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빈빈유례(彬彬有禮) (2)
마차를 세우려면 꽤 큰 객잔이어야 한다.
곡부가 비록 공자를 내세워 유람객이 많긴 해도 워낙 보수적인 곳이라 규모가 큰 객잔은 한두 개 정도.
그중에 궐리빈관(闕里賓館)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곳으로 숙소를 정했지만.
막상 객청(客廳)에 앉은 일행은 전부 한심스러운 표정.
“이게 곡부에서 제일 좋은 객잔이라고? 나 참.”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증명단에게 오보혜도 한숨으로 답한다.
“후, 그러게 말이다. 이름이나 규모가 꽤 그럴듯하더니 내부는 너무 심하네. 실망했어.”
오소민 역시 입맛을 다시며 탁자에 놓인 차구(茶具)를 노려보았다.
“쩝, 침상은 삐꺽거리지, 의자는 비틀어졌지, 창은 아귀가 맞지 않지. 대단하네, 대단해. 이러고서 두 냥을 달라? 이런 식으로 근엄하게 바가지를 씌우는 집은 처음인데.”
마지막에 악송령까지 고개를 저으며,
“더럽소.”
라고 이마에 주름을 잡는 바람에 해원기가 맥없이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어쩔 수 없지. 마차를 맡기고 다섯이 쓸 독채까지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니까. 하루만 머물 테니 참자고.”
점심과 저녁, 그리고 취침. 곡부를 지나면 낙양으로 직행할 계획이니 미리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제남에서부터 남쪽으로만 향하던 길이 곡부에서 서쪽으로 꺾이고, 제녕(濟寧)과 조현(曹縣)을 지나면 바로 하남 땅. 개봉(開封)까지 마차로 갈 수 있다.
산동을 벗어나기만 하면 일행도 조금은 편해질 터.
다들 알고 있지만, 이 객잔은 해도 너무 했다.
오소민이 겨우 표정을 풀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제남의 황부에서 너무 편했나 보네. 강호를 돌아다니는 신세, 객청까지 딸린 독채는 과분해. 자, 이따위 얘기보다 아까 해형이 기억났다는 거, 그거 좀 들어보세.”
노문기라는 낙척문사가 떠난 후, 문득 뭔가를 떠올린 해원기. 마차에서 대충 나눌 얘기가 아니어서 이 궐리빈관을 찾을 때까지 미루어두었었다.
화제가 돌아오자 해원기가 안색을 고쳤다.
“음, 태안현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얼핏 생각했던 부분인데. 그 전에 우선 노문기라는 유생에 관해 얘기함세. 그 때문에 기억이 났으니까.”
노문기에 관한 얘기.
이미 일행이 한 마디씩 평가한 적이 있다. 낙척문사로 여길 수밖에 없는 외모와 언행이지만, 유생인지 무인인지 모호한 정체. 딱히 꼬투리를 잡으려 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안덕차행의 행수인가가 우리, 아니, 자네를 보고 낙척문사를 떠올렸었어. 처음엔 오형의 외모를 보고 나온 소리인가 했고, 그래서 금방 잊었고. 하나 안덕차행은 이미 흑도, 동창이나 금의위의 앞잡이라고 여겨도 되겠지. 그렇다면 그들 나름 곳곳의 소문이나 소식을 모으는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흐음, 낙척문사를 ‘희한한 소문’이라고 했던 것 같군.”
행수의 모가지를 움켜쥐었던 오소민이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자,
해원기가 바로 그 얘기를 노문기에게 연관시켰다.
“희한하다라. 자, 이제 노문기라는 유생일세. 자네나 오 소저는 사람을 알아보는 감각이 뛰어난데도 무인이라고 확신하지 못했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그저 좀 불쾌한 인상만 남겼달까.”
‘재수 없다’, ‘역겹다’. 그런 평가는 전부 특별한 근거 없는 느낌.
불쾌함을 표현했던 증명단과 오보혜가 자연히 얘기에 집중하게 된다.
“나 역시 비슷해서… 차분히 따져보다가, 음, 우리로선 그를 간파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으응?”
오소민이 미간을 구기며 목울음을 높였다. 믿기 어렵다는 듯.
강호에서 사는 이들이라면 무공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았어도 상대를 재는 습관이 붙게 마련이다. 하물며 지금의 일행은 더욱 경각심을 높인 상태요, 오소민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나름 견실한 기초를 지녔는데.
고지식한 해원기가 굳이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려고 ‘우리’라는 표현을 썼지만. 유생인지 무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면.
