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77화 (78/410)

제20장 청명상하(淸明上河) (1)

전통의 문파일수록 그 체계가 탄탄하다.

이제 막 강호에 나온 증명단에겐 모든 것이 다 신기하지만, 특히 항산파를 계승한 입장에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 그건 바로 문파로서의 체계다.

정가촌에서 잠시 쉬고 다시 말을 달렸는데 하남 경계로 들어서자마자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상구에 들어선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불쑥 나타난 서너 명, 일행을 뒷골목의 작은 주루로 안내하더니 마치 제 것처럼 제녕에서 빌린 말들을 이끌고 가버렸고.

그 작은 주루에 먼저 와있던 취객 몇은 갑자기 술이 깬 표정으로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는데.

희한하게도 일행의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갈수록 더 어리둥절한 건 자기뿐.

술과 요리에 손댈 생각도 없이 연신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해원기가 가만히 일러주었다.

“용문세가와 개방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아도 두 사람은 이미 각각 연락을 취했던 거지.”

“에? 어떻게?”

대뜸 목소리가 높아지자 오소민이 히죽 웃었고, 뭔가 생각하던 오보혜가 비로소 얼굴을 돌렸다.

“아, 제남에서 떠날 때 먼저 지급으로 연락했고, 오는 동안 틈틈이 행로를 알렸으니까. 강호에는 각기 독특한 연락수단과 자기들만 알아보는 표시가 있단다.”

함께 지내면서 거의 막내 여동생같이 되어버린 증명단이라. 오보혜가 몇 가지 예를 들어 자세한 설명을 추가해주자.

해원기가 오소민에게 말을 건넸다.

“이미 합의가 되었나?”

오소민이 재미있다는 듯 증명단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남에서 적각개가 열나게 보고를 올렸나 봐. 용문에선 이미 개봉으로 출발해서 우리와 거의 같은 시각에 만나게 될 걸. 동창이라니까 세가에서도 사전에 손을 좀 쓰는 모양이고, 반룡령이 끼었으니 경계를 더 강화하겠지.”

과연 그간에 벌어진 일을 참작해 그에 맞춘 대비를 시작했다.

당세 무림에서 용문세가의 지위는 예전만큼 높지 않으나, 관계와 상계에 걸친 영향력은 여전히 일반 문파들이 비할 수 없고.

천하제일대방이라는 개방은 규모보단 실력으로 손꼽히는 상태니.

동창과 반룡령을 상대하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합작이랄까.

“어디로 가는가?”

“응방원(凝芳苑)이란 곳이야. 개봉의 서북쪽 귀퉁이, 변하(汴河) 기슭에 있는 작은 동산이지. 세가 사람들이 온다니까 꽤 운치 있는 곳을 골랐네. 거지 주제에. 흐흥.”

“총단이 아니구먼. 개봉에는 온 적이 없어서.”

“아아, 총단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그 황량한 여우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 행여 거길 구경하자는 얘긴 꺼내지도 말게.”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악송령이 의아한 듯,

“여우굴?”

간단히 묻는 말에 오소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지 소굴이 뭐 다르겠소? 흙먼지 풀풀 날리는 더러운 폐가지.”

자기 문파의 본거지를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문파는 아마 개방뿐일 게다.

해원기가 쓴웃음을 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분들이 오실까?”

오소민이 악송령과 술을 나누려다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게 좀 우습게 될지도. 아무래도 주둥이 가벼운 둘째 사형이 돌아온 것 같아서. 용문세가에선 이가주(二家主)께서 직접 오신다네.”

쓴웃음을 짓던 해원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가주라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시선. 마침 증명단에게 간단한 설명을 끝내던 오보혜가 바로 말을 받는다.

“제 사숙이십니다. 호가삼원(護家三院)을 맡은, 성함은 엄정원(嚴正源)이라고 하시죠.”

관상무 일체의 용문세가라 가문을 지키는 조직도 호가삼원인데 그 우두머리가 직접 나온다.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해원기가 얼핏 머리를 스치는 기억 속에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소민의 둘째 사형.

개방의 호법장로인 취개 단삼육은 당세 무림에서 널리 알려진 고수. 개방과 용문세가 모두 사안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의미다.

이제 개봉에 이르면 소위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만나게 될 터.

