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78화 (79/410)

제20장 청명상하(淸明上河) (2)

작은 주루의 주방 쪽은 대부분 뒷문. 용문세가와 개방이 마련한 장소이니만큼 보안이 철저할 게 당연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으니.

뒷문으로 들어온 이가 적일 리 없다.

그런데 그 트림 소리가 전해지자마자,

오소민의 안색이 싹 바뀌어 벌떡 일어났다. 탁자를 밟고 맞은편의 해원기 머리를 넘어 그대로 튀어나갈 자세.

다들 의외의 목소리보다 이 반응에 깜짝 놀라는데.

일행이 들어왔던 입구에서,

“뭐 좋은 걸 공양하려고 오라 하나? 아미타부르.”

이 또한 생전 처음 듣는 희한한 불호.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쪽을 향하기 전에 오소민이 먼저 풀썩 주저앉는다.

누가 마혈이라도 점한 것처럼 맥이 빠져서.

해원기는 다른 일행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대신에 흥미로운 눈길로 오소민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오만상.

이 친구를 안 이래로 준수한 얼굴이 이렇게 왕창 구겨진 걸 처음 보았기에.

그리고 주루에 들어서는 두 사람.

주방 쪽은 까치집을 지은 머리에 낡은 거적을 걸쳤고, 구멍이 숭숭 난 바지에 헤질 대로 헤져서 발가락이 다 나온 짚신을 신은.

그야말로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통 거지.

커다란 호로병을 연신 기울이는 얼굴이 취기로 새빨갛다.

또 입구 쪽은 해학적인 달마도에서 고스란히 빠져나온 듯한 화상. 눈썹도 거의 없는 커다란 눈을 되록되록 굴리고 엉성하게 난 수염 가운데는 헤 벌어진 입, 여러 겹 기운 승포로 넉넉한 체구를 감싸고 아장아장 걸어오니.

달마를 닮은 화상이 먼저 오소민을 향해 아는 체를 한다.

“아니, 아니. 이게 누구야. 거지 노릇 하기엔 지나치게 빼어난 용모, 그 고운 얼굴 아끼느라 개방의 신비가 된 순행장로잖아? 허어, 겨우 일 년 지났는데 정말 몰라보게…….”

“어이, 오 년이라고, 오 년. 이젠 몇 년 지났는지도 모르나? 꺼억.”

정통 거지가 툭 끼어드는데 그 턱을 타고 술이 줄줄 흐른다.

화상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질색하곤,

“더러워, 더러워. 어쩌다 저리되었을꼬. 남몰(南沒), 아미타부르.”

나름 정중하게 외우는 불호가 또한 생전 처음 듣는 희한한 소리라.

강호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 하지만, 직접 본 이가 얼마나 될까. 등장부터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사람.

아예 젊은이들의 얼을 빼놓았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마침 오보혜가 거론한 직후였으니까.

취개 단삼육(段三六)과 무공화상.

풍진삼우에 속한 두 사람.

일행이 어쩔 줄 모르는 건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제각각 의자를 당겨 근처의 탁자에 아무렇게나 앉아버렸고,

그제야 오소민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역시 총단 근처는 불길하구나. 용문세가에서 이가주가 온다는 소식에 왠지 자꾸 생각이 나더라니. 그나마 한 명은 빠져서 다행이랄까.”

오소민 역시 전혀 소개할 마음이 없는 듯.

단삼육이 호로병을 탁자에 놓으며 입맛을 다셨다.

“쩝, 무당산은 좀 멀잖냐. 그래도 너 한번 보겠다고 부리나케 달리고 있을 게다. 다들 너를 워낙 귀여워해서리. 크크크.”

해괴한 웃음이 나오자마자 무공화상도 점잔을 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렴. 울화통 도우(道友)가 빠질 리 없지. 빈승(貧僧) 또한 이렇게 불공대천의 원수를 찾은 것처럼 기를 쓰고, 아, 이게 아닌가? 아, 아미타부르.”

뭔가 엉뚱한 예를 들다가 희한한 불호로 마무리.

‘울화통’이란 물으나 마나 풍진삼우의 나머지 한 명인 부덕도인일 터.

“으으으.”

오소민이 아예 머리를 부여안고 앓는 소리를 내자,

만족한 표정이 된 단삼육의 시선이 비로소 움직였다.

“으흠, 이 복스러운 아가씨가 바로 세가의 천금, 용문의 지낭이로구먼.”

오보혜가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났다.

“용문의 오보혜가 삼가 개방의 호법장로님과 소림의 무공선사를 뵈옵니다.”

두 손을 모으고 머리까지 숙인 정중한 인사.

그러나 두 기인의 기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으잉? 술귀신은 호법장로고 난 그냥 선사야? 나도 숭산(嵩山)에 가면 어엿한 호법수좌(護法首座)라고.”

“중이 ‘나’가 뭐야. 빈승이라 한다며? 취했는가? 꺼어어억!”