평범한 인물이 절대 아니다. 평범하긴커녕,
“에? 그 재수 없는 골샌님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고? 그러려면, 에, 뭐라더라, 등봉조극(登峰造極)?”
봉우리에 올라 마침내 하늘로 나아가는 경지.
증명단이 대뜸 어려운 표현을 입에 올렸다. 사부에게 그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으니까. 그러면 남들이 그녀가 고수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나.
묵묵히 듣던 악송령이 짧게 혀를 찬다.
“쯧, 노화순청(爐火純靑).”
화로의 불이 순수하게 파랗게 변하는 경지. 등봉조극보다는 이게 더 어울린다는 의미일까.
오보혜가 불신의 눈빛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평범과 비범 사이에 있으려면 초범입성(超凡入聖)의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범인을 뛰어넘어 성인에 들어서는 경지.
해원기의 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점에 막 주의를 기울이던 오소민이 그만 픽, 하고 웃어버렸다.
“이러다 선유태허(仙遊太虛)까지 나오겠구먼. 일단 해형의 얘기를 마저 들어보자고.”
다들 해원기의 진실한 신분을 모르니 부정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데도 산에서 내려온 소녀는 봉우리를 말하고, 돌을 깎으며 도를 닦은 사내는 화로를 언급하며, 속가인 용문세가의 아가씨는 성인을 따지니.
참으로 출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 오소민도 개방 팔선(八仙)으로 장단을 맞춰주며 정리부터 한 것.
해원기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표현이든 다 지고한 경지를 이르는 말. 그 경지에 이르면 자신을 드러내고 감추길 자유롭게 하지. 하지만, 그자는 아직 그 경지가 아니야.”
좌중의 시선이 해원기에게 집중되었다.
딱 잘라서 지고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단다.
어떻게 단정할 수 있지?
그러나 의문을 표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깊은 바다처럼 고요한 해원기의 두 눈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그럼 남이 엿보기 어려운 공부를 닦았을 수도. 그런 공부라면…….”
여간해선 말을 끌지 않는 해원기다.
각자 자신에 맞추어 경지의 이름을 읊어대던 좌중이 귀를 기울이고,
“유문심법(儒門心法).”
해원기의 입에서 나온 네 글자에,
모두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태안현에서 해원기가 떠올린 생각, 그 기억을 되살리기 전에 먼저 노문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했다.
모호하고 의심스러웠던 낙척문사.
산동 전통의 귀족 가문 출신, 고리타분한 서생 티를 내면서 남쪽에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왔단다. 그리고 해원기는 산동에 태산의 검보다 더 오래된 유가의 문파가 있었다는 말을 했었으니.
오보혜가 작은 눈을 빛냈다.
“노문기라는 서생이, 동창에서 주목하는 낙척문사. 그 이유는 그가 신유문의 후예이기 때문, 인가요?”
말이 뚝뚝 끊긴다. 해원기의 의도를 좇아 답을 추리했기에.
“그렇게 추정할 수 있소.”
똑똑한 이들과 함께 논의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직감 혹은 본능, 예지 또는 징조. 어떻게 표현하든 스스로 느낀 바를 제대로 말로 표현하긴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또 다른 사안과 이어질 경우에야.
해원기가 일단 그렇게 답했지만,
오소민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 공감하지 못한 표정들.
대체 유가의 무공이란 게 뭔지 감도 오지 않는다.
항시 잠심침령을 운용하는 습관을 길렀다.
바탕인 구고문심(究考問心)을 아예 심신에 새기도록. 그리고 아직 완전하진 않아도 수시로 상상지(上上智)가 도움을 주곤 한다.
사부와 달리 지덕체(智德體)의 삼산(三閂)이 존재하지 않는 해원기.
부족한 신왕공으로도 노문기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는 능히 감지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지만, 들은 대로라면 세상에 이렇게 차분하고 고요해서 기도를 알아채기 어려운 공부는.
유문의 전설적인 신공뿐이다.
사부와 함께 그런 얘기를 해주셨던 이. 강인한 기질과 아름다운 용모를 함께 지닌 이사모(二師母)였지. 봉황과 같았던 분.
‘열여덟에 다시 환정곡으로 돌아갔을 때, 둘째 사모님은 이미 어르신과 연락을 끊었다고 하셨어.’
얼핏 옛 기억이 끼어들지만, 얼른 지웠다. 가슴 아픈 기억까지 따라올 것 같아서.
“해 사부, 유가의 무공은 뭐가 달라요?”
