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신주정기(神州正氣) (2)
밤중에 성문을 빠져나가는 게 그리 쉽지는 않지만, 워낙 손이 크신(?) 오 공자께서 계시니.
은원보 두 개로 관병들 입을 싹 막아버리고 당당하게 문을 열고 나간 건 좋았으나.
다시 반 시진 만에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악송령이 투박한 외모와 달리 부드럽게 말갈기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며,
“말도 사람과 같지. 미안하구나.”
해원기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걸,
오소민이 용케 알아듣고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걸 알면서도 달리자고 한 건 자네잖아. 뒤늦게 사과는 무슨.”
해원기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관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큰 바위 하나가 가린 뒤라 쉬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의외로 증명단이 이런 노숙에 익숙한지 그새 지로를 파고 불도 피웠으며, 일행이 앉을 자리까지 마련해놓아서.
달리 할 일이 없는 오소민은 마차를 보러 나온 듯.
“그 노 학사는 우릴 조양신문으로 오해했지만, 이젠 조양신문이 오해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 소단이는 확실히 손이 참 빠르네.”
오소민이 모를 리 없다.
궐리빈관에서 벌어진 일,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야 있나. 나중에라도 일행이 사라진 걸 확인하면 당연히 개입했다고 여기겠지. 조양신문이 딱히 겁이 나서가 아니라, 지금은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걸 피하는 게 좋다.
그래서 서문을 나서자마자 마차의 속도를 올리긴 했지만.
제대로 쉬지 못한 건 말도 마찬가지. 밤중에 계속 길을 달리는 건 무리다.
“그나저나. 우리 일행이 그래도 묘하게 필요한 손을 채워서 다행이야. 막돼먹긴 해도 기민한 소단, 말수는 없어도 말을 잘 아는 악형. 처음에 셋이서만 있을 때보다 훨씬, 아, 해 사부의 요리 솜씨를 뺄 수는 없지. 크큭.”
키득거리는 오소민에 맞춰 해원기도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하긴. 증명단과 악송령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노숙 준비와 말을 다루는 데 둘이서 바빴을 터.
호중객잔의 큰딸인 증명단과, 어려서 군대에서 허드렛일을 했던 악송령. 그 경험이 이런 상황에 큰 도움이 된다.
여전히 노숙이 어색한 오보혜도 이제는 제법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올 줄 알고.
오소민이 냉큼 불가에 자리를 잡으며 이죽거리는데도.
“에고, 세가의 천금이 고생이 많으시네. 덕분에 따땃해졌소이다.”
오보혜가 피식거리며 손을 탁탁 털었다. 놀리는 소리에도 이전처럼 상대하지 않는 건 그만큼 서로를 알기 때문일까.
“고생은 소단이 했죠. 그래도 내가 관가나 상가가 아니라 무가(武家)의 딸인데 너무 무지해서 좀 부끄럽긴 하네요.”
“언니, 아까 꺾어놓은 가지를.”
말하다가도 증명단의 재촉에 얼른 가지를 건네준다.
화륵.
불이 제대로 붙어 올랐다.
“옳지. 아, 해 사부, 뭐 좀 먹을까요?”
예쁜 얼굴 몇 군데에 뭐가 묻은 건 상관하지도 않는 증명단의 밝은 모습에,
해원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부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큰 짐.
필요한 재료를 꺼낼 때마다 웃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말을 다독이고 돌아온 악송령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어지간히 챙겨왔다. 그래서 간단하게 요깃거리를 만들려던 해원기가 결국은 소매를 걷어붙였고.
이번에는 그 솜씨에 다들 눈이 팔리기 시작했으니.
가슴팍에 매단 판과가 어느새 냄비처럼 우묵해진 것도 신기한데, 넉넉한 물에다 좁쌀을 손바닥 사이에 비벼서 넣는 건 왜일까. 중간 중간 지로 위로 판과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생강과 파에 채소 몇 가지, 그리곤 바짝 마른 육포 하나를 잘게 찢는다.
“흠, 이제 조금 더 끓이기만 하면.”
“해 대형, 여기에, 돌화덕.”
악송령이 지로를 가리키며 건네는 말에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요리에 몰두하는 동안에 만들었나 보다. 돌, 길쭉하게 자른 돌조각이 여덟 개, 지로를 둘러 묻었고 그 높이가 똑같아서 판과를 올려놓기에 딱 알맞다.
“고맙소, 악형.”
화덕이 생겼으니 굳이 판과를 매달 궁리를 하거나 손으로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악송령 뿐 아니라, 지로 주위에 모여 앉은 일행 앞에는 완자(碗子)와 수저가 한 벌씩. 잽싸게 챙겨놓은 증명단이 코를 찡긋거린다.
“해 사부는 수저를 가지고 다닌다면서요. 원래 네 벌만 넣어서, 아니, 이건 무슨 죽이래요?”
