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조양신문(朝陽神門) (2)
석수장이가 아니란 것쯤 척 보면 안다.
대충 천황곡이라 불린 그 계곡 속에 즐비했던 조각들. 크기도 모양도 각양각색에 그냥 주사위처럼 편편한 것부터 동식물을 고스란히 본뜬 것까지 전부 자연스럽게 다듬어졌는데,
어디에도 공구가 보이질 않았다.
무엇으로 그 많은 조각을 만들었을까.
더구나 무공의 고수라면 그 조각들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느낌을 모를 리 없다. 거칠면서 정교하고, 대범하면서 세심하고.
석수장이라면 대개 한 가지 기풍을 중심으로 만들기 마련, 이렇게 상반된 기운을 동시에 표현하기는 극히 어렵다.
해원기와 희한한 관계를 몇 년간 유지한 것부터 평범치 않다. 날을 정하지도 않고 매년 한 번씩 만났다니. 그러면서도 서로 마음에 둘 정도의 친분이라니.
천황곡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기다란 자루에 병기가 담겼으리라 추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건 칼.
어려서 군대에 팔려간 아이가 기인을 만나 수련의 비결을 얻었고, 홀로 살아남은 후에는 그 비결을 찾아 수련에만 몰두했었다는 얘기.
외팔이 영감님은 분명 무림인이었을 것이다.
“호오, 도라면 무슨 도? 어느 문파에요?”
증명단이 윤기가 자르르한 밀삼도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강호에서 남의 사연을 함부로 묻는 건 실례. 해원기를 통해 알게 되었고, 일행으로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그 내력을 알고자 한 것이지만. 악송령이 이 정도로 답해주면 더 캐묻기도 어렵다.
증명단의 이 단순함이 오히려 대화를 이어가게 해주었고.
악송령이 밀삼도 접시를 증명단 앞으로 끌며,
“도의 도(道), 모르오.”
순순히 답해주어서 도리어 호기심이 더해졌다.
증명단의 질문은 참으로 단순하지 않아서, ‘무슨 도’라고 하면 어떤 칼을 쓰는지, 혹은 어떤 도법을 익혔는지 다 묻는 뜻.
그리고 외팔이 영감님이 도사를 자칭했으니 당연히 유파도 말해주었을 텐데.
악송령의 간단한 대답 또한 전혀 간단하지 않다.
가만히 차를 마시며 듣기만 하던 오보혜도 이 의미심장한 대답에 입을 열 생각이 들었나.
“도도(刀道)라. 엄청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럼 그 도사라는 분의 성함…….”
그러나 차분하게 따져보려던 그녀의 말은,
반점으로 들어서는 소란스러움에 끊어졌다.
“제로평(齊魯平), 조양안(朝陽安)! 감사합니다.”
“아휴, 언제나 지켜주셔서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제로평, 고마우이!”
“이거라도 좀 받아주시지, 또 그냥…….”
왁자하니 몰려들었다가 멀어지는 소리, 그리고 반점의 주인과 점소이가 급히 나가 맞이하는 모습.
“아이고, 어서 드십시오. 제로평, 조양안.”
“신문(神門)의 귀한 분들이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요.”
태안현의 현령이 와도 이렇게 반가워하진 않을 게다. 주인과 점소이가 연신 굽신거리며 넓은 자리로 모시는 태도가 살갑기 그지없다.
네 사람. 모두 연한 색의 청삼을 깔끔하게 갖춰 입었고, 다 같이 혼원관(混元冠)을 썼으며 허리띠 뒤쪽에 기특한 병기를 매단 것까지 똑같다.
하얗게 광이 나는 좁은 날이 한 자, 손잡이가 한 자, 또 손잡이와 좁은 날 옆에 붙은 동그란 고리가 또 거의 한 자 길이.
언뜻 보기엔 도사(道士) 같은데, 도사가 저런 기특한 병기를 지녔을 리 없고.
하나 입구에서부터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의젓하게 답례하는 태도는 또 훌륭한 도사를 연상케 하니.
넷 중의 우두머리인 듯한 인물이 반점 안을 둘러보다가 해원기 일행에게 잠깐 시선을 멈추었고. 미소를 머금은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나서야 입구를 향해 돌아앉는다.
