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탐춘석춘(探春惜春) (4)
골목.
만화원을 떠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봄날 밤, 변하 강변을 걸었던 즐거움도, 처음 기루에 들러 기막힌 노래를 들었던 감동도 사라졌고.
그저 골목을 따라 서문을 나설 생각뿐. 우울한 기분만큼 걸음도 느리다.
그런데.
열 걸음이나 걸었을까. 뒤에서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무거운 다리가 자연히 멈춘다.
“잠깐, 잠깐만요!”
어린 목소리, 소청이란 불린 아환이 구르듯 세 사람에게 달려와 엎드리는 모습에 다들 엉거주춤.
해원기가 얼른 소청의 소매를 잡아 일으켰다.
“허어, 이게 무슨 짓. 어서 일어나라.”
“혀, 협사님. 이, 이대로 가시면,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해원기의 손을 부여잡고 몸부림까지 치면서.
“이환 아가씨가. 다 뒤집어쓴단. 어, 어떻게 해…으흑, 으흑.”
막무가내로 외치다 울기까지.
어린 여자애를 어찌할 줄 몰라 난감한데, ‘이환 아가씨’란 말에 악송령이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았고, 증명단이 급히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소리야?”
구해줘서 고맙다는 치사를 받을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울며불며 매달릴 줄은.
그것도 소청, 자신이 아니라 노래를 불러준 기녀를 들먹이다니.
소청이 울상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게, 그게. 협사님들이 그냥 가버리시면. 결국은, 그 대공자가, 아휴우, 이걸 어찌해야! 노랑(老娘)은 아무 힘도, 원래 못 믿을…….”
부리나케 뛰어와서 숨이 차나. 말에 두서가 없다.
“천천히. 천천히. 괜찮소, 괜찮아.”
악송령이 평소답지 않게 연신 달래지만, 해본 적도 없는 일이니 그게 어디 쉬울까.
해원기, 악송령, 증명단. 셋이 골목 가운데에서 소청을 둘러싸고 쪼그려 앉아야 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달려와 울먹이는 건가.
노랑, 즉 늙은 어미라고 부르는 만화원의 노파는 단지 기녀들을 거느리는 포주 역할에 불과하고.
진짜 주인은 몇 명이나 되는 개봉의 토호란다. 그리고 그중에 삼보별저 또한 포함되니, 대공자는 그 삼보별저의 큰아들.
오늘 행패를 부린 대공자는 자기 가게에 놀러 온 것과 마찬가지. 물론 다른 주인들도 손님 접대와 향응의 장소로 빈번히 사용하지만, 꽤 점잖은 편이고 계산이나 수고비도 넉넉히 쳐주는 편이다. 어차피 나중에 다 자기들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돈이라서 일지.
그러나 이 대공자라는 자는 언제나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기 일쑤.
만화원에서 대공자에게 시달리지 않은 여자들은 하나도 없을 정도요, 기녀뿐 아니라 아환들에게도 음탕한 짓을 요구하다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손찌검을 해서. 모두가 태세(太歲) 보듯 두려워하며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대공자 마음대로 되지 않은 여자. 그게 바로 이환이었다.
본래 예기(藝妓)로 들어왔다.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고, 노래와 춤이 다 뛰어난 데다, 시문까지 배운 기녀. 양주(揚州)의 교방(敎坊)에서 자라 남경(南京)의 고급 기루에서 꽤 이름을 떨치다가 나이가 들면서 개봉으로 옮겨온 처지.
남경의 고급 기루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터에 개봉의 망나니 하나에 휘둘릴까. 게다가 성격도 대단해서 기어이 심한 병으로 목을 다쳐 목소리를 잃은 척까지 했더란다.
회유와 협박을 일삼던 대공자의 횡포도 그쯤에서 그쳤다. 아무리 그라도 나이든 기녀, 벙어리가 된 바에야 흥미를 잃었겠지.
그렇게 뜨내기손님에게 가끔 연주나 해주며 지내왔건만.
오늘 들통이 난 데다가, 대공자는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흉한 꼴을 다 보인 판.
뒷일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기도 두렵다.
“…그런데도 아가씨는 겁도 나지 않는지, 흑흑, 태연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히잉, 언제나 비수 한 자루를 지녀서, 흐윽, 어떻게 해요오오. 으아앙.”
해원기와 증명단이 번갈아 다독여 겨우 듣게 된 얘기. 소청은 말할수록 더 겁이 나는지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아버렸다.
사연을 알고 나자 해원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루에서 기녀를 두고 다투는 건 흔하디흔한 일.
