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신주정기(神州正氣) (1)
“아, 결국은 또 야반도주 신세인가.”
“이게 다 저 빌어먹을 작자들 때문에…….”
“어이, 소단, 그 말은 좀 거슬린다. 그거 빌어먹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아차, 그렇지. 죄송, 또 죄송. 순행장로님.”
그리고선 같이 키득거리는 오소민과 증명단.
오보혜가 나오려던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바깥쪽에 붙어 앉은 노문기를 바라보았다.
잔뜩 찡그린 미간에는 주름이 서너 개나 잡혔고, 시선은 자신의 손에 든 철패에 둔 채. 노닥거리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덕에 그다지 흔들리진 않지만, 그 눈썹은 계속해서 꿈틀댄다.
빈관의 독채에서 난리를 쳤으니 그대로 머물긴 무리. 조양신문에 원군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는데, 빈관에서 일하는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주변에서 얼굴을 내미는 사람도 없어서.
도리어 마차를 끌고 나서기 편했었다.
그리고 한 식경. 노문기는 계속 저 자세였다.
지루하다고 증명단과 농담을 주고받는 오소민도 그렇지만, 다시 어자석에 악송령과 앉은 해원기는 아예 돌아보지도 않으니.
대강 일행의 신분을 밝힌 오보혜로선 난감한 기분.
‘일행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상한 일행이긴 하지.’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용문세가의 아가씨, 사라졌던 항산검파의 장문제자에 정체불명의 사내 둘.
더구나 이 정체불명의 사내 둘 중 하나는 주운 칼로 능히 평수를 이루었고, 또 하나는 아예 뭔지도 모를 수법으로 경력의 소용돌이를 풀어버렸다.
생각할수록 노문기의 심정이 기가 막힐 것 같아서 오보혜의 얼굴도 슬슬 풀어지려는데.
“어흠, 그럼 오 소저를 안전하게 세가까지 호송하기 위한 위탁이었군요. 크게 오해를 했습니다.”
비로소 고개를 든 노문기가 무겁게 입을 뗐고.
오보혜가 자세를 바로 하고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오해라. 우선 그 자리를 피하느라 바빴네요. 노 학사가 왜 오해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오소민과 증명단이 농담을 멈추고 보든지 말든지.
노문기는 손에 들었던 철패를 오보혜 앞에 내려놓으며 짧게 혀를 찬다.
“쯧, 다 이 물건 때문이었지요. 아까 간단히 말해주신, 태안에서 오 공자, 오 장로에게 조양신문이 선사한 신물. 이 안에는 기묘한 술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닌 자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끼치는 지까진 아직 모릅니다만, 이걸 발동해서 자기들끼리 연락을 취하는 거죠. 그래서 오 소저 일행을 조양신문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확실히 그 신물이 갑자기 진동해서 저희도 의아했더랍니다. 한데 그들이 왜 우리에게 이 신물을 선사했는지, 음, 그것보다 조양신문이 어떤 곳인지 잘 아시는 듯하네요.”
“역시. 이궐(伊闕)의 용문세가나 천하를 둘러보는 개방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군요. 후우.”
노문기가 의미를 알기 어려운 한숨을 내쉬었다.
용문세가가 있는 낙양을 옛 이름 이궐로 부르고, 개방에는 천하를 둘러본다는 명칭을 붙이면서.
“이 조양신문이란 무리는 의심스럽기 그지없어서 아직 세상에 본모습을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 면이 어떤 면에선 부끄러운 꼴을 당한 본문에겐 다행일 수도 있지만. 아, 본문이 잠시 문을 닫고 정돈하는 동안에 이런 삿된 무리가 모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자신이 신유문 출신임을 이미 밝혔기에 서슴없이 나오는 단어지만.
뭐가 부끄럽고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삿된 무리요?”
“예. 제가 호남으로 떠나기 전에는 없었던 무리. 십 년이 지나 돌아왔더니 그새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유가의 본고장을 더럽히고 있더군요. 이곳은 신주(神州)의 정기가 서린 곳, 멀쩡한 모습으로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떠벌리는 자들이 있으니. 참으로 선조들께는 면목이 없지요. 허어.”
장탄식. 이게 부끄러웠단다.
노문기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걸 보면서 오보혜가 작은 눈을 깜빡였다.
“조양신문의 정체를 아시나 보군요. 얼핏 듣기엔 유가와 도가를 결합한 것처럼 얘기하던데.”
“말도 되지 않는! 입세(入世)와 출세(出世)가 본디 다른 도이거늘 어찌 한데 묶일 것이며, 설사 그렇다 해도 그건 결코 정도(正道)가 아니외다.”
“하지만 태안현에서 본 바로는 백성들이 상당히 반기는.”
