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청명상하(淸明上河) (3)
“이, 이게 웬일? 아, 반가워서. 흐헤헤헤헤.”
“아미타부, 그, 그렇군요. 하하하하하.”
바닥에 주저앉은 채 웃는 단삼육이나,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며 희한한 불호조차 마치지 못하는 무공화상이나.
오소민의 폭소까지 겹쳐서 주루 안이 갑자기 시끄러워져,
오보혜와 증명단은 눈이 동그래졌고, 악송령조차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두 분은 여전하시군요.”
“그, 그런가? 헤헤헤.”
“뭐, 그대로지요. 남몰, 하하하.”
해원기가 포권한 채 말을 건네도 그저 웃어대기만. 처음부터 해괴한 언행을 보이긴 했으나, 이젠 아예 정신줄을 놓은 것 같다.
“단 대협은 아무리 마셔도 덜 취하고.”
“똑같지요. 흐헤헤.”
“선사는 불호 앞이 바뀐 듯?”
“아, 나무(南無)보다는 남몰이 더 나아 보여서. 하하하.”
그간의 안부를 묻는 말에도 전부 웃음으로만 답한다.
술귀신 취개는 술주정을 부리고, 멍충이 치승은 진짜 바보가 되어버렸나.
둘이 워낙 웃어대는 통에 오소민이 먼저 터뜨렸던 폭소를 쓴웃음으로 바꾼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오보혜는 작은 눈을 연신 깜빡거리고, 증명단의 눈은 해원기, 취개, 무공화상을 번갈아 살피고.
풍진삼우의 두 사람. 황정리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일단 취개는 오소민의 사형, 게다가 무공화상 역시 오소민을 어릴 적부터 아는 모양. 아주 애 취급을 한다. ‘귀염둥이’라잖나.
그런데.
해원기하고도 면식이 있을 줄이야.
아니, 그보다 오소민을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 저렇게 정신없이 웃어대는 이유가 쑥스러움이란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오십 줄로 보이는 무림의 선배, 제멋대로 행동하던 고수 둘이 스물여덟 먹은 해원기에게 쑥스러울 게 있을까.
말투까지 올리면서.
웃음이 비로소 잦아들었다.
단삼육의 벌겋던 얼굴은 말짱하게 돌아왔고,
“십 년, 아니, 십이 년 만인가요?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태산에서였지요. 제가 한참 치기(稚氣)를 부릴 때.”
무공화상의 맹한 얼굴도 또렷하게 바뀌었다.
“과연 그만큼 세월이 흘렀군요. 몰라볼 뻔했습니다.”
“그리 변한 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어리숙하니까.”
여태 기행을 일삼던 두 사람이 똑바로 일어나서 해원기에게 예를 취했다.
“이렇게 만나니 기쁩니다.”
“빈승 또한. 나무아미타불!”
모은 손을 꼿꼿하게 내밀어 정식으로 답례하는 단삼육, 가슴 앞에 한 손만을 세워 반장례(半掌禮)를 취하는 무공화상.
목소리에 한 점의 취기도 없고, 처음으로 올바른 불호를 외운다.
비로소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
바로 옆에서 터진 탄성에 증명단이 화들짝 놀랐다.
뭐가 뭔지 모르게 돌아가는 상황이라 얼이 빠졌었는데,
오보혜가 작은 눈을 찢어지라 뜬 채 입을 딱 벌리는 모습. 이렇게 경악하는 걸 본 적이 없건만, 오동통한 입술이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
증명단은 저절로 그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흥륭에서도, 그랬지. 황 대협뿐 아니라, 다들, 어렵게 대했어. 여기서도, 마찬가지. 이, 이제야 알겠어. 저, 저 사람은…….”
오보혜의 떨리는 손가락.
단삼육과 무공화상에게 인사하느라 몸을 돌린 해원기의 옆얼굴을 가리킨다. 멀리서도 하기 어려운 손가락질을 바로 맞은편에다 하다니.
평소의 오보혜에게선 전혀 볼 수 없는 경악과 무례. 그러나 그걸 탓하기보다 그다음 말이 궁금해서.
“오라버니가 뭐?”
증명단이 급하게 채근했다.
철부지 소녀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비천무영 황정리, 흥륭 염상단의 단주 같은 사람들이 공손히 대했었지. 지금 눈앞의 단삼육과 무공화상처럼.
사부가 숱한 고생 끝에 간신히 되찾은 항산의 검. 복룡검식을 십육식 전부 알고 전수해준 해원기에게.