“그거야 가난해서, 아니지. 거지 앞에서 가난하다고 자칭하면 욕이 되겠네. 그렇다고 부승(富僧)? 이건 말이…에,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 과연 듣던 대로 총명한 여시주로세. 남몰아미타부르.”

굉장한 트림과 희한한 불호가 거듭되니 머리가 아플 지경.

머리를 부여안은 오소민의 심정이 슬슬 이해 간다.

그래도 일단 인사를 마친 오보혜가 명문의 후손답게 다시 예를 갖추었다.

“두 분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에 불민한 저 때문에 여러분께 폐를 끼쳤으나, 다행히 개방의 오 장로와 좋은 분들 덕에 무사히 하남까지 올 수 있었지요. 단 장로님과 선사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깍듯이. 단삼육과 무공화상에게 차례로 사례하자, 이번엔 무공화상이 어색한 듯 딴청을 피우며.

“에고, 무슨 예를 이리. 에, 술귀신, 그런데 귀염둥이와 세가의 지낭만 있는 줄 알았더니 얘들은 누구야?”

세가의 지낭이 오보혜니까 ‘귀염둥이’는 오소민일 듯.

오보혜의 정중한 인사는 받지도 않고 딴소리. 단삼육이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한다.

“으아아함. 몰라. 거지들이 아무리 연락방법이 많아도 이번에는 빠른 것만 받았거든. 빠르면 내용이 워낙 간단해서리. 순행장로와 오 소저 외. 이렇게만 들었지. 귀염둥아, 네가 알려주련? 히꾹.”

술 취한 것 치고는 그래도 제대로 말을 하는 편인데.

이번엔 트림 대신에 딸꾹질이라.

이젠 기행이라기보다는 거의 광태에 가까워, 오소민의 심정을 짐작한 오보혜가 일어선 김에 자신이 소개를 맡으려 했지만.

“아, 이쪽은.”

“잠깐! 아니지! 그건 이사형 말대로 내가 해야지.”

갑자기 머리를 번쩍 쳐든 오소민이 마치 고함치듯 버럭 소리를 질러서.

주루 안이 윙, 하고 울린다.

이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나. 아니면 이 광태에 한술 더 뜨기로 했나.

맑았다가 흐렸다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변화무쌍한 봄 날씨처럼.

잔뜩 구겨졌던 오소민의 얼굴이 이번에는 환하게 펴졌다.

이 친구가 괜히 소릴 질렀을 리 없지.

맞은편에 앉은 해원기로선 쉬지 않고 변하는 그 표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열심히 감상을 계속하는데,

오소민이 소리 지른 걸 잊어먹은 것처럼 의젓하게 손을 폈다.

“동도끼리 딱히 사례 받을 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만. 하여간 고맙습니다, 오 소저. 그럼 그간 함께 고생한 동료들의 소개는 제가 하도록 하죠. 명성이 쟁쟁하신 풍진삼우의 두 분께. 어험.”

헛기침으로 목소리까지 가다듬는 연극에,

기어이 증명단이 쿡쿡거리기 시작했다.

기인이사의 진면목을 처음 보지만, 이 개방 순행장로도 어지간히 기인인 건 이미 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극이란 게 이럴까. 그야말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배꼽 잡을 연극,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판이었으나.

“먼저 꽃처럼 아름다운 방년 십팔 세의 증 낭자.”

“엑?”

오소민의 손이 대뜸 자기를 가리키는 통에 목이 콱 막혔다.

보통 여러 사람을 소개할 때는 나이순.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니까 악송령이 맨 처음일 줄 알았다.

가장 나이 어린 자신은 마지막일 텐데. 아무리 기행이 거듭된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방년 십팔 세’라고 밝히면서까지.

완전 거꾸로다.

그러나 따질 새가 없다.

“무림에서 그저 전설로만 들었던 이름,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여겼던 오악검파의 하나, 항산파의 절정검학을 이은 유일한 후예, 복룡검식의 주인인 당대의 항산파 장문제자입니다.”

이렇게 거창한 소개라니.

“에에? 항산파?”

“복룡검식이라니. 오오, 아미타부르.”

어안이 벙벙하지만, 당장 단삼육과 무공화상이 놀란 듯 감탄을 섞어 쳐다보는 통에.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아, 네. 저, 소녀는 증명단이라고 합니다.”

고작 이름 석 자 밝히는 데 힘이 든다.

멸문된 지 백 년이 넘은 항산파. 이제 열여덟 먹은 소녀가 돌연 그 장문제자라니. 오소민의 과장된 소개보다 그 신분이 심상치 않아서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시선이 빠르게 증명단을 훑는다.

술에 전 더러운 몰골, 어리석은 언행만 일삼던 둘의 눈이 단숨에 응운검과 북룡포를 살피고 뭔가 물으려 하지만.

오소민의 소개가 더 빨랐다.

증명단 다음 가리킨 이는 악송령.

