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73화 (74/410)

제19장 사회부연(死灰復燃) (1)

과거의 기억.

“강호에서 궁술로 그 경지에 이른 자를 처음 보았다. 고수가 감지하는 거리 바깥에서 순식간에 화살이 다가들지. 시위를 당기는 소리도,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음향도 전혀 없었고. 다만 모든 무공의 기초는 하체, 이 사부는 그자가 활을 당길 때 땅을 디디는 미세한 움직임을 느꼈는데. 그건 아마 그가 다루는 활이 특이하기 때문일 게다.”

사부가 무공을 가르치는 방법은 상당히 특이해서, 언제나 관련된 사건과 상황을 함께 전해주었고. 그 덕분에 해원기는 직접 겪지 않고서도 다양한 경험을 체득할 수 있었다.

중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활. 해동(海東)에서 만들어졌고, 작은 크기에도 엄청난 탄력을 지녀서 궁사(弓士)에겐 신병으로 취급된다는 진방각궁.

사부의 딸, 자신의 여동생이 태어나고 돌잔치를 열었을 때, 백산(白山)에서 축하차 온 형님이 마침 갖고 있어서 만져본 적이 있었다.

그때 형님이 기꺼이 가르쳐준 얘기도 잊지 않았다.

천하 궁술의 최고는 해동에 있다고. 어떤 자세에서도, 심지어 말 위에서도 쏠 수 있는 기예. 몽고의 몽마희(蒙馬戱)와 여진의 엽마예(獵馬藝)도 전부 해동의 마상재(馬上才)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주면서 그 기본까지 살짝 일러주었기에.

지금 자신과 일행을 노리는 이 놀라운 궁술이 무엇인지 단박에 간파했지만.

선풍결을 두른 채 바위 위로 날아오른 해원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환문(幻門)은 완전히 와해되었을 텐데. 누가 있어 그들의 강설궁진(降雪弓陣)을 재현했단 말인가.’

분명히 사부가 과거에 겪었던 암습. 오소민과 악송령을 노린 화살에 사람의 오감을 무디게 하는 효과까지 담겼다면 완전히 똑같은 진세요, 규모는 열 배가 넘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을 어지럽혔던 사도(邪道), 환문은 진즉 파괴되었거늘.

더구나.

행인을 노리고 덮치는 강도 따위가 아니다.

기껏 마차 한 대, 승객은 다섯. 이걸 노리고 삼십 명이 넘는 궁수가 천여 발의 화살을 발사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어둠에 숨어 진방각궁으로 저격하는 적.

누구인지 밝혀야만 한다.

밤중에 곡부를 출발했다. 그저 관도를 따라 이동하다 말을 쉬게 하려고 멈춘 곳.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을 뿐, 주위에는 산도 숲도 보이지 않는 평지.

워낙 캄캄해서 시야를 넘는 어둠 속엔 뭐가 있을지.

피잇.

오른쪽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

신형을 노출하자마자 예의 가공할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선풍결에 표풍결까지 더한 해원기는 가볍게 피하면서.

두 팔을 바위 주위로 연달아 흔들었다.

파파파.

무형의 검기가 일행의 주위에 심어지는 걸 확인하지도 않고,

돌연 회오리바람이 퍽, 하고 터지면서 해원기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화살을 피하는 순간에 방향을 확인했다.

선풍, 표풍에 질풍결까지. 풍뢰진결(風雷眞訣)을 한꺼번에 세 개까지 사용하긴 처음. 선풍은 방패가 되고, 표풍은 화살을 피하게 하며, 질풍은 단숨에 목표까지 이끈다.

피잇, 피잇.

공중을 가르고, 아니, 해원기는 거의 공중을 뛰어다니는 듯.

눈썹이 꿈틀했다.

이런 신속한 경공에도 거의 동시에 날아든 화살 두 발. 게다가 마지막 화살의 각도가 조금 다르다.

‘그새 움직였다?’

백주 대낮이라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해원기를 찾기 어려울 텐데, 이 어둠 속에서 정확히 조준하고 위치까지 바꾸다니.

안력이 뛰어난 건 물론이요, 경공까지 해원기와 맞먹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쏴아아.

