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65화 (66/410)

제17장 빈빈유례(彬彬有禮) (1)

“흐음.”

안력을 높여서 유심히 바라보던 오소민이 기어이 묘하게 목을 울렸다.

오소민 뿐 아니라 함께 전면을 주시하던 해원기와 악송령 역시 같은 심정.

꽤 먼 거리지만, 세 사람 다 세밀히 살피는 데 별 지장이 없다. 말 한 필과 그 위에 탄 한 사람. 그냥 느린 게 아니다.

“비루먹은 말을 실제로 보게 되네. 게다가.”

오소민이 중얼거리자, 해원기가 악송령을 쳐다보았다.

“악형, 가봅시다.”

악송령이 바로 고삐를 살짝 채서 늦췄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터덜터덜.

어떤 표현이 맞는지 몰라도, 말이라는 짐승이 저런 식으로 걷는 건 다들 처음 보았다. 그리고 오소민이 미처 다하지 못한 말, 그 위에 탄 사람도 정상이 아닌 듯하다.

‘비루먹은 말’이란 단어가 연상될 정도로 간신히 움직이는 말과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은 이.

경계보다 염려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마차의 속도가 오르자 오소민이 얼른 포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조식에 든 두 여자를 일단 깨울 셈.

거리가 가까워지자 해원기가 목청을 높였다.

“여보시오, 어이, 괜찮습니까?”

바퀴가 구르는 소릴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사람이나 말이나 다 귀를 먹은 것처럼 여전히 느릿느릿 움직이고.

마차를 끄는 말이 옆에 보이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나.

“어이쿠!”

말 위의 인물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허우적거려서,

해원기가 하마터면 몸을 날릴 뻔했다.

고삐가 당겨져 멈춰선 말, 악송령도 얼른 마차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말처럼 고삐를 당긴다고 금방 세워지지 않는다. ‘비루먹은 말’보다 조금 더 나가고 나서야 바퀴가 섰고, 그 덕분에 어자석이 안장의 바로 옆에 붙게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말을 타고 가던 기수.

머리에는 조금 커 보이는 유건(儒巾), 치수가 안 맞아서인지 절반 이상이나 뒤로 넘어갔고. 그 아래엔 피곤함에 절어 꾀죄죄한 얼굴, 며칠은 씻지를 못한 듯하지만, 굵은 눈썹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에 짧게 다듬은 수염이 의젓한 용모다. 때 묻은 누런 장삼에 짚신을 신고, 등에는 나무판자 두 개로 엮은 책 상자까지 짊어져서 영락없는 서생(書生) 차림인데.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해원기가 잠시 말을 잊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며 눈썹에 달린 눈곱, 고삐로 손목을 칭칭 감아둔 것도 자신이 졸다가 떨어질 걸 예방한 수단이다.

졸고 있었다. 말을 타고.

“아.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소생이…….”

어자석의 해원기, 고삐를 쥔 악송령, 그리고 바로 옆에 멈춘 마차. 차례로 시선을 보내다가 비로소 상황을 깨달았는지 눈썹이 푹 내려앉았다.

“길을 막았습니까? 이런 죄송스러운.”

“아닙니다. 뒤에서 오다가 영 불안해서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흠, 굉장히 지쳐 보이는데 어찌 말을 타셨는지.”

껌뻑거리던 눈이 제대로 해원기를 향하더니 한숨을 내쉬고,

“후우, 못난 꼴을 보여드려 괜히 염려를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노문기(盧文紀)라 하는 가난한 서생입니다.”

사죄와 함께 안장에 두 손을 모으곤 이마를 박을 듯이 머리를 조아린다.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에 해원기가 조금 당황했다.

“이런. 제 이름은 해원…….”

“해 사부! 무슨 일이야? 마차를 세웠구먼. 어흠.”

통성명을 끊는 오소민의 음성, 휘장을 걷고 얼굴을 조금 드러내더니.

“누구? 무슨 일이 생겼나?”

뻔히 노문기라는 서생의 출현을 알면서도 일부러 못 본 척. 목소리까지 착 깔아서 해원기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유, 공자님. 제가 괜히 오지랖만 넓어서. 지나치다가 이 분이 편찮은 줄 알고.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일 아닌데 날 깨워? 제대로 얘기해봐.”

은근히 심통 난 표정으로 노문기를 힐끔거려서.

해원기가 그 뜻을 알고 자세하게 설명을 더했다.

