 사이, 당령은 몇 가지를 증명단에게 또 물었고.

이맛살을 잔뜩 찡그린 채 머리를 바쁘게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별명은 오매불망. 보통은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절절한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당가의 다섯째, 당오매(唐五妹)에겐 사소한 일도 잊지 않는다는 집요함을 의미한다.

그 집요한 성격이 이 지효성 독에 의한 사건에 집중했고, 궁리 끝에 얻은 결론이 그녀 자신조차 믿기 어려워서.

탁자를 둘러보는 눈이 흔들렸다.

“지효성만이 아니라. 인체를 중독 시키고도 역병처럼 만연하는, 무공을 지닌 이들조차 중독된 걸 자각하지 못했다면. 그건, 그건.”

말을 더듬다가 머리를 마구 흔들고.

“망령칩독(亡靈蟄毒), 아니, 그럴 수는 없는데.”

툭 끄집어낸 말을 또 부정한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와 달리 정신 나간 것처럼 보여.

이번에는 해원기와 증명단이 당혹스러울 판.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증명단이 상체를 확 내밀었다.

“망령 뭐시기가 뭐예요? 그게 마을 사람들을 죽인 독인가요? 누가 쓰는 거죠?”

현재 유일한 단서. 여기서 알아낸다면 굳이 약왕당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떤 독이고, 누가 쓰는지 안다면 당장 달려가 그 죄를 물을 셈.

무고한 화전민을 전부 죽이고, 하마터면 호중객잔의 가족까지 영문 모르고 독살당할 뻔했다.

급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 증명단이지만.

당령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뭔가를 중얼거렸고.

“삼재금독(三才禁毒)은 절대로. 독경에 이미 없앴다고, 불가능한…….”

“오매, 오매!”

황보관이 급하게 부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다.

“아, 이런 실태를.”

그러나 표정을 고치는 안색이 창백한 걸 누구나 알아보았다.

당령의 기질을 아는 황보관이 얼른 말을 걸었다.

“또 지나치게 몰두했구나. 남들 앞인데 좀. 괜찮으냐?”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던 증명단에게 민망한 듯 슬그머니 책하는 말투.

해원기 역시 증명단의 소매를 끌며 차분하게 찻주전자를 들었다.

쪼르르.

당령의 잔에 차를 따르면서.

“소단이 지나치게 나섰군요. 당 소저, 우선 숨을 돌리시고.”

황보관이 명문세가 출신답게 상당히 예의를 따진다는 걸 알았기에, 평소처럼 상대를 편하게 대했다.

이 객잔에 부탁한 소식이 들어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반나절은 걸린다.

당령이 독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 지 아직은 몰라도,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자세하게 들을 생각이다.

기왕 무림에 나설 결심을 한 자신.

어떤 인연이라도 소중히 하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리다.

당령이 차를 따르는 해원기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그냥 독이라고 하지만, 그 나름대로 분류가 있다.

독, 극독, 절독(絶毒).

극독은 독 중에서 독성이 몇 배가 강한 것, 절독은 해독이 지극히 어렵거나 독문(獨門)의 비방으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

독이 있으면 약이 있고, 극독이든 절독이든 해독의 어려움에 차이는 있어도 어떻든 해약이란 게 있는 법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전혀 풀 수 없는 독이 있단다.

하늘에서 불현듯 쏟아지는 벼락처럼 삽시간에 생명을 빼앗는 독, 땅이 갈라져 모든 걸 삼키듯 생명을 빨아들이는 독, 그리고 마치 저주처럼 사람만을 노려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선사하는 독.

천재독(天災毒), 지변독(地變毒), 인앙독(人殃毒).

이걸 통틀어 삼재금독이라고 한다.

숨을 돌린 당령이 설명을 시작하자, 증명단이 불만스럽게 툭 끼어들었다.

“그거 천재지변, 재앙. 그런 이름을 그냥 갖다 붙인 거잖아요.”

원하던 답은 얻지 못하고 뜬금없이 웬 강의람.

당령이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누군지 모르지만, 천지인 삼재에 억지로 붙였겠죠. 그러나 독이란 게 천지 만물에 두루 존재하고, 그걸 어떻게 알아내어 피하거나 쓸지 사람에게 달렸거늘. 사람이 미처 방비할 수 없는 독, 그건 정말 금기라고 할 수밖에요. 그래서 독을 다루는 이들에겐 이 금기가 하나의 훈계로 전해진답니다. 예를 들어 천재독은 때에 맞지 않는 독을 당하는 경우, 한겨울에 뱀이나 두꺼비에 물리면 더 위험하다고. 그래서 천재독을 시독(時毒), 지변독을 이독(理毒)이라고 다르게 부르기도 하고요.”

독을 다루는 분야에선 가장 먼저 배우는 이론.

이게 골치 아픈 강의라는 건 당령이 더 잘 안다. 그래서 간단한 예만 들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천재와 지변은 당연히 흔치 않아서 몇 백 년에 하나 발견될까 말까 하답니다. 문제는 바로 인앙독. 저주라는 건 귀신을 빙자해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라서 그 말처럼 이건 사람이, 사람으로 만든 독이고, 그 종류도 아주 많다고 배웠습니다. 그중에, 음, 죽은 시신으로 독을 퍼뜨리고, 발작의 시간을 조절해 중독을 느끼지도 못하게 하는. 소위 음침지독(陰沈至毒)의 이름이 망령칩독이지요.”

대첨산 화전민 마을이 당한 상황과 딱 맞는다.

음침지독이 뭔지 몰라도, 망령칩독이 그런 효과라니 증명단이 또 들썩거리지만.

해원기가 먼저 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독문(毒門)의 전설이라는 독강시(毒僵尸)나 독인(毒人) 같은 건 뭡니까?”

강호에 널리 퍼진 이야기. 시체를 독으로 제련하거나 특수하게 사람에게 독을 주입해 만든다는 엄청난 괴물인데.

지금이 이런 걸 논할 땐가. 증명단이 흘겨보는 걸 모른 척, 해원기의 묻는 말에 당령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건 생령(生靈)을 사령(死靈)으로 역전하는 외도(外道)니까 이독에 속하죠. 저도 단지 전해들은 것이라. 아직 배움이 부족해서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럼 그 망령칩독을 어디서, 혹은 누구에게 구할 수 있는지는?”

“그것도 몰라요. 아주 예전, 백 년도 훨씬 전에 금기를 어긴 이단이 제조를 시도했다가 선조들에 의해 멸망했다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서. 제가 아는 건 그 정도네요.”

“아휴우.”

김이 팍 새버린 증명단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기껏 얘기를 시작하더니 결국 아무것도 모르잖아.

인상을 쓰며 입을 내미는 표정까지.

이것도 실례지만, 해원기는 달리 뭐라 하지 않고 손을 모았다.

“당 소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당령에게 독을 통한 단서를 찾는 건 역시 무리였을까.

사례하는 해원기의 얼굴은 진지했다.

당령이 아는 걸 다 말하지 않았고, 왜 그런지도 짐작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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