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의운중중(疑雲重重) (2)
“나 참.”
팔짱을 꼈더니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무림에 나선 후에 검왕수를 몇 번 썼던가. 거의 전부가 싸우는 도중이었으니 검왕수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에 주의를 기울일 새가 없었지.
워낙 고심한 무공이다.
사부의 검형수를 기초로 군림어검대법을 뼈대로 삼아 십대검상을 불러올 수도 있는. 참으로 가공할 검학(劍學).
당연히 지나칠 정도로 강해서 무림을 떠나 있을 때는 일부러 붕대를 감아 그 위력을 줄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설마 사부가 그 안에 묘한 선물을 남겨두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왕소군의 혈도를 풀고 두 손으로 어깨를 잡자마자 벌벌 떨면서 희한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까지. 묻기도 전에 말이다.
‘그건 왜어(倭語). 왕소군으로 분한 자는 흑목(黑木)이라는 성을 쓰는 동영(東瀛)의 살수였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하북과 산동을 중심으로 육 년이나 장거리 쾌체 일을 한 덕에, 어설프게나마 왜어를 접할 수 있었지만. 기껏해야 평범한 말 몇 가지 알아듣는 정도.
흑목이란 성씨의 인물이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해원기는 본디 동이(東夷) 출신, 그리고 천부의 지혜로 그 의미를 대강 짐작할 뿐.
흑목은 동남쪽에서 중원으로 들어왔다. 동영의 살수로서 고용주의 뜻을 따라. 어딘가에서 사살검의 최고봉이라는 염라검법을 익혔고, 시키는 대로 몇 차례의 살업(殺業)도 성공했으며, 그 후에 또 지시를 따라 구란와자에 끼어들었다.
지시는 단순했다. 구란와자에서 맡기는 일을 완수할 것.
대부분이 연극을 빙자한 비무여서, 흑목의 역할은 주로 도박판을 키우는 소위 바람잡이랄까.
다른 참가자들에겐 관심도 두지 않은 듯, 당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장야독연도, 화합독술도 잘 모르고. 그저 해독약이든 뭐든 주는 대로 삼켰다가 막판에 삼화검이 죽는 걸 보고 눈치로 피하려고 했던 것.
아무런 소득이 없다.
‘누가 고용했는지, 어디서 누구에게 염라검법을 배웠는지 그 자신도 모른다. 살수란 게 그렇겠지만. 그러나.’
생각에 잠긴 해원기의 눈이 깊어졌다.
흑목이 일부러 관련 사항에 관해 입을 다문 건 아니다. 고용주와 염라검법을 익힌 사정은 몰랐지만, 연화창간과 장설연검에 대해선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염라검법을 익힌 곳은 일종의 폐쇄된 연무장, 흑목 외에도 여러 가지 병기를 익히는 자들이 있었고, 사람이 바뀌어도 항상 수십 명을 유지했으며. 언제나 특이한 병기를 먼저 갖춘 후에 무공을 가르쳐주었단다.
교두들은 전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 가르치면서 특이한 병기의 응용도를 수시로 측정했고, 즉시 수정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나. 흑목 자신의 장설연검도, 무정의 연화창간도 그런 식으로 마지막에 건네진 병기다. 그런데도 흑목은 무정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온통 비밀투성이.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해원기에게는.
‘단기간에 무공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 이런 구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연구할 통천할 지혜와 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어렸을 때, 사부가 직접 가르칠 상황이 아니었기에 잠시 다른 곳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젊지만 훌륭한 글 선생에게 문(文)을, 뭐든지 아는 기막힌 어르신에게는 무(武)의 기초를 포함한 다양한 도(道)를 배웠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때 분명히 이런 얘기를 했었지.
‘무공이 도가 아니라 술(術)이라면, 병기를 손보는 것만으로도 수십 년의 수련을 대치할 수 있다고. 어르신, 천교진인(天巧眞人)께서 비웃듯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암암리에 엉뚱한 자에게 넘어간 걸 나중에야 비로소…….’
되살리기 싫은 기억이다.
사부의 힘겨운 일생을 낳았던 과거의 일.
하지만.
‘더구나 화합독술을 구사하려던 삼화검이 배후의 암습으로 폭발한 걸 단순히 사신공멸로만 봐야 할까?’
사천당가의 당령이 아무리 해박해도 모를 것이다.
잊힌, 잊혀야만 할 과거 속에 그 사신공멸보다 수십 배나 지독한 술수가 있었음을.
‘천황독결(天荒毒訣)과 광혈단(狂血丹). 금기를 되살리려는 자가 있는가.’
이름조차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은 술수다.
해원기가 무거워진 눈을 감았다.
눈앞에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린 왕소군, 아니 흑목이 널브러진 채.