“그게 바로 사도(邪道)라는 겁니다. 겉으론 그럴싸하게 관의 눈을 피해 백성들을 지키는 척 꾸미고, 속으론 희한한 사상을 퍼뜨려 따르게 하다니. 그 행태를 보면 사도가 아니라 아예 사교(邪敎)와 같더이다.”
아예 오보혜의 말을 자르며 벌컥 소리를 높이는 노문기.
찌푸렸던 눈썹이 버쩍 올라붙어서 꽤 화가 난 모습이다.
오보혜가 잠깐 오소민을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그런 점을 느끼긴 했어요. 그런데 노 학사가 아까처럼 행하시는 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겠죠?”
이미 일행이 나누었던 얘기.
그러나 조양신문이 확실히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는 모른다.
신유문이 있었던 지역이요, 유가의 본고장인 산동에 사교로 의심되는 문파가 나타났다고 찾아다니며 족치는 건 조금 과한 행동.
뭔가 특별한 이유, 혹은 명백한 증거가 있을 텐데.
이 노문기의 화법은 상당히 우활해서 대화가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
아울러.
마차 안에서 오직 오보혜하고만 말하고 있다. 개방의 순행장로인 오소민이 있는데도.
열심히 귀담아듣는 중인 오소민은 아무렇지 않지만,
증명단은 벌써 짜증이 올라오는 표정.
‘해 대협과 대화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드네. 아니지, 해 대협은 답답하긴 해도 말을 돌리진 않았어.’
오보혜가 참을성 있게 노문기를 보았다.
노문기의 시선은 그저 위아래만 움직일 뿐, 안쪽으론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음, 종교라는 게 본디 미신, 백성을 속여 사리사욕을 취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재물이나 금전만을 노리는 건 단순한 사기꾼, 그보다 더 나쁜 게 민심을 훔쳐 방패로 삼는 거지요. 깊이 조사할 시간은 없었습니다만, 단 십 년 동안 산동 곳곳에 거점을 두고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려면 상응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흐음.”
말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어서,
오보혜가 먼저 손가락을 꼽았다.
“자급하거나, 보호하거나, 직접 상행위를 하거나. 그런 조건이 갖추어져야죠.”
무림의 방회문파(幇會門派)가 대부분 유지하는 조건.
백도를 대표하는 구주정문(九州正門)과 흑도의 제문파 모두 이 중의 한두 가지로 존속된다. 관상무(官商武)가 한집에 모인 용문세가의 아가씨답게 얼른 설명을 보탰고, 그건 노문기의 얘기를 재촉하는 뜻인데.
“구걸하거나, 나쁜 놈들 걸 빼앗기도 하지.”
“오, 나쁜 놈들 걸 빼앗아서? 그거 좋은데요.”
불쑥 끼어든 오소민과 증명단.
개방은 구걸. 그건 당연하고, 그밖에 흑흘흑(黑吃黑)이란 방법도 있기는 하다. 흑흘흑이란 노자가 떨어진 협객이 일부러 흑도나 도적 떼를 찾아 그 재물을 빼앗아 충당하는 것.
쓸데없는 참견에 오보혜가 노려보기 전에 노문기가 먼저 헛기침을 했다.
“어허험, 뭐 어떻든 사리에 맞아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조양신문에는 개중의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 학생을 거둘 수 있을까? 차림새와 병기도 거저 얻는 게 아니면서. 게다가 관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한다더니, 오히려 관의 비호를 받는 경우가 빈번했기에. 조금 전에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말이 조금 빨라졌으나,
여전히 오소민 쪽은 쳐다보지 않는다.
묘한 분위기지만, 오보혜는 우선 노문기의 말에 집중했다.
확실히 그렇다. 궐리빈관은 곡부에서 가장 큰 숙소, 몇 채나 있는 독채에서 한밤중에 난리가 났는데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미리 백성들을 소개(疏開)했거나, 단단히 주의를 시켜서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을 터.
하지만, 관의 비호를 받아 문파를 유지한다고 사교로 치부하는 건 여전히 지나치다. 더구나 사교라면 관이 절대 감싸지 않을 텐데.
“그렇네요. 하지만 관이 왜?”
오보혜가 작은 눈을 일부러 동그랗게 떠서 궁금한 표정을 짓자,
노문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살짝 곤란한 기색으로 머뭇거리다가.
“말씀드린 대로 아직은 깊은 조사가. 음. 본디 관이 부패하면 가장 큰 도적이 되는 법, 그러니 그 비호를 받는 무리 또한 숨어서 도적질할 게 틀림없습니다.”
“엥?”
증명단의 의아한 탄성이 대뜸 끼어들 소리.
뭔가 두루뭉술, 확증은 하나도 대지 않고 그렇게 무력을 휘둘렀단 거다.