또다시 쏟아지는 화살의 비. 아까처럼 한 점에 집중한 폭우가 아니라 수십 장을 덮는 소나기라서 명중도는 훨씬 떨어지겠지만.

어차피 한순간이라도 해원기를 멈칫거리게 하면 충분하다.

‘강궁의 곡사는 보통 고정 목표를 노린다. 이동 목표에 미리 발사하려면.’

상대는 해원기가 진방각궁을 쓰는 궁사에게 접근하리라는 걸 미리 상정했고.

그건 해원기의 무공 수준을 어느 정도 안다는 의미다.

해원기가 몸을 급격히 멈추며 두 손을 크게 펼쳤다.

쿵.

무겁게 디딘 발에선 지유진의 공력이 지면을 타고 퍼지고,

위이잉.

선풍, 표풍, 질풍을 죄다 대풍결에 담아서 뿌려 버렸다.

해원기를 중심으로 수십 장의 땅거죽이 지진을 만난 듯 갈라지고, 거대한 돌풍에 휘말린 공중에는 남아나는 게 없다.

해원기의 비췻빛 시선이 또 번쩍였다.

수백 발. 처음 일행을 노리고 쏟아졌던 화살의 폭우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면적을 넓히기만 한 게 아니라 숫자도 줄었음을 확인하자,

해원기가 펼쳤던 두 손을 빠르게 거두다가.

“흠.”

입을 굳게 다물며 오른손을 한 방향으로 떨쳤다.

슈왕.

돌연히 터지는 굉음. 동서남북이 구분되지 않는 어둠이거늘, 그 어둠보다 더욱 검은 선 한 줄기.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간을 그대로 갈라버린다.

그건 마치 검을 날린 것 같았고, 멈칫했던 해원기를 노린 진방각궁의 화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화검형(身化劍形). 전신이 검으로 화해 날아가서.

제남의 황부에서 검은 경장으로 갈아입은 해원기는 눈 깜빡할 새에 사십여 장의 거리를 뛰어넘었다.

경공으로서의 묘용은 거의 없는 무식한 방법이지만, 직선으로 최단거리를 이동하는 데에 이보다 빠른 것은 없다.

해원기의 눈에 막 화살집을 챙겨 몸을 돌리던 열댓 명이 들어왔다. 강궁으로 곡사를 쏜 일대(一隊). 지유진에 이들의 발걸음이 감지되었기에 곧장 신화검형을 썼고, 공중에서 거꾸로 몸을 뒤집으며 두 손을 떨쳤다.

퍼펑.

“으에엑.”

“와악.”

공간을 가르는 신화검형에는 반드시 후폭풍이 따른다. 그걸 전부 폭풍결(暴風訣)로 뒤집어씌웠으니.

열댓 명의 궁수가 모조리 나가떨어지고 강궁과 화살이 산산조각 날 수밖에.

해원기가 또 바닥을 지유진으로 밟았다.

쿵.

이번에는 방향을 정한 발 구름. 악송령이 서른 명이라고 했으니 반대쪽에 또 일대(一隊)가 있을 터. 곡사의 발사지점을 감추려면 양쪽에서 쏘는 게 맞다.

일단 강궁을 사용하는 궁수들을 전부 제압하고 진방각궁의 궁사를 찾는다. 활을 쏠 때나 이동할 때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면 다른 잡음을 먼저 제거하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신화검형을 쓸 셈인데.

팅.

해원기가 황급하게 옆으로 미끄러졌다.

어느새 날아들었는가. 하마터면 가슴팍에 박힐 뻔한 화살. 간신히 피했지만, 판과를 스친 소리에 안색이 변했다.

신화검형의 속도를 어떻게 따라왔는가.

방향과 거리를 전혀 알 수 없다.

진방각궁의 궁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인지.

해원기의 사부도 이런 경우는 겪어보지 못했을 터.

그러나.

해원기 또한 과거의 사부와는 다르다.

사라라랑.

불현듯 손끝에 출현한 형상. 한 필의 비단이 풀리듯 삼 척 길이에 오광을 머금은 기운.

