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93화 (94/410)

제24장 의운중중(疑雲重重) (1)

다짜고짜 물어봤던 증명단이 되레 놀라버렸다.

“정말로 들고 튀었, 아니, 집안의 비전을 왜 가지고 나갔대요?”

해원기가 생각에 잠겨 말없이 듣는 것과는 달리 지나치게 대화에 몰두한 증명단의 채근에,

당령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요. 무슨 심술인지 자기가 맡아두었던 독경 일부분까지 지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지요. 딱히 돈이 되지도 않을 텐데.”

심술이란다.

당가의 진수, 독경에 실린 비결 중의 하나일 터. 아무리 비결이라도 독을 다루는 내용이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을 리 없다. 가출이라면 대개 당장 환금이 가능한 물건을 챙기는 게 상례거늘.

“아휴, 돈이 된다고 해도 그렇지. 어쩌자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당령의 심정이 절로 이해가 돼서 더 심한 소리가 나올 판.

“그게 화합독술이란 것과 관계있습니까?”

증명단이 지나칠까 싶어 해원기가 먼저 주의를 환기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서시의 괴이한 죽음. 그리고 구란와자는 평지에서 장야독연을 펼치기도 했었다.

독을 잘 아는 당령의 설명이 중요하다.

당령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조금 복잡한 얘기입니다만, 구란와자가 앞서 펼쳤던 독연은 일종의 조합독(調合毒)이라. 화혈독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주로 마취의 성분이죠. 물론 그걸 외부에서 어떻게 장시간 연기로 고정했는지는 따로 연구가 필요하고. 하여간 이걸 본가에선 양독(陽毒)이라고 부릅니다. 중독의 증상이 바로 드러나기에.”

독에 관한 설명이 어찌 쉬우랴. 하물며 그 안에 집안의 비전이 얽혀있음에야.

문외한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당령이 나름 애써서 풀어내는 얘기.

해원기가 바로 말을 받았다.

“아까 말씀해주신 사신공멸의 수법. 그때 삼화검의 피를 뒤집어쓴 건 서시입니다. 음령초라고 하셨죠. 그럼 음령초는 음독(陰毒)이겠고, 삼화검이 지녔을 겁니다.”

이미 많은 말을 한 당령이다.

대화를 빠르게 진행할 필요가 있어서 해원기가 나선 셈이고, 당령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음령초 한 가지만 경맥 내부에 스며드는 음독이지요. 그럼, 말이 되는군요. 저 서시 분장을 한 자가 미리 독연을 방비할 해독약을 복용했다고 해도, 음독이 스며들면서 잔류한 양독과 상승작용을 일으켰을 겁니다. 다행히 해 소협은 닿지 않아서, 아!”

화합독술이 무엇인지 밝히려던 당령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확 질려버린 낯빛.

“처음부터 두 가지 독을 섞었다면 피해가 막심했겠죠. 소홀했군요.”

당령이 뭘 떠올렸는지 아는 해원기의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만약 장야독연이 전부 음령초와 반응했다면.

전신이 녹아 끔찍하게 죽은 건 서시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독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제탁지검을 지녔다고, 독에 뛰어난 당령이 있다고 방심했었나.

해원기는 이 깨달음을 가슴에 깊이 새겨놓았다.

당령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면서 표정을 고쳤다.

“아니, 그렇게 심하진 않았을 수도. 독연은 미리 곳곳에 숨겨두었다가 한꺼번에 퍼뜨렸죠. 양독이니까 불기운을 이용해서. 그만한 분량의 음령초는 준비하지 못했어요. 그저 그 삼화검 혼자만 지녔을 정도, 만약을 위한 비장의 한 수였을 거예요. 본래 해 소협을 노렸다가, 음, 이 서시가 휘말려 들었다. 그렇게 봐야죠. 그런데.”

꼼꼼하게 따지느라 어지간히 머리를 썼을 당령이 해원기를 똑바로 바라본다.

“해 소협은 어떻게 괜찮은가요? 내공으로 항독(抗毒)? 혹시 피독(避毒)의 물건을 지녔던지, 설마 백독불침(百毒不侵)은 아니겠죠?”

처음부터 가장 궁금했던 사항. 한참을 떠들다가 비로소 생각났나.

이 더벅머리 청년은 독연을 마음대로 돌아다녔고, 대부분의 독연을 없애기까지 했었다.

독을 다루는 사람으로선 참으로 진기한 대상.

