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탐춘석춘(探春惜春) (1)
응방원을 나와 남쪽으로 향하는 길.
변하의 양쪽 기슭을 따라 곳곳에 많은 사람이 어울려 노닌다. 웃고 떠들며 거니는 이들, 술과 음식을 펼쳐놓은 이들,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 모두가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하다.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즐겁고 화창한 풍경. 변하를 따라 흐르는 무수한 유등 덕분인지, 날이 저물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
번화한 옛 도읍 개봉. 낮이라면 봄기운 가득한 명승고적을 볼만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 구경인데도.
돌아보는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변하가 마치 은한(銀漢) 같구나.”
유등이 물 위로 끝없이 이어져서 은하수가 땅에 내린 것처럼 황홀하다. 절로 감탄이 나올 장관이지만.
함께 한 이들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악송령이야 워낙 과묵하니 그렇다 쳐도,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증명단.
제남에서부터 함께 여행했던 일행과 헤어진 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악송령 역시 말은 없어도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 슬쩍 떨어져 작은 등롱이 줄지어 이어진 쪽을 향했다.
사람이 많으면 장사치도 모이게 마련.
강기슭에 노점들이 즐비하다. 주전부리, 장신구, 장난감, 기념품 따위를 파는 작은 가게들.
“이거.”
악송령이 불쑥 내민 손에 들린 건 빙당호로(氷糖葫蘆). 꽃사과 열매를 꼬치에 끼워 설탕물을 부어 굳힌 간식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작년에 저장한 열매를 썼을 테고, 값도 비쌀 터.
뜻밖의 선물에 증명단이 눈을 깜빡이다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앤가? 뭐.”
말을 그래도 냉큼 받아드는 건 역시 기분이 풀렸다는 뜻.
해원기가 악송령에게 눈을 찡긋했다.
“어, 악형에게 선수를 뺏겼네. 그런데 소단만이요? 사람 차별이잖소.”
악송령에게 이런 살뜰함이 있었던가. 좋은 기분에 절로 농이 나오지만.
“돈이 없소.”
악송령이 두 손을 펴 보이는 모습에 증명단은 하마터면 베어 물던 빙당호로를 토할 뻔했다.
“푸헷.”
“하하하, 그도 그렇구먼. 자, 갑시다.”
이렇게 웃고 떠들고.
제대로 명절 기분이 난다.
기껏해야 찐 감자에 계란 볶은 것, 그리고 지진 두부 정도. 그래도 셋이서 오순도순 서서 먹는 맛은 일품이다.
“오라버니, 돈이 있었어요?”
“음, 흥륭에서 받은 게 있잖으냐. 오형이 헤어지기 전에 전부 건네주더라.”
“호오, 날름 집어삼킬 줄 알았더니. 의외네.”
“오형은 욕심이 없소. 진짜 거지지.”
“히힛, 진짜 거지라니. 그거 보통은 칭찬이 아니라 욕인데?”
훈풍이 살짝 부는 밤은 걷기에 좋다.
간단한 주전부리에 부드러운 밤바람은 사람을 풀어지게 해서, 가벼운 걸음만큼 대화에도 우스개가 자꾸 섞인다.
응방원이 서북쪽에 있었으니 성문까지는 아직 한참. 되도록 번화가를 피하려고 해도 갈수록 사람들이 많아지고 등불도 더 많아졌다.
더구나 대부분이 붉은 등.
해원기가 결국 멈추어 섰다.
증명단이 곳곳에 달린 붉은 등과 화려한 장식에 눈을 뺏겼다가 좁은 골목 앞에 선 해원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여긴 어디예요? 되게 아름답고, 좋은 냄새도 나고. 와, 오가는 사람들이 전부 멀끔해. 개봉에서 제일 부자들 사는 동네인가?”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해원기가 몸을 돌리려 했다.
“다른 데로 가자.”
남문으로 가려면 번화가를 지나야 해서 조금 더 가까울 서문을 택한 게 잘못.
이쪽은 홍등가(紅燈街)다.
악송령과 둘이라면 아무 지장 없이 가겠지만, 증명단을 데리고는 무리.
모른 척 길을 바꾸려는데.
“아항, 이곳이 화류가(花柳街)로구나. 예쁜 여자들이 웃음과 노래를 팔고, 거기에 홀린 영웅호걸들이 모여든다는. 진짜 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과연 오라버니, 자, 들어가 봐요.”
