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구란와자(勾欄瓦子) (2)
와아아아.
“여기, 여기 백 냥!”
“폐월과 수화에 이백 냥씩이야!”
“사대미녀 전부, 각각 오백 냥씩 주! 먼저 주부터!”
“비켜, 비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시끄럽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소란스럽다.
탁자마다 몰려든 사람들, 깔끔하게 차려입은 귀공자도, 온갖 장신구로 멋을 부린 귀부인도, 지긋한 나이에 의젓한 영감님도,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도 모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탁자마다 돈을 올려놓는다.
해원기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고, 증명단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
조금 전까지 봄을 즐기려 등롱을 들고 한가히 밤길을 걷던 이들. 서로 얘기를 나누고 함께 웃으며 맛난 간식까지 챙기던 사람들이 맞나.
그 행복해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광란.
아니, 행복해했던 건 이 광란을 기대해서였던가.
증명단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옴츠렸다. 항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어깨에 걸친 북룡포 덕에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고, 개봉에 와서는 되레 약간 더울 날씨가 되었건만.
사람들이 이렇게 속에 감추었던 욕망을 드러내는 광경에.
소름이 끼쳤다.
“오, 오라버니. 그만 가요.”
더 보기 싫어서 떠나고 싶은데.
해원기가 증명단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머리를 저었다.
“이상하다. 이런 식의 연극무대는 들어본 적도 없고. 지금 사람들이 하는 짓은 바로 도박장에서의 행동. 그것도 아주 판돈이 큰 경우에나 볼 법한 광경이란다. 이 밤중에, 이런 야외에서 도박이라. 무슨 짓을 벌이는 걸까? 더구나.”
말을 잠시 멈추고 시선이 향하는 곳은 네 개의 탁자.
화려한 분장을 하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줄 세우는 사정과 각기 조그만 장부를 든 채 금액을 적느라 바쁜 사생.
“그냥 배우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로소 증명단도 정신을 차렸다.
한밤중에 야외에서 사람들이 미친 듯 소란을 떠는 이 상황. 처음 보는 연극무대에 대한 호기심이 이상하게 비틀어질 만큼 흉한 장면이었지만.
그게 연극이 아니라 도박판이라.
“그럼 무림인?”
다른 호기심이 다시 일어났다.
세상에 나가면 별별 희한한 일을 보게 될 거라더니. 무림인이 배우로 꾸민 이유는 뭘까.
당당당당.
어느 정도 소란이 정리되었나.
이번에는 종(鍾)을 빠르게 치는 소리가 높이 울리면서. 지붕까지 덮인 오색 휘장의 전면이 열린다.
봄바람에 주위에 피운 화톳불이 가볍게 일렁이는 가운데,
활짝 열린 무대, 네 명이 종소리를 따라 아장아장 등장하고.
그새 돈주머니가 잔뜩 쌓인 네 개의 탁자에 맞춰 무대 끝까지 나와 서니.
전부 복사꽃처럼 고운 화장을 마친 아름다운 여인.
청의를 걸치고 고개를 조금 숙인 날씬한 몸매, 홍의를 날리며 망연한 표정을 지은 자태,
백의를 단정히 여민 채 하늘을 우러른 자세, 풍성한 황의를 흔들면서 나른하게 쳐다보는 자세.
따앙.
반주가 돌연 끊기면서 네 미녀가 만든 것처럼 굳어졌다. 연극에서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정태(靜態).
와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함성이 해일처럼 일어나고.
“서시완사(西施浣紗)다, 서시완사.”
“무슨 소리. 소군출새(昭君出塞)야!”
“역시 초선. 초선배월(貂蟬拜月)이 최고다아아.”
“푸하하, 귀비취주(貴妃醉酒), 오늘은 양귀비라고.”
각각 자신이 정한 대상을 응원하는 외침이 왁자하다.
여전히 무대 중앙에 선 삼화검이 두 손을 흔들어 진정시키는 시늉,
“자, 자아. 벌써 이리 소리를 내시면 나중에는 어찌 감당하시려고오오. 오늘의 극목은 보시는 대로 사대미녀, 시냇가에서 빨래하면 물고기가 다 깊이 숨는다는 서시, 변방으로 떠나며 한숨지으면 기러기가 떨어진다는 왕소군, 달을 바라보면 달이 구름으로 얼굴을 가린다는 초선, 그리고 꽃구경에 꽃잎이 부끄러워 말려버린다는 양귀비올시다아아아.”