당령의 눈이 호기심으로 깜빡이는 모습에 해원기가 고소를 지었다.

아까 군중 안에서 당령을 ‘오매불망’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쩐지 그 의미를 알 듯하다.

상당히 머리가 좋으면서 깊이 따져 답을 구하는 성격. 화제가 어떻게 바뀌든 한번 집중하면 철저하게 분석해야 직성이 풀린 달까.

뭔가 핑계를 찾는데, 마침 증명단이 나서준다.

“피독은 이 북룡포죠. 웬만한 독기는 다 막아준다고. 뭐, 우리 오라버니야.”

“딱히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저 몸이 좀 빠르고, 연기를 미리미리 내쳤을 뿐이지요.”

증명단이 지닌 북룡포와 응운검은 다 항산의 보물. 그녀의 사부가 하산하는 제자를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해 찾아낸 물건이다.

피독의 북룡포만 해도 대단히 귀한 보의(寶衣). 백 년 만에 다시 등장한 항산파 장문제자에 어울리고. 그러니 그 오라버니 역시 평범하진 않겠지.

따로 피독주(避毒珠) 같은 걸 지녔다고 해도 굳이 드러낼 일은 아니요, 워낙 대단한 신수를 보인 해원기라 내공으로 독을 견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몸이 좀 빨라서 독연을 미리 쳐냈다잖나.

세상 어디에 백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인물이 있으랴.

그쯤 여겨주면 좋을 텐데. 해원기의 시원찮은 답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당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빠른 정도가 아니었어요. 독연을 날려버릴 속도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고 멈추는, 어쩐지 우리 집안의 경공과 유사한 듯…….”

“어흠, 오매. 그건 실례구나. 어떤 무공이든 상승에 이르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 항산의 공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안하오.”

항보관이 급히 말을 끊고서 무안한 표정을 보였다.

남의 무공을 함부로 논하는 건 금기. 게다가 당가의 경공과 닮았다는 건 모욕이 된다.

백 년 전에 사라진 항산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북악의 검, 복룡검식 뿐. 여전히 해원기를 항산파로 여기는 황보관이 대신 사과하자.

증명단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당 소저의 신법은 신기하던데요. 그 연극배우들이 전부 당황해서 픽픽 쓰러지고.”

신이 나서 사생이 쓰러진 장면을 손짓으로 그려댄다. 원래 이런 기질이었지.

“바로 얼마 전에 오라버니에게 들었는데. 그게 혹시 전궁, 전궁…….”

“전궁유향이다.”

“맞아. 그게 극동의 부동이라는 전궁유향인가요?”

얼굴까지 내밀면서 묻는 통에 해원기가 나오려던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뭐가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아가씨가 이쪽에도 있다.

증명단은 당령의 손이라도 잡을 듯 다가앉았고, 당령은 해원기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증명단 곁의 해원기는 시선을 공중으로 돌렸고, 당령 뒤의 황보관은 마른 입맛을 쩍 다신다.

동병상련을 느꼈나.

황보관이 가볍게 혀를 찼다.

“츳, 당문의 절학을 알아주시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우선 하던 얘기를 마칩시다.”

언제까지 여기서 수다를 떨 수는 없다.

해원기 역시 동감.

“황보 공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당문 소공자가 지닌 독경 일부분이 화합독결입니까?”

화제를 되찾자 당령도 지금의 상황을 인식했다.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배합조제(配合調劑)는 맞습니다.”

“그렇게 조합된 독은 더 위험, 음, 해독이 어렵습니까?”

“네. 성분과 용량도 중요한데 음양이 작용하면 결과를 예측하기 더 어렵죠.”

“곤란하군요.”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황보관도 인상을 굳혔다.

“맞습니다. 마침 두 분에게 약왕당이란 이름을 들어서 이 문제를 조속히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막내를 찾는 게 급선무지만.”

침중한 음성.

당령도 안타까움을 억지로 감추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칫 잘못하면 본가가 큰 오명을 쓰게 됩니다. 본가에도 알려야겠지만, 너무나 먼 거리. 당세에 화합독술을 막을 곳은 약왕당 밖에 없지요.”

당규라는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가출한 동생을 찾아 나선 여정.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집안 사정. 이렇게 구구절절 얘기가 길어진 이유는.

바로 약왕당으로 간다는 말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친동생이 걱정될 텐데.

화합독술의 흔적을 확인한 순간부터 세상이 더 염려되었던가.

