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독경약전(毒經藥典) (2)
무공이란 기본적으로 상대와 다투는 행위. 손발을 내뻗든 병기를 휘두르든 그 위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찾는다.
특히 때리거나 찌르는 동작이 많아서, 당연히 이런 동작에 방어를 꿰뚫고 나아가는 힘을 부여하고자 노력하는데.
나사(螺絲)처럼 비트는 힘을 말한다.
특히 창과 같은 긴 병기에서는 이 힘을 체득하는 것만으로도 고수의 경지에 오를 수 있고.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신창(神槍)이라고 불릴 만 하단다.
소위 신창삼대절예(神槍三大絶藝)라는 기예,
그중의 하나가 바로 나사관천이다.
해원기가 뒤로 훌쩍 물러서며 왼손을 들었다.
얼핏 단창의 찌르기에 몰려 방어로 바꾸는 듯한 동작.
여기서 나사관천을 이룬 창과 마주칠 줄이야.
물론 놀란 건 아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창술의 기본공(基本功)을 다지려고 노력한 이가 드물어 신창삼대절예가 뭔지도 다 잊었을 거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 자는 몇 가지나…… 흠, 이럴 때가 아니지.’
나쁜 버릇.
무공에 관한 지나친 관심 탓에 엉뚱한 상념이 끼어들곤 한다.
세상의 모든 장병기(長兵器)를 능숙하게 다루던 탁 소숙이 해주던 말을 떠올리다가, 얼른 현실에 집중했다.
왼손으로 둥근 원을 그리고, 오른손이 전부 제탁지검을 끄집어내었다.
처음에 꺼낸 건 삼지화정, 독은 불에 약한 게 상리이니 손을 휘두르는 대로 독연을 태워버릴 심산이었고.
무정의 단창이 나사관천을 보이기에 이지무성까지 더했었다.
하나 불에다가 뻗어 가는 나뭇가지를 더했거늘 독연이 줄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확산하는 기미를 보이니.
곧장 검왕오형으로 전환했다.
둥근 원을 통과하는 오른손, 제탁지검의 발검제형이다.
우우웅.
시급한 문제는 구석에 묶인 상태의 군중, 그들을 덮치는 독연부터 막고자 발검제형이 크게 확산하면서 무정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자신을 향하는 줄 알고 움찔한 무정은 공간을 메운 독연이 삽시간에 베어져 사라지는 걸 멍하니 쳐다볼 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나사관천을 이룬 고수라도 자신의 눈을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챙, 채챙, 챙.
대체 몇 번이나 부딪혔을까.
왕소군으로 분한 자도 어지간히 고집스러운지, 방향을 바꾸지도 않고 거듭해서 살기 어린 섬광을 뿜어 대서.
증명단이 아예 당령을 대신해서 맞상대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왕소군은 독연에 몸을 숨긴 채, 증명단은 해원기가 그린 원 속에서 노출된 채.
낯선 발검술에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증명단은 초수(招數)를 거듭할수록 안정되어서.
불쑥불쑥 목숨을 노리는 살검(殺劍)의 섬광에 응운검이 차츰 유연한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십육식을 전부 익힌 지금, 오악검의 하나인 복룡검식이 되찾은 본연의 위력을 보이니.
굳이 검강지기를 의식하지 않아도 응운검이 흘리는 기운이 물처럼 이어져 왕소군의 발검을 오히려 묶으려 하고.
독연 가운데 있던 왕소군의 모습도 끌려 나온 것처럼 드러난다.
기가 막힐 노릇.
왕소군의 두꺼운 분장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이잇!”
견디지 못한 기합 한 소리, 단숨에 증명단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쓰쓰쓰.
잔뜩 웅크린 자세, 좌우로 흔들리는 신형. 또다시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기음을 흘리며.
해원기가 그려놓은 결계진의 원을 단숨에 넘었다.
“위험!”
황보관이 버럭 고함을 쳤지만, 증명단의 눈은 반짝 빛났다.
해원기의 말 때문에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했었다.
본래 거침없는 성격, 불같은 기질을 억지로 누른 건 오직 ‘오라버니’의 당부 때문. 상대가 먼저 다가오니 그야말로 감히 청하진 못했어도 정말 바라던 일 아닌가.
