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탐춘석춘(探春惜春) (3)
고급 기루일수록 방마다 손님들이 남 신경 쓰지 않고 놀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벽면을 두껍게 하고, 방의 간격을 넓히며, 장지문을 두 겹으로, 병풍 따위를 둘러쳐 웬만한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
해원기 등이 모셔진 이 작은 방 역시 보기엔 허름해도 나름대로 구조에 따라 칸막이를 이용한 공간.
이환의 연주는 몰라도 노랫소리는 워낙 은근해서 거의 들리지 않았을 텐데.
용케 알아들은 이가 있고,
이번에는 바닥을 쿵쿵 울리는 발소리와 잡다한 소음이 섞여 이쪽으로 전해지니.
호통을 친 후에 꽤 큰 소란이 일어난 모양이다.
“아가씨! 이를 어째…….”
안색이 변한 건 이환만이 아니라서 당황한 아환 계집애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자.
이환이 입술을 깨물더니 얼른 손을 내저었다.
“소청(小靑), 호들갑 떨지 마라. 귀빈들이 놀라시잖니.”
낮게 꾸짖는 소리. 소청이라 불린 계집애가 겨우 정신을 차리지만. 얼굴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마침 물러나라고 하시던 참. 천첩의 재주가 잠시 귀빈들을 즐겁게 해드렸다면 그걸로 족하지요. 그럼 귀빈들 말씀 나누시도록 천첩은 물러가옵니다.”
이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일어나 깍듯하게 예를 차렸다.
밖에서 무슨 소란이 났든지 간에.
한껏 격식을 차린 인사말과 두 손을 허리에 모아 맵시 있게 무릎을 굽히는 자세까지.
옷깃을 여미면서 소청에게 눈짓을 보낸 건 빨리 휘장을 치고 나가자는 뜻.
그러나 티 안 나게 서둘렀다고 해도.
콰당.
겹으로 된 장지문이 부서질 듯 열리면서 소란스러움이 먼저 이 작은 방으로 뛰어들었다.
“에구머니나!”
소청이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고, 구석에 기대놓았던 악기가 우당탕 쓰러지고.
별안간 방안으로 뛰어든 기세가 그렇게 흉험해서다.
잡아 뜯은 것처럼 장지문을 벌리고 성큼성큼 들어온 흙발. 다짜고짜 이환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대공자, 여깁니다.”
청의 단삼에 목이 긴 장화, 머리에 느슨하게 복두(幞頭)를 썼으나 단단한 체구며 험상궂은 인상이 평범하게 남의 집 일하는 하인이 아니다.
쿵쿵쿵.
당장 급한 발걸음이 다가들고,
“오, 조표(趙彪), 잘했다! 내 이년을.”
호통을 친 장본인의 음성, 그러나 이 거친 목소리 뒤로 여전히 다른 소음이 더해진다.
“아유, 대공자, 그러지 마시고…….”
짝.
“아악.”
“이년들잇, 다 죽고 싶은 게야?”
젊은 여자, 나이든 여자. 붙잡고 늘어지던 애교 섞인 음성이 금세 비명으로 바뀌고. 을러대는 협박과 욕설이 때리고 차는 소리에 어지럽게 섞여서.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뜨내기 대접이야? 요망한 년이 결국 여기까지 떨어졌나. 크큭.”
분을 바른 듯 하얀 피부. 소요건(逍遙巾)으로 높다랗게 묶은 머리 아래에는 넓은 이마, 날카롭게 뻗은 눈썹과 갸름한 눈, 뾰족한 코에 선명한 입술이 꽤 준수하지만. 쭉 째진 눈매나 비틀린 입매가 야박해 보이는 인상이다.
방에는 들어올 생각도 없는 듯.
얼굴만 보인 채 비웃음을 던지며 주위에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는다.
“냉큼 끌어내. 오늘 아주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자고. 하하.”
흥이 나는지 킬킬거리며 그 얼굴이 바로 빠지려는데.
“쿠엑.”
쿠다탕.
조표라는 자가 홱 뒤집혀 나가떨어지고.
“쌍놈의 새끼. 어디서 야료를 부려?”
잔뜩 성질이 난 막돼먹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처음 와봤다.
어려서부터 호중객잔에서 손님들이 떠드는 얘기에 나오던 기루. 항산에 오른 후에도 사부가 가끔 해준 무림 얘기에 자주 등장하던 장소라.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젊은 여자 혼자서 갈만한 곳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어도.
그래서 증명단은 오늘의 경험이 대단히 신선했고,
더불어 생전 처음 듣는 아름다운 노래에 푹 빠졌었다.
기녀가 어떤 신분인지 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 고운 자태, 우아한 몸짓, 청아한 음성과 가슴을 어루만지는 노래. 당나라 시성이 어쩌고, 시가 어쩌고 하는 것보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어찌할 바 몰라.
그저 멍하니 여운에 젖었기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랬더니 웬 시커먼 잡놈이 ‘우리’ 이환 소저의 목을 움켜쥐고 난리를 치고 있더라.