이런.
이 성격 급한 산골 소녀가 어찌 알았을꼬.
더구나,
“나도 처음. 술 한 잔 생각나오.”
악송령까지 드물게 호기심 어린 표정을 드러내니.
해원기가 난감한 채 눈을 껌뻑였다.
어째 이렇게 돌아가나. 그러면서 문득 오소민이 생각나는 건 아무래도 처음 만난 곳이 아침나절의 홍등가여서겠지.
무림인은 대부분 강호의 낭객(浪客). 일정한 거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천하를 주유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사한다. 믿는 건 오직 자신의 무력, 혹은 옳은 일이라고 의를 좇고, 혹은 이득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칼끝에 매달린 이슬처럼 덧없는 인생일 수도.
그래서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즐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소위 급시행락(及時行樂)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부랑자가 제멋대로 붙인 허울 좋은 핑계일 뿐.
산이든 들이든, 집이든 객잔이든. 무인은 촌각도 단련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홍진에 묻혀도 자신을 정결히 할 줄 알아야 하고,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으면 천지를 집으로 삼으면 그만. 지닌 능력으로 남을 돕고 올바른 도리를 따라 행하는 게 전부다.
어느 문파에나 다 이런 계율이 있고, 명문정파는 더 심하지만.
어디 사람이 그런가.
명문정파의 제자일수록 풍류를 찾는 이가 많고, 흑도 출신은 아예 대놓고 향락을 즐기기 마련. 주색(酒色)으로 무인의 호방함을 따지는 풍조까지 유행하는 판이다.
해원기가 자신의 요대자를 툭툭 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가진 건 은원보로 한 열 냥. 약왕당까지 가는 노자로는 넉넉한 편이지만. 이런 곳에서 하룻밤 놀기에는 아슬아슬할 거요.”
“음?”
악송령이 눈을 홉뜨고, 증명단이 인상을 썼다.
그냥 은자가 아니라 은원보가 열 냥이다. 도중에 마차며 말이며, 소비가 적지 않았는데도 이만큼 남았다는 건 흥륭에서 거금을 선사했다는 의미. 백은 열 냥이면 웬만한 집이 몇 달을 놀고먹을 금액이니, 셋이 개봉을 떠나 약왕당까지 가는 동안 아무 걱정이 없을 터.
그런데 이 화려한 골목에선 하룻밤 값도 안 된다고?
가격 개념이 흔들릴 정도로 놀랐고, 아울러 호기심이 강해졌다.
“그렇게 비싸…….”
“아, 무슨 노래 한 곡 듣는데. 아니지, 뭔가 엉큼한 짓을? 그래서 가격이.”
산속에서만 지내던 악송령보다야 어려서부터 객잔을 꾸렸던 증명단이 훨씬 기민해서.
눈치 빠르게 비싼 값의 이유를 찾는 통에.
해원기가 얼른 말을 이었다.
“간단히 노래 한 곡 듣고 술 한잔하기에 적당한 곳도 있다. 영웅호걸이 모여들 만큼 대단치는 않다만. 얼추 구경은 되겠지.”
또 딴소리가 나올까 싶어 앞장서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헤, 오라버니는 익숙하네. 많이 와봤나. 그렇죠?”
증명단이 악송령에게 동의를 구하는 말에 등이 따가웠다.
술은 사부에게 배웠지. 사부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고서도 음주의 예를 잊지 않으셨고, 알고 나야 절제한다는 도리도 가르쳐주셨다.
여자에 관해서는.
해원기가 떠오르는 기억에 쓴웃음을 지었다.
만화원(晩花圓).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하디흔한 이름. 활짝 열린 문을 들어서면 바로 벽이 가로막아서 옆으로 돌아 조그만 누각으로 들어서게 된다.
다른 곳처럼 떠들썩하지도 않고, 안내를 해주는 사람도 없지만. 사실은 이런 곳이 고급. 그리고 고급일수록 손님을 가려 받는다.
어차피 악송령과 증명단을 위한 구경. 해원기는 일부러 골목 안쪽의 이 집을 골랐다.
누각에 들어가자 향내가 코를 스치고, 좌우에 아환(丫鬟)이 모시어선 작은 탁자에 노파가 앉아 있다가 가만히 해원기 일행을 살펴본다. 이제 열두 셋 정도 먹었을 계집종인 아환은 그저 무표정.
