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독경약전(毒經藥典) (3)
닫혔던 문을 누가 발로 찬 것처럼.
두 쪽으로 갈라진 가슴팍에서 왈칵 쏟아지는 핏물, 그 핏물과 함께 덮치는 삼화검의 육신.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좌우에선 염라검과 천왕권의 협공까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지만,
해원기의 뻗으려던 두 팔이 와락 가슴으로 모이면서 신형이 우뚝 멈췄다.
번갯불 같던 속도다. 그 신형이 공중에서 갑자기 정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한 동작인데.
휘이이익.
돌연 해원기의 전신을 휘감는 예리한 기운, 양손에 모았던 검기가 뻗는 대신에 회오리치기 시작한다.
맹렬한 회오리, 그건 선풍을 넘어선 폭풍.
퍼펑.
염라검의 섬광과 천왕권의 탁탑경이 정통으로 부딪쳤고, 그 충격에 해원기가 일 장이나 더 튀어 올랐다.
그러나 왕소군과 서시는 공격을 이을 수가 없었으니.
퍽.
해원기가 일으킨 폭풍, 그리고 자신들이 내지른 힘이 한 점에서 터졌다.
공중에서 산산이 조각난 삼화검의 육신, 피와 살점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발검술과 기묘한 신법을 쓰던 왕소군은 즉각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몸을 뺐지만,
“으윽.”
가녀린 체구와는 달리 무거운 보법을 쓰는 서시는 상반신을 적신 채 신음과 함께 나동그라지고.
그 위로 폭발한 무대의 잔해와 오색 휘장이 어지럽게 쏟아져 내렸다.
공중에 머문 해원기의 눈이 빠르게 무대 뒤를 향했다.
새카만 어둠, 무대 앞의 너른 풀밭과는 달리 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숲이 드러나자.
해원기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횃불과 화톳불이 다 없어졌고, 장야독연이 아직도 곳곳에 뭉쳐 있는 상태에선 설사 동시안의 시력이라도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곳으로 들어올 때는 저 숲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무대가 홀연히 출현한 것과 무슨 관계가…… 음?’
숲 바로 앞에 뭔가가 있다.
폭풍결(暴風訣)을 질풍으로 바꾸어 단숨에 숲 앞에 내려섰고, 뭔가를 집어 들자마자 관도 쪽으로 도주하는 왕소군을 발견했다.
삼화검이 졸지에 죽어 버렸고, 연극배우로 분했던 자들은 독연에 가려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괴이한 극단의 내막을 알려면.
키잉.
오른손이 정신없이 달려가는 왕소군을 가리키자 손끝에 금광이 맺히는 듯하더니.
이십 장이 넘는 거리를 무서운 빛이 쓸어버렸다.
사지태백만을 운용한 군림검, 태백어검(太白御劍)이다.
쨍.
“크악!”
엉겁결에 막으려고 세웠던 장설연검이 수수깡처럼 부서지면서 팔다리가 한꺼번에 부러지는 고통.
왕소군이 누가 내던진 것처럼 땅바닥에 처박혔다.
“얘기를 나누기엔 좋은 장소가 아니군요. 자리를 옮깁시다.”
양손에 축 늘어진 서시와 왕소군을 끌고 해원기가 하는 말에.
당령과 황보관이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뭐가 휙휙 하는 것 같더니 독연이 거의 사라졌고 마침내 모습을 제대로 보인 해원기.
기합 소리, 병기를 휘두르는 소음, 무대가 통째로 파괴되는 폭음에 비명이 연달아 이어졌었다.
그러더니 다시 나타난 더벅머리 청년.
일이 다 끝난 걸 겨우 깨달았다.
“으음. 네.”
간신히 대답만 하고서, 북쪽으로 해원기의 뒤를 따라야 했다.
누군지도,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을 끌고도 가볍고 빠른 걸음. 그 뒤를 따르면서 적의는커녕 의심도 들지 않는 게 살짝 얼이 빠졌나.
당령의 멍한 시선이 해원기의 평범한 뒷모습만 보는데.
“나, 나는 증명단이라고 해요.”
은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아까 고마웠어요. 나는 당령, 여기는 황보…….”
“벌써 들었는걸요. 사천당문과 황보세가, 무림의 명문정파잖아요. 반가워요.”
해원기 뒤를 바쁘게 따르는 중이라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해서, 당령이 증명단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눈에 뜨이는 미모지만 짙은 눈썹이 꽤 강한 성격일 듯.
‘예쁘고 어린데.’
