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탐춘석춘(探春惜春) (2)
사락사락.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휘장 뒤로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이고, 조금 전의 아환이 술병과 차호를 들고 들어왔다.
조그만 원탁 위에 간단히 차려놓고는 조심스럽게 휘장을 걷자.
바닥에 엎드려 대례를 올리는 여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널찍한 판자로 조금 높게 무대처럼 만든 곳, 머리에 꽂은 화려한 장식과 무대를 전부 덮을 정도로 펼친 치마가 마치 한 떨기 만개한 꽃과 같다.
은은하게 전해지는 향기.
“천녀(賤女) 이환이 삼가 귀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맑고 고운 음색이지만, 바짝 엎드린 대례를 올려서인가. 인사말이 착 가라앉아 읊조리는 듯하다.
말을 마치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얼굴. 곱게 바른 분에 가늘게 그린 눈썹, 볼은 분홍색으로, 입술은 빨간색으로. 둥근 귀고리에 가는 목걸이가 다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이고 좁은 저고리 위에는 투명한 경사(輕紗)를 덧입었다.
예쁘고 화려하게 꾸몄지만 해원기와 그들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고, 화장 아래에는 피곤한 기색이 살짝 드러나.
흑의 경장을 한 해원기, 허름한 차림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악송령, 북룡포에 응운검을 멘 증명단을 스윽 훑어보곤.
구석에 있던 아환에게 살짝 눈짓을 보낸다.
민첩하게 구석에서 가져와 건넨 악기는 비파(琵琶). 이환이라는 기녀가 비파를 품에 안고 다시 목례를 올리더니.
디리링.
“감히 귀빈 여러분께 한 곡 올리나이다.”
극진히 떠받드는 말투지만, 맑고 고운 목소리는 그저 차분히 가라앉았을 뿐.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손님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든, 술을 나누며 안주를 먹든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어쩐지 무시당한 듯한 분위기지만, 해원기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자, 악형. 소단은 차를 할래?”
악송령은 홀린 듯 눈길로 돌리지 못한 채, 해원기가 따라주는 술잔도 받는 둥 마는 둥. 증명단은 기녀와 아환을 요리조리 뜯어보다가 냉큼 작은 잔을 내민다.
“저도 술.”
해원기가 빙긋 웃으며 잔을 채웠다.
“좋은 술과 차, 그리고 진귀한 음악까지. 강호에서 얻기 어려운 호사지. 그동안 적잖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니 잠시 마음을 푸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아. 한잔합시다.”
디리링, 디링.
“으음. 기막힌 술.”
악송령이 비로소 정신이 든 것처럼 술잔을 쳐다보는 건 그만큼 훌륭한 술맛이기에.
딩딩딩딩.
비파 소리가 차츰 빨라진다.
“오라버니는 고구마 대장인데 어떤 때는 확실히 인정미가 넘친다니까. 오호, 오호.”
술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기루 구경을 시켜줘서인지.
칭찬을 해주다가 빨라지는 비파 소리가 신기해 금방 정신이 팔리고. 그건 악송령도 마찬가지였다.
산서 항산에서 내려온 소녀와 산동 태산 계곡에만 있었던 사내. 도대체 제대로 된 악기 소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비파의 탄주를 들었으니 홀딱 빠져들 수밖에.
그런데 둘의 표정이 갈수록 무거워져서 술잔을 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빈 잔을 홀로 채우고 다시 비우는 건 해원기 혼자.
작은 방에는 비파의 음률만 울릴 뿐이다.
까라라랑, 까라랑.
빨라지고 거칠어지고, 촉박해서 애가 타고, 아슬아슬해서 어깨가 옴츠러든다.
악송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고, 응운검을 멘 증명단의 어깨가 움찔움찔.
해원기가 그제야 가볍게 혀를 차면서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
힘을 준 것도 아니면서 꽤 큰 소리가 나고.
비파소리가 뚝 끊겼다.
얼핏 정신을 되찾은 악송령과 증명단이 동시에 묘한 표정이 되어 해원기를 보는 건.
이렇게 잔을 거칠게 내려놓을 성격이 아님을 알기 때문.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기녀는 왜 비파를 멈추었을까?
