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조양신문(朝陽神門) (3)
바깥이 또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해원기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 민심을 얻은 것 같군. 조양신문이란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육 년. 황신의 대비와 악송령을 만나기 위해 매년 한 차례는 꼭 들렀던 산동이다. 그러나 그동안 조양신문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다.
태산 아래의 대묘. 백성들이 많이 모이는 이곳에서 이렇게 환영을 받으려면 꽤 덕을 베풀어야 할 터.
자신의 손바닥을 살펴보던 오소민 역시 미심쩍은 표정.
“나도 처음 들어. 학문을 닦는 모임이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저렇게 대하는 건 도덕군자(道德君子)기 때문은 아니지. 겉모습은 그럴듯해도 허리 뒤에 매단 병기, 흠.”
“그 병기는 뭐예요? 창날을 뚝 잘라놓은 모양이던데.”
증명단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먼저 물었다.
갓 하산해서 뭐가 뭔지 몰라도, 오소민이 일부러 경박한 귀공자 행세를 했다는 것쯤은 눈치챘다. 그러나 조규헌이란 자와의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를 아직 모르겠고, 무엇보다 조양신문의 인물들이 지닌 기특한 병기가 뭔지.
오소민도 선뜻 답을 내지 못하는데.
“극도(戟刀).”
악송령이 드물게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리자,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극도라기엔 너무 작아서. 흠, 휴대하기 편하게 도병(刀柄)을 잘라낸 걸까.”
악송령이 고개를 끄덕이곤,
“본래 오 척, 능형철준(菱形鐵鐏). 원(援)이 작긴 해도, 전첨변봉(前尖邊鋒).”
자신이 단정한 근거를 댄다. 당연히 해원기가 알아듣는다는 걸 전제한 답변이지만.
다른 사람은 다 어리둥절. 해원기가 설명을 보태야 했다.
“극도는 본래 군문(軍門)에서 만든 장병도(長柄刀)로 칼에다 극의 효용을 더한 것이지. 총장이 오 척이고, 자루 끝의 물미에는 마름모꼴 쇠가 박히며, 극을 흉내 낸 곁 날, 원이라 부르는 곁 날이 붙어서 찌르고 베며 할퀴고 거는 등의 다양한 변화가 가능해. 강호에선 보기 드문 기형도(奇形刀)라.”
조규헌 들이 지닌 병기는 이 척이 조금 넘는 길이. 자루를 잘라냈으리라 추측한 이유다.
한눈에 기특한 병기의 이름을 알아내는 건 과연 도의 길을 공부했다는 악송령답지만, 그걸 또 줄줄 풀어놓는 해원기 역시 범상치 않다.
설명을 듣고 난 오소민이 혀를 찼다.
“쯧, 그런 기형도를 저렇게 짧게 만들면 더 고약해지지. 희한한 기병(奇兵)이군. 그러면서 유가와 도가를 더했다고? 웃기는 소리야.”
일촌장(一寸長)은 일촌강(一寸强)이요, 일촌단(一寸短)은 일촌험(一寸險)이라 했다.
병기가 한 마디 길면 그만큼 강해지고, 한 마디 짧으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 쉬 보기 어려운 기병은 그 자체로 살상에 특화된 형태요, 뜻밖의 치명적인 효과를 낳는 병기라서. 선비처럼 굴었던 언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증명단이 오소민에게 머리를 돌렸다.
“그럼 그자들이 이곳 태안현을 무력으로 지켰다는, 무엇으로부터 지켰다는 거죠? 소문도 안 나게.”
이해가 빠른 소녀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들어본 적 없는 문파, 기이한 병기를 지녔으니 문(文)이 아니라 무(武)에 속하고, 백성들이 저렇게 받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참 철패를 쳐다보던 오보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호의 백성들이 무림인을 반기는 이유는 단 한 가지야. 약자를 도와 강자를 누르고, 무고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니까. 심지어 흑도라고 해도 환영을 받는 경우가 있어.”
