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사회부연(死灰復燃) (2)
생각에 잠기느라 침착해진 걸음걸이.
일행이 미리 바위 뒤로 피한 후에, 혹시나 하는 염려로 해원기가 일행 주위에 검기를 심어두기까지 했고. 곡사와 직사를 막론하고 화살은 전부 해원기에게 집중되었으니.
직접 일행을 노린 자들은 없는 듯.
그런데.
해원기가 돌연 땅을 박차고 바위 위로 몸을 날렸다.
발이 닿자마자,
“오형, 잠시 더 부탁하네!”
짧은 말을 건네기 무섭게 그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휘잉.
뒤늦게 이는 돌풍 한 줄기. 오소민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싸움은 끝난 것 같더니 갑작스러운 변화. 그래도 오소민은 악송령과 시선을 나누고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
해원기가 만약을 위해 손을 쓴 것까지 아는데, 돌아오다가 도로 급하게 떠난 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환도라는 칼을 꺼내든 악송령이 허리를 펴고 대담한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든든하다.
‘담도라더니. 꽤 하잖아.’
궐리빈관에서 노문기와, 여기서는 무수한 화살과. 칼 쓰는 걸 두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믿음직하다.
해원기가 어떤 싸움을 했는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왜 돌아오다 사라졌는지.
궁금해도 전혀 겉으로 드러내질 않는다.
그건 오소민 자신만큼 해원기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는 뜻.
특이한 사내요, 괜찮은 친구다.
어둠 속에 둘만 남게 되자,
일모불발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어구구, 이게 웬 고생이람? 아주 진이 다 빠졌어.”
몸에 걸친 고급스러운 비단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곁에 선 근근계교도 허리를 굽히며 맥 빠진 얼굴.
“완전 적자야 적자. 이번엔 투자할 때가 아니었는데.”
“그렇지? 소령주의 일이면 쉬울 줄 알았던 게.”
“주판이랑 저울까지 다 부숴 먹었으니.”
“으으. 손해가 막심하군. 보상해달라고 따라가기도 싫다니까.”
근근계교의 찢어진 눈이 일모불발을 흘겨보았다.
“그러니까 진즉 빠지자고 했잖아. 소령주랑 있어 봤자 본전을 찾기는커녕. 쯧.”
불만스럽게 혀를 차자 일모불발의 살집 가득한 눈매도 휙 올라붙는다.
“그게 내 잘못이냐? 너도 일단은 있어 보자고 했잖아.”
“그거야 바로 돌아갈 요량이었으니까. 우리끼리면 되돌아갈 비용도 다 우리가 내야잖아. 거기서 본전 얘기 꺼낸 건 너고.”
“병기 값은 받아내자고 한 게 누군데? 탈명궁사(奪命弓士)와 강설궁대(降雪弓隊)를 보자마자 장사가 되겠다고 반색을 하고선.”
“얼씨구. 난 소령주를 보호하러 온 건 줄 알았다고. 진방각궁을 해동에서 구해준 적이 있으니까 도움이 될 테고.”
“그게 무슨. 비싸다고 툴툴거리던 녀석이 잘도 우릴 돕겠다. 괜히 뭉그적대다가 코가 꿰어서 결국 이 꼬락서니……”
“딱히 나설 필요가 없다고 하니까. 그저 탈명궁사 녀석의 위치만 몇 번 바꿔주면 된다고. 에잇, 설마 상대가 똑같은 놈일 줄 알았겠냐?”
‘똑같은 놈.’
그 소리가 나오자 일모불발의 처진 볼이 부르르 떨었다.
“젠장, 완전히 소령주에게 당했어. 근데 대체 그놈은 뭐야?”
목소리가 확 낮아지자 근근계교도 다리 힘이 풀린 것처럼 쪼그려 앉았다.
“탈명궁사의 천심전(穿心箭)을 맨몸으로 받아내더라.”
일모불발의 올라붙었던 눈매도 가라앉고.
“우리 주판과 저울도 단번에 부쉈지.”
“중기귀생의 힘을 썼는데도.”
“검기, 아예 검강을 썼잖아.”
“맨손으로.”
자랑하는 절초를 썼는데도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었다.
두 사람의 손이 저절로 가슴팍을 문지른다.
“뒤질 뻔했어.”
“뒤질 뻔했지.”