못난 자들일수록 그런 자리에서 권력이니 무력이니 자랑하는 터라 자주 시비가 붙고 주먹다짐을 한다. 그래도 그게 다 여자 앞에서 잘나 보이려는 심리라, 기녀에게 심한 짓 하는 자는 드물고. 기녀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원한을 품는 좀생이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떠들었다간 더한 조롱을 받을 테니 아예 다른 기루를 찾는 게 낫다.
기녀란 기루의 중요한 재산. 함부로 다루는 자가 있으면 곤란하다. 건달패를 고용하고 흑도를 뒷배로 두는 이유가 다 그런 거잖나.
그래서 큰돈을 내놓고 나왔거늘. 사태는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를 공산이 컸다.
“이 쌍놈의 새끼들잇. 내 당장…”
“안 되지. 내가, 가겠소.”
욕설을 내뱉으며 쌍심지를 세우는 증명단보다.
단호하게 몸을 일으킨 악송령의 목소리가 더 커서 해원기가 조금 놀랐다.
환도가 든 자루를 쥔 손에 힘줄이 선명하게 일어나고,
기루의 장지문 앞에서 느꼈던 살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악형.”
해원기가 따라 일어서며 바로 악송령의 손을 잡았다. 놔뒀다간 그대로 뛰어가 한바탕 피바람이 일 것 같아서.
돌아보는 악송령의 무표정한 얼굴이 바위처럼 단단한데, 입술 끝만 꿈틀거리는 건 분노가 치솟아서겠지.
“거친 수단은 이미 썼고, 자칫하다간 무고한 사람들이 더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음?”
“아니,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목을 베는 게 무슨.”
악송령보다 증명단이 먼저 대들 듯 따지는 게 오히려 다행. 해원기가 인상을 굳힌 채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지금 소청에게 들었지 않니. 만화원의 주인은 개봉의 유지들, 그 가운데 삼보별저도 들어있는데 그 큰아들이 목이 날아가면 그걸로 끝날까?”
“어.”
성질이 급하다고 머리가 나쁜 게 아니다. 증명단이 말이 막혀 눈을 깜빡였고.
산속에만 있어서 과묵하다고 세상 물정이 어떤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악송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달려가 대공자와 그 똘마니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지만. 해원기의 말에 비로소 생각이 돌아간다.
“이건 강호의 분규도, 무림의 상쟁도 아니야. 심지어 강호 무림도 다툼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잖아. 여긴 확실히 왕법이 우선인 곳. 살인사건이 생기면 관이 나서고, 관이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워. 단순히 만화원이 폐쇄되기만 해도,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
살인사건. 죽은 자가 어떤 죄를 지었든 일단 흉수를 잡으려 하겠지. 개봉에서 기침깨나 한다는 토호들이 끼어들면 사건이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더구나 살인사건이 났다는 소문에 기루에 손님이 끊어질 테니, 그런 손해를 본 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만약 관에서 아예 기루 폐쇄를 정하면 기녀나 계집종 따위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송령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해원기가 잡았던 손을 놓아 주저앉은 소청을 부축해 일으켰다.
“소청의 말대로라면 오늘 일을 관에 알리지는 않을 것 같구나. 대공자와 부하들도 다 나으려면 며칠은 걸리겠지. 그럼 문제는.”
“해 대형.”
놓았던 해원기의 손을 악송령이 도로 붙잡는다.
“내가 남겠소. 내가, 이환 소저와 소청을, 지키리다.”
불쑥 길어지는 말.
그보다 조금 전의 차가운 살기 대신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손 때문에.
해원기가 또 놀랐다.
“아니, 악형이 왜…….”
“해 대형과 소단, 약왕당 가야 하오. 여기는 나 혼자면 충분. 괜한 일로 발이 묶이는 건, 싫소.”
손만이 아니다. 해원기를 보는 두 눈과 아직 어눌해도 쉬지 않는 말에서 열기가 전해진다.
일행이 셋으로 줄어 대별산으로 향하는 여정. 딱히 시일을 정해 가야 하는 길은 아니지만, 여유를 부리며 느긋하게 유람을 가는 것도 아니다.
이제야 겨우 해원기가 처음 마음먹었던 단서를 찾는 일로 돌아왔고, 증명단 역시 관계되어 있다.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라면 같이 처리하고 떠나도 될 텐데.
해원기가 생각을 바꾸었다.
악송령은 본래 태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떠날 참이었다. 그러다가 해원기를 만나고선 의리로 따라나선 길.
벗을 위해 무작정 따라온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벗의 뜻을 존중해줘야 한다.
