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구란와자(勾欄瓦子) (4)
사천당문, 혹은 사천당가.
무림에선 흔히 당문이라고 부르고, 사천 지역에서는 당가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원래는 당(唐)이라는 성을 쓰는 한 집안이니 당가가 맞는 말이지만, 오랜 세월 무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한데다가 다른 성씨가 섞여 들어가면서 하나의 문파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되었다.
독(毒)과 암기(暗器).
정정당당한 무인의 싸움을 더럽힌다고 멸시하는 자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강호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무기다.
상대를 부지불식간에 무력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위력, 그리고 방비하기 어려운 효용.
당연히 비열한 자들이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를 때 애용할 수밖에. 멸시와 오명이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지만.
약자가 능히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니 본래 무리(武理)와 병법(兵法)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물며 그 배움의 어려움이 몇 곱절이나 되는 바에야.
당가는 바로 천박하고 비루하다고 여겨진 이 독과 암기를 제대로 무공으로 승화한 가문이요, 당당히 구주정문에 이름을 올린 명가다.
세상 어떤 공부가 간단하고 쉬울까. 독을 약리(藥理)로 극복하여 내공으로 품고, 암기를 치명적인 기병(奇兵)으로 삼았으니.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당가의 다섯째, 당령이라는 이름을 밝힌 여자.
남장을 해서라기보다는 그 배경 때문인지 위세가 당당하다.
백여 명의 군중에 소요가 일었다.
“당문? 사천당문이라고?”
“어어, 다섯째면 당오매(唐五妹)잖아!”
“익. 그 지독한.”
“오, 오매불망(寤寐不忘)…….”
수군수군.
여기는 하남의 개봉 밖. 사천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기에 기껏해야 사천당문의 이름 정도 알려졌을 텐데.
한가한 유람객 차림을 했어도 이런 해괴한 비무에 돈을 건 자들이다. 개중에는 당령에 대한 소문을 아는 자도 적지 않은 듯.
삼화검이 과장된 예를 거두고 손을 풀었다.
여전히 웃는 낯, 하나 그건 축의 분장 때문일지도.
한쪽 손을 가볍게 휘둘러 넓은 소매를 말아 쥐면서,
“오늘 밤 공연은 예상외의 객관(客串) 출연이네. 할 수 없지, 한바탕 크게 놀고 막을 접는 수밖에. 에, 그럼 그간 저희 구란와자를 아껴주신 관객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면서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요오오오오.”
객관은 극단에 소속되지 않는 인물이 배역으로 깜짝 출연하는 것.
당령의 신분을 알고 나서 대뜸 특별출연으로 치부하곤, 갑작스럽게 무대를 접는다고 선포하는 말꼬리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길다.
그게 미리 약정한 신호인지.
화라라라라.
무대를 뒤덮은 오색 휘장이 돌연 돌풍을 만난 것처럼 마구 휘날리고, 십여 개의 그림자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전부 단창을 들고 등에 작은 깃발을 하나씩 꽂은 배우들. 얼굴엔 간단하게 울긋불긋 물감을 칠하고 복장은 사정 중의 무정과 유사한 소위 타화검(打花臉)이란 배역으로 극 중에서 병졸로 나오는 자들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군중 속으로 내려서더니 다짜고짜 창을 눕혀 한쪽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윽, 이게 뭐 하는.”
“어어어, 왜 이래? 왜?”
“아야야. 무슨 짓이야!”
항의를 하든, 비명을 지르든. 연극에서 노래도 대사도 하지 않는 타화검들은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백여 명을 짐승처럼 구석으로 몰아갈 뿐.
모정을 제외한 나머지 삼정 역시 열두 명의 타화검에 합세하니,
흉흉한 기세에 군중이 휩쓸려 나가자 무대 앞이 졸지에 휑해졌다.
당령은 오직 삼화검에게만 시선을 준 채.
나자빠진 채로 인사불성인 모정과 각기 맡은 탁자 앞에 선 사생은 본 척도 하지 않고서.
