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사회부연(死灰復燃) (3)
잠깐 기억의 한 자락을 끌어당겼던 해원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무릎을 꿇은 채 옹송그리고 있는 인색이귀. 처음 관도에서 마주쳤을 때의 오만하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잔뜩 주눅이 들었다.
아니, 아예 겁을 먹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왜 이렇게 순순히 알려주는 거요?”
이미 신왕공을 푼 지 오래되었다. 특별히 신왕공 고유의 위엄이 드러나지도 않았을 터.
왜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질문이 갑자기 바뀌자 일모불발과 근근계교도 움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그게…에, 그런 게, 있습니다. 봉래의 유학 안에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구명(救命)의 유훈(遺訓)입죠. 살고 싶으면 반드시 지키라고.”
묘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해원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걸 아는지, 일모불발이 얼른 말을 이었다.
“조, 좋게 말해서 구명의 유훈. 사실은 구요(求饒)의 계율이 맞습니다.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구요’가 용서를 구한다는 뜻이긴 해도, 실제로는 살려달라고 싹싹 빌 때 쓰는 말이다.
뭔가 특이한 구명의 절초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그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싹싹 비는 거란다. 계율이라면서.
“빈다? 누구에게?”
자연히 반문이 나오고.
근근계교가 마른 얼굴을 긁어댔다.
“하나는 오래된 건데, 혹여 해동으로 가면 절대로 백산(白山)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백산의 신선을 뵈면 무조건 땅바닥을 기면서…….”
빈다.
일모불발은 갑자기 땀이 나는지 이마를 훔치며,
“하나는 얼마 되지 않은. 봉래선이 마지막으로 보낸 연락이었던 듯한데. 에, 만약 상상을 초월하는 신령한 검을 만나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때. 그, 그 검을 쓰는 이가.”
말을 자꾸 더듬거리자 근근계교가 답답한 듯 머리를 쳐들었다.
“백년제일검사(百年第一劍士)라는 이름입죠, 네. 그런 이름과 관계있는 이라면 그냥 ‘죽여줍쇼’하고 애걸복걸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허!”
해원기가 탄성을 올리길 기다렸던가.
둘이 동시에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죽여줍쇼!”
“죽여줍쇼!”
그야말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불쌍하기까지 한 꼬락서니인데.
해원기는 뜻밖에 듣게 된 명칭 때문에 망연해졌다.
‘백년제일검사’. 설마 여기서 들을 줄이야.
사부를 가리키는 예칭(譽稱) 중의 하나.
인색이귀를 향했던 시선이 초점을 잃고 아련해진다.
그랬구나.
인색이귀가 생포되자마자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던 이유를 알았다.
해원기가 가슴속에 회오리치는 감상을 다스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그랬군요.”
이렇게 받아주는 수밖에.
관도에서 증명단에게 복룡검식을 전수할 요량으로 검왕수를 보였고, 조금 전에는 탈명궁사의 편전을 검왕법신으로 퉁겨내었다.
아마도 ‘백년제일검사’에 관해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 듯.
양주의 학술을 바탕으로 삼은 자들, 예전에 봉래선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고해바쳤다더니.
자신이 과거의 사부와 똑같은 상황이란 걸 깨닫자 절로 쓴웃음이 나오지만.
여기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럼 백문량과 궁수들은 완전히 철수한 거요?”
인색이귀의 머리통이 슬그머니 땅바닥을 떠난다. ‘죽여줍쇼.’라고 했는데 질문이 계속되는 건 좋은 징조.
“넵. 저격이 실패하고 탈명궁사까지 다쳤으니 더는 볼 일이 없는 거죠.”
“개봉에서 또 뭘 요구할지는 몰라도. 에, 저희는 빠질 겁니다.”
“빠진다?”
“그럼요. 이런 본전도 못 찾을, 아니, 그런 해괴한 집단과는 그만 어울리려고요.”
“자꾸 나쁜 짓만 시키는 것 같아서. 아예 중원무림을 떠날 작정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 둘이 마침 그런 마음을 먹던 차에. 바다로, 바다로 나가죠. 뭐.”
“남해는 너무 멀고, 동해는 좀 껄끄럽지만. 그래도 집이 최고니까. 그렇지?”
“그럼, 그럼. 몰래 들어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봉래도로, 여길 떠나면 곧장 봉래도로 갑니다. 절대로.”
이렇게 수다스러운 작자들이었나.
대화가 끊기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둘이 주거니 받거니. 강호를 떠난단다.
당장 눈앞의 위험을 피하는 게 급해서 빈말을 지껄이는 걸지도.
