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빈빈유례(彬彬有禮) (3)
“아, 나는 객청에서 쉴게. 영 갑갑해서.”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쉬기로 했을 때, 오소민이 불쑥 꺼낸 말에.
해원기도 그냥 객청에 남았다.
이 독채는 객청 양쪽으로 방이 딸린 구조. 한쪽은 남자들이, 다른 한쪽은 여자들이 쓰기로 했는데. 오소민은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지.
남은 음식이 그대로 쌓인 탁자에 앉아 차를 따르기 시작한다.
“괜찮나? 마차 안에서 쉬지도 못하고서.”
“응, 그 정도로 피곤할 리 없잖아. 여자들은 좀 지쳤을지도, 악형은 계속 마차를 몰았고. 대낮에 객방에 눕는 게 밤이슬 맞으며 노숙하는 것보다 지겨워, 흐흐.”
거지 본색이랄까.
여자 뺨치게 잘생긴 용모에 귀공자다운 복장을 갖추고도 실상은 개방의 순행장로. 스스로 그 기질을 드러낸 게 우스웠나 보다.
키득거리며 따라주는 차를 받는 해원기도 씩 웃었다.
이렇게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사귄 시간은 길지 않지만,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오소민이 음식 접시들을 훑어보곤 입을 삐죽거렸다.
“여긴 정말 맘에 들지 않는군. 요리라고 나온 것들이 죄다 텁텁하기만 하고. 흠, 차 맛까지 나빴으면 한소리 했을 거야.”
차는 그래도 상큼한 편. 해원기도 한 모금 마시고 동의했다.
“뭐, 곡부는 원래 산동에서도 음식 맛이 제일 떨어지는 곳이거든. 그나마 춘차(春茶)가 나왔으니까 용서해주자고.”
춘차. 봄에 새로 딴 찻잎으로 신차(新茶)라고도 한다. 약간 풋내가 나긴 해도 묵은 차와 달리 신선한 풍미가 진해서 봄철에는 선물로도 많이 쓰이는 기호품.
오소민이 잔을 흘낏 들여다본다.
“그러고 보니 먹느라 바빠서 오 소저에게 묻는 것도 깜빡했구먼. 이 춘차 말이야, 용문세가도 이번에 흥륭을 방문할 때 차상을 끼웠잖은가. 물론 간세가 숨어들어 온갖 폐를 끼쳤지만. 우리는 알기 어려워도 이 차라는 게 아주 돈이 되는 모양이더라고.”
강호를 뒹구는 삶이라고 세상사를 다 알긴 어렵다. 특히 무인은 돈에 대한 감각이 무딘 편이라. 흥륭을 거치고 오보혜랑 동행하면서 상계에도 관심이 좀 생겼나.
“나도 예전에 우연히 춘차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저 이름만 기억했을 뿐. 아직 품차(品茶)는 멀었지. 세상의 여러 면을 고루 알기에는 아직 부족해. 그나저나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차 하나만 제대로 아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가. 요리에 관심을 두었었던 해원기라서 우연히 그런 귀동냥도 했을 뿐. 화제가 자연스럽게 아까의 논의로 넘어간다.
오소민이 찻잔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리다가.
“글쎄, 용문세가의 지낭이라는 오 소저가 제대로 분석했잖아. 자네의 추론은 중요한 고리 하나가 빠진 채거든. 그래도…….”
해원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자네 의견이 맞다고 생각해. 비록 ‘바부탱이’에 ‘고구마 대장’이긴 해도 진짜 고수는 범인이 알지 못하는 직감이란 게 있다니까. 음, 십 년쯤 되었나? 자네를 지칭하던 얘기 중에 풍화절세(風華絶世)라고, 풍모와 재화가 세상에 견줄 데 없이. 에, 재화야 그렇다 쳐도 풍모는 영 아니잖아. 크크큭.”
예전의 풍문을 들먹이다가 그만 웃음이 터지고,
해원기의 표정은 암담해졌다.
오소민이 불쑥 이런 소리를 꺼낼 줄이야.
풍화절세, 응양구천. 이제는 다 잊힌 풍문인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먹을수록 낯 뜨겁게 여겼던 소리. 그저 한때의 즐거운 농담에 불과한 걸 이 친구는 용케 기억하고, 잘도 놀려먹는다.
헝클어진 더벅머리를 괜히 긁었다.
“사람 부끄럽게. 그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기로 했잖은가.”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모른 척하잖아. 아니, 남들 앞에서 검왕이라고 불러도 뭔 소리인가 할 걸?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강산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게 인심이라고. 실재하는지도 모를 소문 따위 누가 기억할까. 무림이 어떻게 생기를 회복했는지 궁금해 하는 이도 없거늘. 채 이십 년도 되지 않았건만, 쯧.”