“자, 앉자꾸나.”
평범하지만 깨끗한 안색, 세 갈래로 다듬은 수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존경심을 품게 하는 용모요,
“네, 장자(長者).”
예를 차리고서야 앉는 나머지 셋도 전부 믿음직하게 생긴 청년들.
달리 시키지 않아도 주인과 점소이가 부지런히 차를 올린다. 상당히 받드는 모습에서 이들이 꽤 유명한 인사란 게 엿보였다.
다른 손님이 들었으니 해원기 일행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멈추었고, 아무래도 눈길이 이들에게 쏠리게 되는데.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다가온다.
성큼성큼 다가와 예를 취해 모은 손에는 김이 오르는 찻잔.
“처음 뵙겠습니다. 졸자(拙者)는 유(劉) 모라고 대묘 부근을 순찰하는 사람입니다. 일찍 참배를 오신 분들인 듯해서 장자께서 인사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뜻밖의 정중한 인사.
다들 조금 당황할 상황이지만, 오소민이 밝게 웃으며 마주 일어섰다.
“하하, 이거 예상치 못한 환영이로군요. 태안은 과연 남다른 고을이로구먼. 이번에 산동의 명승지를 유람하러 온 오(吳)라고 하외다. 이렇게 살펴주시는 귀상(貴上)께 감사드리오만, 관인(官人)은 아니신 듯?”
자신의 찻잔을 한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는 답례, 그리고 웃음과 함께 짧게 줄이는 말투.
꽤 건방진 티를 내보이자,
“아아, 대뜸 학생(學生)을 보내면서 조금 걱정을 했소이다. 혹시 괜히 놀라게 해드리는 게 아닌가 해서. 역시 타지에서 오신 귀빈이셨구려. 괜찮으시면 따로 자리를 같이해서 좋은 사귐을 갖고 싶습니다만.”
처음에 목례를 보냈던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인이 다시 몸을 돌려 답한다.
‘장자’라는 호칭, ‘졸자’라는 자칭과 학생이라 했으니 어디 옛날 서당에서나 나온 사람들 같고. 그 정중한 언행과 친절한 태도에 자연스레 호감이 간다.
타지에 놀러 와서 현지의 선비와 사귀는 것도 유람의 즐거움.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소민이 쾌활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좋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막 도착해서 궁금한 게 많았던 터라. 어흠, 너희는 여기 있거라. 내가…….”
“공자, 저희가.”
“에? 저 사람들 누군지도 모르는데…….”
시비인 척하는 게 어째 오보혜보단 증명단이 더 어울려서.
불만스럽게 종알거리는 소리에 중년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상을 붙여 같이 앉으면 더 화기(和氣)가 넘치지요.”
아예 한자리를 만들잔다.
중년인이 일어서고, 청년들이 냉큼 다가와 자리를 만들고.
어지간히 적극적이다.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오 공자께서는 부귀한 집안 출신이시구먼. 문무쌍비에 포인(庖人)을 둘이나 데리고 유람이라니.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소이다. 허허.”
“뭘 그 정도로. 유람이란 게 본래 먹고 마시고 아니겠습니까. 제가 본래 입맛이 까다로워서. 어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청년들을 이끄시는 분이니 어디 유명한 서원(書院)의 석학(碩學)이실 것 같은데, 그, 뒤에 지니신 게. 흐음, 흐음.”
괜한 헛기침.
점소이까지 거들어 탁자 두 개를 붙였지만, 막상 마주 보고 앉은 이는 오소민과 중년인뿐이다.
오보혜와 증명단은 시비답게 오소민의 등 뒤에 나란히 서고, 해원기와 악송령은 조금 떨어져 오소민의 좌우에 앉아서. 처음 정했던 역할에 맞게 자리를 잡았다.
중년인 역시 마찬가지. 청년 셋은 그대로 중년인의 좌우와 뒤에 서서 공손하게 손을 모았으나.
그 시선이 다 해원기 일행을 빼놓지 않고 살핀다.
오소민이 건방진 귀공자로서 대담하게 청년들의 병기를 흘끔거리자, 중년인이 웃음을 짧은 한숨으로 바꾸었다.