증명단이 코를 찡긋거렸다.
자신이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을 진 항산파는 전통의 명문정파. 협의란 백도(白道)에만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흑도도 환영을 받는단다.
용문세가의 대소저께서 허튼소리를 할 리 없으니 그 속뜻을 새겨보는 것.
부약제강(扶弱制强), 보가호민(保家護民).
누가 강하고 누가 백성을 위협하는가. 오죽하면 흑도가 차라리 낫다고 환영할까.
궁리하는 증명단을 보며 오소민이 고소를 지었다.
“관(官)이지.”
증명단이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올렸다.
“아! 관핍민반(官逼民反).”
관이 못살게 굴면 백성은 돌아선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무림이란 게 본디 부패한 관권에 맞서는 성격이니.
말 없는 악송령조차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관아가 못된 짓을 했는데 저 조양신문이란 게 나서서 막아주었다? 말하는 걸 봐선 요 아래, 아니, 산동은 죄다 자기들 판도 같던데. 좀 이상하잖아요, 황부에서 미리 일러주지도 않고.”
증명단이 인상을 쓰며 둘러보자, 오소민이 손바닥을 문지르며 코웃음을 더했다.
“흐흥, 그러니까. 산동, 특히 제남에서 곡부를 잇는 지역은 유가의 본고장. 또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이라 관이 함부로 설칠 때가 드물지. 제남에서도 들었잖아, 괜찮은 관원들이 꽤 있다고. 그런데 남모르게 백성을 지키는 문파가 나타났다라. 흥륭도, 황하문도 모르게 말이지. 산동 전역을 자기 판도로 만든 세력이라면 강호에 벌써 이름이 쫙 퍼졌을 거야. 더구나.”
힐끗 오보혜를 보곤 목소리를 낮춘다.
“하는 짓거리가 해괴해. 옛 노나라 땅의 유가와 제나라 땅의 도가를 합쳐서 경세제민에 국태민안을 도모한다니. 아주 황홀한 말씀을 뻔뻔하게 늘어놓잖아.”
얼핏 유가의 이상적인 지향처럼 들리지만, 어마어마한 소리.
일개 무림 문파가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그럴 역량을 갖추었다는 자신감일까.
오소민이 장단을 맞춰준 게 그 내막을 캐려는 책략이란 걸 아는 오보혜가 조금 더 세밀한 부분에 집중했다.
“조규헌이란 자, 그리고 학생 세 명. 전부 멀쩡한 용모였지. 말솜씨나 태도에서도 딱히 불쾌한 점은 없었어. 그러나 그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잖아. 이 반점에 들어와 우리를 보곤 바로. 그건 낯선 이를 살피려는 의도라고 봐.”
“아.”
다들 증명단을 상대로 설명하는 상황이 되어서, 말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순시(巡視)를 통해 낯선 자의 내력을 확인하고 대책을 마련하려는 것이겠지. 처음 보는 공자님이 다른 지역에서 놀러 온 경박한 한량이란 걸 확인하자 바로 거창한 소릴 지껄이는 것도.”
“아주 능숙하더구먼. 생면부지의 길손에게 문파의 신물을 서슴없이 증정하고. 부유한 티를 팍팍 내주니까 먹음직스럽게 보였나. 혹시 뒤를 덮칠 가능성도 있어서…….”
오소민이 얼른 말을 받으면서 두 손으로 철패를 앞으로 밀었다.
해원기가 비로소 오소민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본 이유를 깨달았다.
“추종향(追蹤香) 같은 게 발렸던가?”
“그건 아닌 듯해.”
한참 오소민과 오보혜의 설명을 듣던 증명단이 또 막혀서 머리를 내밀었다.
“추종향?”
