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85화 (86/410)

제22장 구란와자(勾欄瓦子) (1)

“오라버니는 기루를 잘 알데? 히힛.”

여전히 묘한 웃음을 달고 쳐다보는 증명단 때문에 해원기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서문을 나선 이래로 밤이 깊어가는 데도 관도에 사람이 줄지 않아 계속 걷는 중. 다들 손에 등롱 하나씩은 들어서 그리 어둡지도 않다.

“개봉에선 청명이 명절과 다를 바 없구나. 해시(亥時) 끝 무렵에도 이렇게 사람이 오갈 줄이야.”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기루 얘기나 할 수야 없잖나.

증명단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하지만 때가 때니만큼 성으로 가는 사람들보다는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호,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늦은 시각에 성 밖으로 사람이 몰리는 게 그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일까.

성문을 활짝 열어둔 것도 특이하고, 사람들의 즐거운 분위기도 뭔가 기대하는 듯하다.

증명단으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 이제 곧 야반삼경(夜半三更)이거늘 개봉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는가.

확실히 평범치 않다.

해원기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판이었다.

명절 같은 청명에 답청으로 성의 번화가를 구경하는 건 사리에 맞는다. 성 밖 마을에서는 이런 때가 되어야 한 번쯤 나들이를 할 테니까. 간만에 외출이라고 깨끗이 씻고, 좋은 옷 입고.

그래도 성안 사람들과는 차이가 나기 마련. 게다가 다음날을 생각하면 서둘러 돌아가 쉬어야 한다.

청명이 되었다는 건 농가에 있어서 이제 바빠진다는 의미.

성안의 부귀한 집안처럼 늦도록 놀 수는 없거늘.

해원기처럼 서문을 나서는 사람들이 더 많고, 대부분이 화려한 차림새에 먹을 것까지 손에 가득 들고 있다.

놀러 가는 것처럼.

답청도 끝날 시각, 성 밖으로 놀러 간다?

기묘하다.

마침 맞은편에서 빠르게 다가오던 중년인. 해원기가 얼른 예를 취하며 물었다.

“저, 말씀 좀.”

“뭐요?”

허름한 차림에 무거운 등짐. 잰걸음이 세워져서 퉁명스럽게 대한다.

“개봉을 막 떠나는 참인데, 이 사람들 다 어디 갑니까? 이 늦은 시간에.”

“그거야, 방자(梆子)에 가는 거지. 한가한 작자들이.”

“방자라.”

“흥, 외지 사람이구먼. 희대(戱臺) 말이요, 희대. 여기선 방자라고 해. 궁금하면 따라가 보쇼. 돈푼깨나 들겠지만.”

“돈이 든다면.”

“아, 바쁘니까 가겠소.”

귀찮은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냥 떠나니 더 붙잡을 수 없다.

불친절한 대답에 인상을 쓰려던 증명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자? 희대? 그거 연극을 한다는 말 아니에요? 희한한 사투리네.”

방자는 딱따기. 사람을 불러 모으거나 야밤에 불조심을 외치는 야경꾼들이 쓰는 물건이다. 그걸 희대, 즉 연극무대라는 뜻으로 쓰는 건 하남 사투리지만.

해원기는 중년인의 말투에 주의했다.

“연극이 늦은 저녁때 무대에 오르는 경우는 많아도 지금은 지나치다. 아무리 한가한 사람이라도 밤중에 시끄러운 걸 즐길 리 없지. 그리고 연극은 보러 오는 이들이 많아야 돈을 버는 법, 보통은 번화한 시정에 무대를 두고. 흠.”

얼핏 지나온 서문 쪽을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놀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성문을 떡하니 열어둔 게 정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연극 보러 가는데 돈이 든다는 건.

“연극. 나 그거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하남의 방자는 어떤 걸까? 가봐요, 가봐.”

심상치 않든, 정상이 아니든.

증명단은 그런 것보다 ‘연극’이라는 소리에 눈이 반짝반짝.

제남에서 해원기의 일행이 되고 나서는 전부 신기한 경험을 이어가는 판이다. 개봉에서 기루에 간 것도 처음이요, 이제 연극도 볼 수가 있다니.

호기심과 기대가 뒤섞여 신이 난다.

해원기도 슬그머니 드는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마음에 걸려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수중에 돈은 없지만.

서문을 나서서 반 시진쯤.

그 정도면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산책할 만한 거리다.

