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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71화 (72/410)

제18장 신주정기(神州正氣) (3)

“그러고 보니 악형의 무위를 처음 보았단 말이지. 신통한 장력을 마구 휘둘러대던 신유문의 후예를 꼼짝 못 하게 만들던데.”

대뜸 호기심을 드러낸 오소민에게 악송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요. 밀렸소.”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는 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악송령이 자신을 낮추는 표정이 무거워 보이자.

증명단이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뭐가 밀렸단 거예요? 장풍을 자르고, 묵연장인가 뭔가 하는 것도 튕겨냈잖아요. 그 극도라는 칼이 워낙 허술해서 부러지는 바람에…….”

“그러니, 진 거요.”

미간의 주름이 더 진해져 증명단도 더 입을 놀리지 못했다.

‘밀렸다’는 말을 부정하려 했더니 아예 ‘진 거’란다. 노문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꼭 악송령을 위로하려고 했던 말도 아니다. 그녀가 보기엔 전혀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평수(平手).

해원기가 마지막에 제지하면서 결판이 나지 않았을 뿐인데.

오보혜도 동의하기 어려운지 악송령을 보았다.

“병기를 썼는데 맨손과 비겼으니 졌다. 그런 뜻인가요?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런 식의 계산이 가능하지만, 상승의 무공에서는.”

“잠깐.”

해원기가 살짝 손을 들었다.

웬만해선 남의 말을 가로막지 않는 사람. 오보혜가 작은 눈을 깜빡이지만,

해원기의 깊은 눈은 곧장 악송령을 향했다.

“악형, 칼이 부러졌기 때문입니까?”

남들과는 전혀 다른 질문. 칼이 부러져서 졌다고 여긴단 건가. 겉모양만 그럴듯하다고 했으면서.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아듣기 어려운데.

끄덕.

악송령이 말없이 긍정하는 모습에 더 헷갈린 두 여자가 마주 쳐다본다.

오소민이 먼저 코를 울렸다.

“흐흥, 그 작자의 손이 평범하진 않았지. 문방사보를 빗댄 두 손, 나중에 지필수까지 더해졌다면 만만치 않았을 게야. 악형이 처음의 장력을 무난하게 잘라냈기에 끄집어낸 수법이잖아.”

묵연히 고개를 숙였던 악송령의 미간이 꿈틀.

“그렇소.”

닫혔던 입이 열렸고,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었다.

악송령의 심사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고, 또 이에 관해 얘기를 나눌 사람은 오소민 뿐. 오보혜와 증명단으로선 아직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채기 어렵다.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었으나, 증명단과 오보혜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악송령이 상당히 무거운 표정이라.

해원기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흠, 강유겸제(剛柔兼濟)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딱 어울리는 조화를 이루지는 않지. 때로는 강중유유(剛中有柔), 때로는 외유내강(外柔內剛), 필요에 따라서 강유를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조화니까. 그래서 조화(調和)가 조화(造化)에 이르러야 비로소 강유겸제라. 악형, 악형이 보기에 신유문의 무공은 어떠했습니까?”

악송령이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보기엔 간결, 실제론 복잡. 강유를 분별하기, 어려웠소.”

두 여자뿐 아니라 오소민도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노문기와 실제로 손을 섞은 악송령. 관전하며 느낀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유가의 무공이 어떤 특징을 갖는지 정도는 그 바탕 개념을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으나.

간결하고 단정하게만 보였던 노문기의 수법이 의외로 강유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단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첫 번째 장력이 아니라 두 번째 묵연장을 접하면서 뚜렷했을 겁니다.”

노문기의 첫 번째 장력은 웅후했으나 극도에 잘려나갔고, 두 번째 묵연장은 반대로 극도를 절반이나 부러뜨렸다.

천천히 머리를 든 악송령의 눈이 기이한 빛을 품고 잠시 해원기를 향하다가,

무거운 입이 어렵게 열렸다.

“반수위공?”

수비를 뒤집어 공세로 삼는다.

얼마 전 해원기가 유가의 무공을 설명할 때 입에 올렸던 비결. 모두가 다 들었었다. 그러나 악송령이 왜 이걸 떠올렸을까.

성격 급한 증명단이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은데.

뜻밖에 그녀는 해원기와 악송령, 그리고 오소민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오물거린다.

뭔가를 열심히 궁리하며 웅얼거리는 모습.

해원기가 언뜻 보이는 이 모습에 그녀에게 말을 돌렸다.

