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87화 (88/410)

제22장 구란와자(勾欄瓦子) (3)

“호오. 꽤 하잖아. 저 시커먼 기운.”

연극을 처음 본다는 설렘보다야 비무를 관전하는 즐거움이 더한 소녀.

소름이 끼치던 불쾌함은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흥미진진하게 무대 위의 싸움을 구경하는 증명단의 감탄에.

“시작할 때에는 장으로 썼지만 본래 권법이었군. 저렇게 무거운 경력을 두른 권법이라면…….”

해원기가 기억을 더듬자, 증명단의 호기심 어린 눈이 냉큼 다가왔다.

오라버니.

산서의 민간에서 전설로 여겨지는 검왕이라지만, 만검지존이니 백협표상 같은 말은 들어도 무슨 뜻인지.

그것보다는 완전한 복룡검식을 전해준 데다 오는 내내 무공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었잖아.

사부보다 더 많이 아는 오라버니다.

“진주언가(晉州彦家)의 천왕권(天王拳) 같구나.”

과연 답을 주긴 하는데.

듣자마자 증명단의 눈썹이 이상하게 누웠다.

“에? 진주면 우리 산서 땅. 언가의 천왕권이란 게 있다고?”

대첨산 호중객잔에 있다가 항산에 올라간 증명단이다. 소위 고향 얘긴데 전혀 모를 얘기라니.

진주는 산서에서 주로 태원(太原)을 가리킬 때 쓰는 옛 지명.

태원에도 몇 차례 왕래한 경험이 있지만, 언(彦)이라는 성을 쓰는 집안은 들어본 적도 없다.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었다.

당연한 일.

“백여 년 전에 멸문이 되었다지. 그 집안의 권법이 세상에 흩어져 당금에는 아무나 익히는 평범한 재주로 변했지만. 저 시커먼 기운이 탁탑경(托塔勁)이 맞으면 진짜 천왕권이 백여 년 만에 나타난 거고.”

“탁탑경?”

이 또한 처음 듣는 공부.

“그래. 검에도 상승검법(上乘劍法)이 있듯이 권장에도 상승의 요결을 갖춘 것들이 있단다. 초식이 내공의 바탕과 긴밀하게 연관된. 탁탑천왕의 권은 기초를 익히는 순간부터 맨손으로 병기와 부딪치는 걸 꺼리지 않게 하지. 소단의 복룡검이 성형검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궁금해 하는 학생이 있으면 가르치는 데 열의가 생기는 법.

해원기가 차근차근 자신이 아는 바를 일러주고,

“그럼 양귀비의 암기를 퉁겨낸 힘이 저 시커먼 기운, 즉 탁탑경이란 거네?”

“맞았다. 물론 탁탑경이라고 해서 모든 병기에 상하지 않는, 이른바 도검불입(刀劍不入)의 능력은 아니야. 암기라도 충분한 공력을 갖추면 탁탑경을 뚫을 수 있지.”

“흠, 양귀비의 공부가 부족했구나.”

증명단이 제꺽제꺽 반응하는 게 흥을 돋운다.

해원기가 가만히 머리를 저었다.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구나. 암기를 쓰는 이는 대개 경공에 주력하기 마련, 빠른 신수로 상대의 빈틈을 찾아 예상 밖의 공격을 펼치는 게 특징이니까. 당장 정면에서 천왕권의 탁탑경에 밀렸다고 하수로 평가해선 곤란하지.”

“아, 저 무대. 아무리 널찍해도 제한된 공간이라서 양귀비에겐 불리하네. 좀 더 넓은 장소였다면 싸움을 끌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가는 밤이 새도록 승부가 나지 않을 수도 있겠네. 히힛.”

가녀린 서시는 발을 쿵쿵 울리며 무거운 주먹질, 풍만한 양귀비는 메뚜기처럼 피해 다니며 암기를 쏘아대면.

상상한 장면이 우스워 키득거리는 건 영락없는 말괄량이다.