비트는 허리를 따라 북룡포가 펄럭이고, 응운검이 검기를 휘몰아 왕소군의 전신을 휘감았다. 총원심법의 내공을 충분히 담은 박룡쇄운의 비결.
새파란 기운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폭발하는 섬광 덩어리와 마주쳤다.
펑.
쇳소리가 아닌 폭음, 그 속에서 불쑥 공중으로 튀어 오른 왕소군. 그 신형도 어지럽게 겹쳐서 이번에는 좌우가 아니라 상하로 흔들린다.
미리 다음 수를 준비했었나. 증명단의 머리를 쪼개려는 네 줄기 섬광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쏟아졌다.
그러나 증명단은 백여 년 만에 세상에 나온 항산의 장문제자.
북룡포가 파르르 떨더니 상체가 고꾸라지듯 꺾였다가 응운검이 힘차게 올라온다.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새파란 기운이 용솟음쳐 오르고.
따당!
망치로 때린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으윽.”
왕소군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튕겨나갔다.
두 사람의 접전 때문인지 독연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바닥에 내려선 왕소군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되찾더니.
“이, 이건. 거, 검강지기?”
코피가 터져 엉망이 된 얼굴이 급하게 자신의 병기를 향했다.
손가락 두 개 넓이의 좁은 검신, 뱀의 혓바닥처럼 길게 드리워진 연검(軟劍)의 끝부분이 뭉툭하게 끊겨나갔다.
병기가 상한 게 믿기지 않아서 자신이 코피를 흘리는 것도 모르는 듯. 시선이 확 증명단을 노려보는데.
파팡.
“컥.”
돌연히 날아온 경력에 신음을 토하며 또 밀려났다.
휘익.
어느새 증명단의 바로 앞에 나타난 해원기, 시선이 황급히 증명단의 전신을 확인하고.
“괜찮으냐, 소단?”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막 검을 고쳐 잡던 증명단의 얼굴이 확 펴졌다.
“오라버니.”
오늘 밤, 증명단은 오라버니란 소리를 어지간히 해댄다. 아주 입에 붙을 정도로.
어쩌다 이렇게 돌아가는지.
당령과 황보관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
당가의 막내인 당규(唐珪)가 가출한 게 한 달 전. 금방 집에 돌아오겠지 하다가 영 종무소식에 마침내 당령이 나섰고, 만일을 염려해 황보관이 뒤늦게 합류했다.
사천 지역에서 당령이라고 하면 이름보다 오매불망(寤寐不忘)이란 별명이 더 유명하고, 황보세가의 황보관도 장권쌍절(掌拳雙絶)로 꽤 알려진 편.
당규의 흔적을 찾아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심상치 않은 걸 느끼긴 했으나, 딱히 두려울 게 없었다. 나름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구란와자를 발견하곤 당령 혼자서 나섰으며, 암수를 대비해 황보관을 원군으로 두었으니 실수할 리 없었을 텐데.
당령이 초반에 간단히 제압했던 자들은 그저 배우에 불과했나. 갑자기 독연이 퍼지고 알지 못할 무공에 하마터면 크게 당할 뻔했다.
이런 광활한 공간에 독연을 푸는 것도 상식 밖, 그리고 당령과 황보관을 알아보고도 해치려는 자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해 도움을 주는 두 남녀. 전혀 오누이로 보이지 않는 이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나이 어린 소녀가 고명한 검법을 시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아예 오가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 더벅머리 총각이란.
이름이 해원기라고 했었지.
얼이 빠진 건 당령과 황보관 만이 아니다.
구란와자의 주인 행세를 하는 삼화검이 무대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장야독연을 풀고, 서시와 왕소군을 당령과 황보군에게 붙였으며, 백여 명의 군중은 무정에게 맡겨놓았다.
사천당가의 오매불망이든 황보세가의 장권쌍절이든.
암기와 신법이 뛰어나다면 왕소군의 연검이, 맨손의 박투라면 서시의 두 주먹이 충분히 상대할 터. 게다가 사정 가운데 창술의 고수인 무정을 슬쩍 숨겨놓아서 의외의 사태에 대응할 준비까지 했잖나.