해원기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제를 되돌렸다.
“백문량이 우리 일행을 어떻게 찾았소?”
수다스럽던 인색이귀의 입이 비로소 닫히고,
일모불발이 통통한 볼을 불룩대다가 슬쩍 근근계교를 쳐다보았다.
“그건 잘, 어디서 소식을 받았대?”
근근계교가 또 얼굴을 긁었다. 기억을 되살리는 듯.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마, 태산 쪽으로 내려오다 들었을 걸? 관도에서 우리 덕에 내빼고선 제남으로 들어갈 생각을 안 했잖아. 그리고서 남행하다가 갑자기.”
하나씩 따져보는 소리에 일모불발이 꿇은 무릎을 탁, 쳤다.
“아하. 맞다. 소령주가 한참 시무룩하다가 골샌님들이랑 만났었지. 유생인지 도사인지 헷갈리는 것들. 그러고선 대뜸 탈명궁사를 불렀어.”
해원기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유생인지 도사인지 헷갈리는 골샌님들. 태산 쪽으로 내려오다 만났단다.
해원기 일행이 각각 분장하고 마차를 빌린 곳이 바로 태안현.
그렇다면.
“혹시 조양신문이라고 하지 않았소?”
인색이귀 둘이 똑같이 갸웃거리고.
“글쎄요. 그때는 소령주가 한참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좀 떨어져 있었거든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리송한 표정이라 해원기가 질문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버릇처럼 손이 올라가 눈썹을 문지른다.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은 조양신문이다. 조규헌이란 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으니까.
백문량이 제남으로 들어가지 않은 건 아마도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서 일 듯. 황정리를 중독 시켰던 위 소감, 어떻게든 제남에 들이지 않으려고 관도를 막았었다. 그 역할을 백문량과 눈앞의 인색이귀가 맡았는데. 막상 제남에선 태감이 등장하면서 백문량 등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었지.
동창과 조양신문, 그리고 반룡령. 뭔가 얽힌 듯하면서 또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애매모호한 관계.
해원기가 생각을 멈추고 손을 내렸다.
이 정도면 알아볼 건 다 알아본 셈.
“흠. 되었소.”
인색이귀의 머리가 재빨리 들렸다. 뚱뚱하고 홀쭉한 둘, 전혀 상반된 외모지만, 해원기를 우러르는 얼굴엔 똑같이 기대가 가득한 표정.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쯤에서 풀어주려나.
해원기가 신왕공을 운용하며 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또 회계산 근처에서 몰래 나쁜 짓을 했다고 들었소. 지금은 약속한 대로 놓아주겠지만, 다시 그런 소문이 들리면 응당한 벌을 받을 것이요. 아까 말한 것처럼 곧장 강호를 떠나는 것도 좋겠구려. 알겠소?”
심해처럼 깊은 두 눈에 신광이 어리고, 무거운 기운이 서서히 퍼지자.
인색이귀가 다시 납작 엎드렸다.
“넷. 부디 용서를. 가르침을 따라.”
“아무리 어려워도 중원을 떠나 동해로 가겠습니다.”
아무리 목숨이 걸렸어도 그렇지.
지나치게 비굴한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해원기가 머리를 돌리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힘주어 전했다.
“악행의 소문이 돌면 동해 봉래도라도 찾아갈 거요.”
슬쩍 위협하는 말투.
“어찌 감히!”
“명심봉행!”
체면이고 뭐고. 머리통으로 바닥을 두드릴 셈이라 해원기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사부는 무림을 떠나면서 자신을 숨기고자 애썼다.
마(魔)를 멸하고, 사(邪)를 부수어 세상을 구했지만,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세운 공과 베푼 덕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고협(古俠)의 정신. 그 정신의 구현이기도 했으나.
인심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단지 천외인협(天外仁俠)이라는 외호 하나만 남겼을 뿐, 용모도 나이도 출신도 내력도 밝히지 않았던 사조(師祖)와 달리.
사부는 강호에 고스란히 드러났었으니까.
이는 반드시 시기와 질투를 낳는다.
더구나 그 무공이 중원의 어떠한 문파와도 궤를 달리하고, 그 뿌리가 천외(天外)를 능가하는 고대의 신비였기에.
중화라 자부하고 주변을 죄다 오랑캐로 치부하는 자들에겐 큰 충격이 된다.
부귀는 물거품이요, 공명은 뜬구름이다.
세상에 아무런 욕심 없이 오직 남몰래 강호의 안녕을 도모할 뿐이지만, 지나친 영예와 드러난 공덕은 필경 엉뚱한 귀찮음을 초래할 터.