‘오라버니’랑 함께 하면서 한껏 죽였던 성질이 왈칵 폭발해버려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차버렸다.
쌍놈의 새끼. 어디 감히 여자한테 손찌검이야?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소중한 감동을 깨뜨린 것들을 가만 놔둘 수 없다.
항산 용낭자가.
“야, 너, 희멀건 놈, 네가 이 새끼 주인이냐? 뭐 하는 것들이…….”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기세등등하게 나설 셈인데.
불쑥 앞을 막아서는 듬직한 등, 그리고 나직하게 타이르는 말.
“소단, 먼저 이환 소저와 소청을.”
악송령이 부서진 장지문 앞에 섰고, 해원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
잠깐 어리둥절했던 증명단이 얼른 몸을 돌이켰다. 증명단의 발길질에 조표가 날아가면서 목덜미가 잡혔던 이환 역시 그 기세에 나뒹굴었고, 소청은 아예 벽에 붙어 벌벌 떨고 있으니.
증명단만 처음이 아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군문에 팔린 신세. 종살이하는 노예와 뭐가 다르랴. 그러다가 만난 외팔이 영감님 덕에 무공이란 걸 배우게 되었고, 혼자가 된 후에도 오직 그 가르침만 지켜왔다. 하찮은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매달릴 것이었으니까.
바닷가에서 육 년, 태산에서 또 육 년. 그렇게 십이 년 동안 수도하듯 보낸 세월.
유흥이란 걸 처음 겪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준 게 마치 꿈같았다.
선녀가 정말 있구나.
백은 한 냥의 값어치가 얼마든지 상관없다.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것만으로 가슴이 벅찬데. 심지어 같은 탁자에 앉기까지.
해원기와 대화를 나누다가 환하게 웃는 모습에는 넋이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깨기 싫은 꿈, 소중히 간직하고픈 선녀의 모습이.
한순간에 다 부서졌다.
믿기 어려워서, 아니, 믿을 수 없어서.
증명단보다 반응이 늦어버렸다.
악송령은 십이 년 만에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살심(殺心), 환도를 넣어둔 자루 채 손에 들고 눈에 보이는 족족 죽여 버릴 셈이었는데.
해원기의 목소리에 간신히 억눌렀다.
“어? 뭐야?”
흰 얼굴, 대공자라 불리는 청년이 의외라는 듯 묻는 소리에.
해원기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내다보았다.
부서진 장지문 뒤로 보이는 아늑한 정원. 동그란 연못에 작은 가산까지 세워 꽤 규모를 갖추었고, 그 정원을 중심으로 회랑을 따라 사방으로 방이 붙어있다.
정원 쪽으로 트인 방들은 전부 크고 화려해서 열 명은 족히 놀 수 있을 크기. 자기들이 이환의 노래를 들은 이 작은 방의 몇 배나 된다.
담장에 붙은 쪽은 본래 아랫것들이 쓰는 행랑채, 그걸 칸막이로 나눠 뜨내기손님을 받은 거다.
대공자 일행은 그 큰방을 두 개나 빌린 호화판 놀음. 정원과 회랑에 사람들이 잔뜩 몰렸고, 그중에 기녀나 여종들이 스무 명이 넘는데.
묘하게 기원에서 일하는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곳엔 소란이 일면 조용히 해결하는 건달패가 있거늘.
해원기가 잠깐 방안을 둘러보고 악송령 옆으로 섰다.
이환과 소청 모두 놀라고 겁을 먹었으나 증명단이 서둘러 다독이는 중, 해원기가 씁쓸하게 혀를 찼다.
“쯧, 어처구니가 없군.”
바로 곁의 악송령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 그건 자책이었다.
화려한 개봉의 밤, 악송령과 증명단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면서 마음이 풀어졌었나.
듬직한 친구, 귀여운 여동생. 변하 강변에서 파릇한 풀을 밟고 강을 따라 흐르는 유등을 구경하고. 싸구려 간식을 나눠 먹다가 기루까지 오게 되었다.
비싼 돈을 내고 좋은 술에 기녀의 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특이한 기녀의 노래에 오랜만에 잘난 체를 했다.
기루에서 분란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또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으리라고.
또 아는 척을 했던 게.
이런 꼴이 되었잖나.
상황이 어떨지 미리 감지할 생각도 하지 않다니. 무(武)는 뭐하러 배웠는고.
이 지경이 되도록 먼저 나서서 돕지 않았으니. 협(俠)은 어디에 두었는고.
스스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 혀 차는 소리에 무거운 자책이 담겨서.
악송령의 살기까지 누그러졌다.
세상에는 다 법도가 있다. 사람이란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 사람이 사는 곳에는 그에 맞는 도리가 있게 마련.
강호는 더욱 그렇다. 어느 곳에든 지켜줘야 할 게 있어서 그걸 함부로 무너뜨리는 건 폭력에 불과하다.
힘이 있다고 제멋대로 해선 안 된다.
