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독경약전(毒經藥典) (4)
해원기가 맞은편에 앉은 당령과 황보관을 차례로 보았다.
당가는 성도, 황보세가는 조금 떨어진 의빈(宜賓). 사천이다.
종남산에서 장안 부근에 출현한 살수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함양 쪽의 종남파와 장안 북쪽의 화산파가 있는 섬서.
낙양 아래 여양과 지금 모여 앉은 개봉 외곽. 용문세가와 개방 총단, 그리고 소림사가 연결되는 선이다.
선.
사천에서 개봉까지 전부 전통의 구주정문을 잇는 선이 된다.
물론 전통의 구주정문이라고 해서 다 지주(地主)로서 행세하는 건 아니어서. 몰락했다가 되살아난 문파도, 겨우 터전을 잡아 모양을 갖춘 집안도, 심지어 완전히 없어졌다가 간신히 뿌리를 되찾은 곳도 있다.
해원기의 시선이 좌중을 한 바퀴 훑어보듯 곁에 앉은 증명단으로 돌아갔다.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증명단이야말로 바로 사라졌던 항산파를 되살리려는 염원의 증거 아닌가.
대략 이십여 년.
잊힐 뻔하던 구주정문이 각기 ‘전통’을 되찾은 건 겨우 그 정도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구란와자의 공연, 그리고 가출한 당가의 막내가 유흥을 즐긴 곳이 이 선과 일치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에 잠긴 해원기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증명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 그럼 당규라는, 저분의 막내는 어디로 간 거죠?”
사대미녀 중에서 끝까지 나타나지 않은 이는 초선뿐. 첫 번째 싸움에서 패배한 양귀비가 그 당규일 텐데.
지금 나누는 이야기도 당규의 가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증명단이 문제의 핵심을 짚어서, 해원기도 시선을 바로 했다.
“음, 마지막에 무대가 폭발할 때, 기척을 놓쳤다. 삼화검 분장을 한 자가 우두머리인 줄 알았건만, 도리어.”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삼화검의 가슴이 두 쪽이 나서 피를 쏟는 시신으로 달려든 건 분명히 누군가 뒤에서 암습을 가했다는 뜻.
당령이 인상을 쓰며 머리를 흔들었다.
“얼핏 보았는데 그 육신이 화약처럼 터지더군요. 그런 지독한 방법까지 쓸 줄은. 해 소협은 그 와중에도 전혀 피해를 보지 않고. 놀랐어요.”
“그렇지. 여기저기서 폭음과 비명이 이어지다가 독연이 흩어지면서 해 소협의 멀쩡한 모습이 보이기에. 나도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황보관도 얼른 동감을 표하지만.
해원기가 당령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무대의 폭발, 그리고 곧장 이어진 삼화검의 변고. 그 정신없는 상황과 분간하기 어려운 사정을 ‘얼핏’이라도 봤다는 건 보통이 아니고.
그게 무엇인지도 아는 눈치다.
황보관의 경탄에 답례도 하지 않고.
“지독한 방법이라면. 그 삼화검이 그냥 죽임을 당한 게 아니군요. 가르침을 청합니다.”
해원기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이 구란와자에는 해원기가 따져봐야 할 문제가 적지 않았다.
약간의 실마리도 중요하다.
정중하게 묻는 모습에 당령이 조금 머쓱하다가 머리의 사방건을 긁었다. 하얀 천으로 단단히 묶어 간지러웠나.
“해 소협은 눈치가 빠르군요. 음, 저도 얼핏 본 거라. 본가가 암기로 유명한 건 다 아실 터. 암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방편이 바로 독이고, 또 한 가지는 화약일 거예요. 본가에선 그리 환영하지 않는 분야지만, 화탄(火彈) 역시 위력적이죠. 그러나 독이든 화약이든 가장 무서운 건 필살의 각오려나요. 암기가 본디 출기불의(出其不意), 상대가 예상치 못할 때 출수하지만, 아예 자기 목숨을 내놓고 상대를 죽이려 드는. 쯧, 소위 사신공멸(捨身共滅)의 수법이라고 한답니다. 이것도 상당히 듣기 좋게 말한 거지 실제로는.”
머리가 간지러운 게 아니라 어지간히 꺼내기 싫었던 얘기였나 보다.
말이 뚝뚝 끊기고, 중간에 혀까지 차는 당령의 말에 황보관도 얼굴을 찌푸렸다.
“실제로는 사람을 살인의 도구로 쓰는 거지. 생명을 뭐라고 여기는 건가? 그건 무(武)가 아니야. 완전히 인성을 상실한 미친 짓일 따름.”