그래서 채 이십 년이 되지 않는 시간에, 생기를 회복하는 무림에서 사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구주정문을 비롯한 과거의 영웅들이 사부를 존경하여 그 뜻을 기렸으니까.
당세의 무림에선 거의 잊힌 사부.
그런데.
사부를 적대시했던 쪽은 그 무서움을 잊지 못했나 보다.
동해삼사의 후대인 인색이귀가 ‘백년제일검사’라는 말을 떠올리자마자 벌벌 떨었으니.
잊지 않아야 할 쪽은 잊어가고.
잊고 싶었던 쪽은 되레 잊지 못하는가.
세상일이라는 게 참 기묘하다.
‘어쩐지 과거의 벽세(僻世)를 닮은 행태다. 삿된 짓을 하는 무리라면 어차피 닮은꼴이겠지만, 지나치게 비슷해. 벽세는 완전히 와해되었고, 그 잔재는 겨우 영광종(靈光宗)이라는 사교로만 남았거늘. 누가 있어 그 흩어진 부스러기를 되살릴 수 있을까. 가만, 영광종의 근거지가 동해의 보타산(普陀山)일 텐데.’
무서운 속도로 일행에게 돌아가던 해원기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 그 둘에게 동해 쪽도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다.”
생포해서 심문하는 게 영 서툴렀다는 아쉬움.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인색이귀가 보기 흉할 정도로 비굴하게 굴었고, 일행과 오래 떨어지지 않으려 서둘렀기에 놓친 부분이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서.
이미 일행이 모여 있는 바위를 넘었다.
“해형! 괜찮아?”
당장 오소민의 살가운 목소리와 함께 일행이 모여들어, 조금 전의 복잡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흠. 개봉으로 간다고 했다라.”
오소민이 어둠 속을 멀리 보며 인상을 썼다.
해원기의 간략한 설명. 상의할 부분이 여럿 있지만, 당장 중요한 건 자신들의 행로가 드러났다는 것.
말은 죽어서 악송령이 따로 땅을 파고 묻어주는 중이고, 마차는 다 부서졌다.
오보혜가 작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관도 쪽을 가리켰다.
“낙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그 길목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내려가 상구(商丘)로 들어가면 돼요. 오히려 잘 되었어요, 흥륭에서 본가에 연락을 취하기로는 복양(濮陽)으로 들어가 개봉을 거친다고 했으니, 적들도 그쪽만 신경 쓰겠죠.”
“하긴. 복양보다는 상구 쪽이 더 길이 편하지. 아예 제녕(濟寧)쯤에서 말을 빌려서 달릴까?”
대담하게 말을 빌린다는 소리에,
막 돌아오던 악송령이 오소민을 보았다.
“말 한 마리, 두 냥이 넘고. 압금(押金)도 매우 비싸오.”
압금은 보증금. 말이란 게 워낙 비싼 운송수단이요, 그걸 인원수대로 다 빌리려면 엄청난 금액이 들 터.
태안에서 마차를 구할 때 이미 거금을 썼거늘.
오소민은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허리춤을 두드린다.
“그까짓 거. 제남에서 받은 게 아직 남았고, 부족하면 압금만 내고 상구에 들어가서 돌려주지 뭐. 상구에 가면 일단 하남 경계니까 용문세가가 책임져 줄 테고.”
남한테 얻어먹을 궁리지만, 본색이 거지이니.
오보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미 노출된 이상 속도가 우선. 적이 생각지 않은 곳으로 예상보다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아요.”
오보혜도 슬슬 오소민이 희떠운 소리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노선과 수단이 결정되었으면 행동으로 옮길 때.
한밤중이지만 화살이 잔뜩 꽂힌 이런 곳에 더 머물 생각은 없다.
해원기가 바로 몸을 일으키는데.
“출발합시다.”
“자, 잠깐!”
갑자기 손을 들고 제지하는 증명단. 웬일인가 싶어 돌아보는 시선에 오만상을 쓴 얼굴이 들어온다.
“나, 나는, 말을 타본 적이…없다구요.”
심술이 난 듯, 계면쩍은 듯 붉어진 안색. 말을 탈 줄 몰라서 부끄러웠나.
짐을 챙기려던 일행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고.
흉험한 습격을 당한 긴장도 조금 풀렸다.
“밤길을 경공으로 달려야 해가 뜰 때 제녕에 들어가겠지. 그때까지 내가 기초를 알려주마.”
해원기가 앞장서며 하는 말에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이 ‘고구마 대장’은 말도 잘 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