역시 낯선 이와의 대화는 오소민이 맡는 게 낫다.

휘장을 절반쯤 말아 올리고, 노문기가 타던 말의 고삐를 마차 기둥에 묶고.

증명단의 재빠른 솜씨에 노문기가 감탄했다.

“허, 공자의 무비(武婢)는 아주 뛰어나군요. 긴 여행에도 든든하시겠습니다.”

“세상이 만만치 않으니 별수 있소? 유람 길에 오를 때 나름 가려서 뽑은 애들인데. 그런데 노 학사는 어쩌려고 말 위에서 잠이 들었을까?”

“학사라니 과분합니다. 그저 가난한 서생일 뿐, 이리저리 글을 배우려 애쓰다 보니 제때 쉬질 못해서지요. 하여간 이렇게 폐를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사정을 듣고 오소민이 마차에 타길 권했고, 문무쌍비인 오보혜와 증명단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낯선 이와 동행, 오보혜가 사방을 가렸던 휘장을 조금 올리자고 아뢰고, 증명단이 행동에 옮기는 것도 다 격식에 맞는다.

구석에 나란히 앉아 새침하게 노문기를 살펴보는 것 역시 비녀로서 당연한 일.

노문기라는 인물. 말에서 내릴 때도, 마차에 오르기 전에도, 마차에 올라 오소민과 마주 앉고 나서도. 두 손을 겹쳐 읍(揖)이란 인사를 취하니 먹물깨나 먹은 서생 티가 팍팍 난다.

말투 또한 고리타분하지만, 오소민은 여유작작하게 응대한다.

‘고구마 대장’도 극복했는데, 뭘.

“글을 배우려고? 호, 노 학사는 과거를 준비하시나?”

노문기가 고소를 지었다.

“과거라. 저는 공령(功令)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인의(仁義)의 도리를 찾고자 할 뿐이지요.”

공령은 과거시험에 쓰이는 문장.

의젓하게 머리를 젓는 모습에 오소민이 흥미가 이는 표정.

“이거 참. 진짜 학사구먼. 세상에 학문을 익히는 이들은 다 치세(治世)의 도를 환도(宦途)에서 구한다던데. 간록(干祿)을 마다하고 공맹(孔孟)의 이치만 따르시겠다? 대단하네. 하하.”

환도는 벼슬길. 간록은 관직을 구한다는 말.

쓸데없이 문자를 써서 잘난 척을 하지만, 골샌님을 풍자하는 뜻이 웃음에 담겼는데.

노문기의 고소가 더 짙어진다.

“뭐, 그렇게 고상한 쪽은 아니랍니다. 공자의 말씀대로 치세의 도를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 선현(先賢)이 꼭 유약(儒弱)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보려고. 산동에는 상무(尙武)의 전통도 있거든요.”

“오호, 내 태원에서 내려올 때 유가의 본고장이라 들었거늘?”

“가까이 남송(南宋)의 양산호한(梁山好漢)은 차치하고라도, 자로(子路)나 자공(子貢)처럼 유용유모(有勇有謀)한 선학(先學)이 있고. 공맹의 인의가 또한 용위(勇爲)와 감연(敢然)임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학(理學)에 골몰하는 피상(皮相)에서 벗어나면 자연히 찾을 게 있답니다.”

“음, 음.”

오소민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다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문자 좀 썼다가 도리어 호되게 당한 꼴. 제대로 학문을 논하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박한 귀공자잖나.

궁색해서 얼른 화제를 바꾼다.

“그럼 노 학사는 산동이 고향이오?”

노문기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관적(貫籍)이 범양(范陽)이니 어려서는 산동에서 자랐습니다만, 공부 때문에 한참 남쪽에 있었지요. 경사를 거쳐 다시 산동으로 돌아온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북의 동창부를 통과해서 곧장 곡부로 가던 길입니다.”

곡부가 목적지라는 건 먼저 말했다. 그래서 마차에 동승하는 걸 허락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다 모호한 얘기. 범양이 관적이면 산동에서 자라나? 남쪽의 어디에서 공부했기에? 경사를 갔다가 동창부를 통해 곡부로 가는 것도 특이하다. 보통은 제남을 거치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묻기도 어렵고.

오소민이 입맛을 다시며 말문을 닫자, 노문기가 도리어 말을 건넨다.