“음. 강호엔 그런 물건이 있다. 백일향(百日香)이니 천리일선방(千里一線芳)이니, 훈련을 거친 이만 맡을 수 있는 특수한 약물. 그 향기로 목표한 인물의 뒤를 따를 수 있다고 들었다.”
해원기의 설명에 또 하나 새로운 걸 알게 된 증명단은 신기해서 눈을 깜빡이고.
개방의 장로인 오소민은 고개를 저으며 오보혜를 보았다.
“특별한 향기가 아니라면 이 물건이 수상한데. 혹시 짚이는 게 있소?”
워낙 별별 인물이 다 모이는 개방이라, 잡술(雜術)에 관해서는 자연스레 아는 바가 적지 않으나. 추종향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에 다른 쪽을 의심해봐야 한다.
오보혜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저도 그래서 유심히 살펴본 거죠. 철패 자체에 특이한 점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나.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데가 없어요. 자철(磁鐵)이라면 당장 티가 날 테고. 이 철패를 지녔다고 우리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까요?”
머리를 갸웃거리며 철패를 문질렀다.
그냥 쇳조각. 대뜸 선물로 줄 때 의심이 들었지만, 수상한 점이 없다.
증명단 역시 저절로 눈길이 철패로 가다가,
“어? 그럼 강도질하려고? 그렇게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또 목소리가 뒤집혔다.
비로소 이 화제의 속뜻을 깨달았다.
추종향이든 자철이든 일행의 소재를 파악해 뒤를 쫓다가 덮칠 셈이라는 얘기.
오소민이 상체를 세우며 피식 웃었다.
“그려, 강호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지. 쓸만한 먹잇감을 찾으면 몰래 뒤를 따르다가 몽혼약으로 재우고 홀랑 벗겨가거나, 아예 으슥한 곳에서 칼부림을 하거나. 낯선 곳에서 낯선 이가 친절하게 굴면 조심해야 한다고. 특히 외관이 멀쩡할수록.”
막돼먹은 성격이라도 아직 하룻강아지.
오소민이 의젓하게 그 순진함을 지적하자, 증명단이 오만상을 썼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것들이 주우그을라구! 내 당장…….”
특유의 거친 말투가 확 쏟아지고, 바로 자리를 박찰 기세라.
해원기가 얼른 증명단의 소매를 잡았다.
“잠깐. 아직 확인된 게 아니잖으냐.”
해원기의 심연처럼 깊은 눈이 바라보자,
증명단의 치솟은 눈썹이 살짝 떨다가 겨우 내려앉는다.
성깔대로 날뛰고 싶지만, 이 신비한 ‘해 사부’의 말을 거역하긴 어렵다.
“함부로 의심했다간 도리어 모함을 받을 수도 있겠군. 흠, 교묘한데.”
오소민이 씩씩대며 화를 참는 증명단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오보혜와 해원기도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자존심 강한 무림인이 제멋대로 굴었다간 조양신문에게 토벌할 빌미를 주게 될 터.
증명단의 행동이 그 예가 되지 않는가.
명망과 친절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병기다.
그러는 가운데 악송령이 뒤늦게 철패에 시선을 모았다. 날카로운 눈, 철패를 꿰뚫을 듯하다.
“해 대형, 나에게. 맨 처음, 해준 말.”
악송령의 말은 나직하고, 소리도 크지 않으며, 뚝뚝 끊기지만.
해원기는 금방 알아들었다.
맨 처음. 악송령을 처음 만났을 때. 독한 장기로 뒤덮인 천황곡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돌을 쪼는 괴상한 인물과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고 애쓰다가 포기하고. 하릴없이 그 솜씨를 구경하며 불쑥 건넨 얘기.
기억을 더듬는데 악송령이 먼저 중얼거렸다.
“골상옥석(骨象玉石), 무차무별(無差無別). 추정도지(鎚釘刀砥), 세술법도(勢術法道).”
“이건 또 무슨 요결이야?”