이제 떳떳하게 ‘오라버니’라고 부르게 된 청년. 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것도 어느새 잊었었나. 그러다가,
“풍화절세, 응양구천…….”
오보혜의 이어지는 혼잣말에 문득 머릿속에 번갯불이 친 것 같았다.
오소민의 비꼬는 듯한 소개말을 취개와 무공화상이 절반씩 풀어냈던 구절. 처음 항산에 올라갈 때였던가, 이번에 항산에서 내려오면서였던가. 산서성의 물길인 분하(汾河) 주변 백성들 사이에 떠돌던 얘기를 우연히 들었었지.
몇 년째 봄철에는 수로(水路)를 다시 닦아 범람을 미리 막아주는 신령이 다녀간다는 전설.
풍모와 재주가 세상에 견줄 데 없이 뛰어나고, 그 기세는 마치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매와 같다는 신령.
그 이름이.
증명단이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검왕!”
오보혜가 귀를 막으며 펄쩍 뛰고, 주루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
엄청난 목청에 다들 얼떨떨하긴 했지만,
증명단을 향한 시선에는 전혀 당혹한 기색이 없다. 그저 기특하게 여기는 느낌뿐.
그래, 그랬다.
해원기의 진짜 신분. 그건 전설에 나오는 검왕이었다.
새로 나눈 자리.
마주 보고 앉게 된 오보혜가 먼저 오소민에게 물었다.
“해 대협이 정말 그분, 그분의 제자인가요?”
조심스럽게 한껏 낮춘 음성. 한 탁자 건너 따로 자리를 잡은 해원기 쪽을 흘끔거리던 오소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걸요. 그나저나 소단과 악형이 알 줄은 몰랐네. 매년 산서 분하의 수로를 뚫어 봄장마를 미리 막은 신령이라니. 그런 식으로 전해지는 수도 있구먼. 그럼 악형은 누구에게서 들은 얘기인 거요?”
검왕이라는 칭호.
용문세가의 천금이 아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오래전에 몰락했던 항산파를 새로 계승한 증명단이나 희한한 방법으로 도 닦듯 무공을 익힌 악송령에겐 낯선 이름일 터.
분서현(汾西縣) 백성들 사이에 전설로 구전되었다는 사실도 신기하지만,
산동의 해안과 태산에만 머문 악송령은 어떻게 알았을까.
여간해선 입을 열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악송령도 ‘검왕’이라는 소리에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계속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도사……, 먼저 해 대형에게 물을 게 있소.”
오소민의 질문에 답하려던 말을 억지로 삼킨다.
내주 출신, 어려서 군에 끌려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 외팔이 노인을 만났다고. 태안현에서 거기까지 들었다. 길을 일러주는 스승이란 뜻의 도사, 그렇게 부르라고 했던 외팔이 노인이 아무래도 검왕의 소문을 일러주었을 텐데.
해원기의 신분을 알자 물을 게 있단다. 그러고 나서야 상세한 내막을 알려주려나.
과묵한 입이 이렇게 밝히는 데야 더 물을 도리는 없고.
증명단이 더는 참지 못하고 급히 묻는 것부터 응해줘야 했다.
“그러니까 검왕은 민간의 전설이 아니라 본래 무림의 칭호였다는 거잖아요. 그럼 언제부터, 오라버니 나이로 어떻게 그 이름을, 아니, 그 뜻이 뭐죠? 검왕? 왕이란 글자를 떡하니 붙여서. 검을 쓰는 자 중에 최고라는 뜻인가?”
질문이 갈팡질팡. 증명단 자신도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헷갈려서다.
오소민이 괜스레 입을 주억거렸다.
하긴.
기묘한 과정으로 검왕의 전설을 들은 증명단으로선 무림과 어떻게 연관시켜야 할지 모르겠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해원기에게 검왕이라는 칭호가 붙은 이유. 너무나 많은, 또한 복잡한 과거의 고사가 얽혀있고, 엄청난 얘기들이지만.
그 얘기들 대부분은 당사자에 의해 봉인되었잖나.
아무리 내막을 아는 오소민이라도 대충대충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뭇거리자 오보혜가 가만히 증명단의 팔을 잡았다. 조금 전 경악했던 심정을 다스렸는지 본래 차분했던 표정을 회복했다.
“단매,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란다. 왜냐하면, 단매가 이제 걷기 시작한 강호, 단매가 다시 일으키려는 항산의 검. 심지어 당세 무림의 모든 것이 해 대협이 이은 사승(師承) 덕분이거든. 그리고 검왕이란 예칭은 그저 최고의 검객이라서 붙은 게 아니야. 강호에서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지키는 이라는 뜻이지. 다만 손에 든 것이 검이기에.”