오행제림으로 검왕수를 구현하자 어둠 속에서 해원기의 전신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기다렸다는 듯 가공할 화살이 또 연달아 날아드는데.

이번에는 전혀 피하지 않는 해원기.

두 손을 허리에 붙이고서 오히려 앞으로 내달리니 마치 화살을 마중하는 것 같다.

손끝에 출현했던 기운이 어느새 전신에 어린 걸 아무도 알 수 없다.

팡, 팡, 팡.

검왕수를 구현하고 내달리기 시작했을 때 이미 세 발. 과연 엄청난 궁술이지만,

정면으로 부딪쳤는데 단 한 발도 꽂히지 않는다.

가슴에는 판과가 있다고 해도 머리와 배를 노린 화살은 어찌 막았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쏘아진 화살이 해원기에게 닿자마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으에엑?”

“그, 금강불괴(金剛不壞)?”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었어도 심중의 경악을 누르지 못한 떨림이 얼핏 귓가를 스치고,

“타앗!”

두 개의 목소리를 지우는 단호한 기합 일성. 그 기합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의 머리 오른쪽에 화살촉이 출현했다.

끼이이이잉.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은 어디 멀리서 울리는 듯. 소리보다 빠르게 이른 화살이 어찌나 맹렬히 회전하는지 제대로 초점조차 맞추기 어렵다.

진방각궁의 궁사가 작심하고 전력을 다한 한 발. 눈동자가 화살을 확인하긴 했어도 몸을 돌릴 틈 따위는 없다.

내달리는 해원기에게 그냥 꽂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통을 박살 낼 것만 같은 위력인데.

해원기가 살짝 눈을 찡그린 순간,

팍.

맹렬히 회전하던 화살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화살이 날아들던 공간에 홀연히 출현한 기이한 기운, 해원기의 옆에서 거꾸로 어둠을 자르고 날아간다.

말 그대로 쏜살같이.

“우왓!”

“윽.”

콰작.

이십여 장 밖. 어둠 속이 깜빡 빛나는 듯하더니 비명과 신음이 뒤섞여 터지고.

해원기가 몸을 틀어 벼락같이 덮쳐갔다.

휘릭.

마지막 화살을 먼지로 만들고, 화살이 날아든 흔적을 고스란히 따라 날아갔던 검왕수의 기운이 다시 돌아왔지만.

“음.”

몸을 세운 해원기가 무겁게 목을 울렸다.

부서진 활과 화살이 뒹굴 뿐, 아무도 없다.

그 짧은 순간에 기척까지 남기지 않고 사라지다니.

검왕수로 이룬 의검지경(衣劍之境), 검왕법신(劍王法身)이 조용히 해제된다.

해원기가 조그만 화살 하나를 주워들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폭우로 쏟아지던 강궁의 화살보다 훨씬 작아서, 길이는 절반도 되지 않고, 깃도 살대의 끝이 아니라 몸통에 조그맣게 붙은 모양.

“인색이선이라는 자들이 시해선법(尸解仙法)으로 궁사의 위치를 바꾸었군.”

제남으로 향하던 관도에서 맞붙었던 일모불발과 근근계교. 동해삼사의 후예가 확실하기에 붙잡으려고 했지만, 기묘한 술법으로 눈앞에서 사라졌었다.

그때와 마찬가지. 그 둘이 시해선법이라는 술법으로 계속해서 진방각궁을 쓰는 궁사를 이리저리 전이시켰던 것.

해원기가 가공할 화살을 몸으로 막아내는 통에 놀란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어둠 속, 방향과 거리를 잴 수 없는 화살의 공격, 그리고 독전을 곡사로 날리는 궁진. 아무리 해원기의 능력이 높아도 이유를 모르고선 계속 농락당하기에 십상이었다.

인색이선과 진방각궁의 궁사. 그리고 강설궁진까지 펼쳐 해원기를 노린 이.

일행이 있는 바위 쪽으로 몸을 날린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백문량이라고 했었지.’

반룡령의 소령주라는 젊은이.

동해삼사의 후예인 인색이선에 환문에서 유출된 궁술까지. 백문량이라고 이름을 밝혔던 젊은 선비를 떠올리면서 해원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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