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독경약전(毒經藥典) (1)
당당한 체구의 호한은 생김새대로 호탕한 듯.
뜻밖에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잠깐 당황했으나 바로 주먹을 모아 쥐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도움에 감사드리오. 내 이름은 황보관(皇甫寬), 여기 오매의 오라비가 되오.”
오빠가 아니라 오빠가 된단다.
성이 다르니 당연히 친오빠가 아니겠지만, 그것보다 이런 자리에서도 사례를 잊지 않는 사내.
그 또한 당령을 쪼개려던 살기 어린 섬광이 어떻게 저지되었는지 아는 눈치다.
해원기가 포권으로 답례했다.
“해원기라고 합니다. 제가 괜히 나선 듯하군요.”
당령에겐 이미 황보관이라는 든든한 후원이 있었고,
물러선 왕소군과 당령 사이에 생긴 움푹 파인 땅바닥이 그 실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과연 제때에 막아낼 수 있었을까.
해원기의 답례가 인사치레라는 생각이 얼핏 들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어서.
황보관이 손을 풀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수상한 구석이 적지 않았어도 당가의 막내만 돌려보내면 그걸로 더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런 살수를 써? 그냥 놔둘 수 없군.”
전면에는 왕소군, 그 옆에는 서시, 무대 위에는 삼화검.
누구에게 건네는지 정확하진 않아도 공개적인 선전포고다.
홍사건을 씌워 높이 올린 가발 아래에 왕소군의 눈가가 일그러지고, 옆에서 관전하던 서시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히는 중에.
삼화검이 또 뒤집힌 음성으로 웃어댔다.
“호호호, 이거 정말 극단을 닫아야 하나 보다. 고생 끝에 겨우 돈푼이나 만질 때쯤 되니까 깡패들이 몰려드네. 사천당문에 황보세가(皇甫世家)……, 거기 둘은 어디서 왔어? 아니, 그보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을꼬? 아직 멀리 있는 집안에는 청첩을 돌리지도 않았건만. 이거 다음 개업을 위해서 잘 따져봐야 할 문제라…….”
여전히 우스개 담당의 배역에 충실한 말투. 그래도 등장한 무인들을 전부 ‘깡패’로 취급했다.
삼화검이 해원기와 증명단을 훑어보며 말을 끌다가,
울긋불긋한 분장에 주름을 잡았다.
“다들 남아줘야겠다.”
어조가 확 변하고,
펑, 펑.
무대 주변에서 터지는 폭발.
갖가지 무대장치를 찬란하게 비추었던 화톳불들에서 불꽃이 크게 일어나고, 탁자들을 서랍처럼 수납했던 무대 아래쪽에서도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뿐 아니라 한쪽으로 몰아놓은 군중, 그들을 꼼짝 못 하게 눌러놓던 사정 중의 셋, 정정의 동추가 무슨 향로로 화하고 부정의 갑주는 수십 개의 구멍이 생긴 것처럼 한꺼번에 연기를 토하며.
바닥에 누인 모정의 거창한 체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삽시간에 이 평지가 구름에 갇힌 듯 자욱해져.
말 그대로 연막(煙幕)이 장막처럼 모든 걸 뒤덮었다.
원래 밤 시각이었다.
커다란 화톳불을 몇 개나 놓고 횃불들을 밝혀놔서, 또 군중들이 워낙 미친 듯이 열광하는 분위기라 몇 시인지를 잊을 정도.
다들 휘황찬란한 무대와 울긋불긋한 분장에만 눈이 팔렸었다.
그러다가 돌연히 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연막이 넓은 공간을 꽉 채우니.
아무리 고수라도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지고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더구나.
“에, 콜록, 콜록. 오라버니?”
증명단이 연기에 기침을 하며 해원기를 찾는 건. 순간적으로 당황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갑자기 주위의 기척이 뚝 끊긴 것 같으니. 바로 곁에 있던 해원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허우적거렸다.
항산에서 내려온 용낭자, 보통내기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소녀.
겁이 덜컥 나는데.
불쑥 그녀의 어깨를 잡는 손,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찬 기운 하나.
증명단이 부르르 떨며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검기? 믿기 어려워도 검을 쓰는 그녀가 착각했을 리가. 전신을 훑고 지나간 찬 기운은 분명 검기였지만.