해원기가 성큼 다가가 은원보 한 냥을 탁자 위에 놓았다.
“좋은 노래 한 곡에 술 한 병이면 족합니다. 자리가 있을까요?”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파. 곱게 빚은 백발에 어울리지 않는 꽃 장식 하나를 꽂았다. 노파가 탁자 위의 은원보를 보고 다시 해원기를 올려다보더니 씩 웃는다.
“바쁘시구먼. 운이 좋아, 마침 한 자리 어울려줄 애가 있거든.”
이가 거의 다 빠져 흐물거리는 입으로 용케 똑똑한 발음을 하곤, 바로 오른쪽의 아환에게 턱짓.
“따라오세요, 손님.”
그제야 생기를 찾은 것처럼 오른쪽 아환이 잽싸게 나서서 안내하고.
‘손님’이란 호칭에 해원기가 가만히 웃으며 악송령과 증명단을 보았다.
“잘 찾아온 모양이군.”
초행길인 두 사람은 뭐가 뭔지 몰라서 두리번거리기만.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호화로운 내부, 누각의 꾸밈이며 노파가 앉은 탁자까지 평범하지 않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아환을 따라 걷는 좁은 회랑조차 곳곳에 정교한 장식을 새긴 것이어서, 담장까지 풀이 곱게 깔린 건 쳐다볼 새도 없었고.
금방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흠.”
“어.”
의외의 광경에 악송령과 증명단이 멈칫거린다.
누각과 회랑에서 잔뜩 화려함을 보았는데. 이 작은 방은 뭐지?
벽에는 흔한 그림 한 장 붙어있지 않고, 화병도 서가도 없이 자그마한 원탁 하나에 의자 세 개. 반대쪽은 장지문으로 닫혀있고 한쪽은 휘장으로 가려져서 방이 아니라 회랑이나 마루를 임시로 막아놓은 공간 같다. 원탁과 의자도 전부 수수한 물건, 보통 객잔만도 못하다.
너무나 다른 방이라 의심이 들 정도인데,
해원기는 당연하다는 듯 의자 하나를 당기며 아환에게 은자 부스러기를 몇 개나 집어준다.
“고맙구나. 배가 고프진 않으니 술과 차만 주려무나.”
아환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반짝 환해지고,
“네에, 귀빈.”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조그맣게 종알거린다.
“이환(怡紈) 아씨도 예뻐해 주세요. 부디.”
들릴락 말락. 인사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나가버리고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백은 한 냥이라고요. 동전으로 천육백 문. 게다가 저 아환에게 준 은자도. 아 참, 이게 말이 돼요?”
뭔가 속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다. 증명단이 기가 막혀 따지지만, 같은 초행길이라도 악송령은 어른.
“일부러…인 거요?”
뭔가 이유가 있을 터. 증명단이 입을 다물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고급 기루일 거라 예상했습니다. 골목에서 조금 외진 위치, 다른 곳에 비해서 조용한 곳. 따로 헤맬 필요 없이 들어서면 그 누각으로 들어가죠. 그 노파가 그곳에서 손님을 맞아 어울리는 방으로 보낸답니다. 부유한 손님, 뜨내기손님, 잘 대접해야 할지, 바가지를 씌워야 할지. 전부 그 노파의 눈에 달렸죠.”
“에? 그럼 우리는?”
“어차피 뜨내기지. 개봉에서 오래 지냈을 텐데 척 보면 모르겠니? 그 앞에서 괜히 잘난 체 해봐야 웃음거리가 될 뿐이야.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래 놀진 않는다, 이렇게 정확히 뜻을 전해주는 게 예의지. 손님이 솔직하면 기루도 편하니까. 다행히 뜻이 통했구나.”
“흐음.”
“아환이 ‘손님’이라고 부르면 제값이고, 처음부터 ‘귀빈’으로 부르면 바가지일 거라고 하더군요. 이 방에 들어와서 수고비를 주니까 ‘귀빈’이라고 하잖습니까.”
“아항, 여기도 암호가 있구나. 그런데 그 꼬맹이, 나중에 종알종알 간청하는 건 또 뭐람?”
아환의 들릴락 말락 한 말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글쎄.”
해원기도 조금 의아해서 머리를 갸웃거리는데.
드르륵.
휘장으로 가려진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사뿐사뿐 방안으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