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68화 (69/410)

제17장 빈빈유례(彬彬有禮) (4)

수준차가 극명하다.

해원기의 설명대로 극도는 기특한 생김새보다 더 치명적 효용을 지닌 병기, 게다가 그 자루가 늘어나 완벽한 형태로 변했다.

두 명이 먼저 쓰러진 후에 여섯이 진법까지 펼친 상태라서 참으로 살벌한 장면이었지만,

노문기는 맨손으로 단 한 수에 꺾어버렸다.

조양신문의 무리가 비록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고 보긴 어려우나, 그래도 나름 극도의 효용을 최대한 발휘하는 진법을 펼칠 수준인데.

극도를 제대로 세운 두 명, 무공이 개중 나은 자들도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이, 이게 무슨…….”

대체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모르는 듯.

진법을 무너뜨린 기세를 이어 마무리하려던 노문기의 동작이 멈추었다.

신광이 어린 시선이 날카롭게 향하는 곳.

정원 쪽 문가에 나와 있는 해원기 일행이다.

노문기의 미간이 꿈틀하더니.

“신패가 또 하나 울린 곳, 그래, 그렇구나.”

의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자마자,

두 손을 뒤집으며 몸을 날렸다.

퍼펑.

“으악.”

“켁.”

극도를 세웠던 두 명까지, 나머지 여섯이 고통스러운 소릴 지르며 나뒹굴지만.

확인도 하지 않는 노문기의 신형은 이미 해원기 일행을 덮쳐간다.

그의 눈엔.

바닥에 꽂힌 극도를 뽑아드는 악송령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규헌이 준 철패가 울리고,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시작되고.

객청에 있던 일행은 당연히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고 정원 쪽으로 나왔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악송령부터 차례로.

나오는 순간, 가산에서 두 명이 굴러 떨어지고, 그 손에서 벗어나 극도 한 자루가 바로 앞에 내리꽂혀서 증명단이 깜짝 놀랐으나.

곧바로 이어지는 싸움에 절로 눈길을 빼앗겼었다.

싸움의 당사자가 마침 얼마 전에 동행했던 노문기니 묘한 느낌이 들 수밖에.

이것도 인연일까.

싸움이 금세 끝을 보이자, 악송령이 일단 일행 앞에 꽂힌 극도를 뽑아냈는데.

돌연 노문기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위잉.

노문기의 내민 손에서 경력이 용솟음친다. 웅장하면서 단호한 기운, 맨 앞의 악송령뿐 아니라 일행 전체를 짓누를 만큼 강하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 싸움을 마쳐가던 노문기가 왜 갑자기 달려드는지. 일단은 오보혜와 증명단을 보호할 생각인데.

악송령의 어깨가 홱 돌았다.

막 땅에서 뽑은 극도, 도진을 구성하던 여섯 자루와 달리 아직 자루를 늘리지 않은 형태. 짧은 칼자루를 잡은 채로 극도가 아래에서 위로 치솟고.

펑.

폭음과 함께 노문기가 공중제비를 넘었다.

솨아아.

땅바닥을 쓸면서 퍼지는 여파가 호수처럼 파문을 그리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밀려 나가는 가운데.

악송령이 비스듬히 자세를 바꾸며 극도를 거두는 모습.

“참경(斬勁)? 장력을 쪼갠다?”

거꾸로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내려선 노문기가 미간을 모았다.

자신의 손, 그냥 쏟아내는 장풍이 아니다. 단호한 한 줄기 힘으로 보여도, 일단 접하면 상대를 꺾고 웅장하게 확대되어 짓눌러버리는 경력이거늘.

그 경력을 칼 한 자루로 쪼개버렸다. 처음으로 겪는 상황.

조양신문의 무리는 전부 극도라는 기특한 칼을 쓰지만, 지금까지 극도로 자신의 장력을 견디는 자가 없었다.

부러지거나, 손에서 놓치거나, 잡고 있어도 그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고작.

칼로는 안 된다. 칼로 자신의 장력과 상응하는 힘을 뿜어내지 못하는 이상.

마부 노릇을 했던 이 거한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아울러 노기가 버쩍 올랐다.

“감히!”

고함과 함께 다시 오른손을 힘차게 내밀었다.

우웅.