검기핍인에 의해 내공이 파괴되어서 이제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허약한데다가 팔다리까지 부러져 겨우 숨만 쉬는 상태.
천성이 순후한 해원기를 위해 사부가 검왕수에 부여한 또 하나의 효과. 그 앞에선 누구도 견딜 수가 없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남쪽으로 간 흔적이 있어요. 여기서 정남향이면.”
“큰 고을로는 허창(許昌)과 여남(汝南)일까. 해 소협은 어찌 생각하시오?”
숲을 지나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정주(鄭州)에서 남쪽으로 곧장 통하는 큰 관도.
막 관도로 올라선 네 사람에게 여명이 슬며시 비치기 시작한다.
해가 뜨기 전에는 가장 캄캄한 순간이 찾아온다. 해원기가 얻은 정보를 차분히 알려주면서 걸어온 길, 당규에 관한 단서가 없어 암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떠오르는 해가 어쩐지 희망을 주는 듯.
황보관이 기운을 내며 묻는 말에 해원기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초선 외에 무정의 무리가 도주했으니 취합이 우선일 겁니다. 일단 가까운 허창에 들러 알아보죠. 그런 모습은 어떻든 눈에 뜨일 테니까요. 우리도, 그들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밤을 꼬박 새웠다.
독연에, 싸움에. 무공이 뛰어나도 사람은 쇠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무대를 폭파하면서까지 다급하게 도주한 자들에겐 무엇보다 회복이 우선.
증명단이 빠져나온 숲을 돌아보며 입을 삐죽였다.
“칫, 고생은 누가 했는데 그 도박꾼들은 고맙단 소리 하나 없이 잽싸게도 달아났네.”
백 명 가까운 군중은 독연이 흩어지자마자 이미 사방으로 도망갔고, 그 바람에 흔적이 뒤섞여 도리어 헷갈릴 뻔했다.
당령이 피식 웃었다. 증명단의 투덜대는 말투가 맘에 든 모양.
“그런 자들일수록 자기 보신을 위한 눈치는 더 빠르니까요. 오면서 보니까 어째 허랑방탕한 기풍이 심해진 것 같더군요.”
황보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해원기도 동감을 표했다.
사천에서부터 하남까지 온 여정. 당령과 황보관은 각지의 큰 고을에서 향락을 즐기는 장면을 여러 차례 보았을 것이다.
세상이 그런 쪽으로 변하고 있다.
육 년간의 쾌체 생활에서 해원기도 익히 느꼈던 부분. 영락제(永樂帝)가 조카를 짓밟고 제위를 찬탈하든 말든 민간의 풍속은 차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쪽으로 흘러갔다.
제대로 된 생업도 없고,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면서 차림새만 그럴듯하게 꾸미고선, 요행과 투기로 돈과 명예를 얻으려는 심리.
강호도 무림도 과거의 참혹한 혼란은 다 잊어버렸다.
사람이 본래 그러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신의를 지키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 가시죠.”
해원기가 증명단에게 손짓해 앞장서자.
당령과 황보관이 잠깐 마주 보곤 뒤를 따랐다.
‘신의’란 단어가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마도 똑같은 구주정문 출신이라서였을 게다.
허창 외곽의 장갈(長葛).
네 사람이 관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마을. 그리 크진 않아도 관도에 접한 마을이라 객잔과 주루가 적지 않고, 역참에 마방(馬房)까지 갖추었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객잔에 자리를 잡고서야 황보관이 은근하게 말을 건넸다.
“이왕이면 좀 더 큰 곳이 수소문하기에 어울리지 않겠소? 저희가 노자는 넉넉히 준비했습니다만.”
장갈에 들어오자마자 해원기가 굳이 일행을 데리고 골목을 돌아 돌아 찾은 곳이 이 낡은 객잔이다.
중간에 크고 호화로운 주루나 반점도 많았거늘. 해원기가 앞장섰기에 뒤를 따르긴 했어도, 일행이 늘어 비용이 염려되나 싶었기에. 조금 민망한 얘기를 슬쩍 돌려 표현했는데.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돈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이렇게 딱 알아채시니 부끄럽군요. 뭐 그래도 이곳을 찾은 건 들은 소문이 있어섭니다.”
“에휴.”
옆에서 그제야 인상을 쓰며 한숨을 폭 내쉬는 증명단. 개봉을 떠날 때 남은 돈을 모조리 악송령에게 건네준 게 비로소 생각났다.
처음 알게 된 사이에 이게 무슨 꼴이람. 낯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이 ‘고구마 대장’은 뻔뻔하게 속을 다 내보이네.
해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간다.