해원기가 눈을 똑바로 떴다.

당령의 고심과 각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참 대단한 결심이오.’, ‘훌륭합니다.’

감탄이나 칭찬 따위는 이 순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원기가 천색을 잠깐 살피고 고개를 남쪽으로 돌렸다.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날이 길어졌으니 조금 있으면 밝아질 때, 소단이 두 분과 함께 먼저 숲 쪽으로 가서 흔적을 찾는 게 좋겠습니다. 급한 탓에 동생분의 수대만 챙겼지만, 다른 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당령과 황보관이 살짝 놀란 듯.

해원기가 증명단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남쪽으로 가던 길이다. 당 소가주가 어디로 갔는지, 구란와자 같은 괴이한 무리가 또 있는지 찾아보자꾸나. 민첩하게. 조심하고.”

증명단의 동그란 눈이 깜빡, 입가가 살짝 올라간다.

민첩은 서두르라는 뜻. 조심은 여동생을 아낀다는 의미.

“알았어요.”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는 증명단과 달리. 당령과 황보관은 조금 당황했다.

“아, 굳이 그렇게…….”

“해 소협은 같이 가지 않습니까?”

해원기가 한쪽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바로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전에 저자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거든요. 당 소저만이 알아볼 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기에. 문초는 제가 맡겠습니다.”

맞는 말이다.

여기서 밤을 새울 이유도 없고, 당규의 수대가 남은 건 중요한 단서. 서두르는 게 옳다.

그리고 깜빡 잊었던 것. 왕소군으로 분장한 자, 살기 넘치는 섬광으로 당령을 노렸던 검수의 정체와 구란와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쪽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 일을 나누어 처리해야 한다.

그만큼 당규의 행방에 대해 신경을 써준 거니까.

“갑시다.”

증명단이 북룡포를 펄럭이며 의젓하게 권하는 대로.

세 사람이 다시 무대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해원기가 천천히 왕소군 앞에 섰다.

당령과 황보관의 대의(大義)에 감명을 받았고, 어떻게든 당규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 구란와자의 사건 중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몇 가지 사안.

가능하면 공개하지 않고 알아내야 한다.

그게 증명단까지 먼저 보낸 이유였다.

팔다리가 부러진 채 실신한 왕소군. 가발은 다 흐트러졌고, 의복도 다 찢어져 본 모습이 거의 드러났다.

생각보다 평범한 체구, 허리가 긴 편에 팔다리는 오히려 짧은 사내다. 가발 속의 머리칼만이 상당히 길어서 억지로 틀어 묶은 게 특이하달까.

동시안으로 살핀 화장 속의 얼굴은 서른이 될까 말까 한 나이.

맥없이 펴진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여서 꽤 혹독한 수련을 거친 듯.

‘문초란 걸 해본 적이 없지.’

난감해서 머릿속으로 그간 배웠던 것들을 마구 떠올렸다.

사부는 그저 묻기만 하면 된다고 했고, 탁 소숙은 머리를 마구 쥐어박으라고 했었다.

‘그건 사부와 탁 소숙이니까 가능하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사부야 인상만 살짝 써도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을 것이요, 탁 소숙은 두들겨 패면서 속을 박박 긁어줬을 테니까.

큰 사모(師母)가 몰래 탁 소숙이 젊었을 때의 별명도 가르쳐줬었지. 풍사귀(瘋死鬼), ‘완전 미친놈’이라니. 세상에.

그나마 경맥과 혈도를 제대로 가르쳐 준 사람은 두 분 사모. 서시와 왕소군을 끌고 올 때도 전신 혈도를 제압했었다.

그리고 그 경혈을 나눠 고문하는 방법은.

‘종(鍾) 선생이 남겨준 단혼절백(斷魂絶魄)의 수법은 너무 잔인해.’

예전에 사괴(四怪)라 불렸다던가. 사부가 박대정심을 위해 전해주긴 했으나 이름 그대로 하나같이 괴이한 수법들.

고개를 흔들어 떠오른 기억들을 지우고.

그냥 신왕공을 끌어올렸다. 양손에 살짝 베푼 검왕수, 오른손은 오행제림(五行齊臨), 왼손은 오귀전륜(五鬼轉輪). 상생상극(相生相剋)은 검왕수를 처음 배울 때부터의 기본이었다.

이 두 손으로 쥐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게 사부가 고심 끝에 고안한 검기핍인(劍氣逼人)의 기세를 낳는다는 건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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