그보다 가려졌던 시야가 분명해지고 자신을 바짝 끌어당긴 손의 주인이 해원기인 걸 확인해서.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오른손을 크게 휘두른다.
휘이익.
맨손 끝에 맺힌 청정한 기운이 크게 확대되어 주변을 휘감자 단번에 회복되는 광경, 어리둥절한 당령과 황보관을 확인하고서야,
증명단은 자신이 어떻게 제정신을 차렸는지 깨달았다.
자욱한 연기를.
저 맨손이 베어버렸다.
해원기가 증명단을 자신의 뒤로 물리면서 크게 외쳤다.
“독이요! 물러서시오!”
서시와 양귀비의 비무 때부터 암중으로 운용했던 동시안, 연막이 사방을 뒤덮어도 눈이 어두워질 리 없다.
그리고 잠심침령이 버썩 일어선 건 이 연기에 독이 있다는 뜻. 제탁지검이 절로 뽑혀 나온 이유다.
당령이 눈을 깜빡이다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 황보관에게 건넸다.
“황보 대가, 이걸.”
황보관도 서슴없이 환약을 입에 넣고, 당령이 두 손을 가볍게 털자 소매에서 뭔가가 나와 손을 감싼다.
정교하게 만든 수투(手套). 팔뚝까지 완벽하게 가리는 긴 장갑이다. 장갑을 끼자마자 왼손을 곧게 내뻗는 자세, 바로 한 걸음 물러서는 황보관과 달리 되레 연기를 잡으려는 듯.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서둘러 나서려 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다.
“마목향(痲木香), 실혼산(失魂散), 소량의 화혈독(化血毒)까지. 흡입하면 안 돼요! 아.”
어느새 바로 앞에 온 해원기. 시선이 당령의 수투를 향하고, 그 위치가 이미 당령보다 더 연기에 가까운데.
해원기가 이르자 연기가 깜짝 놀란 듯 밀려난다.
당령의 왼손 수투는 녹피(鹿皮)를 정교하게 가공해서 만든 것. 그 손등에 마름모꼴로 네 개의 조그만 보석이 박혔고, 그 보석 중 세 개가 희미하게 흐려진다.
“신기한 수투군요. 그걸로 어떤 독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 그래요. 어, 어떻게?”
신기한 건 이 수투가 아니라 멀쩡하게 묻는 이 더벅머리 청년 아닌가.
무슨 수법으로 당령과 황보관 주위의 연막을 몰아냈는지 모르는 판에, 이렇게 독연(毒煙)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서다니.
당령이 당혹스러워 말을 더듬지만. 해원기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몸을 돌렸고.
이어진 행동에 당령은 아예 입을 딱 벌려야 했다.
휘리링.
해원기를 감싸고 일어나는 회오리바람.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그 회오리바람이 곧장 주위를 빠르게 돌아간다.
당령, 황보관, 그리고 증명단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파파파파.
땅바닥에서 연달아 일어서는 흙먼지는 가는 기둥처럼 늘어서서 독연이 다시 접근하는 걸 막는 듯.
“소단, 당 소저와 있어라.”
짧은 말을 건네는 즉시 그 회오리바람이 거침없이 독연 속으로 뛰어들었다.
“앗, 안 돼…….”
채 말릴 새도 없는데.
“괜찮아요. 오라버니는 저쪽 도박꾼들까지 걱정하느라.”
등 뒤에서 전해진 증명단의 말에 당령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는 소녀.
예쁘장한 얼굴에 검은 피풍을 젖히며 어깨의 검에 손을 얹는 모습이 자신만만.
도대체 뭘 믿고 괜찮다는 걸까.
황보관도 오만상을 쓴 채 눈을 껌뻑거렸다.
박대정심을 목표로 삼았기에 적지 않은 걸 공부했지만, 독에는 여전히 문외한.
그래도 당령이 읊어댄 독이 어떤 종류인지 대강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마비시키는 향기, 정신을 잃게 하는 가루, 그리고 핏물로 녹이는 독.
접하는 순간 오감을 잃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다가 마침내 혼절해서는,
전신이 핏물로 녹아버린다.
해원기가 좋지 않은 느낌에 서둘렀다.
