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신주정기(神州正氣) (4)
신의.
믿음과 의리라는 뜻으로 흔하게 쓰이는 단어지만. 강호를 유랑하는 무인에게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믿음이란 스스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약속. 설사 하찮은 삼류의 건달로 뒷골목을 구르더라도 일단 무인이라면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이루고, 남과 맺은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그런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게 바로 의리. 옳다고 여긴다면 스스로 믿고 나아가야만 한다. 온갖 어려움과 고통이 닥쳐도 절대 변치 않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 비록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개념이 달라 흑도니 백도니 나누지만, 그 안에서는 피를 나눈 혈육과 무엇이 다르랴. 아니, 때로는 대의를 위해 친족을 버리는 대의멸친(大義滅親)까지 감행하는 이유가 바로 그 옳음에 대한 의지요, 그것이 또한 생명을 바친 믿음일지니.
그건 바로.
“도(道).”
오소민의 허튼 웃음이 잦아들 즈음, 악송령이 무겁게 한 글자를 내뱉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또 뜬금없는 말로 대화가 끝났나.
오소민은 코를 문지르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하고, 해원기도 다시 판과와 요대자를 정리하는 데 신경 쓸 뿐.
이걸로 족하단 거다.
증명단이 눈을 홉뜬 채 번갈아 쳐다보지만, 누구 하나 자세히 설명해 줄 마음은 없는 듯. 심지어 오보혜까지 작은 입을 옴팡지게 다물고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라.
은근히 심통이 났다.
언제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해원기가 왜 지금은 모른 척이람.
또다시 묻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어떻게든 혼자서 이 대화의 의미를 찾아낼 셈. 머리에서 열이 날 정도로 궁리하는데.
“엑?”
잔뜩 찡그렸던 눈에 확 덮쳐드는 그림자.
얄미운 ‘해 사부’가 돌연 놀란 토끼처럼 뛰어든다.
파파파팟.
급하게 휘두르는 두 손에 부러져나가는 십여 개의 화살.
“조심!”
해원기의 외침이 전해지기 전에 오소민도 오보혜에게 달려들어 소매를 펼쳤고,
퍼퍼퍽.
또 화살들이 튕겨 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는 채, 무수한 화살이 하늘 가득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악송령의 거구가 그대로 뒤로 넘어지면서 땅바닥을 거꾸로 굴렀다.
해원기와 오소민보다 조금 늦은 반응이라 옷자락에 화살 한 대가 꽂혔지만, 소매가 찢기든 말든 곧장 마차까지 재주를 넘었다.
체격에 비해선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 그러나 마차에 이르자마자.
히히힝.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말이 털썩 거꾸러지는 모습.
콰콰콰콱.
마차의 장막은 그새 고슴도치가 되었고, 바위와 돌에 튄 화살들이 난전(亂箭)이 되어 마구 날아든다.
찌이익.
바짓가랑이 한쪽이 또 찢기고, 악송령이 겨우 자신이 가져온 자루를 손에 넣었다.
쉬잉.
광풍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쏟아지던 화살들이 두 동강이 나자, 악송령이 비로소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렸다.
손에 든 칼. 도신(刀身)의 길이는 삼 척 정도, 넓고 두꺼운 칼등을 따라 한쪽만 뾰족한 칼끝, 손을 보호하는 호수구(護手鉤)가 없는 대신에 짐승 가죽이 덧대어진 손잡이가 일 척이나 되고 끝에는 어린아이 주먹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고리가 달렸다. 거무튀튀하게 날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이 칼이 바로 악송령이 만들었다는 환도.
하지만 숨을 한 모금 들이킬 새도 없이,
“또 온다!”
“악형, 마차를!”
오소민과 해원기의 급한 외침에 악송령이 칼을 뉘어 그대로 마차 아래로 찔러 넣었다.
“흡.”
말을 쉬게 하려고 마차에서 풀어놓길 잘했다. 이미 화살에 맞아 죽은 말을 신경 쓰지 않고 악송령이 환도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콰당.