묘한 감상이 들었다.

“아까 말들을 다 끌고 가던데. 그럼 개봉까지 어떻게 가요?”

증명단이 다시 묻는 말에 오보혜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좀 쉬면 세가의 인마가 올 거야. 제녕에서 빌린 말은 돌려주고 더 빠른 수단을 마련하겠지. 오늘 중으론 개봉에 들어갈 수 있을걸.”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인 듯. 용문의 지낭이라는 별명이 붙었어도 이번에 워낙 흉험한 일을 겪었던 오보혜의 얼굴이 많이 풀렸다.

“개봉에서 개방과 용문세가의 어르신들 뵙고, 또 이것저것 얘기하고. 흠, 그러다 약왕당은 언제 가려나. 생각보다 아주 머네요.”

맥이 빠진 듯, 축 늘어지는 증명단의 어깨.

항산에서 처음 내려와 호중객잔이나 태원을 오갈 때는 아는 길이니 괜찮았지만, 제남에서 산동 남부를 통과해 이제 하남까지. 여기서 또 대별산의 약왕당으로 가야 하니.

세상이 넓다는 걸 비로소 깨달아 지칠 만도 하다.

해원기가 요리 한 점을 집어 증명단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도 하남에 온 적은 거의 없지. 그래도 기운을 내자꾸나. 많은 걸 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뭔가를 배울 수 있으니까.”

접시에 놓인 건 얇게 저민 고깃점과 감자를 푹 익힌 서증편육(薯蒸片肉). 해원기의 의젓한 말에 증명단이 픽 웃었다.

“헷, 해 사부도 개봉은 가본 적 없다면서. 하는 말은 좋지만, 여전히 고구마, 아니, 감자 같다고요.”

어른인 체 뭐든지 가르치려 드는 말투가 우스웠나. 고구마가 감자가 되었어도 소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와서.

별명의 원조인 오소민이 같이 키득거린다.

“크큭, 고구마나 감자나. 소단, 그래도 괜찮은 소리 할 때는 좀 봐줘라. 아, 그리고 언제까지 사부야? 이제는 연극 안 해도 되잖아.”

같이 지내면서 어느 정도 호칭이 정해졌다. 나이 어린 증명단은 다들 ‘소단’이라고 부르고, 오소민은 ‘장로’, 오보혜는 ‘언니’. 워낙 말이 없는 악송령과는 대화한 적이 거의 없으니 ‘악 대협’이든 ‘증 낭자’든 상관없는데. 유독 해원기에게만은 여전히 ‘사부’, 물론 요리사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긴 해도.

오보혜도 같은 생각.

“그래. 명정언순(名正言順)이란 말도 있잖아. 소단도 해 대협이라고 불러.”

막 해원기가 놓아준 서증편육을 먹으려던 증명단이 대뜸 머리를 흔들었다.

“아유, 그건 아무래도 어색해요. 오 장로님이야 본래 개방 장로니까, 악…대협은 보기에도 대, 협, 같은데.”

일행 중에서 가장 체구가 큰 악송령, 그리고 과묵하기까지 해서 굳이 대협을 하나씩 끊어 읽어 강조하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해원기를 힐끗거린다.

“영 어울리지 않잖아요. 처음 봤을 때부터.”

“오, 그러고 보니 이 중에서 해형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소단이구나. 소단 가족이 하는 객잔, 호중객잔이던가, 거기에 투숙한 낯선 손님. 뭐,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겠지만.”

해원기를 놀리는 건 언제나 재미있다.

오소민만 동의하는 게 아닌 듯, 오보혜가 냉큼 말을 받고,

“그렇네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행색, 당최 뭐 하는 사람인지 짐작도 가지 않죠.”

심지어 악송령조차.

“처음부터, 무인 같지, 않았소.”

머리를 갸웃거리니 증명단이 잔뜩 힘을 얻었다.

“거봐요. 대협이라고 부르기엔 입이 간지럽다고요. 아, 물론 사부가 맞지 않는 것도 알죠. 그래도…….”

기승스런 성격이 오랜만에 드러난다.