이 기회에 사천당가와 황보세가의 후기지수를 생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비장의 한 수인 초선이나 자신이 지닌 화합독술(和合毒術)까지 쓰일 리 없고, 당령과 황보관의 실력이 괜찮다면 무정을 동원하면 그만.
그렇게 여유를 부렸는데 채 일각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예상이 전부 어긋났다.
의외의 사태.
창이 부러진 무정이 술에 취한 것처럼 흔들거리고, 왕소군 역시 무대까지 밀려났으며,
거센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는다는 장야독연이 여기저기서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저 시커먼 더벅머리 놈 때문에.
이미 시체처럼 늘어졌어야 할 군중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는 건 둘째 치고.
뭘 어떻게 했기에 무정과 왕소군이 맥을 못 추는 걸까.
잘난 머리가 굳은 것처럼 돌지 않아서.
초선을 부르고 화합독술을 쓸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해원기는 누구보다 나사관천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래서 발검제형으로 제탁지검을 날린 후에 즉시 무정의 단창이 평범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단창으로 나사관천을 이룬 고수. 그러나 그 변화가 단조로워 오직 찌르기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그것도 열 개나 되는 창날을 만들 정도로.
뭔가 야료가 있고, 그것이 바로 단창의 창간(槍幹). 즉 창대다.
본래 연극에서 쓰는 단창은 속을 비워 가볍게 만든 것. 무정이 쓰는 단창도 모양은 똑같지만, 뱀처럼 부드럽고 고무처럼 탄력적이다.
그걸 알아챘을 때 증명단 쪽에서 폭음이 터졌고, 걱정이 불끈 치솟아 그대로 두 손을 나누어 떨쳐버렸다.
검왕오형의 두 번째인 재단경위.
무정과 왕소군을 단번에 밀어내고서 동시안의 비췻빛 시선이 독연에 가려진 무대 중앙을 향했다.
“연화창간(軟化槍幹)으로 나사관천, 장설연검(長舌軟劍)으로 염라검법(閻羅劍法). 이 비결을 어디서 얻었지?”
증명단의 안위를 확인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음성.
바로 뒤의 증명단이 어깨를 옴츠릴 정도로 무겁다.
몇 차례 보고, 직접 손을 섞고서. 해원기는 무정과 왕소군이 무슨 수법을 쓰는지 알아냈고.
그건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다.
아직 무대 주위를 감싼 장야독연.
그 연기 속에 있는데도 해원기의 푸른 눈빛이 정확히 자신을 노려보는 바람에,
삼화검이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전신을 떨었다.
무정과 왕소군이 쓰는 수법을 정확히 짚어내는 자가 있다니.
“너, 너는. 으흠, 대체 어디서 온 고인이기에 그걸 알아보실까?”
덕분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해서 겨우 천연덕스러운 말투를 되찾았지만.
상대는 그런 말투에 말려들 사람이 아니다.
해원기가 성큼 앞으로 나아가자, 옅어진 독연이 밀물처럼 양쪽으로 흩어진다.
“신창의 기본공을 기계(機械)로 대치하고, 사살검(死殺劍)의 효과를 강화하는 방안은.”
말을 끊으면서 보는 건 좌우로 흩어지는 장야독연.
해원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독까지. 출처를 알아야겠다.”
스스로 하는 다짐.
말이 끝나자마자 신형이 번갯불처럼 튀어나가는데.
“이야앗!”
“차압.”
독한 기합과 함께 좌우에서 살기 어린 섬광과 시커먼 기운이 폭발하듯 막아선다.
끝이 부러진 장설연검을 광포하게 내뻗는 왕소군과 구석에서 구경만 하다가 탁탑천왕의 주먹을 내지르는 서시.
이미 신왕공을 끌어올린 해원기가 섬광과 권력을 무시한 채 곧장 삼화검을 향했다.
두 손에 맺힌 검기, 다시 재단경위로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변화는 그뿐이 아니어서.
퍼엉!
무대가 통째로 터지면서 오색 휘장이 광풍에 휘말려 사방을 뒤덮고,
“크악!”
그 속을 가르는 처절한 외마디 비명.
가슴이 쩍 갈라진 삼화검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아직 검왕수를 펼치지도 않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