키득거리던 오소민의 표정이 조금 샐쭉해지자, 이번에는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되었네. 세상일이 다 그런 법. 사부님도 처음부터 원치 않으셨으니. 자, 그럼 이쪽에서 단서를 찾는 것도 괜찮다는 말이지? 흠, 진즉 노문기가 신유문인 걸 확인했다면 좀 더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화제를 되돌려 조양신문에 대한 의심을 확인하자, 오소민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신유문이라도 어떨지. 그건 모르는 거야. 한때 유가의 종주 노릇을 하고, 신주의 정기를 지킨 문파라고 해도. 아까 그 작자가 어떤지 보았잖아. 본 공자의 문무쌍비가 불쾌하게 여기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고.”
“너무 지나친 평가 아닐까?”
“흐흥, 고수의 직감만 직감이 아니야. 여자의 육감이 얼마나 예리한데. 그 작자, 뭔가 의뭉스러워.”
오소민까지 불쾌함을 딱 잘라 말하는 바람에 해원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여자의 육감. 오보혜와 증명단은 노문기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바부탱이’가 입을 다물자, 오소민이 얼른 말투를 바꾸었다.
“그래도 그 작자 덕에 자네가 고수의 직감을 발휘했으니, 뭐, 인연이 없는 건 아니지. 약왕당을 들른 후에 다시 산동으로 돌아오자고. 그새 조양신문이 문을 닫을 리도 없잖아. 하여간 그 오리 알이 뭔지 부터 좀 알았으면 좋겠어. 누구 없나? 딱 보고 좍 읊어줄 양반이.”
진자현의 몫이었던 돌멩이.
진자현이 죽었으니 현재 유일한 단서는 이 돌멩이뿐이다. 모든 게 모호한 아홉 무리의 도적, 실상 해원기가 그때 호중객잔에 들르지 않았다면 강호에는 소문도 나지 않았을 사건. 겁표는커녕 표행의 존재마저 의심스럽다.
송화단을 닮은 이 돌멩이가 무엇인지만 알아도 훨씬 수월해질 텐데.
“단목 형님이 알려주길 기대할 수밖에.”
해원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오소민이 눈을 흘겼다.
“얼씨구. 제세성수 단목 당주는 또 형님이야? 나 참, 배경 든든해서 좋겠구먼. 이거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인 유룡개의 기가 팍 죽는걸.”
강호에서 가장 명망 높은 약왕당의 주인을 형님으로 부르는 해원기가 또 계면쩍어졌다.
“그만하게. 팔선과해(八仙過海), 각현신통(各顯神通)을 일신에 다 모은 사람이.”
팔선이 바다를 건너며 각자 신통을 보인다.
각각 독특한 재주를 자랑한다는 속담이지만, 오소민에게는 그 사승(師承)을 밝히는 얘기. 풍화절세를 끄집어낸 대가로 갚아줬지만.
“주인 주(主)자에서 점 하나 빼면 뭐더라?”
싱글거리며 대뜸 되묻는 오소민에게 당할 재간이 있나.
그저 더벅머리를 다시 긁는 해원기다.
주인 주자에서 점 하나 빼면 왕(王), 검주(劍主)의 제자를 검왕(劍王)이라 부르기로 했었다나.
저녁에는 그래도 술 한 잔.
오소민의 제의에 증명단이 가장 먼저 동의했고, 해원기와 악송령도 마다하지 않으니.
오보혜 역시 따를 수밖에 없다.
늦은 점심에 오후 내내 쉬었던 터라 저녁 식사도 상당히 늦어졌고,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는 꽤 컴컴해져서.
객청 사방에 걸린 화려한 등을 보며 오소민이 히죽 웃었다.
“하여간 겉모양으론 되게 그럴듯하다니까. 이름은 궐리빈관이요, 등롱은 고색창연인데 공가노주(孔家老酒)는 간장보다 짜구먼. 공자님 사당엔 가볼 시간 없지만, 어쩐지 문식(文飾)이 과해 촌스러울 듯해.”
조롱하는 말투대로. 이 빈관은 내오는 술도 영 마땅치 않다.
술 대신 차를 들던 오보혜가 피식 웃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에요. 곡부는 공자를 모시는 고을이랍시고 어딜 가나 점잔을 빼지요. 그러나 실속 없는 허례허식이 많아요. 이 공가노주도.”
과거에 왔던 적이 있어서 술병을 가리키며,
“이곳에선 질박(質樸)한 기상을 품었다고 하던데. 오 장로에게 걸리면 그냥 간장이네요.”
“질박은 무슨. 이건 투박이라고 해야지. 안 그래요, 악형?”
맞은편에 앉은 악송령을 끌어들이지만.
“산동은, 다 짠맛.”
본래 산동이 고향인 사람에겐 아무렇지 않은 모양. 악송령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면서 자신의 잔도 채운 증명단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질박이든 투박이든 맛없는 건 맛없는 거예요. 텁텁하고 밍밍한 요리라고 술을 짜게 먹으란 건가. 칫, 차라리 황부에서 짊어지고 온 재료로 직접 요리해서, 에, 해 사부는 요리도 잘한다면서요?”
간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음식을 두 끼 거듭 먹어서 짜증이 나나.
객잔 집 딸, 아니, 가족이 본래 녹림 출신이어서 그런지. 술 마시는 품이 제법인 증명단이 돌연 화제를 바꿔서.