개봉의 서문은 정주(鄭州)를 거쳐 낙양(洛陽)까지 이어지는 큰길. 커다란 마차도 달릴 넓게 닦은 관도인데, 반 시진쯤 걷자 사람들이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넓은 관도에서 주변의 마을로 빠지는 작은 길이 나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이 시각에 그 길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터. 그런데도 등롱이 거리낌 없이 죽 이어져 돌아간다.

그 수가 물경 삼사십 개. 마치 금룡(金龍)이 내려와 구불구불 기어가는 것 같다.

등롱 하나에 두세 명이 일행이라고 치면 백여 명. 이렇게 많은 사람이 캄캄한 어둠 속을 제집 찾아가듯 몰려가면서.

웃고 떠들고 희희낙락.

그리고 얼마쯤 걸었을까. 맨 앞이 멈추어서인지 등롱이 한 덩어리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떠들던 소리도 차츰 줄어들어 조용해진다.

행렬의 맨 뒤를 따르던 해원기가 미간을 살짝 모았다.

관도 곁을 빽빽하게 메운 숲을 지나 우묵하게 내려앉은 지형. 사방에 작은 언덕이 빙 둘러 놓인 벌판 한가운데다.

무대가 있다고 믿기 어려운 벌판.

증명단은 뭐가 있는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느라 바쁜데.

화악.

돌연 대낮처럼 밝아지는 시야.

해원기가 눈살을 찌푸리고 증명단이 갑작스럽게 눈이 부셔서 움찔거렸지만.

“우와아!”

“시작이다, 시작이야!”

“구란와자(勾欄瓦子)다! 좋아, 좋아!”

함성이 왁자하게 터지고 환호가 파도처럼 일어난다.

어둠을 밝히며 환하게 무대가 밝혀졌다.

평지에 불쑥 등장한 무대. 열 명이 뛰어다닐 정도의 넓이에 사람 키에 맞춘 높이, 아무리 야외에 얽은 시렁과 난간이라도 이런 규모가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출현하다니.

게다가 기단(基壇)으로 삼은 받침대는 전부 번들거리는 옥돌이요, 금칠한 기둥을 세운 데다가 시렁을 엮은 밧줄은 죄다 은광을 뿜고, 지붕 삼아 덮은 휘장은 오색천을 몇 겹이나 휘감아서.

언제 피웠는지 모를 사방의 화톳불과 횃불을 받아 휘황찬란하다.

무슨 요술을 보는 듯하다.

“엥? 대체 어디서…….”

증명단이 놀란 눈을 홉뜨고서 까치발을 들어 자세히 보려고 애를 쓰는 중에.

뎅!

징 소리가 울리며 무대를 덮은 휘장 사이로 홀연히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아아아.”

말끝을 떨면서 늘리는 이상한 말투지만.

그리 높지 않은 그 목소리가 함성과 환호에 아랑곳없이 해원기의 귀에까지 명확하게 전해진다.

‘공력을 운용한 음성.’

그렇게 파악한 해원기가 눈에 힘을 주었다.

이상한 말투만큼 기특한 외모. 무대에 홀로 나타난 인물은 이미 분장을 마친 상태였다.

높이를 두 배는 과장한 관모(官帽)를 쓰고 눈은 동그랗게, 수염은 돌돌 말린 모양으로, 입술은 툭 튀어나온 듯. 그리고 콧잔등을 중심으로 얼굴 가운데에만 하얗게 분을 발랐다.

홍포(紅袍)에 관대(寬帶)를 둘렀으니 고관대작의 복장, 한 팔엔 흰 수건을 걸쳤고 한 손엔 옥홀(玉笏). 수건과 옥홀도 전부 길다.

지나치게 높은 모자와 과하게 큰 옷을 걸쳐서 체구가 어떤지 알 수 없는 인물.

동그란 눈을 연신 깜박거리면서 수건과 홀을 모아 예를 취한다.

“이렇게 구란와자를 찾아주신 여러 군자와 숙녀들께,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오오오.”

이상한 말투가 이어지면서.

수백 명 군중이 환호를 멈추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배율을 열 배로 올리기로 했답니다요오오오.”

와아아.

다시 터지는 함성.

군중이 아예 등롱을 휘두르며 날뛰는 통에 무대가 더욱 번쩍거린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더구나 압금(押金) 없이 은자 두 냥부터 시작이라니. 절호의 기회랄까요오오오.”

우아아아.

함성에 폭소에. 사람들이 우르르 무대 앞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해원기와 증명단이 공교롭게도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무대 바로 앞에 작은 책상 네 개가 나란히 늘어선 걸 발견했다.

완전 야단법석. 소리를 지르고, 등롱을 흔들고, 손을 휘두르고, 발을 구르고.

이게 연극을 보려는 사람들인가.