이렇게 명랑하고 순진한 모습. 조금 전에 놀라운 실력을 보였던 검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당령과 황보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녀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뜸 출신을 들었다고 하잖나.
“네, 저도. 그럼 두 분은…….”
더벅머리 청년은 해원기, 이 예쁘장한 소녀는 증명단. 성이 다르니 친남매가 아닐 터.
내력을 물으려 했지만, 해원기가 속도를 줄였다.
“언덕 아래로 갑시다.”
관도에서 빠져나와 구불구불한 샛길로 군중과 함께 올 때 봐두었던 곳.
네 명의 남녀가 어둠 속에서 관도 근처로 움직였다.
사람이란 처음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어떤 사람인지 밝히는 과정을 거친다.
“저야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 소단은 항산파의 장문제자랍니다.”
“네? 항산파?”
“오, 오악검의 하나, 북악의. 허!”
‘별 볼일 없는’ 해원기에 대한 궁금증도 항산파라는 말에 묻힐 수밖에 없다.
무림에서 사라진지 백 년이 넘은 문파. 이 예쁘장한 소녀가 그 장문제자라니.
의외의 신분에 당령이 깜짝 놀랐고, 황보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과연. 그 흉한 연검을 제압한 실력, 복룡검식이었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무는 그늘이요, 사람은 이름이라던가.
황보관이 새삼스럽게 정중한 포권을 취하자 증명단이 어쩔 줄 모른다.
“아니, 제가 무슨…….”
얼핏 돌아보는 얼굴에 홍조까지 오른 건 부끄러워서겠지.
해원기가 괜히 신분 얘기가 길어질까 싶어 얼른 화제를 이끌었다.
“실례지만, 두 분은 그 구란와자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저희는 그저 개봉에서 묘한 인파가 몰리기에 따라온 셈이라서.”
황보관이 포권을 풀며 시선을 돌리는데,
당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우연이었군요. 그럼 해…… 소협과 증 낭자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셨나요?”
여전히 백의로 남장한 당령의 준미한 얼굴이 해원기를 향했다.
백 년 전에 사라졌던 항산파다. 증명단의 실력이나 도움을 받은 처지로 의심하는 건 옳지 않지만.
그렇다고 묻는 대로 고분고분 답할 생각은 없는 듯. 해원기에게 ‘소협’이란 칭호를 붙이는 것도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다.
당연한 반응.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네. 제 의매(義妹)와 함께 북쪽에서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때마침 청명절이라 개봉을 들러 구경했지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대별산으로 갑니다.”
“대별산이면.”
“약왕당을 찾아가는 겁니다.”
“아아.”
고분고분 답하는 건 도리어 해원기. 딱히 숨길 이유도 없다.
약왕당이란 이름에 당령의 표정이 조금 풀리고, 황보관을 힐끗 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죄송해요. 초면에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꺼내기 어려운 내용이라서……. 그래도 도와주신 분들께 솔직히 말하는 게 도리겠죠.”
“오매.”
황보관이 얼굴을 굳히며 불렀지만, 당령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황보 대가. 저기 둘을 이렇게 끌고 온 것도 저희를 생각해 주신 거잖아요.”
인사불성인 서시와 왕소군. 가발과 분장이 다 망가져서 한심한 몰골로 드러누운 둘을 가리키며 당령이 말을 이었다.
“원래 남에겐 밝히기 어려운 집안 사정이라 여겼지요. 대략 한 달 전쯤, 막내인 당규가 가출했습니다. 평소에도 워낙…….”
사천당가는 예로부터 손이 귀하다.
물론 무림의 세가가 여염집처럼 여자를 차별하진 않지만, 오랫동안 대를 이어가는 가문에선 아무래도 아들을 원하는 법.
그러다가 늦둥이로 아들을 얻었으니 얼마나 이뻐했을까. 으레 그렇듯이 여기도 지나치게 사랑을 베풀어 오냐오냐하다가 막내아들 성격만 나빠지게 한 예.
버릇없고, 건방지고, 천방지축에 제멋대로 하려고만 하니.
뒤늦게 깨달은 어른들이 조금 엄하게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걸 못 견디고 더 말썽을 부려댄 당가의 막내, 당규다.
몇 번이나 야단을 맞고 벌을 받다가 기어이 애먼 짓을 저질러서. 열다섯 살짜리가 겁도 없이 뛰쳐나가 버렸다.
이에 노한 어른들이 아예 혼꾸녕을 낼 심산으로 모른 척 내버려 뒀다나.
제까짓 게 집을 나가봤자 얼마나 버티랴. 돈 떨어지고 배고프면 돌아오겠지.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다.