“아, 되었다고.”
“설명 따위 필요없어어!”
“추첨, 추첨부터 해!”
“추첨, 추첨.”
군중이 진정하기는커녕 이젠 아예 한목소리로 추첨을 외친다.
삼화검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맺혔다. 군중을 흥분시키는 방법을 잘 아는 자다.
무대에 바짝 붙어 소리를 질러대는 군중, 탁자마다 그득하게 쌓인 돈.
이쯤에서 속도를 조금 높이는 게 좋다.
삼화검이 대뜸 소매에서 두 개의 나뭇조각을 꺼내 쥐었다.
“하아앗. 첫 번째 시합은 서시와 양귀비로군요오오오. 자아, 기대하시라아아아아아아.”
언제 추첨을 했는지, 또 그 나뭇조각에 무슨 표시가 있는지.
그런 세세한 부분을 따질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삼화검이 목청을 길게 늘이면서 미끄러지듯 무대 뒤쪽으로 밀려가는 희한한 모습도 신기하게 여길 틈이 없다.
와아아아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
왕소군과 초선이 무대의 좌우로 슬쩍 빠지자, 서시와 양귀비가 자세를 풀고 서로 마주 본다.
꽤 넓은 무대이긴 해도 그저 기둥에 휘장만 덮어놓은 형태인데.
삼화검과 두 미녀는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가녀린 서시가 쌍장을 들자,
우웅.
돌연 시커먼 기운이 손바닥에서 구름처럼 퍼져나가고.
풍만한 양귀비가 풍성한 황의를 여미자,
스스스.
예리한 기세가 종잡을 수 없이 뿜어진다.
“저게 사대미녀에요?”
“음. 저 삼화검이 설명한 대로지. 전국시대의 서시, 한나라의 왕소군, 삼국시대의 초선, 그리고 당나라의 양귀비. 서시는 가슴 병을 앓아 파리한 병색에 가련한 처지, 왕소군은 흉노에게 팔려가며 고향을 등지는 애수, 초선은 미모로 맹장들을 농락할 의지, 양귀비는 황제조차 그 치마폭에 휘감는 매혹이라고 들었다. 각기 역사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미인들이고 연극에 자주 인용되는 배역이다만.”
이미 연극 구경이 아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고.
“흥, 꽤 어울리는 여자들을 골랐네. 딱히 미녀라고 보이진 않지만.”
아무리 환하게 밝혔다고 해도 어차피 야외의 화톳불.
빛이 계속 일렁거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연극배우의 분장이란 게 본래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법. 게다가 금빛 기둥에 은빛 밧줄, 오색 휘장까지 뒤엉킨 무대라.
그런데도 증명단은 꽤 유심히 사대미녀라는 배우들을 살폈던 듯.
딱히 소녀의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해원기 역시 눈을 가늘게 뜨며 무대에 남은 서시와 양귀비를 보았다.
“그래. 가녀리고 넉넉한 체형은 얼추 맞추었다만. 흐음.”
막 기세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두 미녀.
증명단이 눈썹을 곧추세웠다.
“가녀리다더니 저 무거운 장력, 넉넉한 주제에 품에는 송곳을 품었나. 거꾸로잖아요.”
굳이 대답을 기다리는 말이 아니라서.
해원기가 말없이 무대 위에 집중했다.
가늘게 뜬 눈에 은근히 비췻빛이 맺힌다.
증명단 앞이라 미녀를 표현하는 단어에 주의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체형’이란 말을 했던 건 아니다.
서시의 가녀린 체구, 양귀비의 풍만한 몸매. 보통 그렇게 얘기들 한다. 그러나 지금 무대에 남은 두 사람에겐 조금 다른 느낌.
첫 번째 시합이라고 했다.
사대미녀란 극목은 처음 듣고, 추첨으로 둘씩 나누어 겨룬다면.
이건 연극이 아니라 비무(比武)요, 눈앞에 설치된 무대는 무대가 아니라 뇌대(擂臺)일 터.
서시가 먼저 움직인다.
둥.
내딛는 발이 반주 대신에 무대 전체를 무겁게 울리고, 시커먼 기운이 곧장 양귀비의 전면을 찍어 눌렀다.