황보관 역시 사신공멸의 수법이 뭔지 잘 알기에 이렇게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해진다.
당령이 잠깐 황보관을 돌아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무대가 폭발했을 때는 겁이 좀 났었어요. 뜻밖의 상황, 소규가 자칫 잘못될까 봐. 그러나 그 삼화검이 사신공멸로 나온 게 다른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죠. 한 달간 뒤를 쫓으면서 구란와자에 뭔가 흑막이 있다고 느꼈으니까요. 당장 황보 대가와 같이 뒤를 차단했어야 했는데.”
어두워지는 표정. 찌푸린 인상의 황보관도 시선을 돌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설마 그런 식으로 독연을 쓸 줄은 몰랐잖으냐.”
당령과 자신,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괴이한 극단이라도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독과 암기에 모두 정통한 당령이 먼저 나서고 무공 실력에 자부심 있는 황보관이 뒤에서 받쳐주니 무슨 문제가 있겠나.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해원기가 없었다면 과연 어찌 되었을까.
넓은 공간을 뒤덮은 장야독연, 당령을 핍박했던 살기 어린 검법, 그리고 사신공멸의 독한 수법까지.
당규를 되찾기는커녕 두 사람의 안위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원기가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막내 분은 괜찮을 겁니다. 무대 뒤의 숲 어귀에 떨어져 있더군요.”
가죽 끈을 꼬아 작은 구슬 하나를 엮은 짧은 띠. 그 구슬 위에 당(唐)이라는 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당령이 그 물건을 보자 화들짝 놀란다.
“이건 우리 집안의 수대(袖帶)!”
수대란 활을 쏠 때 넓은 소매가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묶는 끈. 물론 당가에선 암기를 다룰 때 편하도록 소매에 달아놓은 끈이지만.
당령이 대번에 이 수대가 당규 것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사대미녀 중에 초선이 배후인 듯합니다. 삼화검을 사신공멸로 이용하고 폭발 중에 막내 분을 데리고 도주했겠죠.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당령과 황보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온다.
해원기가 말을 끌면서 몸을 돌리는데,
“이 둘에게 알아보는. 음?”
말이 멈추고 대신 손이 번개같이 증명단을 끌어당겼다.
“어어?”
얼마나 빠르고 강한 힘인지 대화에 집중하던 증명단이 하마터면 바닥에 구를 뻔. 간신히 중심을 잡을 때, 해원기는 오른팔을 옆으로 쭉 편 채 당령을 부른다.
“당 소저! 여길 좀 봐주시오.”
목소리가 워낙 급하고 무거워서 졸지에 내팽개쳐진 꼴이 된 증명단이 화도 내지 못했다.
당령과 황보관이 벌떡 일어서고, 증명단이 도로 머리를 내밀었는데.
누구도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해원기의 쭉 편 오른팔 하나가 마치 장벽처럼 막아선 듯한 느낌.
“으음.”
“이건?”
“왜, 왜 저러지?”
해원기의 팔보다 눈에 들어온 광경에 다들 의혹에 휩싸였다.
병약하고 가녀린 서시. 푸른 수건을 두르고 파리하면서 선명한 화장, 길게 휘감기는 청의가 특징인 배역.
지금 모두의 시선 안에는 오직 그 특징만 보일 뿐, 화장 속의 얼굴과 청의에 감긴 몸매가 마치 녹는 것처럼 꺼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거죽만 남기고 육체가 통째로 바닥에 스며드는 것 같아서.
깊은 밤에 옛이야기에 나오는 요괴를 마주한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이 무슨 괴사인가.
다시 특이한 수투를 양손에 낀 당령이 흔적만 남은 서시를 검사하고 나서야.
해원기가 증명단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독이라 여겨서 당황했구나.”
“칫, 왁살스럽긴. 오라버니는 날 너무 우습게 여긴단 말이야. 북룡포가 뭔지도 모르면서.”
눈을 흘기며 투덜대지만, 증명단의 표정이나 목소리에는 전혀 화난 기색이 없고.
도리어 흐뭇한 기분.
여동생이 독기에 노출될까 봐 ‘당황’했다잖아.
오누이의 대화를 중단한 건 당령의 당혹스런 얼굴이었다.
장야독연의 성분을 알아냈던 왼손과 달리 오른손 손등의 네 개 보석 중에는 단 한 개만 흐려졌다.
“이건, 아무래도 음령초(陰靈草). 그렇다면 화합독술에 당했다는 의미…….”
자신의 오른손 손등을 보며 수투를 벗을 생각도 않는다.
해원기가 신중하게 물었다.