뜬금없는 소리라 오소민이 입속으로 되뇌다가 바라보자,
해원기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아니, 무슨 대단한 요결 같은 게 아니라. 악형이 이걸 또 이렇게 줄였을 줄은. 허.”
탄식과 함께 악송령을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는다.
그도 그럴 것이.
육 년 전, 돌을 쪼는 악송령에게서 문득 느낀 바가 입에서 나왔었다.
뼈든 상아든 옥이든 돌이든, 그 대상물에 무슨 차별이 있으랴. 또한, 망치든 정이든 칼이든 숫돌이든, 다듬는 도구는 달라도 다 똑같은 이치.
악송령이 돌을 쪼는 것이 아니란 걸 느끼자 절로 그에 빗댄 도리를 읊조렸던 거다.
그걸 이런 식의 구결로 만드니까 마치 고심한 무공요결처럼 들리잖나.
해원기가 겨우 설명을 마치자, 악송령이 오소민의 손과 철패를 차례로 가리켰다.
“술(術)? 술.”
이 또한 수수께끼 같지만, 이번에는 오소민과 오보혜까지 알아들었고.
“추종향 같은 잡술이 아니라.”
“철패 자체에 술법을 걸어놓았을 수 있군요.”
해원기가 벌떡 일어나 왼손을 철패 위로 뻗었다.
“어.”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는 증명단이 이 돌발적인 행동에 눈길을 빼앗겼다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비취처럼 변한 해원기의 두 눈, 그리고 홀연히 전해지는 맑은 기운.
신왕공의 동시안과 청정력을 한꺼번에 운용한 해원기가 곧장 공력을 거두고서 혀를 찼다.
“쯧, 철패 내부에 미세한 인흔(印痕)이 있군. 악형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걸세. 아마 외부에서 발동시키는 술법이겠지.”
오소민이 새삼스럽게 악송령을 보곤 툴툴거렸다.
“제길, 술법이라니. 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좀도둑이나 강도라기엔 그 수준이 너무 높다. 술법을 발동시키는 주인(呪印)을 내부에 찍은 철패라. 아무나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해원기가 묘하게 굳은 얼굴로 눈썹을 문질렀다.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
“제로평, 조양안이라고 읊어댔지. 도복을 방불케 하는 복식에 유생처럼 의젓한 말투, 선생을 장자, 학생은 졸자라는 특이한 칭호를 쓰고.”
해원기 특유의 혼잣말인 걸 바로 깨달은 오소민이 얼른 뒤를 이었다.
“어지간히 고루한 단어들이야. 요리사를 포인이라 하더구먼. 그러면서도 아주 친절하고 적극적이라 거부하기 어려웠어.”
조규헌 들의 언행을 곰곰이 되짚어보는 대화, 증명단도 이건 자신 있어서 얼른 끼어들었다.
“기특한 병기를 지니고 황홀한 소리를 지껄여댔죠.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에 있어 조양이라나 뭐나, 게다가 신문(神門)이면 저희가 신을 모신다는 걸까? 흥.”
불쾌한 감정이 담긴 코웃음까지 치자.
오보혜가 작은 눈을 깜빡이며 해원기를 향했다.
“진언(眞言) 혹은 주문(呪文), 독특한 복식과 명칭, 온화한 언행과 깔끔한 외양. 이건 전부 신앙(信仰)의 특징이죠.”
번쩍.
해원기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나고 눈썹을 문지르던 손이 멈추었다.
“신앙? 종교? 머리를 박박 깎지도 않았고, 도호를 외우지도 않았잖아요. 아니지, 유가와 도가를 합쳤다니까 공자니 맹자니 하는 양반과 동쪽의 태양을 신으로 모시는 건가? 그럼 유생이야 도사야? 어지간히 수상하고 헷갈리네.”
증명단이 답답해서 마구 투덜거리지만,
오소민이 이마에 주름을 몇 개나 잡으며 짧은 단어를 토했다.
“사교(邪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