산속에 숨어있는 객잔도, 길거리에서 밀가루를 지져 파는 노점도, 역참 옆에서 닭을 파는 가게도, 술과 노래와 몸까지 파는 기루에서도.
무력이 있다고 그걸 내세워 도리를 어길 수는 없다.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밥을 사 먹으면 돈을 내야 하는 법이요,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친절하고 다정해야 한다.
그래서 무력과 폭력은 다르다.
무(武)는 본래 지과(止戈)라는 글자. 폭력을 그치게 해야 한다.
흥륭과 용문을 겁박했던 동창과 이 기루의 행패가 뭐 다를까.
그 잠깐 사이에 정원에는 사내들이 열댓 명이나 몰려나왔다. 전부 힘깨나 쓸 몸집에 거친 인상, 대충 옷으로 가렸어도 곤봉 따위를 숨긴 게 분명한 자들.
본래 기루에서 소동이 나면 나서서 해결해주는 작자들일 텐데, 지금은 희멀건 대공자를 옹위하듯 주위로 늘어선다.
그새 작은 방 안쪽을 경망스럽게 기웃거린 대공자.
“이 허접스러운 작자들은 어디서 굴러온 것들이지? 에, 조 계집은 꽤 이쁜데? 계집이 기루에 뭐 하러 온 거야. 내가 누군지나 알고서…….”
문 앞에 선 해원기와 악송령은 본 척도 하지 않고서, 예쁘장한 증명단에게만 눈길을 두며 지껄여대는데.
“악형.”
“음?”
불쑥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악송령.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고 나직하게 말을 건다.
“우리 사부님은 살기가 대단히 강하셨지만, 무지한 자들까지 손을 대진 않으셨다오. 죽이진 마시오.”
해원기는 그런 대공자를 아예 대놓고 무시. 염려하는 건 악송령에게서 전해지는 살기뿐이다.
악송령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곤 비로소 시선을 대공자에게 돌리더니.
“넌, 좀 맞아야겠다.”
그렇게 결정했고.
그다음 비명이 합창처럼 울렸다. 만화원의 담장을 넘어 기루 골목 전체에 들리도록.
해원기가 가볍게 휘두른 손가락 하나. 풀썩 고꾸라지는 대공자 앞에 이르기도 전에.
환도를 자루 채 쥐고 달려든 악송령은 그야말로 양 떼 속의 늑대.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부서지고,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꺾인 자들이 정원과 회랑을 질펀하게 메웠다.
기절을 했든, 앓는 소리를 내든. 쓰러진 놈들을 하나하나 정원에 꿇어 앉혀 놓으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녀들이 우르르 작은 방으로 몰려들었다.
“열여섯, 열일곱……, 딱 스물.”
악송령이 한 놈도 놓치지 않으려고 줄지어 앉힌 숫자를 세자.
“여기 한 놈 더 있어요.”
퍽.
맨 처음 증명단에게 차였던 조표란 자가 데굴데굴 굴러 정원에 떨어졌다. 어딜 어떻게 또 찼는지 아예 인사불성.
대공자까지 스물두 명을 정원에 조르륵 꿇려놓은 광경이 가관이다.
해원기가 천천히 회랑에 걸터앉았다.
일단 못된 악패(惡覇)를 전부 제압했지만,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나. 회랑을 경계로 정원에는 악패들의 앓는 소리, 작은 방에는 기녀들의 흐느끼는 울음.
비로소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노파 하나. 처음 만화원에 들어왔을 때 손님을 재던 노파다.
“아이고, 이를 어쩌려고. 이, 이분은 삼보별저(三保別邸)의 대공자이신데. 어쩌자고 이런 사달을. 이 양반들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아이고, 아이고.”
일부러 들으라고 곡소리를 하는 걸 거다.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으면서 괜스레 바닥을 치는 과장.
기루를 운영하는 노파가 으레 그렇듯 오직 자기 보신만 챙기는 걸 따질 생각은 들지 않지만.
해원기가 미간을 모았다.
흔히 이런 악패가 설치려면 배경이 있게 마련이다. 기루의 건달이 막기는커녕 한패가 되는 걸 보니 꽤 잘난 집안 출신일 터. 흔히 이런 기루의 진짜 주인은 고을의 유지, 돈으로 흑도(黑道)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개봉은 본디 토호(土豪)가 많고, 또 개방의 총단이 있는 곳. 지역의 건달들이면 몰라도 흑도가 설치기 어려운 환경이다. 스무 명이 넘는 자 중에 제대로 무공을 갖춘 자가 하나도 없는 게 그 방증.
‘삼보별저’가 어떤 집안인지 처음 듣지만, 더는 얽히면 귀찮아질 것이요, 쓸데없이 개방에 폐를 끼칠 우려도 있어서.
해원기가 일어나면서 요대자에 손을 넣었다.
툭.
묵직한 주머니.
“그 정도면 얼추 보상될게요. 번거로운 게 싫으니 뒤처리를 부탁하지.”
수중에 지녔던 은원보 전부.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수밖에 없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악송령도, 증명단도. 다 흥이 깨져서 무거운 표정으로 해원기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