정원을 울리는 진동, 동시에 왼손이 뒤를 이으며 물을 뿌리듯 흔들린다.

극히 무거운 기운이 곧장 악송령을 노리고 들이닥쳤다. 거암이 절벽에서 떨어지듯.

비스듬히 선 악송령의 큰 체구를 고스란히 짓뭉갤 셈이다.

칼집도 없는 주제에 극도를 거두어 허리춤에 숨긴 자세 따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그러나.

악송령이 눈을 부릅뜨며 벼락같이 도를 떨쳤다.

“벽지(闢地)!”

기합 일성에 새파란 빛이 공간을 횡으로 가르고,

쩡!

귀를 찢는 쇳소리. 맞부딪친 힘이 미친 듯이 공간을 흔드는 중에,

노문기가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흔들리던 왼손을 주욱 뻗었다.

세 손가락은 모으고 두 손가락을 굽혀서 마치 붓을 쥔 듯한 모양, 그 손이 공간을 거침없이 훑는다.

악송령이 받은 충격도 적지 않아서.

극도는 곁 날이 붙은 부분까지 쪼개져서 절반만 남았고, 두 발은 한 치나 파묻혔건만,

왼손이 절반만 남은 칼날을 문지르자마자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눈 깜빡할 새에 노문기와 악송령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바로 그 순간.

퍼엉!

돌연히 터진 폭음.

“음?”

자신의 왼손이 옆으로 미끄러지는 감각에 노문기가 경호성을 토하며 동작을 멈췄고,

악송령은 발이 엇갈려 겨누던 방향이 바뀌자 급하게 몸을 세웠다.

정면으로 부닥치려던 두 사람, 노문기는 왼쪽으로, 악송령은 오른쪽으로 틀어져 엉뚱한 곳을 향한 채.

“그만 손을 멈추시오.”

낭랑한 목소리.

언제 나타났는지, 해원기가 낙엽처럼 펄럭이며 가운데에 내려선다.

해원기가 나서자,

악송령은 바로 부러진 칼을 내던졌다.

“오 공자, 말처럼. 문식만, 과한 칼.”

객청에서 요리에 대한 불만을 표했던 오소민. 그 표현대로 극도가 겉모양만 그럴듯한 칼이라고 평가를 내린 건데.

악송령의 기묘한 말투는 노문기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붓을 쥔 모양의 왼손은 그대로, 장력을 뻗었던 오른손을 내리지도 못하고서 해원기를 노려본다.

자신의 무거운 장력, 그걸 또 잘라낸 악송령의 극도. 칼이 부러지긴 했으나, 둘이 펼쳐낸 힘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었다.

공간에 회오리치는 여력, 그걸 자신은 왼손으로, 상대는 부러진 칼로 끌어들여 결판을 내려 했다.

노문기 자신과 같은 발상, 그리고 그걸 시전 할 실력. 덩치만 좋은 마부라곤 여길 수 없는 상대도 상대지만.

그 순간에 공간은 지독한 경력으로 뭉친 상태다. 누구도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할.

그런데 그 경력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고수란 공간을 읽는 데 소홀하지 않다.

그런데도 지독한 경력이 뭉친 공간을 제멋대로 흩어버린,

이 자는 누구인가. 마차에서 요리사라고 소개했던.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해원기를 노려보는 노문기의 눈썹이 자꾸 꿈틀거렸다.

칼을 놓은 악송령에게선 이미 아무런 기운도 전해지지 않는다.

해원기를 확인하자 싸울 마음을 접어서인지. 평소의 범범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날 뿐.

반면에 동작이 굳은 듯한 자세의 노문기에게선 여전히 날카로운 느낌.

해원기가 찌푸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 학사,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제야 두 손을 천천히 내리는 노문기.

하나 다가오는 오소민 등을 찬찬히 살피면서 얼른 입을 열진 않는다.

엉망이 된 정원을 훑어보며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온 오소민, 문무쌍비라는 두 여자가 바로 뒤에 붙었다.

사방에 조양신문의 여덟이 널브러져 끙끙 앓지만,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고. 오소민이 은근히 두 여자를 감싸는 듯한 자세라.

“내 눈이 멀었구먼. 허어.”

노문기가 자책과 함께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오는 오소민을 향해 읍을 취한다.