싱글거리던 오소민은 한술 더 떠서,

“해형, 나이도 적은 편은 아니니까, 아예 소숙(少叔)은 어때? 아니면 워낙 어르신 말씀을 잘 하니까 대야(大爺)? 후훗.”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해원기의 유일한 친인인 탁 소숙을 끄집어내고, 해원기의 숨겨진 외호라면 왕야(王爺)라 불러도 될 터.

개방과 용문세가에 연락이 이어진 상태라 오소민도 이젠 마음이 완전히 놓여 작정하고 놀려댄다.

막내 삼촌이냐, 어르신이냐.

증명단이 말도 안 된다고 입을 내미는데.

“보살피고, 일러주고. 해 대형은 오빠 같소.”

불쑥.

악송령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꺼낸 말에 증명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무인 같지 않고, 오빠 같다.

개방의 자유분방함, 용문세가의 단아함, 그리고 악송령의 과묵함. 제남의 관도에서 반룡령의 괴상한 자들도 보았고, 오다가 재수 없는 신유문의 노문기도 만났다.

성격과 언행이 전부 다르지만, 그 안에는 전부 평범치 않은 기질을 지녀서. 자기 뜻대로 행사하려는 무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해원기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능력을 갖췄으면서도 평소에는 전혀 무인 같지 않다. ‘고구마 대장’이라고 놀려도 그저 웃을 뿐. ‘바보’ 같다고 놀리는 데도.

그러면서 무공을 가르치거나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언제나 든든하니.

항상 품어주는 건가.

‘소주, 고 계집애가 오빠, 오빠 하더니.’

어느새 훌쩍 커버린 여동생이 지껄이던 소리가 왜 지금 생각날까.

“오빠라기보다는 오라버니, 흡!”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게 낫겠네. 나도 이제부터 제대로 단매(緞妹)라고 할게.”

“호오, 항산파 장문제자의 오라버니라. 해형, 괜찮겠나? 킥.”

오보혜와 오소민이 동의하는 통에 또르르, 눈동자만 돌아간다.

당사자는 어떤 생각일지.

그런데.

증명단이 살짝 놀라서 입을 막았던 손이 저절로 떨어졌고, 다른 이들도 가만히 해원기를 보게 되었다.

아련한 눈빛. 해원기의 두 눈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려.

이렇게 풍부하게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거늘.

하지만, 그 눈빛도 금방 사라지고,

“뭐라 불러도 괜찮아. 소단, 편한 대로.”

또 답답한 대답이 나오는 바람에 다들 김이 새버렸다.

역시 ‘고구마 대장’. 덤덤하게 대답하곤 식어버린 차를 훌쩍 들이켠다.

그건 사실 내심의 격동을 감추려는 행동이다.

해원기는 가족이 없다.

아니, 가족이 있었다.

놀리는 재미도 상대가 이렇게 답답하면 줄기 마련.

오소민이 심드렁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둘째 사형이 왔다면 그 엉터리 같은 친구들도 보이려나?”

증명단도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기회라 얼른 되물었고,

“엉터리 같은 친구?”

자세한 설명은 언니가 해준다.

“오 장로의 이사형은 개방의 호법장로이신 취개 단 대협이셔. 그리고 소림의 무공화상(無功和尙), 무당의 부덕도인(不德道人)과는 아주 친해서. 이 세 분을 풍진삼우(風塵三友)라고 한단다. 모두 구주정문의 뛰어난 고인들이시…”

“쳇, 치승노도취개(痴僧怒道醉丐)가 무슨 고인? 불호도 제대로 못 외우는 멍청이 중, 툭하면 성질부터 내는 못된 도사에 맨날 술에 절어서 시시덕거리는 거지잖소. 그 셋이 모이면 정신이 없다고.”

“에에?”

오보혜의 설명과 대뜸 불만을 토로하는 오소민의 말에 증명단이 희한한 소리를 냈다.

중과 도사의 해괴한 이름과 그 이름만큼 엉뚱한 별명. 그러면서 한데 뭉치면 풍진삼우라는 아주 그럴듯한 칭호란다.

그냥 이름만 들어도 보통 괴인이 아닐 것 같다.

호기심이 확 일어나는데.

“젠장, 그동안 뒤에서 욕하는 것만 배웠냐? 꺼어억.”

주방 쪽에서 돌연히 들려오는 소리.

누군가 거하게 트림을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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