이환 역시 조금 의아한 듯 가만히 해원기를 보는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담겼다.
열 두셋 먹은 계집애가 참 영리하다.
대뜸 이환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이고, 그제야 이환이 비파를 건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죄송합니다. 천녀가 그만 제멋대로 굴었군요.”
의미를 알기 어려운 사죄.
해원기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저 구경삼아 쉬러 온 참인데 지나치게 몰두해버렸나 보오.”
처음 나누는 대화. 이환이 다시 한 번 해원기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 뵙는 분들이라서. 제 나름대로 무인이시라고 여겨 십면매복(十面埋伏)을 골랐더랍니다. 보통 무인 분들은 십면매복이나 패왕사갑(霸王卸甲) 같은 곡을 좋아하시기에. 말씀 나누실 때는 노래보다 연주를 원하시고.”
“좋은 곡이지만 화려함 속의 비장함이 지금의 우리에겐 힘겹구려. 밤중에 답청 나왔다가 먼 길 떠날 셈이거든요.”
‘비장함’이란 말에 이환의 눈이 반짝 빛나고.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률을 아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천녀의 무지를 용서하십시오. 그럼 노래를 한 곡 불러도 되겠습니까?”
다시 한 번 사죄를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목소리에 분명하게 감정이 담겨서 다른 사람 같다.
해원기 역시 진지하게 목례를 보냈다.
“부탁드립니다.”
이환이 돌아보자 어린 아환은 기다렸다는 듯 다른 악기를 냉큼 앞에 대령하는데.
무릎 위에 올라오도록 받침대를 붙인 칠현금(七絃琴).
이환이 고운 손을 그 위에 올리고선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딩, 디잉.
천천히 두 개의 현만 튕기며 노래를 부른다.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 단비는 맞는 시절 고를 줄 알아
당춘내발생(當春乃發生) 때맞춰 생기 돋는 봄에 내리지
수풍잠입야(隨風潛入夜) 바람 따라 밤중에 몰래 들어와
윤물세무성(潤物細無聲) 소리 없이 만물을 살짝 적시네
야경운구흑(野徑雲俱黑) 들길엔 구름이 까맣게 덮여도
강선화촉명(江船火燭明) 강 위의 배에는 불빛이 환하고
효간홍습처(曉看紅濕處) 날 밝아 촉촉한 꽃잎 보자니
화중금관성(花重錦官城) 금관성엔 꽃들이 만발했겠네
드르릉.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금현을 가만히 쓸어내릴 때까지.
얼어붙은 듯이 뻣뻣하던 악송령과 증명단이 깜짝 놀란 것처럼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아주, 아주 좋소!”
“우와아, 멋있다! 아름다워요. 이, 이게 무슨 노래지?”
생전 처음 겪는 감동. 악송령과 증명단은 노래 한 곡이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경험을 처음 접했다.
이환의 목소리는 정녕 봄비와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남몰래 어루만지고, 가만히 적시며,
어두운 밤하늘에 여린 우막(雨幕)을 펼쳐 환한 불빛 앞에 드리우더니, 마침내 무젖은 꽃잎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듯.
기가 막힌 솜씨.
술 한 잔에 취할 리 없는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상기될 정도.
흥분한 악송령과 증명단을 번갈아 보던 이환의 시선이 도로 해원기에게 꽂혔고.
말 없는 재촉에 해원기도 답을 내놓았다.
“당나라 때의 시성(詩聖)인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시란다. 나도 이걸 노래로 듣기는 처음. 참으로 훌륭한 노래군요.”
이환의 무표정한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리고.
“감사합니다. 과연 아시는군요.”
답례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구석에 꿇어앉은 아환의 미간이 확 구겨지는 걸 눈치 챘지만, 해원기가 모른 척 잔을 들었다.
“그게 두보의 시는 좀 배워둬야 할 사연이 있었거든요. 치사의 뜻으로 한잔 권하려는데.”
좋은 노래, 좋은 연주를 들으면 기녀에게 술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차피 돈으로 산 하룻밤의 호사.
황제라도 된 것처럼 수고했다고 술 한 잔 하사하는 기분을 내는 것이지만, 그러면서 기녀에게 술을 먹이려는 게 본뜻.
이환의 미소가 확 굳어지더니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려는데,
“원치 않습…….”