증명단이 뭘 연상했는지 짐작한 해원기도 피식거리면서, 다시 한 가지를 더 가르쳐주고 싶어졌다.

“검법과 권법만이 아니라 신법도 마찬가지. 상승의 경공은 그 자체로 대단한 힘을 지닌단다. 만약 저 양귀비가 부동지경(不動之境)까지 경공을 터득했다면 탁탑천왕의 권도 소용이 없었을 게다.”

증명단의 키득거리던 입술이 비틀어진다.

좀 알만하면 곧장 모르는 얘기가 나오잖아.

잘 알아들으면 칭찬이라도 해주든가. 이해하고 따라가면 또 저만큼 앞서서 어려운 소릴 해대니 슬쩍 심통이 난다.

그래도 궁금하긴 해서.

“부동지경?”

어쩔 수 없이 물으면 대답이 또 와르르.

“경공을 그저 빠른 거로만 따지면 안 된다. 쾌(快)는 수많은 경공의 요결 중 하나에 불과하지. 신(迅)이나 질(迭), 그리고 표(飄)와 산(散), 부침(浮沈)과 이합(離合)까지 참으로 배울 게 무궁무진. 이를 두루 깨닫고 정진한 후에야 비로소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은 듯한 부동지경에 이를 수 있다. 상대와의 간격을 자기 뜻대로 하는.”

“아휴, 그걸 다 언제 배워요. 그 부동지경인가 하는 경공이 있기나 하나?”

이럴 줄 알았지.

고구마 대장이 일단 입을 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뭐가 이리 복잡하담.

해원기가 웃는 얼굴을 무대 쪽으로 돌렸다.

이 막돼먹은 말괄량이가 공부에 지칠 때가 되었다. 해원기도 슬슬 증명단의 성격이 어떤지 파악해서.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은 경공으로 국한하기 어렵지만 가장 대표적인 부동지경이고, 또 암향표(暗香飄)나 십삼요경공(十三搖輕功), 취팔선(醉八仙) 등도 대성하면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반면에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전궁유향(電穹遺響)은 극동(極動)으로 부동지경을 뛰어넘는…….”

대강 마무리를 지으려다가 말이 흐려진다.

선생 노릇에 강의를 이런 식으로 끝낼 리 없건만.

증명단이 의아해서 해원기의 시선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

무대 앞. 광기로 떠들어대는 군중이 몰린 무대 앞의 한쪽이 뭐에 밀린 것처럼 한꺼번에 흩어지고 있었다.

“앗, 따가워!”

“으익. 벌이, 이 밤중에?”

“뭐야, 뭐야?”

“아야, 아이고.”

처음에는 몇 명이 쏘여서 펄쩍 뛰었고, 나중에는 수십 명이 질겁하며 피하는 통에.

무대 오른쪽이 확 트여서 불쑥 나타난 한 사람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깨끗한 백의를 깔끔하게 걸친 날씬한 청년. 사방건(四方巾)을 이마에다 흰 천으로 질끈 묶었고, 넓은 허리띠에 양쪽으로 커다란 주머니를 두 개 걸었다. 손에는 흰 장갑, 발에도 흰 백단화(白緞靴). 온통 흰색의 차림새지만, 그보다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준미(俊美)한 생김새에 눈길이 먼저 쏠린다.

선이 가늘긴 해도 선명한 이목구비, 반짝거리는 눈과 붉은 입술에다 피부는 또 얼마나 하얀지. 무대 위에 사대미녀라고 나온 넷의 분장이 무색할 용모.

군중이 법석을 떨며 멀어지는 건 본 척도 하지 않고.

매섭게 날을 세운 얼굴이 무대를 노려본다.

“소규(小珪)! 어서 나오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입에서 나온 건 여자의 높은 교갈(嬌喝).

사람들이 비로소 깨달았다. 이렇게 준미한 청년, 남장여자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누굴 찾는 걸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할 때, 남장여자에 가장 가까운 모정이 저벅거리며 나섰다.