선풍결을 일으켜 돌면서 검기를 심어 간단한 결계진(結界陣)을 설치하고, 지체 없이 군중이 몰렸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삼화검이 발동한 이 독연은 단지 당령과 자신들만 노린 게 아니다. 꽤 넓은 공간을 전부 뒤덮는 무차별한 공격. 괴상한 극단에 홀려 거금을 거는 도박에 빠진 자들이지만, 군중 대부분은 평범한 백성들. 속절없이 목숨을 잃게 된다.
선풍결을 두른 채 신왕공을 끌어올렸다. 군중의 수는 백여 명, 제탁지검을 최대한 시전해도 독연을 완전히 물리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급한 마음에 그 신형이 빗살처럼 빠른데.
화악.
연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창날.
팅.
해원기가 손으로 막으며 내려섰다. 눈썹이 꿈틀, 자신을 막아선 자를 찾았다.
중단으로 겨눈 단창을 두 손으로 쥐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자세. 얼굴엔 검붉은 분장을 칠하고 등에는 깃발을 네 개나 꽂은 무정의 차림새지만.
그 창에서 대단한 기세가 흐른다.
해원기가 제남의 흥륭 별서에서 수십 명의 금의위를 쓰러뜨렸을 때는 그 신형을 제대로 찾은 이도 없었다. 오죽하면 비천무영 황정리로 오인했을까.
그런데 지금 선풍결을 두르고 빗살처럼 몸을 날린 걸 정확히 찾아낸 자.
분장으로 자신을 숨긴 고수다.
붉은 얼굴, 검은 수염, 과장되게 올려 그린 눈썹. 삼국시대 주창(周倉)을 표현한 분장이 일그러지고.
“장야독연(長夜毒煙)이 효과가 없다? 너는 누구냐?”
해원기가 멀쩡하게 움직이는 게 놀라운 듯. 낮게 깔리는 음성에 희미한 경악이 담겼지만,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장야독연이 이 독연의 이름, 그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따로 이유가 있을 터.
당령의 한 수에 나가떨어진 모정이나 합공을 펼치고도 고꾸라진 사생과는 수준이 다른 자가 무정으로 끼어있다는 건.
만약을 위해 상대의 방심을 노리려는 교활한 수단이다.
“고약하군.”
해원기가 불쾌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날렸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중독된 백성들의 피해는 커질 터.
손가락 세 개가 붙는 삼지화정이 후끈 열기를 뿜는다.
기다렸다는 듯 무정의 단창이 서슴없이 찔러 나왔다.
지이잉.
귀를 간질이는 미세한 소음, 그러나 창끝이 순식간에 열 개로 변해 단번에 구멍을 뚫을 듯. 해원기가 삼지화정에 이지무성까지 더했다.
타타타탕.
숲에 번지는 불길처럼 맨손의 검기가 펼쳐졌건만, 이 단순한 단창의 찌르기에 거듭 부딪히기만 하고.
해원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나사관천(螺絲貫穿)?”
무정의 기예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해원기 때문에 잠깐 멍한 걸 노렸을까.
쉬쉭.
독연 속에서 벼락같이 뻗는 섬광이 손을 내민 채의 당령을 향했고,
이번에도 황보관은 한 걸음 늦었다.
채챙.
검광이 어지럽게 튀기면서 황보관이 뒤늦게 잡아끄는 대로 물러선 당령. 서릿발처럼 맑은 검신이 앞을 지킨다.
“어지간히 살벌한 검이네. 고약해!”
해원기와 우연히 같은 말을 내뱉은 증명단이 미간을 찡그렸다.
응운검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은근히 손이 저리다. 분명히 일종의 쾌속한 발검술인데 아직 그 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게다가 섬광 속에 담긴 지독한 살기. 부딪치는 것만으로 손이 저릴 정도로 흉한 검의 기운이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 무슨 검인지 확인해서 꺾어버리고 싶지만.
해원기에게 복룡검식을 완전히 배운 후로 증명단은 조금 달라졌다.
상대의 검을 살피고, 상대할 방법을 찾고. 주위를 확인하며 내부를 정리한다. 나이에 어울리게 성깔을 부리는 대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내공을 순환해서 다음을 대비했고.
당령과 황보관이 어떤지 흘낏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당령과 같이 있으라고 했잖아.
해원기가 땅바닥에 그려놓은 원을 절대 벗어나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