“공자는 태원의 귀한 집 출신이신데, 유람 준비를 철저히 하셨습니다. 모시는 이들이 다 평범하지 않아 보이네요. 부럽습니다.”

오소민이 코를 찡긋거렸다.

마차에도 주객의 자리가 있다. 어자석에 가까운 안쪽에 오소민이, 그 뒤에 오보혜와 증명단이 앉았고. 노문기는 마차 뒤쪽에서 전방을 향했기에. 마차를 모는 악송령과 해원기의 뒷모습까지 다 보인다.

오소민과 대화를 나누면서 일행을 다 훑어봤다는 소리.

오소민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부럽긴. 어떤 때는 아주 귀찮다고.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심하거든. 이 마차만 해도 좀 괜찮은 걸 얼마든지 빌릴 수 있는데, 굳이 생돈을 주고 사자고 우겨서. 어흠.”

슬쩍 돈 자랑을 집어넣자 노문기가 빙그레 웃었다.

“꼭 낭비라고 볼 수만은 없답니다. 제가 경사로 올라갈 때 산동 곳곳에 의심스러운 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모시는 이들과 안전하게 여행하는 게 좋지요.”

“어, 그거야 그렇지. 우리끼리니까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내키면 놀 수 있고. 뭐, 돈이 좋은 거야. 하하하.”

다시 경박한 티를 내고서야 노문기의 말이 그쳤다. 냉소를 굳이 감추면서.

오소민에 가려서 뒤에 앉은 오보혜가 증명단의 손을 꼭 쥔 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루한 대화에 심통이 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있었으니.

노문기는 현성이 보이자 작별을 고했다.

근처에 먼저 들를 곳이 있다는 이유를 대고, 장읍으로 일일이 정중한 인사를 한 후에.

용케 비루먹은 말을 타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일행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뭐예요, 저 인간. 머리 아픈 소리를 잘도 지껄이고, 속으론 사람을 깔보고. 재수 없어, 흥!”

참았던 입이 터진 증명단의 비난을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다.

아니.

“소단 말이 맞아. 재수 없군.”

오소민의 말에 오보혜가 금방 동의하는 것도 드문 경우.

“예의를 과하게 차리고, 언사도 배운 티를 내지만. 그게 더 사람을 역겹게 하는 경우군요. 상대하기 어려운 작자예요.”

해원기가 가슴팍의 판과를 문질렀다.

“상당한 학문을 익힌 건 분명해. 그러나 서생은 아니야. 숨긴 기도(氣度)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

“노문기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고. 관적이 범양이라고 했지만, 출신도 모르겠군. 수상한 구석이 느껴져 태우긴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네.”

오소민이 답하자 오보혜도 미간을 좁혔다.

“남쪽으로 유학까지 갔다면서 과거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경사에 갔다가 동창부를 거쳐 곡부. 경로도 이상해요. 무인이라고 해도.”

대화 속에서 의심스러웠던 점을 하나씩 짚어보는데.

악송령이 불쑥 입을 열었다.

“범양노씨, 산동귀문(山東貴門), 누대고제(累代高第). 저런 몰골, 본 적 없소.”

악송령은 산동 내주 사람. 당연히 어려서부터 들은 말일 것이다. 범양의 노씨는 산동의 대대로 고귀한 집안. 수백 년간 이름을 떨친 귀족 가문이니 한심한 서생 나부랭이가 있을 리 없다는 얘기.

해원기가 어색하게 입맛을 다셨다.

“악형, 몰골은 좀. 유건에 유삼, 서급(書笈)까지 짊어진 멀쩡한 서생 차림인데.”

“풋, 그런 뜻이 아니잖아. 유생이든 서생이든 엄청난 가문 출신이면 티가 나게 마련이라고. 저렇게 낙척문사(落拓文士)로 꾸미고 다닐 필요가, 어? 이거 어디선가 들은 소리 같은데.”

오소민이 해원기의 고지식함에 웃음을 터뜨리다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 가문 출신의 서생이라면 옷차림과 타고 다니는 말도 다를 터. 그래서 ‘낙척문사’라는 단어를 연상했고, 동시에 귀에 익다고 느꼈으니.

해원기가 머쓱했다가 바로 말을 받았고.

“안덕차행의 행수가 얼핏 그런 소리를 했었지. 희한한 소문이 들린다고. 아, 잠깐.”

이번엔 해원기가 악송령을 똑바로 보았다.

기억을 되살리다가 자신이 뭔가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