“어려서 군문에 팔린 삶이 기구하지만, 인생의 기우(奇遇)가 어찌 심산에만 있으랴. 너른 바다를 보며 한세월, 또 높은 산 속에서 한세월. 절차탁마와 득심응수를 가슴에 새기고 오직 칼 한 자루로 도를 닦았으니 삶의 결이 곧 백병지수라. 고박(古朴)한 환도처럼 듬직해서 제가 간신히 사귈 행운을 얻은 악형입니다.”

갈수록 과장이 심해져서 길거리에서 허풍을 치는 약장수는 저리 가라다.

방심하다 일격을 당한 증명단도, 설마 하고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악송령도 입이 저절로 벌어질 지경이지만.

워낙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 악송령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주먹을 모아 쥐었다.

“악송령입니다.”

단삼육과 무공화상 역시 오소민의 빠르고 엄청난 소개에 휩쓸려버렸다.

증명단에게 물으려던 걸 잊고 듬직한 체구에 묵직한 저음을 내는 사내를 쳐다본다.

“환도라면…보기 드문.”

“백병지수라, 오랜만에 듣는구먼. 담도, 그래, 담도였지.”

사문이 어디고 내력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래도 오소민이 ‘악형’이라고, 사귈 행운을 얻었다면.

항산검파의 장문제자라는 소녀도 궁금하지만, 이 묵직한 사내에게 더 호기심이 생긴다.

대번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오소민.

약장수 같은 소리를 떠들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직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표정만 살필 뿐.

처음 증명단, 다음 악송령.

온갖 수식어를 다 동원해 소개했다. 소위 기인이랍시고 항상 사람 골치 아프게 하는 괴짜 두 사람을 놀래주려고.

증명단은 사라졌던 북악의 검을 계승한 신분. 악송령은 정체불명의 도객. 예쁜 소녀는 신분이 뚜렷하고 묵직한 사내는 내력이 모호하다.

점점 호기심이 강해지겠지.

요렇게 살살 꾀어 함정에 확 밀어버릴 셈이다.

“에, 이 친구는 어떻게 설명해야 술귀신 사형과 멍충이 선사가 알아먹을까?”

오소민이 혼잣말이라고 강조하면서 혼자 머리를 갸웃갸웃.

평범치 않은 검과 피풍을 지닌 항산검파의 소녀, 평범한 듯 차분한 모습으로 칼의 길을 걷는다는 묵직한 사내.

누구에게 뭐부터 물어야 할지. 궁금한 게 한가득한 상태에서 오소민이 어투를 확 바꾸는 바람에.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눈이 자연스럽게 해원기에게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

흑의 경장에 더벅머리, 가슴팍에 동그란 철판을 매단 청년. 딱히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고,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주루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오소민과 그 일행을 살폈기에 다들 상당한 능력을 갖추었음을 예상했었다.

풍진삼우의 두 사람이다. 젊은이들이 어떤 수준인지, 무슨 기질을 지녔는지 정도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무공이 뛰어난 증명단은 항산검파를 이은 사정이 궁금했고, 가장 연장자로 보이면서 보기 드문 예기를 은근히 갈무리한 악송령은 어디서 배웠는지 알고 싶었다.

감탄이나 호기심은 겉으로 과장했을 뿐. 본래 이런 식으로 장단을 맞추며 오소민을 골려 먹던 게 옛 버릇이다.

그중 가장 관심이 가지 않던 자. 어디서나 볼 법한 심부름꾼? 궁벽한 산골에서 짐승이나 쫓는 사냥꾼? 그냥 그렇게 보이고.

그러고 보니 이 청년. 처음부터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주방에서 나온 단삼육과 입구로 들어온 무공화상을 등진 채. 무림기인의 등장에 주눅이 들어 웅크린 건가.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시선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공중에서 마주쳤다.

똑같이 가슴속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묘한 느낌.

“아!”

그때, 오소민이 손바닥을 탁, 치며 탄성을 올리고.

주루 안의 모든 시선이 저절로 모여들었다.

“그 풍모와 재주가 워낙 변변찮아서 세상과 끊어졌고, 기르던 매 한 마리도 정나미가 떨어져 아득히 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나. 이렇게 소개하면 될까, 해형? 푸하하하하.”

영문 모를 소리를 좌르르 늘어놓곤 혼자서 폭소를 터뜨리니.

다들 어리둥절.

오보혜도, 증명단도, 악송령도 처음 듣는 얘기. 게다가 이건 소개가 아니라 대놓고 비웃는 거잖아.

그렇지만.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얼떨떨하던 표정이 차츰 굳어진다.

“풍모와 재주면 풍화, 세상과 끊어졌으면 절세.”

“매 한 마리가 날면 응양이요, 아득히 먼 하늘이면 구천인데…….”

웅얼웅얼 수수께끼를 풀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홀연히 하나처럼 올라간다.

“해형? 성이 해라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마지막 청년이 그 소리에 답하듯 일어나 몸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콰당. 우직.

해원기가 웃으며 포권을 취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단삼육은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고꾸라졌고, 무공화상이 앉은 의자는 다리가 전부 부러져버렸다.

오소민이 계획한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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