“눈앞에 두고도 태산을 몰라 뵈었구려. 오 공자의 호가(護駕)는 여기 두 분. 어디의 고인(高人)이신지 솔직히 알려주시면 좋겠소이다.”

오소민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어이없는 표정. 대뜸 손을 써서 달려들다가, 이제는 또 예를 표하며 고리타분하게 말을 건네다니.

“허 참. 이거 난감한 양반이네. 이게…….”

오소민조차 선뜻 뒷말을 잇지 못한다.

뭐 이따위 작자가 있어?

생각 같아선 증명단의 막돼먹은 말투로 한 마디 쏴주고 싶다.

짜증을 참느라 말을 멈춘 오소민 대신에 오보혜가 작은 눈을 찡그렸다.

“아직도 낙척문사 타령인가요? 빈빈유례(彬彬有禮)라는 것도 사람 봐 가며, 상황에 따라 지키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잘못은 사과하고 먼저 내력을 알리는 게 예의일 텐데.”

오소민만 짜증이 난 게 아니다.

엄하게 공격을 당한 쪽이 누군데.

오보혜의 풍자가 가득한 말에 노문기가 손을 풀었지만, 일행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꾸짖음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흠, 오 공자 일행이 조양신문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먼저 확인해야만 하겠습니다.”

확실히 예의를 갖춘 말투지만, 속뜻은 심문과 다름없으니.

“썩을! 도대체 뭐라 지껄여대는…….”

마침내 증명단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충돌을 막는 건 역시 해원기 몫일까.

“노 학사는 신유문 출신입니까?”

불쑥 묻는 말이 없었다면 한바탕 심한 욕설이 이어졌을 터.

휘익.

갑자기 한 줄기 찬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일행이 순간적으로 긴장할 정도로 노문기에게서 무서운 기운이 뿜어 나왔다.

그 기세를 느끼지 못한 이는 해원기 혼자인 듯.

노문기가 똑바로 해원기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해, 사부라고 하셨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묻는 것이며, 그 이름을 어찌 알고 있소?”

신광이 어린 두 눈, 착 가라앉은 음성. 읍을 푼 두 손은 차분하게 내렸지만, 누런 장삼 자락이 바람도 없이 펄럭이기 시작한다.

해원기는 여전히 찌푸린 표정. 가산을 흘낏 살피고서 주변을 둘러본다.

“아까 도진에 갇혔을 때 괴력난신이라고 하더군요. 공자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네 가지, 그건 자불어진(子不語陣)일 테고. 우리 악형과 상대한 오른손은 묵연장(墨硯掌), 지금도 왼손에 남긴 힘은 지필수(紙筆手). 문방사보(文房四寶)를 무공으로 쓰는 문파는 오직 신유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으음.”

노문기의 전신이 부르르 떨고, 입술 사이로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악연히 놀란 표정, 휘둥그레진 눈에선 신광이 흩어져 심중의 경악을 참지 못한 듯.

남의 무공을 알아보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특히 상대가 세상에 잘 알려진 문파 출신이거나, 저명한 고수일 경우에는 대강 그 형태나 특징이 알려지기 마련.

신유문도 그렇다. 아니, 그랬었다, 백여 년 전에는 정도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이십여 년 전만해도 사존(師尊)께서 계셨으니까.

더욱이 사존에겐 만박(萬博)의 별명까지 붙어서 무림 전체가 존숭했다고.

들었었다.

그러나 당세는 다르다. 이제는 잊힌 문파, 전설로 남은 이름. 설사 과거를 기억하는 노강호(老江湖)라도 대표적인 무공 명칭 정도를 알 터.

이렇게 자신이 펼친 수법을 상세하게 피력하는 사람이 있다니.

노문기가 벌어진 입을 겨우 놀렸다.

“다, 당신은, 누구요?”

자신이 신유문 출신이라고 답한 것과 마찬가지.

해원기가 천천히 표정을 풀었고,

“나는 해원기라고 합니다.”

평소처럼 대답하자마자,

“풋.”

“내 이럴 줄 알았지.”

“맞소.”

오보혜가 웃음을 참고, 증명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에, 악송령까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앞에서 빙그레 웃는 오소민.

이게 대답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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