모르면 물으면 된다. 증명단의 동그랗게 뜬 눈이 대뜸 다가와서 해원기가 정신을 차렸다.
막돼먹은 거친 기질은 그 성격의 한 면, 그만큼 한번 믿기 시작하면 뭐든지 묻고 의지하나 보다.
복룡검식을 배우고, 황정리와의 비무를 목격한 황부의 며칠 이후로 이 소녀는 정말 해원기를 사부로 여기는지.
해원기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음, 무공을 흔히 유불도속(儒佛道俗)의 사가(四家)로 구분하지만, 꼭 맞는다고 하긴 어렵다. 그런 구분보다는 무공 자체가 무슨 이치에 기초하느냐, 어떤 사유를 따라 익히느냐를 따지는 게 옳지. 예를 들어, 항산의 검은 선도(仙道)의 철리를 바탕으로 하면서 불가(佛家)의 흐름을 담고. 오 소저의 용문세가는 더욱 특이해서 유가, 도가, 속가가 한데 융합한 형태라. 아, 내가 괜한 소리까지.”
자기 가문의 무공을 평가하는 소리에 오보혜가 놀란 듯해서,
해원기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유가는 견정침착(堅定沈着)하고 일이관지(一以貫之)하단다. 물론 바탕은 유가 고유의 철리지만, 무도에 발을 들인 원인은 아무래도 유가가 그렇게 무시하던 묵가(墨家)의 영향을 받았을 테지. 그래서 방수(防守)와 모계(謀計)에도 뛰어난 특징을 지녔기에. 음, 이정제동(以靜制動), 반수위공(反守爲功). 여덟 글자로 함축할 수 있겠다.”
설명이 길었다.
마지막 여덟 글자면 충분하거늘, 이렇게나 말이 많은 건.
‘전부 사부님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심하고 자상하게 배웠으니까.
해원기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매달자, 오소민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자. 공부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하자고. 해형, 자꾸 다른 데로 빠지지 말고, 얘기를 마무리해야지. 일단 노문기라는 작자가 신유문이라고 쳐, 그 작자도 사정이 있을 터. 그런데 그게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태안현에서 생각났다는 것 때문에 먼저 노문기를 설명한다고 했잖은가.
화제가 제자리를 찾자 해원기가 미소를 지웠다.
“조양신문. 강호에 소문도 내지 않고 산동의 남부와 동부에 세력을 키웠다면. 그 행색이 혹시 과거의 신유문을 모방한 게 아닐까. 관과 결탁해서 민심을 얻었다면 동창이 배후에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전에 얘기했듯이, 아홉 무리의 도적 중 하나가 교주(膠州) 사투리를 썼으니까.”
교주는 바로 산동의 해안지역. 옛 제나라 땅이다.
“어?”
“음.”
조양신문이란 이름이 신유문과 비슷하다고 했던 증명단, 산동 내주 출신, 즉 교주가 어딘지를 가장 정확히 아는 악송령이 동시에 놀란 기색.
오소민의 빛나는 눈이 홱 오보혜를 향했고, 오보혜 역시 작은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일들이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서 연결될 수 있다.
“조금 억지가 보이지만. 충분히 의심할 만한 부분이군요. 그러나 역시 왜? 라는 의문이 붙어요.”
오보혜가 먼저 입을 떼자, 오소민도 혀를 찼다.
“쯧, 그렇지. 소보, 아니, 오 소저를 알고부터 제남에서 겪은 일까지는 설명이 돼. 동창이 수족과 주구를 동원해 재물을 갈취한다. 상계를 무력으로 위협하는 거니까. 하지만, 해형이 찾는 아홉 무리의 도적. 이게 진짜 헷갈린다니까. 자네 생각을 무시하는 건 아닐세.”
“괜찮아. 나도 내 생각에 근거가 박약하다고 여기니까. 역시 그 표행에 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해원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직감. 조양신문과 교주 출신의 도적이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는 논리가 부족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동창이 어떤 식으로 겁표와 상관있는가 하는 부분. 태감의 낙향, 내부와 밀통해 감쪽같이 겁표를 행한 도적들, 그걸 감추려고 마차까지 숨긴 금의위, 행천호랍시고 나타난 하북팽가.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돌멩이까지.
결국, 내막을 알려면 아홉 중 남은 여덟. 적어도 그중의 하나를 잡아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는데.
“그 도적 중 하나가 분명히 황장촌의 흉수겠죠.”
빠득.
복잡한 얘기라면 질색인 증명단이지만, 이까지 갈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해원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