“막을 접을 때는 푯값은 돌려주는 게 관례 아닌가?”
냉담하게 말을 걸자, 삼화검이 휘날리는 휘장 속에서 또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호, 구란와자가 은자 따위로 푯값을 받겠습니까. 여기선 명근(命根)이 바로 푯값. 우선 당 소저의 푯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부터 셈하렵니다.”
삼화검답게 말재간을 더했으나, 뜻은 명확하다.
목숨을 내놓으란다.
철컥, 철컥.
무대 앞에 놓였던 네 개의 탁자가 홀연히 다리를 접어 서랍처럼 무대 속으로 쑥 박히고.
사생이 각기 병기를 꺼내면서 당령을 향했다.
노생은 끝이 구부러진 괴장(拐杖), 홍생은 판관필(判官筆), 서생은 섭선, 왜왜생은 숨겼던 연편.
배역엔 어울려도 강호에선 다 독특한 묘용을 지닌 병기들이다.
“진즉 이럴 것이지. 덤벼.”
양쪽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얹고서 태연히 걸음을 옮기는 당령.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생과 서생이 정면으로 덮치고, 노생과 왜왜생이 좌우로 벌어졌다.
판관필은 혈도를 노리는 병기, 섭선은 날과 면으로 변화가 많은 병기.
둘이 바짝 붙어 접근전을 벌이고, 길이가 긴 괴장과 연편이 옆과 뒤를 칠 셈이다. 분장으로 노인이니 어린아이니 꾸몄어도 전부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사내들, 남장이라도 날씬한 체구의 당령이 단번에 그 협공에 휘말려 드는데.
파파파파.
“윽.”
“헉.”
달려들던 사생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뒤튼다. 판관필 끝에서 불똥이 튀고, 정신없이 휘도는 섭선이 마구 떨리며, 괴장과 연편은 아예 내치지도 못했다.
화톳불로 대낮같이 밝혔다 해도 캄캄한 밤. 아니, 그 일렁이는 불빛이 도리어 시야를 흐릴 때가 많은 상황이다.
당령의 손이 움직인 걸 보지도 못했거늘,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수십 개나 달려드는 통에 기겁할 수밖에.
막고 피하기 바빠 진형을 이룰 수도 없다.
“흥, 덩치보다는 좀 낫군.”
처음에 맥없이 나자빠진 모정을 가리키나. 당령이 코웃음 치며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퍼펑.
“크윽.”
“컥.”
괴장이 날아가며 노생이 풀썩 주저앉고, 연편을 떨군 왜왜생은 데굴데굴 구르고.
“두 개.”
당령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분간하기 전에 홍생과 서생이 전력으로 병기를 휘둘러야 했다.
휘릭.
어느새 바로 앞에 다가든 당령, 움직임은 번갯불 같고, 그 팔은 갑자기 여덟 개로 늘어난 듯.
새파란 예기가 거침없이 판관필과 섭선을 노리고 쏘아 든다.
타탕, 찌직.
혈도를 노리는 판관필도 끝이 뾰족하지만, 불똥이 몇 개 튀기 전에 홍생이 고꾸라졌고.
섭선이 우산만큼 크게 면을 넓혔는데도 종이로 폭우를 막는 꼴. 갈기갈기 찢기는 섭선을 쥔 채로 서생이 나뒹굴었다.
비명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쓰러진 사생.
당령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무대 중앙을 바라보며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너희가 두 개씩 챙겼구나. 황봉침은 다 회수했고. 호접표는 네가 지녔느냐?”
오른손을 들어 무대 위의 삼화검을 가리켰다.
목숨 값이니 뭐니 살벌한 소리를 한 보람도 없이, 사생이 제대로 공격도 하지 못하고 전부 거꾸러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당령은 싸움이 시작되자 눈에 보이지도 않게 움직였고, 무슨 수법을 썼는지조차 알아볼 길이 없었다.
엄청난 능력이다.
오색 휘장의 펄럭임이 가라앉는 가운데.