대강 그렇게 지내다가 보름이 넘으니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바로 위인 당령은 평소에도 당규와 가까웠던 터라 더는 참을 수 없었고.
성도(成都)를 모조리 뒤져서 당규의 행방을 찾았는데, 그게 어쩐지 섬서 쪽으로 넘어간 흔적.
집안 허락을 받고 나온 것도 아닌 판이라 혼자서 섬서의 함양(咸陽)으로 갔다가 또 장안(長安)으로.
나중에 인편으로 소식을 전했더니 그제야 황보관이 득달같이 달려와 장안에서부터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이 녀석이 대체 뭐에 홀렸는지. 가는 곳마다 소문이 날 정도로 놀자판을 벌여서, 아휴. 흠, 그런데 도중에 좀 수상한 점이 보였죠.”
집안 치부를 드러내는 게 쉬울 리 없다. 어지간히 순화해서 사연을 밝히느라 한숨이 나오지만, 당령이 표정을 고쳤다.
얼굴을 찡그린 채 듣고 있던 증명단이 얼른 말을 받았다.
“놀자판이라면, 수상한 점이요?”
부잣집 막내아들이 가출했다는 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는 증명단이다. 명문정파 아닌가.
대첨산 속의 숨겨진 객잔 딸로 태어난 그녀로선 소문이 날 정도의 놀자판도, 그게 수상하다는 것도 선뜻 알아들을 수 없다.
한 달이나 집에 돌아가지 않고서 희희낙락한다고?
당령이 고소를 지었다.
“자세히 얘기할 부분은 아니고. 그 녀석의 행적이 남았던 곳이 전부 괴상한 극단이 묘한 연극을 공연했다는 소문과 겹쳤거든요. 그 극단 이름이 구란와자란 걸 열흘 전에야 알아냈죠, 다음 장소가 개봉 남쪽이란 것도.”
“그게 동생이랑 연관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니, 동생이 연극배우가 되려는 걸 수도 있잖아요?”
역시 ‘놀자판’이 뭔지를 모르니 엉뚱한 질문이 나온다.
해원기가 증명단의 북룡포를 살짝 토닥였다.
“어려운 얘기해 주시는데 일단 들어야지. 당 소저가 구란와자란 이름을 들은 곳은 어딘지요?”
명문 세가의 늦둥이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려 한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만, 당사자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더구나 당령이 말한 ‘놀자판’은 분명 거창한 기루나 도박장을 의미할 테니.
당령이 증명단의 말을 못 들은 척 얼른 대답했다.
“낙양 부근이었습니다.”
“여양(汝陽) 북쪽에서도 공연했나 봅니다. 여양에서 제일 큰 주루를 통째로 빌려 놀았더군요. 돈도 없을 텐데. 더구나 젊은 공자들 서넛이 각각 방을 잡았다면서, 다른 배우나 그 지역 인사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 젊은 공자 중의 하나가 또, 어흠. 오매?”
황보관이 말을 거들다가 그만 당령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당당한 덩치의 호한이지만, 당령에게는 꼼짝 못하는 듯.
당령이 미간을 찡그렸다가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할 수 없죠. 황보 대가가 먼저 말했으니. 오는 도중에 종남산(終南山)에 들렀어요. 종남파의 장문인은 바로 제 고모가 되시는 분, 그분이 최근 장안 부근에 출현한 살수 얘기를 해주셨는데. 음, 그게 아마 저자일 거예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바로 왕소군.
“어머, 종남파 장문인이 고모라고요?”
증명단이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해원기가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 청령선고(靑靈仙姑)의 이름이 당민지(唐敏志)요, 그녀가 사부의 벗이었던 표풍부운의 딸이란 건 이미 알고 있다.
당령이 고모로 부르게 된 연유는 아직 모르지만,
그것보다 다른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인사불성인 둘. 서시는 진주언가의 탁탑천왕권을 썼고, 왕소군은 장안에 출현한 살수답게 염라검을 익혔다. 그리고 양귀비로 분장한 당규는 바로 사천당가의 적손.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초선은 또 어떤 배경일지.
“혹시 그간 구란와자가 공연한 장소나 동생분이 머물렀던 곳을 알려줄 수 있습니까?”
이미 당령이 숨김없이 말하는 데 힘을 받았나.
황보관이 선선히 대답했고,
“성도에서 섬서의 함양, 장안. 그리고 하남으로 들어와서는 낙양 아래 여양과 이곳이군요.”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전부 번화하고 부유한 고을들이면서,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