“뭔가 떠오르느냐?”

“칼이 부러져서 졌다, 처음의 장력은 잘랐지만, 묵연장에 부러졌다, 그럼 처음의 장력은 간결한데 묵연장은 복잡하다는… 극도를 부러뜨린 묵연장이 사실은 수비? 다음 수를 마련하기 위해서?”

기다렸다는 듯 궁리하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자.

악송령도 증명단을 똑바로 바라보고.

“바로 그거요.”

해원기의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걸렸다.

대견하다.

무공도 학문. 익히는 데에는 수없이 많은 방법이 있지만, 대개는 한 가지에 몰두해서 숙련된 후에야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특히 전통을 중시하는 오래된 문파에선 이런 경향이 강해서, 자칫 자파(自派)의 무공에만 얽매이기도 한다. 더구나 증명단은 사라졌던 항산파에서 겨우 명맥을 되찾은 경우. 나이 어린 소녀가 언제 다른 무공에 관심을 둘 틈이 있었겠나.

그런데도 대화에서 작은 단서를 찾아 그 의미를 유추해냈으니.

확실히 천부의 자질이란 게 있나 보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칼을 부러뜨렸으니 졌다고 한 거예요? 그래도 그 뒤에 아직 부러진 칼로.”

“악형 대신 내가 얘기하마.”

똑바로 봐줬다고 연거푸 물으면 되나. 난감해하는 악송령 대신에 해원기가 나섰다.

“무공을 익힐 때 먼저 투로(套路)란 걸 연습한다. 뭐, 소단의 복룡검식 역시 십육식의 투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럼으로써 언제 어떻게 써야 할지를 깨닫게 하는 보편적 방법이다만, 실제의 싸움에선 자신의 투로보다 상대의 투로를 예측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걸 노수(路數)를 읽는다고 말하는데.”

“어, 그건 알아요. 상대의 노수를 읽을 줄 알아야 내 투로를 어떻게 설치할지 결정하게 된다. 고수의 싸움은 실로 이 노수를 읽는 싸움이다. 그러면서 바둑을 두더라고요.”

밝히지 않아도 누구 얘기인지 알 법하다.

그렇다고 불쑥 얘기를 끊는 건 역시 성격 탓. 해원기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증명단을 보았다.

이래서는 화제가 자꾸 빗나가서 말이 길어지게 된다.

해원기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오소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 가르치는 건 따로 하라니까. 그럼 악형의 극도가 부러진 건 노수를 잘못 읽었다는 건가?”

해원기가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물론 악형이 잘못 읽은 게 아니라, 노 학사가 그렇게 만든 거지. 처음의 장력이 잘리자마자 신속하게 문방사보의 기예로 바꾼 걸세. 묵연장의 벼루로 압박을 강제했지만, 그 안에는 먹물이 휘감는 흐름을 감추고 있었거든. 아, 물론 악형 역시 극도가 부러지는 순간, 알아챘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 아무래도 오소민과의 대화가 가장 편한데.

증명단이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손을 버쩍 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해 사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상대의 노수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챈다는 거죠? 묵연장이니 뭐니 처음 상대하면서 알 리가 없잖아요.”

당연한 질문.

이론이야 누가 떠들지 못할까. 나중에 상황을 분석하는 것도 다 헛소리다. 당장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상대가 먼저 자신의 무공을 알려주면서 공격하나?

이 문제의 답이 바로 경지를 드러내는 증거.

해원기가 다시 증명단이 알아먹을 만한 비유를 찾을 때.

파삭.

악송령이 나뭇가지 몇 개를 쥐었다. 지로에 넣으려고 미리 짧게 꺾어놓은 나뭇가지, 그게 전부 똑같은 길이로 쪼개졌고.

“결을, 잘못, 읽었소. 멍청하게.”

꼼꼼하게 하나씩 지로 깊이 넣으며 자책하는 소리에.

증명단의 눈이 확 커졌다.

결.

그 단어 하나가 그녀의 가슴에 콱 박히는 느낌. 뭔가 알 듯 말 듯.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보다 오보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이라. 해 대협에게 듣기론 예전에 해변의 노산에 있다가 태산으로 왔다고. 과연 돌을 깎으며 도의 길을 닦았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군요.”

머리가 좋으니 이치를 찾는 것도 빠르다.

처음 악송령을 만났을 때부터 석수장이와 같은 기행(奇行)에 의문을 가졌었다. 웅후한 장력을 칼로 베어내는 것도 간단한 능력이 아니요, 신유문의 후예와 평수를 이루는 것도 그 경지가 평범치 않다는 의미.