악송령이 낄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서 해원기 것은 챙기지 못했는데, 그것보단 요리가 궁금하다.
궁금해 하는 건 증명단만이 아니어서.
“좁쌀을 가루로 만들었네.”
“양념은 소금 하나면 되나요?”
“손에는, 송화단?”
다들 한 마디씩 꺼내자, 해원기가 예의 독특한 젓가락으로 죽을 천천히 저으며 대답했다.
“수육진주죽(瘦肉珍珠粥)을 하려고 했는데, 알갱이가 동그란 진주미(珍珠米)가 아니라서 좁쌀을 썼지. 그러면 끓이는 시간이 달라지니까 우선 좁쌀을 빻은 상태로 만들고, 살코기 가루 대신에 육포를 잘게 찢어 넣었으며. 다 끓을 때 즈음에, 지금 넣으면 되겠구먼.”
손에 쥐었던 송화단 한 개를 완전히 으깨서 죽에 넣고는.
“맛은 그래도 속은 편할 거야.”
끝이 찻숟가락처럼 생겼어도 어차피 젓가락, 그런데 그 젓가락으로 어떻게 국자처럼 죽을 푸는 걸까.
너끈하게 네 그릇으로 나눠주고 마지막으로 판과에 남은 걸, 뜨려고 할 때는,
“호오.”
“어머.”
“흠.”
이미 감탄이 모두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게 그냥 죽이라고? 조금 전 궐리빈관에 나온 요리 중 어떤 것도 이 죽에 비길 수가 없다.
오소민이 재빨리 완자를 비우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널찍한 소매 속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 빈 완자를 채운다.
“역시, 해형의 죽이면 이 맛대가리 없는 술도 마실 수 있겠네.”
언제 술병은 챙겼을꼬. 몇 번 겪었던 해원기야 그러려니 하지만, 다른 이들은 요술처럼 술병을 꺼내는 오소민에게 놀란 듯.
“아니, 뭐예요? 술병은 또 언제 슬쩍했대?”
“허어, 슬쩍이라니. 빈관에 미리 돈 냈잖아. 그냥 버리면 낭비 아니냐.”
“기가 막히네요.”
“맞는 말, 낭비요. 여기도, 비었소.”
악송령 역시 빈 완자를 내밀고. 증명단이 급하게 말을 멈추고 먹는 데 열중한다.
해원기만이 판과에 조금 남은 죽을 떠먹고 나서 물주머니를 들었다.
“오 소저는 이걸.”
화아아.
지로의 불길이 돌연 파랗게 소리를 질러 판과 바닥이 달아오르는 광경. 일행이 당혹하기도 전에 불은 줄어들고, 탄내가 나는가 싶더니, 그 위에 물을 따르자 도리어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차는 아니지만, 식후의 과파탕(鍋巴湯)은 훌륭한 풍미랍니다.”
과파는 누룽지.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어 후식으로 먹기는 하지만, 이렇게 탕으로 마시는 건 처음 본다.
그러나 그 냄새가 아주 좋아서 술을 탐내던 증명단이 먼저 완자를 내밀었을 정도.
해원기와 두 여자가 과파탕을 마시는 모습에 술잔을 나누던 오소민과 악송령이 오히려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하아, 이거야말로 말 그대로 야찬(野餐)이로군. 좋네, 좋아.”
기어이 한 모금 빼앗아 마신 오소민이 느긋하게 감탄을 표하자, 증명단이 거의 빈 술병을 흔들며 인상을 썼다.
“본래 야찬(夜餐)이지 술추렴은 아닌데. 쳇.”
마시다 남은 술병이니 넉넉할 리가 없다. 과파탕을 음미하는 동안 오소민과 악송령이 완자로 그득하게 따라 마신 거로 끝. 그리고선 과파탕까지 뺏은 오소민이 얄미운데.
오소민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알아들은 오보혜.
“강호행이 항상 이렇다면 정말 소풍과 같지요. 오 장로는 잘 안 쓰는 단어도 많이 아네요. 그럼 아까 노 문사가 밝힌 비결도?”
이미 이 개방 장로가 생김새뿐 아니라 거지라고 여기기 어려운 갖가지 지식을 갖추었음을 알기에 슬쩍 떠보는 질문이다.
뭐 그런다고 도발에 홀랑 넘어갈 오소민이 아니어서.
“본래 동냥이 직업 아니요? 눈동냥 귀동냥, 다 그런 거지. 신유문의 어려운 소리라면, 에, 해형은 알지?”
능숙하게 떠넘긴다.
말은 지쳤고, 배는 뜨듯하고.
점심 이후에 휴식을 취하기도 했으니 자연히 얘기가 시작될 수밖에.
해원기가 판과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다고 하긴 그렇고. 그저 유가에서 칠정(七情)은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의 감정, 그게 일어나기 전이 중(中), 절도에 맞게 발현하는 걸 화(和)라고 하던데. 신유문은 상당히 고집스럽게 유가의 학술을 무공에 적용한다더군. 그걸 거꾸로 새겨서 술법으로 쓴다? 처음 들었어.”