못 들은 척을 계속하던 노문기 역시 자신의 말에 근거가 박약한 걸 아는 듯.
“무엇보다 근본이 불분명한 무공을 익히고, 본문을 모방해 행세하면서 강호에 나서지 않고 있잖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워 소문이 나기 전에 뿌리를 뽑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쯧.”
인상을 굳히고 혀를 차며 말을 마친다.
이게 아까 다행이라고 했던 이유인가.
요컨대, 신유문의 근거지에 신유문을 흉내 낸 가짜들이 설치고, 그게 영 의심스러운 조직이란 얘기.
뭔가 다른 배경이 있을 듯하지만, 더는 물어보기 어렵다.
문파와 문파 간의 갈등이나 개인적인 원한에 타인이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다.
대화상대인 오보혜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무는데,
“신물인 철패 안의 술법이 뭐였습니까?”
문득 어자석에서 해원기의 목소리가 안으로 전해졌다.
지금까지 나눈 얘기를 다 들었겠지만, 다른 것보다 그게 궁금했나.
노문기의 안색이 조금 변하고, 시선이 잠깐 오소민에게 머물렀다가 앞을 향했다.
“흐음, 처음 이자들과 부딪쳤을 때 전부 똑같은 신물을 지닌 걸 이상하게 생각했고. 나중에 그 안에 칠정중화결(七情中和訣)이 거꾸로 새겨진 걸 알았소.”
오보혜와 대화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딱딱한 말투.
눈빛까지 날카로워져서 장막을 뚫고 해원기를 쏘아보지만,
“그랬군요.”
덤덤한 대답에 미간이 확 일그러진다.
“다들 해 사부라고 하시더군. 그런데 해 사부는 어찌 신유문을 아시오?”
노문기가 그 딱딱한 말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마차에 오르기 전, 간단하게 소개를 받았지만, 해원기만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개방 장로, 용문세가의 딸, 항산에서 내려온 소녀, 심지어 악송령까지 강호에 처음 나오는 칼잡이라는 식으로 일단 소개하더니.
저 더벅머리 청년은 이름만 밝혔을 뿐. 그저 오소민의 친구라나.
내색하진 않아도 가장 많이 신경이 쓰여서 노문기는 자신의 목소리가 차가워진 것도 느끼지 못했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그러나 장막에 가려진 어자석에서는 여전히 담담한 대답.
“예전에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훌륭한 공부에 대해 두루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문절학(儒門絶學)은 다른 무공과는 궤를 달리해 쉬 판별할 수 있다고 했지요. 만박유수(萬博儒帥)라는 이름을 세상이 다 잊은 건 아닙니다. 아, 서문(西門)에 다 왔군요.”
드르륵.
느릿느릿 움직이던 마차가 소리를 내며 멈추기 시작하고,
그 진동 때문인지 노문기가 전신을 떨었다.
곡부의 서문까지 대략 반 시진이 넘게 걸렸다. 밤중에 궐리빈관을 떠났으니 되도록 흔적을 숨기고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었고, 속도도 내지 않았다.
일행은 이참에 곡부를 떠나 길을 재촉할 계획.
노문기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음이런가. 모두가 신주의 정기를 지키는 분들이거늘.”
오소민과 증명단, 그리고 오보혜에게 차례로 깊은 눈길을 주곤.
“이렇게 서로 알게 되어 이 노 아무개는 참으로 기쁩니다. 이후에, 삿된 사문난적(斯文亂賊)들을 징치한 후에, 꼭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그럼 여기서 물러갑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머리를 숙이기 무섭게.
펄럭.
마차를 가린 장막 사이로 몸을 날린다.
경쾌하고 표홀한 신법. 웃음소리가 마차 안에 아직 맴도는데 이미 모습이 사라졌다. 자못 호방한 작별이지만.
오소민이 뒷목을 문지르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고,
“신주의 정기라. 낯을 붉히지 않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먼. 어지간히 꽉 막힌.”
오보혜도 자세를 조금 편하게 풀었다.
“그러게요. 처음 만났을 때는 낙척문사답게 그저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답답한 대화가 될 줄이야.”
꽤 힘이 들었나 보다. 증명단이 입을 삐죽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해 사부를 고구마 대장이라더니 저 작자는 완전 벽돌이네, 벽돌. 답답한 게 아니라 아주 갑갑해서 혼났다고요. 당최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고, 에?”
불만을 와르르 쏟아내다가 또 뭐가 생각났는지.
마차 뒤쪽을 홱 째려보며.
“그런데 저 작자, 미안하다는 소린 한 번도 안 했잖아?”
막돼먹은 음성이 거칠어지자 오소민과 오보혜도 쓰게 입맛을 다셨다.
노문기는 오해했다면서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