해원기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 술이 노교(老窖)였다면 질박이란 말에 어울리지. 오랫동안 잘 묵힌 술은 유람객에겐 잘 내놓지 않아. 하지만 노교를 내놓았다면 요리가 더 욕을 먹었을걸. 아무래도 이쪽 요리는 격식에 너무 치우쳐서, 음, 색향미(色香味)를 두루 갖추기보다는 색(色)에만 치중하거든. 제사나 접대용 음식이 많으니까. 아, 소단 어머님 솜씨가 참 좋으시던데.”
간단하게 설명하려다 문득 호중객잔에서 먹었던 토속적인 음식이 떠올랐다.
증명단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리고, 이 음식 투정을 시작했던 오소민이 궁금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오, 해형이 칭찬할 정도면 정말 맛있는 음식이란 건데. 어떤 걸 잘하시던가? 그 뭐라더라, 색향미구전(色香味俱全)이면, 에에.”
“진선미도유(眞善美都有)일세.”
음식은 색과 냄새와 맛으로 이루어진다. 이 셋이 다 완전하면, 그야말로 진선미가 다 있는 셈.
먹지 못하면 떠들기라도 하는 게 음식 얘기.
해원기가 웃으며 증대랑의 요리를 말하려는데.
스스스.
기묘한 소리, 어디서 나는지 모를 만큼 미약한 음향에 좌중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오소민이 표정을 고치면서 왼쪽 소매를 털고,
덜컥.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물건 하나가 탁자에 떨어졌다. 조양신문의 신물이라는 철패. 내부에 술법의 흔적이 있다더니.
“징그럽게 떨어대네. 역시 추적용이었나.”
의심을 품었던 터라 오소민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은 대답을 구하는 게 아닌데.
챙챙, 펑.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청 밖이 시끄러워졌다.
흔한 객잔과 달리 빈관은 본 건물에 독채를 몇 개 거느린 규모, 마차를 수용할 창고까지 갖췄고 독채마다 작은 정원까지 딸려 상당한 면적이다.
독채와 독채 사이에는 나무를 심고 가산을 만들어 구분하는 게 상례.
그 나무가 몇 그루나 부러지고, 가산 위로 그림자가 어지럽게 얽힌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것들!”
꾸짖는 소리와 함께.
퍼펑.
두 사람이 가산에서 나동그라지고 손에서 벗어난 병기가 날아올랐다.
나머지 여섯 명이 훌쩍 물러나 지면에 내려서고, 누군가의 입에서 날카로운 호령이 터졌다.
“도병신장(刀柄伸張)!”
칼자루를 늘이라는 호령, 여섯이 손을 크게 흔들자 대번에 사 척 길이로 늘어난 병기는 바로 극도(戟刀).
뒤를 쫓아 가산을 넘은 인영을 포위하면서 칼날이 공중을 하얗게 물들였다.
전부 연한 청삼에 혼원관. 태안현에서 만났던 조규헌과 똑같은 복장이다.
그리고 여섯 자루의 극도 가운데 태연하게 내려선 이는 바로 노문기.
신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주위를 무섭게 훑어보곤.
“조과기실(藻過其實)한 칼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냉엄한 말과 함께 양손에 들었던 쇳조각을 바닥에 내던진다.
형편없이 부서진 모양이지만 본래 철패였던 쇳조각, 처음 두 명을 쓰러뜨릴 때 그 철패로 병기를 날려버렸던 듯.
“너희들도 똑같은 신패를 가지고 있을 터. 그 안의 조잡한 술법만 발동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 감히 성인(聖人)의 고향을 더럽히다니! 그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다.”
근엄한 음성에 노기가 가득하지만.
여섯 자루 칼이 둘러싼 살풍경에는 어째 어울리지 않는다.
낯짝 두껍게 부끄러움도 모른다는 후안무치, 꾸밈이 그 실질을 넘는다는 조과기실,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만사무석.
이런 문자를 잘도 늘어놓아서.
본래의 장병도 형태가 된 극도를 쥔 여섯이 이미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조양도진(朝陽刀陣)!”
호령과 함께 진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리리리.
자루가 길어지면서 속도가 더 빨라지고 변화가 더 교묘해지고, 심지어 칼날과 손잡이가 뒤집히며 교차하니. 매서운 바람과 함께 도세가 거침없이 전신을 찍어온다.
그러나 노문기는 두 발을 엇갈려 사방으로 손을 내밀었다.
“괴(怪), 력(力), 난(亂), 신(神)!”
챙, 채챙, 키킥.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극도가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하고 튕겨 나가더니, 이어서 공중을 휘돌아 내뻗는 두 손이 엄청난 경력을 토한다.
위이잉.
조양도진이 거꾸로 그 힘에 부르르 떨다가,
펑!
굉음과 함께 여섯 명이 모조리 밀려났다. 극도를 제대로 세운 이는 두 명뿐, 나머지는 전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극도를 질질 끌어서.
진세가 단번에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