오소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들었다면서, 마차에서 노문기가 말했을 때는 덤덤하게 답했었다.
해원기도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시선을 악송령에게 돌리며 말을 잇는다.
“악형, 혹시 조양신문의 그 도진에서 특별한 게 있었습니까?”
악송령이 잠깐 기억을 더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겉치레, 과해서, 칼처럼, 허술한데. 여섯이 아니고, 수련이 충분한, 여덟이었다면. 달랐을 것 같소.”
해원기에게만은 말이 짧지 않은 악송령이니, 나름 느낀 걸 최대한 설명한 것.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죠. 처음에 두 명이 먼저 쓰러졌기에. 본래 육합(六合)이 아니라 팔괘도진(八卦刀陣)일 겁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함께 수련한 여덟 명이었다면, 흠. 손잡이를 신축하는 극도라는 게 간단치 않군요.”
해원기도 조양도진이란 것에 주의했던 모양이다.
차츰 얘기가 복잡해질 기미가 보이자 증명단이 급히 끼어들었다.
“해 사부, 좀 확실하게, 쉽게. 해, 주, 시, 겠어요?”
무공 얘기라면 눈이 번쩍 뜨이는 소녀, 성질이 급해서 빨리 알고 싶다.
딱딱 끊어 강조하는 말투에 해원기가 머리를 긁었다.
“아, 전에 악형과 극도에 관해 말한 적이 있지. 강맹하면서도 많은 변화를 낳는 병기라고. 그럼 팔괘도진이라도 아주 복잡한 변화를 품었을 터. 유문의 절학은 대부분 난해한 이치를 무공으로 구현하니까. 사상팔괘(四象八卦)인지 정반음양(正反陰陽)인지 외부인은 알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증명단이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
그보다 오소민은 다른 점에 주의했다.
“결국은 다 유문의 비전이란 거로군. 그렇다면.”
“조양신문의 무공이 다 유문에서 비롯되었다. 확실히 노 문사가 이를 갈 이유가 되네요. 같은 뿌리에서 반도(叛徒)가 나왔거나, 문파에서 잃은 무공, 혹은 도둑맞은 경우라면.”
오보혜도 금방 알아듣고 정리한 결론.
칠정중화결이나 조양도진이나.
유가에서 나온 오래된 비결이기에 낯설다. 신유문도 해원기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으니, 그 자세한 내막을 어찌 알 수 있겠나.
해원기의 설명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증명단, 묵묵히 해원기를 보는 악송령, 오소민과 오보혜도 잠시 입을 닫았는데.
해원기는 어쩐 일인지 깔끔하게 닦인 판과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냄비처럼 우묵했던 판과가 어느새 다시 평평하게 바뀌었는데도.
둘째 사모님의 의조부(義祖父).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십여 년 전에 그분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고. 그 이후로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었지.
사모님도 사부님도 굳이 밝히지 않은 사정. 그사이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픔이 끼어있기에 해원기도 다시 떠올리긴 싫었으나.
유가.
비록 그 의조부란 분이 워낙 위대했기에 신유문이 유가의 종주처럼 여겨지지만, 신유문만 있는 건 아니다.
노문기가 호남에 갔다 왔다는 얘길 했을 때, 해원기는 능히 그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과거에 신유문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던 대아지당.
그러나 대아지당은 유가 자체에서도 금기시하는 이름. 신주를 배신했기에.
그 의조부라는 분이 평생 가장 증오한 배신자 중의 하나다.
노문기가 만약 둘째 사모님이 의조부로 모신 분의 후예라면, 당연히 그 영향을 받았을 터.
만박의 유수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지닌 신유문의 주인.
천지일사(天地逸士) 제대광(齊大光).
‘어쨌든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로군. 사라진 대아지당의 무공이 조양신문에 전해졌을 가능성, 어떻게 된 사정인지도. 하지만.’
“후우.”
생각을 정리하다 그만 한숨이 새어 나왔고,
눈치 빠른 오소민이 먼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소단의 표현을 따르면 갑갑한 작자. 잠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아주 딱딱하게 굳은 머리란 걸 알겠더라고. 웬만하면 조양신문이 도적 떼와 관련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쩝.”
“흥, 그런 작자에겐 무슨 부탁이람? 툭하면 무슨 신주의 정기니 뭐니. 정기는 정화(精華)를 궁구하는 곧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사부가 뭐랬더라? 그래, 양심(養心)이 양기(養氣)!”
증명단이 바로 코웃음을 치며 쫑알거려서, 다들 표정이 풀어졌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조금 어긋난 얘기를 꺼냈지만, 그 자체로는 상당히 고심한 구결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동감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악송령 덕에,
“지극히, 옳은 말.”
이번엔 다른 쪽에 호기심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