증명단이 뜻밖의 광경에 얼떨떨해졌다.

“에, 오라버니. 저 웃기는 분장은 뭐고, 이렇게 웃기지도 않는 사람들은 또 무슨.”

웃기는 분장에 웃을 수도, 웃기지도 않는 군중에게 따질 수도 없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해원기가 무대의 좌우를 살피다가 걸음을 내디뎠다.

“연극에서 우스개를 맡는 역할, 삼화검(三花臉)이란 배역이고, 일반적으로 극단의 주인이 저런 식으로 인사를 나온다만. 어째 연극 같지가 않구나. 가까이 가보자꾸나.”

육 년 동안 백성들 사이에서 지냈다. 하북에선 경사를 중심으로 시정에서 유행하던 연극 무대, 산동과 산서에선 딱히 지방색이 강한 무대가 없어서 하남 쪽의 극단이 오곤 했었기에.

해원기는 몇 차례 희대를 본 적이 있다.

고단한 생활 속에 위안을 주는 오락.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삶이요, 천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사는 이들이었다.

더구나 나름의 전통을 지키고 기예를 닦는 게 또 하나의 강호였고, 그 안에 무술이 당연하게 포함되어 있어서 꽤 흥미를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전혀 다르다.

길에서 중년인이 퉁명스럽게 ‘돈푼’깨나 들 거라고 했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극단 주인은 ‘배율’을 높이고 ‘압금’을 없앤다고.

압금은 보증금. 그리고 은자 두 냥부터. 일반인에게는 대단히 큰 금액이다.

해원기가 천천히 발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희극(戲劇)은 생단정축(生旦淨丑)의 네 가지 배경이 기본이라더구나. 간단히 말하면 생은 남자, 단은 여자, 정은 성격파, 축은 광대지. 지금 나온 삼화검이 바로 축의 대표지만, 무슨 연극인지 극목(劇目)조차 밝히지 않아서. 아주 궁금해졌다.”

낯선 연극무대에 관해서 기본적인 설명을 해주려는 것보다,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의혹을 표했고.

기민한 증명단도 금방 알아들었다.

“아하, 노래에 제목이 있는 것처럼 연극도 극목이 있군요. 하지만 지금 떠드는 건 극목이 아니라,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옳지. 판돈! 골목에서 야바위꾼이 떠드는 것 같잖아요.”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돈. 증명단이 딱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냈다.

연극을 관람하러 온 게 아니라 어디 거창한 도박장에라도 온 듯한 분위기.

이 야밤에, 이 들판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대 앞에 달라붙어 돈을 꺼내 들고 소리치는 모습은 바로 도박에 환장한 자들과 다름없다.

그럼 도박장에 가면 될 일. 이해가 가지 않는데.

증명단이 덧붙여 종알거리는 소리에 해원기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어째 이렇지? 처음 기루에 가서 좋은 노래 듣자마자 난장판이 되더니만, 그다음엔 첫 연극 관람에 야바위라. 영 예감이 좋지 않아.”

예감이 좋지 않다. 동감이다.

관도에서 사람들 뒤를 따라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군중의 환호 속에 다시 그 이상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오늘 극목은 사대미녀(四大美女)! 무대 왼쪽부터 침어(沈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올시다아아아. 주(注)는 사생(四生)이, 척(擲)은 사정(四淨)이 맡아라아아아.”

비로소 밝히는 극목.

둥둥둥둥.

따다다닥.

소고(小鼓)가 울리고 딱따기가 빠르게 이어진다.

흰 수염을 길게 붙인 노생(老生), 붉게 칠한 얼굴에 검은 수염을 붙인 홍생(紅生), 섭선을 들고 유건을 쓴 서생(書生), 머리를 땋고 어린아이 옷을 입은 왜왜생(娃娃生)이 무대 좌측에서 나오고.

커다란 동추(銅錘)를 들고 현란한 분장을 한 정정(正淨), 갑주를 으쓱거리는 부정(副淨), 단창을 든 무정(武淨), 우람한 체구의 모정(毛淨)은 무대 우측에서 걸어 나왔다.

사생과 사정.

해원기가 간단히 설명했던 생단정축에 속하는 배역들이 우르르 나왔으니, 오늘은 극목대로 사단(四旦)만 등장하는 여성 위주의 연극이겠으나.

사대미녀라는 극목은 처음 듣고.

이렇게 분장을 다 마친 배역들이 무대 밖으로 먼저 나오는 예도 없다.

그리고 주척(注擲)은 돈을 미리 이리저리 걸거나 한 군데에 몰아 건다는. 진짜 도박 용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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