“좋은 노래에는 술보다 차가 더 어울리겠지요. 대신 전해주겠느냐?”
마지막은 구석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아환에게 하는 말.
“네? 네.”
뜻밖의 말에 당황한 아환보다, 이환의 차가워졌던 표정이 멍하니 풀어진다.
더구나 해원기가 차를 몇 번이나 따라버린 후에야 잔을 채워서 아환에게 건네주는 모습에,
짙은 화장으로 지친 기색을 숨긴 이환의 얼굴이 차츰 부드러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벌컥, 벌컥.
악송령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는 동안,
증명단은 다른 게 궁금했나 보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안대? 당나라 때 시성? 그 양반 시를 왜 배워야 했길래?”
두보의 시를 배워둬야 할 사연이 뭘까.
“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사부님께서 흥륭과 인연을 맺게 된 게 두보의 시 한 편 때문이었단다. 아, 이 얘긴 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하하.”
두보의 등루(登樓) 시를 절반만 외우면 전 재산을 내준다고 내기를 걸었던 흥륭의 전 주인. 기어이 무식한 무인의 콧대를 꺾으려다가 제 꾀에 빠져 하마터면 흥륭을 몽땅 날릴 뻔한 과거의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기억을 되살리면서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받은 차를 마실 생각도 없는지, 받침대 채 들고만 있던 이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시가 무엇인지요?”
“음?”
이번에는 해원기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악송령도 마시던 걸 멈추며, 증명단도 새삼스럽게 돌아본다.
차를 건네면서 받침대에 올려둔 은자. 콩알만 한 크기가 두 개나 되서 아환 계집애가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았는데.
처음 기루에 와서 노래를 들은 악송령과 증명단도 이게 무슨 뜻인지는 능히 짐작했다.
좋은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사례하는 돈. 웬만한 주루나 객잔에서도 점소이에게 은자 부스러기를 집어주잖나. 그러면 고마움을 표하고 잽싸게 자리를 피하는 게 관례라, 기녀도 바로 물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이환은 칠현금을 물리고서 도리어 몸을 일으켜 다가오니.
찻잔 옆의 은자에는 관심도 없다.
이런 경우는 해원기도 처음.
이환이 찻잔을 원탁에 놓기도 전에 아환 계집애는 벌써 작은 의자 하나를 받쳐놓아서, 참으로 믿음직한 여종이다.
“등루라고 들었소.”
태연히 합석한 후에 이환은 더욱 묻고 싶은 게 많아졌는지.
“십면매복에 비장함이 담긴 걸 아셨지요?”
“초왕(楚王)의 해하지전(垓下之戰),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처경이 웅장하고 화려하기만 할 수는 없겠죠.”
“춘야희우를 반주한 현은요?”
“문무이현(文武二絃)만을 쓴 게 참 어울렸소이다.”
문외한은 들어도 모를 문답.
이환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찻잔을 살짝 밀었다.
“그럼 재삼세차(再三洗茶)의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두세 번 차를 따라버리는 건 찻잎을 먼저 씻어내는 도리. 다도(茶道)를 따지는 자리가 아니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
해원기가 더벅머리를 긁었다.
“음, 차가 진한 것보다는 따뜻한 게 목에 더 좋다. 그렇게 배웠거든요. 많이 피로해 보여서. 비파 탄주에 칠현금을 더한 노래 한 곡. 이제 충분합니다.”
뭔지 모를 대화였으나.
‘충분하다’는 말에는 악송령과 증명단 역시 동의. 둘이 똑같이 이환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백은 한 냥이 전혀 아깝지 않은 훌륭한 노래였잖나.
이환이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마침내 미소를 짓는다.
분 바른 얼굴 전체에 홍조가 어리고, 눈과 코를 지나 입술로 이어지는 웃음. 이 또한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해서 해원기조차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
처음에 보았던 그 가면 같은 얼굴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인데.
“하핫! 이거 그년 목소리잖아! 노래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겠다, 그러더니 목을 다쳐 노래도 팔지 않겠다던 요망한 년. 썩 기어 나오지 못할까!”
돌연 거친 호통이 주위를 울린다.
장지문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목청.
이환의 안색이 홱 변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