뚱뚱하고 홀쭉해서 전혀 상반된 외모인데도 그 표정이 쌍둥이처럼 똑같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일모불발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하지? 따라가서 조금이라도 챙겨놓지 않으면.”
마른입이 바짝바짝 타는 속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근근계교가 비쩍 마른 얼굴을 외로 꼬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해. 목숨은 보상이 되지 않는, 아니, 보상되어도 아무 소용없잖아. 뒤지고 나서야 금은보화가 무슨.”
“그치? 계산이 안 돼. 이쯤에서 빠지자.”
시선을 마주한 뚱뚱이와 홀쭉이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빠지려면 확실히 빠져야 해. 동해든 남해든 바다로 나가자.”
“남해는 좀. 거기 최근에 안 좋은 소문이 돈다더라. 신녀(神女)가 나타나 삼보해관(三保海關)까지 물을 먹었다던가.”
“엥? 그럼 우리한테는 더 낫잖아. 삼보해관이 약해졌으면 굳이 귀찮을 일도 없고.”
“그래도 신경은 쓰이지. 그냥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일단 결정은 봤다.
그리고서 둘이 두런두런 구체적인 부분을 의논하는데.
동해 쪽을 주장하려던 일모불발이 말을 흐리며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목뼈가 상한 것처럼 삐꺽거리는 동작.
그 동작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는 근근계교의 마른 얼굴도 고목처럼 핼쑥해진다.
팟.
어둠 속에서 먼지가 풀썩 이는 게 잘 보일 리 없지만, 그건 지나치게 빠른 신형을 세운 흔적.
눈이 어릿한 것도 새까만 흑의 경장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일 터.
무엇보다 공중에 홀연히 출현한 비췻빛 눈동자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스스스스.
귓가를 울리는 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전신이 기이한 압력 아래에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허옇게 질리는 인색이귀를 확인한 해원기가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또 시해를 쓰려고 하면 팔다리 중 하나가 상할 거요.”
휘리링.
손끝에서 비단처럼 풀려나가는 검기. 낭랑한 음성이 미리 경고하지만.
“어, 어떻게?”
“부, 불가능한……”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인색이귀는 자신들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조차 모를 지경.
여길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궁금해 하면 알려주는 게 도리.
해원기가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시해선법이 기특하긴 해도 기척을 완전히 지우긴 어렵고, 뭐,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눈도 있으니까. 그런데 오십 장이 한계인가 보오?”
손끝에 달린 검기가 하늘을 가리키며 슬쩍 움직여서.
인색이귀가 찔끔하느라 제대로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눈? 무슨 뜻일까.
그래도 해원기가 마지막에 오십 장이라고 되묻자,
“시해선법을 아는.”
“오십 장이 한계인 것까지.”
말문이 막힌 둘이 동시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태어나서 이런 일을 처음 당했다.
자기 둘의 능력을 모조리 알아채고 꼼짝도 못 하게 생포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저 손끝에 맺히는 기이한 검기만이 아니라, 전신을 은근히 조이는 이 압력.
도저히 옴치고 뛸 재간이 없다.
대뜸 앞으로 다가온 해원기의 손끝에선 이미 검기가 사라졌고,
대신에 두 손이 공간을 격하고 인색이귀를 스윽 훑었다.
“이건 오행금쇄법(五行禁鎖法)이라고. 특별히 몸을 상하게 하진 않지만, 한 시진 정도는 내공이 사라지니까 엉뚱한 생각 마시오.”
검왕수를 이루는 다섯 손가락이 각각 미약한 검기를 투사하자,
막 몸을 일으키던 인색이귀가 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졸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설 수도 없으니.
해원기가 머리를 들어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보며 씩 웃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인색이귀가 연속으로 시해를 써서 도주했다면 뒤를 쫓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기한 술법이라도 발동하는 횟수에는 한도가 있기 마련. 진방각궁을 쓰는 궁사를 몇 번이나 이동시킨 후에는 그리 멀리까지 가지 못했으리라 여겼고,
그래서 동강을 부려 사방 백 장을 살피게 했다.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신속하게 쫓아왔고, 혹시 또 시해를 쓸까 해서 아예 동강에게 바람의 결계까지 부탁했기에.
우선 심령에 전해지는 녀석의 투덜거림부터 다독여주었다.
“자, 몇 가지 불어볼 게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소.”
시선을 되돌려 차분하게 건네는 말에,
여전히 넋이 빠진 듯 쳐다보기만 하는 인색이귀.