삼화검이 손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하, 양귀비, 아니 당 공자는 암기가 문제가 아니라 시전 하는 화후(火候)가 형편없었던 거로구먼. 더구나 경공조차 허술했으니. 쯧쯧, 당가의 철부지 막내가 아니라 당오매를 끌어들였어야 했나. 아니지, 그랬다간 배역을 어떻게 배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또. 서시와 왕소군이 위험했겠어. 호호호, 의향이 있으신가?”
사정 중의 모정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했고, 사생이 함께 나섰는데도 순식간에 패했거늘.
삼화검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양.
바로 정면에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당령보다 무대 양쪽을 번갈아 보며 웃었고.
기다렸다는 듯 서시와 왕소군이 휘장 속에서 뛰어 내려왔다.
청의의 서시와 홍의의 왕소군. 왕소군이 먼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내가 먼저요.”
서시의 병색과 왕소군의 처연함은 단지 분장으로 만든 표정일 뿐. 왕소군의 서늘한 음성에 서시가 미간을 움찔했으나 별달리 입을 열지 않는다.
연극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규칙. 첫 비무에서 양귀비가 그걸 어겼지만, 자신이 이겼기에 따로 따지지 않았었다. 지금도 같은 제의를 받고 동시에 나왔으면서 선수를 치려고 말을 꺼낸 왕소군.
어차피 양귀비와 일전을 벌였던 서시로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왕소군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당령에게 달려들었다.
사사사.
얼핏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잔뜩 웅크린 자세가 좌우로 흔들려 어디를 노리는지.
머리에 둘러쓴 홍사건(紅絲巾)과 전신에 걸친 홍의가 크게 펄럭여 마치 붉은 물감이 뿌려진 것 같다.
당령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지고.
두 손을 가슴팍에 올린 채 어깨를 살짝 올리는 순간,
핏.
섬광이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무서운 살기가 소름 끼치게 퍼지며 당령의 허리를 베어가고, 그 섬광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줄기의 섬광이 공중에서 뚝 떨어진다.
그저 좌우로 흔들리며 달려든 왕소군인데, 대체 어디서 섬광이 튀어나왔고, 종횡으로 겹쳐진단 말인가.
당령의 전신이 일순 흐려지더니,
찌익.
잘려나간 소맷자락이 나풀거리는 가운데 사 척이나 떨어진 곳에 나타난 당령, 훤하게 드러난 팔뚝보다 중심이 흐트러진 자세가 크게 비틀거린다. 놀라운 신법으로 빠져나오긴 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당황한 손이 급히 주머니를 더듬지만.
붉은 물감은 이번에도 눈앞을 어지럽히며 다가들고, 살기가 아예 소리를 내며 밀려온다.
쓰쓰쓰.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듯한 저 소리 끝에 폭죽처럼 터질 섬광.
중심이 무너진 당령이 다시 신법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파팟.
섬광이 더욱 무섭게 터지는데.
“멈춰라!”
호통과 함께 무거운 경력이 날아들고, 동시에 당령의 바로 앞에 뿌연 황진이 회오리치며 일어섰다.
펑!
챙.
땅이 움푹 파여 흙더미가 날릴 정도의 충격. 그 바람에 당령 앞의 황진이 섬광을 막으며 낸 쇳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왕소군의 홍의가 미친 듯이 휘돌며 무대 앞까지 되밀려가고,
당령의 좌우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괜찮으냐, 오매? 그런데, 흠.”
오른쪽의 사내. 딱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구, 굵은 눈썹에 각진 얼굴이 그야말로 호한(好漢)이라 할 생김새의 사내가 당령의 안위를 묻다가 옆에 나타난 두 사람 때문에 말을 멈추었다.
“아, 황보(皇甫) 대가. 그게.”
당령 역시 마찬가지.
흑의 경장에 평범해 보이는 청년, 검은 피풍에 붉은 머리띠를 한 깜찍한 소녀. 난생처음 보는 사람 둘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령은 자신을 쪼개려던 섬광이 무엇에 막혔는지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황보 대가의 주먹이 아니라, 전면에 회오리쳐 일어난 기운.
검기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