“과연 독이었습니까? 화합독술이란 건 뭐고 왜 서시만 당했을까요? 내공으로만 따지면 탁탑경이 염라검보다 더 위인데.”
염라검법은 살생을 목적으로 하는 사살검. 당연히 내부를 보호하는 데에 탁탑경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팔다리가 부러진 왕소군은 멀쩡하건만, 서시가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녹아버리다니.
멍하니 손등만 쳐다보던 당령이 선뜻 답하지 못하고.
황보관이 조그맣게 부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매.”
“아, 이걸 어떻게. 음, 황보 대가, 잠깐만요.”
질문한 해원기가 아니라 황보관에게 양해를 구하는 당령. 이맛살을 잔뜩 잡은 표정이 꽤 고민이 되는 듯.
천천히 수투를 벗으며 비로소 해원기를 향했다.
“백 년이 넘게 사라졌던 북악의 검, 항산파를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겠죠. 더구나 약왕당이 목적지라는 게 우리에겐 어떤 계시처럼 들리고요. 이건 다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는 게 옳아요. 해 소협, 증 낭자, 부탁드립니다.”
수투를 정리하고 해원기와 증명단을 바라보는 당령의 눈이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빛난다.
해원기까지 항산파로 오해했지만,
그 말에 증명단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한 말씀. 강호의 도의며 무림의 정의가 뭔지 아직 모르지만, 어려운 일에 함께 나서는 게 협의라고 배웠답니다. 무엇이든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다부지게 응하는 말에 해원기의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자신을 항산파로 오해해도 상관없다. 그보다 이 막돼먹은 여동생의 정기 늠연한 모습이 대견하잖나. 항산파 장문제자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대답이다.
당령 역시 마음이 놓이는 듯, 미소를 지으며 황보관과 마주 보곤.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사.
아주 예전에 사천당가는 내외로 극심한 타격을 받아 거의 멸문이 될 지경이었다. 종가의 맥은 완전히 끊겼고, 주인 없는 집에는 도둑만 들끓어서 오랜 세월 이어온 가문의 비전까지 다 사라질 때.
다행히 무림과 떨어져 살던 방계에서 뛰어난 인물이 등장해 무너지던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에는 깊은 뿌리가 있게 마련. 당가의 진수는 잃지 않았기에 다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간 사라진 가문의 비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내용이 담겼고, 그게 혹시라도 세상에 위해를 끼칠 염려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세대에 가까운 시간을 가문의 흥성에만 쓴 게 아니라, 사라진 비전을 회수하는 데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깊고 깊은 가문의 뿌리에는 어느 정도 이를 예지한 방안이 남겨져 있었던 걸까.
남에게 집안 얘기를 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당령은 담담하고 간명하게 가문의 비사를 밝히더니.
“본가는 암기와 더불어 독으로 이름났지요. 무림에서 꺼리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독을 다루는 데에는 상당한 위험이 상존합니다. 역대 가문의 어른들이 이 때문에 많이 희생되셨고, 그러면서 예기치 않은 성과도 얻었으니. 적을 무찌르는 독이 때로는 벗을 구하는 약이 될 수도 있는 도리. 실상 독과 약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까요, 그래서 본가의 진수는 그 양면을 아우르는 데 있습니다. 흔히 본가에 비장 되었다고 알려진 천하 만독의 비방, 소위 독경(毒經)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현재 본가의 독경은 진짜 독경만 남아버렸습니다.”
끝에 묘한 말을 한다.
사천당문에 만독의 비전이 담긴 비급, 독경이 있다는 건 아주 오래된 소문. 가문의 비사 속에서도 독경은 고스란히 남았다고 강조하는 건가.
의문은 당장 풀렸다.
“그 비전의 원래 제목은 독경약전(毒經藥典)이라더군요. 과거에 집안이 멸문지경에 이르렀을 때 약전 부분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고. 하아, 얘기가 너무 길었군요. 하여간 독경으로도 다시 약전을 되살릴 가능성이 있기에……. 흠, 막내 소규는 당가의 적손, 일찌감치 소가주(少家主)로서의 각오를 새겨두려고 한 가지 책임을 지웠습니다. 후우.”
길고 복잡한 얘기를 잘 추려서 들려주느라 숨도 차겠지.
숨을 돌리는 순간에 증명단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설마 동생분이 그 독경을 갖고 날랐, 아니, 뛰쳐나와, 가출했나요?”
평소의 말투를 어떻게든 순화하느라 애쓰지만, 말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령이 움찔하다가 그만 한심스러운 표정이 되었고,
대답은 얼굴을 잔뜩 굳힌 황보관이 대신했다.
“맞소. 일부분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