무겁고 강한 힘. 도저히 가녀린 체구에서 시작된 공격이라 여기기 어려운데.
양귀비는 미리 알았던 것처럼, 무대가 울리자마자 옆으로 미끄러졌다.
배역에 맞춘 차림새, 귀비(貴妃)답게 화려한 복장에 너울거리는 경사를 휘감았고, 그 옷자락이 빠르게 흔들리면서 무수한 섬광이 공간을 가른다.
파팟.
수십 개의 작은 암기.
아무리 넓다 해도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불빛으로 휘황하게 일렁이는 시야. 어떤 암기인지 몇 개나 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서시 또한 일장을 쳐낼 때 반격을 예상한 듯.
남은 한 손을 크게 휘둘러 시커먼 기운을 뿌려댔다. 진짜 구름처럼 퍼지는 기운.
타타타타.
섬광이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가고, 서시가 또 성큼 앞으로 나섰다.
암기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
서시의 한 수에 모조리 퉁겨진 암기 중에는 무대 밖으로 향한 것들도 있을 터. 광기에 젖어 무대에 바짝 몰린 군중들에겐 위험할 텐데.
네 개의 탁자를 지키는 사생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서 제각각 손을 가볍게 흔들고.
군중에게 떨어지려던 암기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둥.
무대가 또 울리고 서시가 힘차게 내지르는 손을 따라 검은 구름이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아예 피할 공간을 주지 않으려고 넓게 퍼져가는 장력.
양귀비가 피식 웃더니 두 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옷감을 걷듯 안으로 말리는 두 손, 겉에 걸친 경사와 넓은 소매가 마구 휘감기면서 전면에 장벽처럼 뭉치고.
펑!
화르르르르.
폭음과 함께 정면으로 마주친 경력, 오색 휘장이 미친 듯이 휘날린다.
못 박힌 듯 꼿꼿하게 선 서시와 달리 움찔거리며 조금 물러난 양귀비의 경사는 가루가 되었고 소매도 너덜너덜. 우열이 보이는데.
와하하하.
당연히 터질 줄 알았던 함성 대신에 웃음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장난하냐? 노닥거릴 셈이야?”
“이따위 보려면 장터에 가겠다. 뭐 하는 거야!”
“둘이 사귀어라, 사귀어. 놀고 있네. 퉤엣.”
“빨랑 죽여어어!”
도리어 연달아 이어지는 비난과 조롱.
이제까지 보였던 함성과 환호와는 딴판이다. 여차하면 가져온 간식거리나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까지 던질 기세라.
장내를 정리하던 사정이 인상을 쓰며 무대 쪽을 돌아보았고.
서시와 양귀비의 눈에도 차가운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광기에 더해진 살기.
이젠 화려한 무대도, 휘황한 불빛도 전부 끈적거리는 것처럼 불쾌하다.
양귀비가 붉게 칠한 뺨을 씰룩거리며 머리에 꽂은 장식 두 개를 손에 쥐었다.
나비. 움직일 때마다 날개를 파르르 떨게 만든 머리 장식이지만, 양귀비의 손에 들린 건 진짜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교한 모양. 그리고 살아있는 것처럼 날개를 하늘거린다.
“쳇, 이걸 쓸 줄은…….”
우우웅.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당장 서시의 두 손에 어린 시커먼 기운에 묻혔다.
가녀린 몸매와 어울리지 않게 두 다리를 벌려 구부린 자세. 미녀가 취할 리 없는 자세에다 말아 쥐는 두 주먹이 차츰 커 보이더니.
두 주먹이 거침없이 뻗었다.
구름이 번개로 화해 벼락같이 양귀비를 무찌른다.
피릿, 피릿.
양귀비가 다급히 두 손을 떨쳐 나비를 날리지만, 나비가 생명을 얻어 날아오르기도 전에 번갯불이 두 번이나 가슴을 때리고.
퍼펑!
“우웨엑.”
한 사발이나 토한 핏줄기가 공중에 뿌려지는 순간,
비명을 지른 양귀비의 모습이 감쪽같이 휘장에 가려져 사라져버렸다.
와아아아.
기대했던 함성. 그러나 기뻐하는 군중의 수는 훨씬 줄었고, 욕설과 탄식 또한 어지럽게 뒤섞인다.
서시에 걸은 자들은 승리, 양귀비에 걸었던 자들은 돈을 잃었으니까.
도박판의 생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