이제야 악송령의 바탕을 조금 알겠다.

그러든 말든 악송령은 잔뜩 어두워진 표정.

해원기가 못 본 척 판과를 천천히 가슴에 걸었다.

“동정(動靜)을 구분하면 다시 미망에 들기 쉽지요. 동이든 정이든 그 본질을 보아야 기미를 느끼는 법, 현우(賢愚)를 따지는 것도 필경 마음은 아닙니다.”

나직한 음성이라 혼잣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 그게 지금까지의 얘기와 무슨 상관인지조차 모르겠다.

똑똑한 오보혜의 작은 눈이 의혹으로 깜빡대니, 증명단은 아예 얼떨떨한 표정.

오소민의 인상이 드물게 심각해졌고,

지로의 불만 쳐다보던 악송령의 머리는 더 무거워진 듯.

모여앉은 자리가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기묘한 젓가락을 요대자에 넣고 풀어놓았던 끈을 다시 판과에 묶는다. 어지간히 혼자서 지낸 티가 나는 동작이고, 꼼꼼하게 어깨에 걸쳐 판과가 가슴팍에 오도록 조정한다.

해원기는 마치 주위의 정적이 당연한 것처럼 그저 묵묵히 손을 움직일 뿐인데.

악송령이 돌연 머리를 거칠게 흔들더니 해원기를 쳐다보았다.

“해 대형, 난 아직도, 득심응수(得心應手). 더 나아가지, 못했구려.”

해원기가 손을 멈추고 마주 보며,

“허, 처음 만났을 때 한 얘기, 아직 그걸 기억합니까?”

쑥스러운 듯 웃음을 머금자, 악송령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후읍.

가슴팍이 벌어질 정도로 깊게 숨을 마시더니 시선을 증명단에게 돌리고.

“양심이 양기라. 좋은 가르침. 덕분에, 배웠소.”

불쑥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하는 바람에.

증명단이 화들짝 놀랐다.

악송령은 일행 중에 가장 몸집이 좋은 거한, 증명단과는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런 체구가 허리를 곧게 편 자세로 포권을 취하니 인왕상(仁王像)을 방불케 하고.

영문을 모르는 증명단으로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일단 두 손을 내저었다.

“아이, 이게 무슨. 아니에요, 제가 뭘.”

두서없는 사례에도 악송령은 두 손을 풀지 않는다.

“북악의 검, 정문(正門)엔 정기(正氣). 부럽구려.”

묵직한 음성에 진정이 담겼다는 걸 깨닫자 증명단의 표정도 이상해졌다.

자기를 칭찬하는 말, 항산파는 과거에 구주정문의 하나였었지. 그런 명문정파의 맥을 이은 자기가 부럽다는 건.

어쩐지 외로움과 한 같은 게 느껴진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치솟는데.

“어따, 꼭 그런 건 아니지. 정문에 정기면 후문(後門)엔 후기(後氣)일까? 악형은 잘 나가다가 엉뚱한 데서 멈추는구먼. 내가 구주정문이란 말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소민의 어이없는 소리에 김이 새버렸다.

후문에 후기라니. 농담 같지도 않은 헛소리.

그러나 말투와 달리 오소민은 의외로 진지한 표정이었고, 시선은 좌중을 떠나 먼 어둠을 향한 채.

“그런 식이면 그 갑갑한 작자가 떠들던 신주의 정기와 다를 바가 없잖아. 자기가 믿는 것만 옳고, 조금만 다르면 내치고. 거기에 무슨 정기가 있다고? 정사흑백(正邪黑白)은 그저 사람들이 자기들 편하게 나눈 구분이지. 진짜는. 험, 험.”

말을 하다가 제정신이 들었나.

오소민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예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하, 이거 거지란 워낙 제멋대로라. 악형, 그냥 어디서 들었던 풍월이니 귀에 담지 마쇼. 히히.”

어깨를 옴츠리며 괴상한 웃음까지 더한다.

멋쩍은 시선이 갈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오소민이 마지막에 삼켰던 말을 해원기가 조용히 받았다.

“신의(信義)지.”

“뭐, 그거지. 하하.”

오소민이 얼른 동의하며 웃음소리를 높였지만.

다른 세 사람은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무공에 관한 논의가 어째서 갑자기 ‘신의’라는 단어로 귀결되는지, 그 비약을 금방 따라갈 수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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