해원기의 설명대로 맥이 탁 풀려 한 줌의 공력도 없는 평범한 신체가 되어버려서, 전신을 누르던 압력이 그새 사라진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다, 당신은.”
“누, 누구요?”
그저 한심한 입을 겨우 놀릴 수밖에.
해원기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누구란 게 뭐 중요하겠소? 두 사람이 제대로 답하면 해치지 않으리다.”
“!”
뚱뚱이나 홀쭉이나 의외의 말을 듣고서 똑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특히 양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기만 아는 인색이귀로선 그야말로 생명줄을 붙잡은 경우.
크게 뜬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서 정신없이 머리를 끄덕대는 것도 닮았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두 사람이 고분고분 답할 강력한 의지를 표하자,
그다음은 그야말로 일사천리.
“동해삼사의 후예요?”
“예, 맞습니다. 동해삼선, 아니, 삼사가 예전에 근거지로 삼았던 동해의 작은 섬, 그걸 봉래도(蓬萊島)라고 하는데.”
“삼사가 사라진 후에 그곳에 남았던 몇몇은 거의 굶어 죽을 판이었다고. 해적질로 간신히 버티며 애를 낳았고, 그중에 우연히 삼사의 유학(遺學)을 발견한 게 저희랍니다.”
“흠, 여전히 해적질을 했구먼. 그런데 혹시 매매이흉(買賣二凶)이란 이름 들어봤소?”
“예? 예. 그것도 아시는군요. 옛날 원나라 때, 대도(大都)에서 이름을 날리던 고수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삼사의 유학 중에 그에 관계된 내용이 있어서, 에, 저희가 슬쩍 흉내를 내기로 했습지요. 벼, 별 걸 다 아시네요.”
인색이귀의 내력을 파악하는 건 이것으로 충분하다.
해원기가 질문을 바꾸었다.
“두 사람의 시해선법으로 피한 자, 진방각궁을 다루던 그자는 누구요?”
“허!”
인색이귀 둘이 동시에 탄성을 토했다.
“진방각궁까지. 탈명궁사가 어떤 활을 쓰는지 아는 이가 없거늘.”
“호, 혹시 그 화살이 뭔지도 아십니까?”
엉덩방아를 찧었던 둘이 어느새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자세로 바뀌었고, 질문에 답하는 말도 공손하게 변했지만.
이제는 아예 질린 듯 입을 딱 벌린다.
“그 정도 위력이라면 편전(片箭)이겠지. 활과 화살, 전부 해동의 것인데. 당신들이 구해주었군.”
“헉.”
“엑.”
목이 턱 막혀 서로 마주 보는 인색이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구차한 꼬락서니를 보이던 둘이 아예 벌벌 떨더니,
묻지도 않은 것까지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반룡령.
이름은 그렇게 붙였지만, 어떤 조직이고 어느 곳에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인색이귀도 마찬가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이가 거액을 제시하며 일을 맡기면서부터 이 반룡령과 얽혀들었다.
본래 바다에선 해적질, 육지에선 강도질로 재물을 탐하던 둘이기에 그저 보수만 높게 쳐주면 그만.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으나.
이 반룡령이란 게 상당히 묘했다.
어떤 때는 사자(使者)라는 자가 오고, 어떤 때는 영주(令主)라는 자, 또 어떤 때는 중이나 도사까지.
당최 어떻게 구성되는 조직인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더니. 몇 년 전부터는 소령주라는 백문량이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듯.
이번에 등장한 탈명궁사와 강설궁대도 십여 년 전에 활을 구해준 인연이 아니었다면 전혀 몰랐을 사이다.
관도에서 인색이귀가 백문량과 내뺀 후에, 어디서 이들을 불러왔는지도 알 수 없었고.
이번에도 퇴각하면서 개봉에서 회합한다는 전갈만 남겨놓았을 뿐. 인색이귀를 남겨놓고 전부 흩어져버렸다.
“전부 흩어졌다?”
“넵. 항상 그런 식입죠. 강남에서 몇 번 일을 맡았을 때도 묘한 작자들이 불쑥 나타났다가 일 끝나면 알아서 꺼져주고.”
인색이귀가 이젠 무릎까지 꿇고 비위를 맞추지만,
해원기의 미간은 얘기를 들을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묘한 조직 반룡령. 하는 짓이 과거에 사부에게 들었던 한 가지 단어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