“이 장갈이 허창 외곽이긴 해도 오가는 물자가 꼭 거치는 요지랍니다. 구란와자의 그 특이한 무대나 장비를 생각해 보면 전부를 먼 곳에서부터 조달하기는 어려웠을 터. 일용품 따위는 개봉과 장갈에서 구했겠지요. 그리고 장갈에서 가장 오래된 객잔으로 소식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왜냐하면, 장갈을 대표하는 음식을 여기서만 제대로 즐길 수 있으니까요.”
합리적인 이유지만.
은근히 거북한 질문을 했던 황보관이나 모른 체하려던 당령 모두 묘한 얼굴이 되었다.
대별산의 약왕당까지 간다면서 벌써 돈이 떨어졌단다. 뭔가 다른 방도가 있나? 그러면서 이렇게 떳떳하게 일행을 데리고 찾은 게 음식 때문이라.
대단한 무공을 보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서민적인 설명이다.
어디서 들은 소문이기에? 처음 들르는 장갈의 특징은 또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얼핏 헷갈리는 판에, 증명단은 오히려 표정이 확 풀렸다.
“음식? 여기도 유명한 게 있어요?”
해원기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건 이미 겪은 바요, 이 오라버니는 어떤 상황도 충분히 해결할 능력이 있으니. 마음이 턱 놓인다.
“그래. 부죽(腐竹)은 허창의 명물이고, 장갈은 또 석상두부(石象豆腐)의 원산지지. 여기에 소어탕(小魚湯)까지 더하면 아주 든든한 아침이 될 거다.”
“에? 대나무를 삭힌 거? 그리고 또 두부예요? 물고기탕도 뻔한 건데.”
기대가 조금 어긋난 기분에 증명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 식사가 크게 다를 리 없지만. 그래도 기껏 대나무, 두부, 물고기탕을 자신 있게 추천하다니.
“하하, 일단 먹어보자꾸나.”
해원기가 웃음소리까지 내며 점소이를 불러 시키는 통에.
당령과 황보관은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 고향에서야 어떤 음식이 무슨 맛을 내는지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집을 나서면 타향, 음식이 낯선 게 당연하다.
강호를 정처 없이 떠도는 낭객이라도 광활한 중원 전부를 돌아다니진 않는다. 그래서 타향에선 평범한 음식을 찾기 일쑤고, 특별히 유명하다는 요리라도 따로 여유를 부릴 때나 시키는 편.
아침을 이렇게 따져서 시키는 경우가 있을까. 식도락을 찾는 무인이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해원기가 점소이를 불러서 음식을 시키고, 또 객잔 주인을 찾아 뭔가 한바탕 떠든 후에 밝은 얼굴로 돌아왔을 때.
당령과 황보관은 새삼 처음 맛보는 진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죽은 두부(豆腐)를 대나무처럼 만든 거로군요. 어떻게 속을 텅 비게 했을까? 신선하면서도 쫄깃해요.”
“이건 두부가 아니라 떡이라고 해도 믿겠소이다. 허, 이런 맛이.”
잠시 실망했던 증명단도 소어탕을 연신 입에 넣으며 키득거린다.
“히힛, 과연 오라버니야. 탕이라고 해서 그저 고아낸 걸 생각했더니, 튀긴 생선을 넣었네. 맛있어, 맛있어.”
해원기를 기다리다가 궁금해서 맛이나 좀 보려 했던 건데.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다.
“입맛에 맞으니 다행입니다. 저도 예전에 이쪽으로 일을 보던 사람에게 들었던 거라 기대했던 음식들이죠. 여기 주인에게도 신용이 두둑한 편이라 덕을 봤습니다.”
간단한 면과 만두가 더 나오고.
해원기가 식사를 시작하면서 탁자가 잠시 조용해졌다.
맛있는 음식은 잊었던 허기도 되살리는 법.
열심히 턱을 움직이던 황보관이 얼핏 처음의 대화를 기억하곤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해 소협, 이렇게 맛있는 아침을 추천해준 분께도 감사하는 뜻으로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역시 돈이 떨어졌다는 말이 걸려서 미리 다짐하는 건데.
이것저것 음미하던 해원기는 엉뚱한 대답.
“아, 그 사람은 몇 년에 한 번, 북쪽으로 오는 편이라. 제가 알려준 반점에서 식사하면 상쇄가 됩니다. 쾌체들은 다 그런 식으로 셈을 하거든요. 여기도 계산은 미리 끝냈고.”
당령과 황보관은 저절로 젓가락이 멈춘다.
쾌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심정을 이해하는 증명단이 키득거리는 입을 가리는데도,
“음, 주인에게 부탁해서 최근의 수상한 동향을 알아봐달라고 했습니다. 커다란 화톳불과 횃불, 특이한 목재며 오색 휘장 같은. 이 지역 쾌체와 마방까지 통한다 했으니 반나절이면 되겠지요. 양이 부족하면 조금 더 시킬까요?”
해원기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서.
당령과 황보관은 다시 얼이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