그래서 검왕이다.
제대로 ‘단매’라고 부르며 진짜 여동생 대하듯 알려주지만,
그 내용이 지나치게 크고 추상적이라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오보혜 덕분에 오소민도 말할 거리가 떠올라,
“뭐, 만검지존(萬劍至尊)에 백협표상(百俠表象)이란 표현도 있구나. 에, 본인을 놔두고 뒤에서 떠들기는 그렇지만. 쩝.”
소리 나게 입맛을 다시며 말을 맺을 수밖에.
성질 급한 증명단이지만, 더는 캐물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검의 으뜸이요, 모든 협객의 본보기란다.
‘고구마 대장’이 이렇게나 대단한 인물이었나.
어안이 벙벙하다.
이쪽은 사뭇 심각한 분위기.
해원기의 말이 끝나자 단삼육이 호로병으로 지저분한 머리를 문질렀다.
“꽤 복잡하군요. 아홉 무리의 도적, 그중 하나가 장풍무명 진자현이고. 단서를 찾다가 마주친 동창, 그리고 제남에서 벌어진 사건에다 하북팽가와 반룡령이라. 흐음.”
이제까지의 경과가 한 가지도 평범치 않아서, 듣는 쪽도 머리가 복잡할 지경.
그러다가 문득,
단삼육의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 걸리고,
“은근히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그래도 해 소협(少俠)이 아주 용코로 걸렸기에 기어이 현신하게 되었으니. 헤헷.”
해원기가 무림에 발을 내디딘 사연을 걱정하긴커녕 차라리 반기는 표정.
무공화상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음모가 끼어든 느낌이오만, 덕분에 해 소협을 만나게 해주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누구에게 사례를 표할지, 그게 문제지만. 남몰아미타부르.”
도로 본래의 해학적인 면모를 보이니, 해원기 또한 어색하게 고소를 머금어야 했다.
오래전의 인연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을 반겨준 건 오로지 사부 때문이었으나, 그 소년이 강호와 무림을 외면한 것도 이해해주었다.
자기 뜻에 따라 사는 삶. 세상을 위한답시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건만,
그 뜻을 존중해주었고,
기다려주었다.
지금도 ‘왜 그랬냐’고 묻지 않는다.
“면목이 없군요.”
해원기가 가만히 속마음을 드러내는데도 모른 척.
단삼육이 호로병을 흔들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제 조금 안정이 될 만하니까 또 암류가 꿈틀대는구먼. 어쩌겠소, 어쩌면 이게 강호의 생리일지도. 그래도 그 가운데 인연이 이어지는 게 인생의 묘미, 귀염둥이 막내 사제가 친구가 된 게 신기하기만 하외다.”
거지의 지저분한 머리칼에 희끗희끗한 게 섞이는 나이. 새삼스럽게 인연의 기묘함을 감탄하고.
무공화상이 화제를 되찾았다.
“동창이라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될 공산이 크지요. 정하불상범의 묵계가 이제는 그 의미를 잃을 시기라. 그보다 그들의 처사가 정도가 아닌 사도요, 왕도를 버리고 패도로 기울었으니. 해 소협은 그 낌새를 발견한 듯 하오만?”
해원기의 얘기에서 느꼈던 부분을 다시 묻자, 단삼육도 표정을 고쳤다.
“동창에서 수족으로 쓰는 금의위야 차치하고라도 환관들이 펼친 무공이나 병기. 그리고 반룡령에서 왔다는 망나니들. 의심스럽다고 한 부분이…….”
“무공입니다. 금의위가 전진 계통의 무공을 익힌 거야 예전에 대내(大內)로 흘러 들어간 일부분이라 치겠으나. 환문과 동해삼사의 흔적을 보고 나니 환관들이 지닌 공부도 점점 그쪽이라 여겨지더군요.”
그쪽.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인상이 동시에 굳어진다.
“곳곳에 흩어진 잔재를 다 찾아 없애진 못했어도…….”
“잔당이 영광종(靈光宗)이란 걸 만들었지만, 중원에 진출하진 못했거늘.”
해원기의 말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믿고 싶지 않아서다.
강호를 완전히 말살하려 했던 사악한 망령.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다.
“저도 설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죠.”
해원기의 말에 단삼육은 호로병을 벌컥 들이켰고, 무공화상은 희한한 불호를 무겁게 외웠다.
“남몰아미타부르.”
승려의 불호에는 정화의 힘이 있다던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불호라도 벽세(僻世)라는 더러운 이름을 지우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