모정은 본래 체구가 가장 큰 배역, 관을 쓴 아래에는 검은색으로 잔뜩 찡그린 눈매를 그리고 또 상반신을 덮는 거대한 수염을 붙였으며, 가슴과 어깨가 뒤집어쓴 황포 아래에 과장되게 부풀어 올라서.

남장여자의 두 배나 커 보인다.

“어이, 여기서 소란을 부리면 안 되지. 이러면 본 와자(瓦子)의 영업에…….”

“이건 뭐야. 와자? 그래, 하남에선 극단을 와자라고 한다지. 그런데 어째 연극은 하지 않고 비무로 경매를 하느냐? 그것도 이 시각에 이런 곳에서.”

덩치가 크니 마주하면 대부분 위축되는데.

남장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도리어 꾸짖어대니.

“허, 감히 본 신(神)에게…….”

“신? 흐흥, 종규(鍾馗)로 분장한 거야? 종규면 귀신을 쫓아야지 기껏 문지기나 하고. 한심하군. 넌, 꺼져!”

전설에 나오는 종규로 분한 모정. 노란 술이 길게 달린 검이 절그럭거린다.

어이가 없다가 화가 났다.

조그만 계집이 대뜸 아랫것 부리듯 지껄이는 소릴 가만히 듣고만 있겠나.

정정, 부정, 무정, 모정은 전부 기괴한 화장에 위압적인 모습들. 본래 극단에 야료를 부리는 건달패를 내쫓는 문지기 역할도 그들 담당이다.

아무리 오늘 저녁에 돈을 갖다 바칠 귀한 손님이라도 참을 수 없을 터.

“이 계집. 컥!”

그러나 모정은 욕하며 검을 뽑을 틈도 없었다.

한 소리 신음과 함께 커다란 체구가 무색하게 벌렁 나자빠지고,

남장여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성큼 나서며 무대 휘장을 잡으려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남장여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는데.

“소규, 너, 안 나와? 기어이 목덜미가 잡혀야…….”

뾰족한 목소리가 더 높아지지만, 이번에는 남장여자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쉬익.

경쾌한 바람 한 줄기가 빠르게 팔을 후려치는 통에.

남장여자가 머리를 까딱했다.

찌익.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오색 천 한 조각. 남장여자가 그제야 팔을 거두며 또 코웃음을 쳤다.

“흥, 꼬맹이는 채찍이냐? 웃기는군.”

무대 오른쪽 끝의 탁자는 왜왜생 담당. 모정이 나자빠지자 왜왜생이 탁자에 붙어선 채로 손을 쓴 건데.

막 긴 채찍을 소매 속에 감추던 왜왜생의 어린아이 화장이 와락 굳어졌다.

분명히 채찍이 남장여자의 팔을 후려쳤건만, 채찍을 회수한 후에야 남장여자가 팔을 거두었건만.

찢겨 날아간 건 엉뚱하게 휘장. 마치 채찍이 남장여자의 팔을 그냥 통과한 것 같다.

“어린아이 차림새면 왜왜생일 터. 고작해야 마편(馬鞭)이나 들고 놀 주제에 연편(軟鞭)에다 날붙이까지 붙였더구나. 수상하다 했지만, 은근히 흉악한 놈들이로군.”

경악으로 얼굴 근육이 떨려서 왜왜생의 붉게 칠한 볼 화장이 후두두 떨어진다.

자신의 연편. 펼치고 거두는 걸 여간해선 볼 수 없거늘. 끝에 조그만 날을 몇 개나 붙인 비밀까지. 언제 확인했더란 말이냐.

“도대체 이런 귀신놀음에 왜 끼어든 거냐? 당장 기어 나와.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는지. 으휴.”

모정을 제외한 나머지 삼정이 모여들고, 각기 탁자를 책임진 사생의 시선이 매섭게 향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탄식을 더하는 남장여자.

이 괴상한 극단 무리를 눈에 두지도 않는다.