마차가 거꾸로 뒤집혀 떨어지자 부서진 기둥과 흙먼지가 풀썩 날리지만, 기다렸다는 듯 해원기와 오소민이 날아들었다.
증명단과 오보혜를 뒤집힌 마차 안으로 짐짝처럼 밀어 넣고, 곧장 마차의 바퀴를 뜯어내는 동작이 약속이라도 한 듯.
파팡.
바퀴 두 개가 엇갈려 마차와 바위 사이의 틈을 메꾸자마자,
솨아아아아.
또 한 차례 화살의 폭우가 쏟아졌다.
위이잉.
악송령이 아예 손가락을 고리에 걸어 돌리는 환도에서 굉음이 울고, 도풍(刀風)이 무려 삼 장이나 퍼져 우산처럼 공중을 가렸다.
뒤집힌 마차 아래, 뒤얽힌 바퀴까지 덮여 만들어진 공간. 증명단이 거의 오보혜를 껴안듯 웅크린 채 자신의 북룡포를 뒤집어썼지만,
핏, 핏.
난전이 옆에서도 날아든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급박한 상황에서, 증명단이 겨우 확인한 건 악송령의 모습뿐.
뒤집힌 마차 위에 선 오소민의 넓은 소매가 은은한 빛을 머금은 채 옥판(玉板)처럼 펼쳐진 것도, 해원기가 커다란 바위 위로 뛰어오른 것도 알지 못했다.
응운검을 뽑을 수도 없는 좁은 공간, 증명단이 겨우겨우 날아드는 몇 대의 화살을 손으로 쳐내다가 눈에 힘을 주었다.
바위나 땅에 맞고도 튈 정도니 화살촉이 날카로운 건 당연한데, 그 화살대가 묘하게 생겼다. 화살촉 바로 뒤에 전부 혹이라도 난 것처럼 조그만 구슬이 달렸고,
그 구슬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듯.
“해 사부! 화살이…….”
불길한 느낌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뜸 커다란 고함이 터졌다.
“손을 멈췃!”
벽력같은 고함, 증명단이 귀가 울려서 그게 해원기의 목소리란 것도 나중에야 깨달았다.
옥판 같은 소매를 펼쳤던 오소민과 환도를 맹렬히 돌리던 악송령.
해원기의 커다란 고함이 들리는 순간 바로 손을 멈추었다.
폭우처럼 화살이 쏟아져 내리는 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두 사람의 시선은 화살이 아니라 해원기를 향하니.
바위 위에서 둥실 떠오른 해원기. 그의 두 손이 빠르게 움직이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공간을 종횡으로 누빈다.
쉬익.
하늘을 뒤덮었던 무수한 화살을 산산조각내고, 바닥까지 남김없이 훑는 기운. 심지어 죽은 말과 뒤집힌 마차, 오소민과 악송령까지 가리지 않았고, 마차 아래의 증명단과 오보혜 주위도.
베, 어, 버렸다.
‘검기?’
그 기운이 검기란 걸 깨달은 증명단이 놀라움에 입을 딱 벌렸지만.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검기란 게 있나?
기가 막혀서 자신이 발견한 화살대의 묘한 구슬이 전부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도 몰랐다.
검왕오형 중의 재단경위.
구현한 것은 바로 제탁지검.
증명단이 소리치기 전에 해원기는 이미 평범한 화살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가장 눈치가 빠른 이는 오소민.
넓은 소매를 떨치면서 날카롭게 주위를 살피고,
“독전(毒箭)인가?”
짧게 묻는 말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바위 위에 내려섰다. 동시안을 운용한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난다.
“지연시켜서 동시에 터지도록 했겠지. 독무가 넓게 퍼지도록.”
대화를 나누면서도 두 사람의 시선은 사방을 빠르게 살핀다.
어디서 날아온 화살인가.
“장거리 곡사(曲射). 강궁(强弓)을 지닌 삼십 명 일대(一隊), 한 번에 화살집 한 개. 두 번 쏘았고, 활 한바탕 거리 이상.”
악송령이 그답지 않게 많은 말을 덧붙이면서 마차 옆으로 움직였다.