악송령은 스스로 자기가 할 일을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해원기가 악송령의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일단 여기 소청과 이환 소저를 만화원에서 빼내야 합니다. 음, 기녀는 대개 기루에 빚으로 묶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나중에 따질 문제.”
“어디로 빼내요? 돈도 다 줬고. 머물 데가 없잖아요. 게다가 개봉은 처음 오는, 아!”
“하는 수 없지. 오형에게 기대는 수밖에. 아직 응방원에 머물 수 있으니 소청과 이환 소저를 데리고 응방원으로 가야 합니다.”
“혹시 응방원에서 다 떠났으면요?”
“그럼 바로 번화한 곳에서 거지를 찾아야지. 악형, 오형이 개방 순행장로 유룡개인 건 알죠? 그리고 새로 만난 사람들, 특히 호법장로인 취개의 이름도 기억하잖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통할 겁니다. 개봉은 개방 총단 소재지니까.”
“그렇구나. 오늘 답청으로 사람들이 많이 나돌아 다니니까 구걸하러 다 나왔겠네. 그럼 문제없이…….”
“만일을 생각해서 번화가의 큰 상점들도 알아놓는 게 좋겠습니다. 개봉은 하남의 큰 고을이라 용문세가와 흥륭이 다 지반을 닦았을 터. 혹시라도 오형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쪽을 찾는 겁니다.”
“하긴 개방이라 해도 결국 거지들이니까. 용문에는 보혜 언니를, 흥륭이라면 오라버니 이름을 대면 되죠?”
증명단이 바로바로 물어준 덕분에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악송령을 보았다.
“이미 오형에게 가는 길목마다 표기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일이 잘 처리되면 금방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묵묵히 듣기만 했어도 해원기가 일러준 걸 빠짐없이 기억하려고 집중했던 악송령.
찡그렸던 미간이 서서히 풀린다.
“미안하오, 해 대형.”
함께하려던 여정에서 갑자기 빠지게 된 게 마음에 걸리나.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전에 오형에게 한바탕 야단맞은 적이 있습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소리 한다고. 친구끼리 그러지 말라더군요.”
끄덕끄덕.
동감을 표한 악송령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정중하게 주먹을 모아 쥐었다.
“해 대형.”
해원기도 포권으로 답하고,
“악형, 그럼.”
증명단은 눈물범벅이 된 소청의 얼굴을 닦아주다가 손을 흔들었다.
“자, 저 무뚝뚝이 아저씨 따라가. 악 대협, 잘해야 해요.”
만화원에서 울린 처참한 비명에 다들 놀랐는지, 홍등이 화려한 기루 골목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아서.
해원기와 증명단이 바로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이제 일행은 둘이 되었다.
성문이 가까워지자 증명단이 돌연 키득거리기 시작해서,
“왜 그러느냐?”
“힛, 무뚝뚝이 악 대협이 신기해서. 히힛.”
“뭐가?”
“나한테 빙당호로 사줬잖아요. 돈도 없으면서. 조금 전에 소청이 울며불며 매달릴 때도 어쩔 줄 모르고. 게다가…….”
일부러 말을 끌면서 쳐다보는 얼굴이 조금 짓궂다.
해원기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악송령이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해원기와는 일 년에 한 번씩 만난 사이, 이렇게 함께 여행하며 같이 지낸 건 처음이라 당연히 그 성격을 다 알 수는 없었다.
그저 과묵하고 무표정한 외양으로만 짐작할 수밖에.
그래도 오는 중에 오보혜와 증명단을 보호하는 데 나름 신경을 썼었구나. 나이 어린 여동생 같아 더 마음이 쓰였을까.
그런데 증명단이 더 은근하게 말을 잇는다.
“아까 만화원에서 이환 소저에게는 눈을 떼지도 못하더라고요. 혹시 반한 거? 후히힛.”
괴상한 웃음에 해원기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허.”
그러든 말든 이 막돼먹은 여동생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무뚝뚝할수록 더 과감한 걸까. 악 대협, 멋지잖아요. 하긴, 이환 소저의 노래에는 나도 넋이 나갈 정도였으니 악 대협이 홀딱 빠지는 것도 당연…….”
“홀딱이 뭐냐. 나 참.”
밤이 깊어가도 답청으로 성안이 떠들썩해서일까. 서문에도 화톳불을 크게 피워놓고 관병들이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성문을 왕래하고 있었다.
봄을 찾아(探春) 번잡한 곳을 향하는 사람과 끝나가는 봄을 아까워하며(惜春) 마저 즐기려는 사람들.
증명단의 괴상한 웃음과 해원기의 가벼운 타박도 그 속에 어울려 개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