“아아, 잠깐만, 잠깐만. 이게 무슨 소란일까요오오오. 구란와자가 막을 연 이래로 처음 겪는 일이라. 아휴우우우, 어쩌면 좋을지.”

예의 희한한 음성과 함께 무대 가운데 삼화검이 툭 튀어나왔다.

역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이 불현듯.

막 퇴장하려던 가녀린 서시도 어정쩡하게 구석에서 남장여자를 바라본다.

하는 말마다 꼬리를 길게 늘이는 삼화검의 버릇.

우스개를 맡은 축의 배역이라는 걸 강조하는 뜻이겠으나 이 호들갑도 도가 지나치다.

“에, 방금 귀비 역을 하던 배우의 가족이신가요오오? 그래도 너무 하시네. 배우가 아무리 천한 일이라고 해도 다들 천명으로 삼은 업이거늘. 자기 스스로 극단에 들어온 걸 가지고 난리를 치시면 곤란해요오오. 자, 자, 여기에, 여기에 미리 약정한 빙문(憑文)이 있잖아요오오.”

소매에서 꺼내어 펄럭대는 종이들.

하나로 묶은 네 장에 모두 선명하게 수결(手決)이 찍혔다.

사대미녀가 전부 구란와자와 계약을 했다는 증서. 소란을 피우는 남장여자에게 억울하다고 내미는 증거인데.

남장여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축이라고 웃길 셈이냐? 이따위를 어찌 연극이라 부를까. 네놈들이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이는지 내 알 바 아니다만, 내 동생 찾으려고 먼 길 고생해서 왔거든. 까불지 말고 비켜라. 동생만 찾으면 조용히 떠나주지.”

“아휴, 아휴.”

꺼냈던 증서를 도로 넣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는 삼화검의 동작이 부산스럽다가.

남장여자의 마지막 말에 우뚝 멈췄다.

“그 말. 그대로 믿어볼까요오?”

지그시 쳐다보는 눈길에 남장여자가 입을 닫고 마주 볼뿐. 두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띠에 매달은 양쪽의 주머니에 얹히고.

삼화검이 바쁘게 눈을 굴리다가 히죽 웃었다.

“뭐, 그래만 주시면 저희는 불만이 없습니다. 서로 간의 불필요한 오해나 소란은 본 와자의 영업에 방해만 되니까요. 마침 그쪽 동생 분은 줄거리 상 더는 등장할 일이 없죠. 그럼 요 무대 뒤로 오셔서.”

“한 가지 더.”

희한한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온 건 조속히 타협을 보기 위해서일 터.

남장여자는 개의치 않고 듣기만 하다가 삼화검이 청하는 시늉을 하자 불쑥 입을 열었다.

삼화검의 손이 멈칫.

“튕겨 나간 황봉침(黃蜂針)이 여섯, 던지지도 못하고 떨어뜨린 호접표(蝴蝶鏢)가 둘. 너희가 주운 건 다 돌려줘.”

남장여자의 목소리가 낮아졌고.

이번엔 삼화검이 목청을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호, 이런, 이런. 놀라운 안목에 빼어난 신수. 감탄했습니다. 호호호.”

확 뒤집힌 음성에 징그러운 웃음소리.

어울리지 않게 대소를 터뜨리더니 청하던 손을 거두어 가볍게 예를 취했다.

“대체 이렇게 당찬 아가씨는 당문(唐門)의 누굴까?”

더는 말꼬리를 늘이지도, 억지로 우스개를 하지도 않는다.

묘하게 뒤집힌 음성 그대로, 차분히 묻는 얼굴은 요란한 화장 속에서도 차가운 기운을 품고.

남장여자가 답례도 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당가(唐家)의 다섯째, 당령(唐玲)이다. 너희 구란와자를 찾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지.”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 이 삼화검은 벌써 알고 있었다.

그걸 미리 짐작했던 남장여자, 당령이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밝히자.

화르륵.

주위에 피운 화톳불이 크게 흔들렸다.

초선과 왕소군의 두 번째 시합은 아예 시작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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