어려서 군에서 살았던 터라 전문용어가 섞였으나 굳이 설명이 필요하진 않아서. 화살집 한 개에는 화살이 스무 대, 활 한바탕 거리는 백 장 정도일 터. 그렇게 먼 거리에서 천 발이 넘게 쏴댔다는 거다.
누가 이 야심한 시각, 관도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지로의 불도 다 꺼져서 사방이 캄캄하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오소민이 환도를 비껴든 악송령을 힐끗 보곤 머리를 들었다.
“독전을 이렇게나 많이 날리고 아깝지도 않나? 어디 당나라 군대야? 아무 낌새도 없구먼.”
천여 발의 화살. 그것도 시간을 맞춰 터지도록 독무를 장착한 화살.
악송령의 말대로 적어도 삼십 명 이상이 동시에 발사했을 것이고, 백 장 거리에서 곡사로 노릴 정도면 평범한 수준이 아니다.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습의 규모를 넘는데. 그리고선 다음 공격이 없다니.
“아직 마음을 놓지 말게. 차라리 당나라 군대면.”
팍.
“엇!”
해원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서 터진 폭음, 오소민이 깜짝 놀라 헛바람을 내는 사이, 어느새 해원기가 그 어깨를 잡아 돌렸다.
어깨동무라도 한 것처럼 오소민의 어깨를 안은 해원기의 오른손은 두 개의 손가락을 부르르 떨고,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도는 신형이 악송령 쪽으로 밀려간다.
파앗.
또 한 번의 폭음.
악송령의 머리 앞을 스쳐 내려선 해원기가 대뜸 발을 들어 마차를 내질렀다.
펑.
뒤집힌 마차와 얹힌 바퀴 두 개가 훌떡 공중으로 날아가고, 해원기를 감싼 선풍결이 악송령과 두 여자까지 휘감아 바위 뒤로 돌았다.
쿵.
마차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보다, 오소민과 악송령은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머리가 꿰뚫렸을 상황에 경악했다.
“이게 무슨?”
“이 어둠에?”
언제 날아들었단 말인가. 해원기가 아니었다면 화살이 꽂히는 것도 몰랐을 터. 세상에 이런 궁술이.
일행이 멀쩡한가부터 확인하던 해원기의 시선이 북룡포로 오보혜를 감싸 안은 증명단에게 잠깐 멈추었다가 돌아갔다.
이지무성에 선풍결을 더했건만, 두 대의 화살을 내친 충격이 작지 않다.
“처음 독전의 곡사, 얼핏 사부님께 들었던 기억이 났지. 과연 진방각궁(震方角弓)이로군. 여기서 경계를 늦추지 말게.”
말을 마치자마자 오소민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리고,
그대로 바위 위로 치솟아 올랐다.
다들 당혹스럽고 얼떨떨한 상태. 기민한 오소민, 총명한 오보혜, 성질 급한 증명단, 과감한 악송령 모두 아직 상황파악조차 되지 않았건만.
평소에 답답하게만 보였던 ‘고구마 대장’이,
지금 이 순간에는 무섭게 빨랐다.
당나라 군대.
당나라 때는 군대에서도 어지간히 화려함과 풍성함을 숭상했다던가. 그래서 외양만 자랑하고 실속이 없는 병력을 놀려대는 말이 되었고, 아울러 당세에는 허세를 부리면서 속으론 겁먹은 상대를 놀리는 은어로 쓰이는데.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천여 발의 독전, 만약 해원기가 그 독무를 미리 제거하지 않았다면. 아니, 해원기가 혹시 먼저 자리를 떴다면.
오소민이 살짝 어깨를 떨었다.
진방각궁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으나, 일행 모두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중독되지 않았는데도 자신과 악송령은 화살이 날아드는 걸 감지하지 못했다.
해원기가 껴안았던 어깨, 돋았던 소름을 가라앉히듯 오소민이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궁전(弓箭). 강호에서 보기 어려운 병기. 그러나 단병접전을 주로 하는 무인에게 이보다 무서운 병기는 없다. 물론 고수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실력을 갖추었다는 전제에서.
누군지 몰라도 상대는 정확히 일행을 목표로 암습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