“후우, 이 조규헌(曹圭軒)이 무슨 재주로 석학이 되겠소이까? 세상이 워낙 어지러워 서책만을 벗 삼기엔… 다행히 인연이 닿아 이렇게 백성들을 도울 방도를 찾았구려. 우리가 지닌 이 병기는 남을 해하려는 게 아니라 무고한 이들을 지키려는 마음의 표현이라오.”
무거워지는 음성.
세 청년 역시 정색하며 입속으로 작게 읊조린다.
“제로평, 조양안.”
엄숙해지는 분위기에 오소민이 눈을 껌뻑이다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이런. 제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군요. 에, 조, 조 선생, 이게 옳게 부르는 건지 모르겠소만. 그런데 아까부터 많이 들리는. 구호? 주문? 뭐라고 해야 할지. 쩝.”
당황하면 본색이 드러난다. 오소민이 갑작스레 엄숙해지는 분위기에 당황해서 경박한 소리를 지껄여대자,
조규헌이라는 중년인이 얼른 표정을 바꾸어 고소를 지었다.
“허허. 이런 실례가. 좋은 분을 새로 사귄다는 기쁨에 제가 서둘렀나 봅니다. 저와 학생들은 모두 조양신문(朝陽神門)에서 공부하는 처지랍니다. 오 공자는 태원에서 처음 산동으로 오셨으니 알 수가 없죠.”
“조양신문?”
“예. 이 산동은 과거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있던 곳, 제나라에 뿌리를 둔 도가(道家)와 노나라에서 꽃피운 유가(儒家)를 함께 익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익혀야 할 공부지요. 뜻을 같이한 동지(同志)들이 모여 작게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어느새 많은 사람이 동참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쪽이 중원의 동쪽, 태양처럼 밝은 기상을 추구한다고 그런 이름을 붙여주더군요.”
“우와, 도가와 유가를 함께? 산동이 본래 제로의 땅이니까. 오호, 오호. 조양(朝陽)의 기상이라. 멋지군요!”
“민망스럽습니다. 뭐 그래도 그 각오를 외우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이젠 백성들까지 따라주니 나름 감격스럽기도 하지요.”
고소가 은근히 자랑스러운 미소로.
온화하고 의젓하며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오소민이 감탄한 얼굴로 거듭 중얼거렸다.
“제로평, 조양안. 산동 땅에 조양신문이 있어 평안하도다. 백성들이 추앙하는 건 그만큼 믿음직하기 때문이겠죠. 부럽습니다.”
“과한 말씀을.”
겸손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오소민이 바로 병기를 손가락질했다.
“이렇게 무서운 병기는 다 나쁜 놈들 때려잡으려는 거군요. 그렇다면 문무겸비(文武兼備)? 이거 태산을 오르는 것보다 귀문(貴門)을 한번 구경, 아니, 배방(拜訪)했으면 좋겠소이다.”
얼른 단어를 바꾸긴 했어도, 세상 모르는 부잣집 귀공자에겐 유람보다 훨씬 구미가 당기는 듯.
조규헌이 얼굴을 환하게 폈다.
“오 공자 같은 분이 와주신다면 참으로 영광이지요. 여기 태안에는 얼마나 머물 예정이신지?”
“한 사나흘? 그 정도면 될까?”
오소민이 슬쩍 돌아보며 묻는 소리에 오보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오늘 대묘를 구경하고, 내일 태산에 오르시면 충분하실 듯합니다.”
괜히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 해원기도 슬그머니 말을 보태서,
“태산 말고도 유람하실 곳이 많습니다.”
일정이 촉박하다고 채근하는 말인데, 조규헌은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태원에서 오셨으니 태산을 거쳐 곡부로, 또 임치(臨淄)와 청주(靑州)까지 돌아보셔야 할 터. 괜찮습니다. 산동에는 본문의 동지들이 두루 퍼져서 어려움이 없도록 돕고 있으니까요. 아, 그럼.”
뭔가 생각난 듯 소매에서 작은 철패(鐵牌) 하나를 꺼내놓더니.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본문을 찾으시도록. 이게 저희 신물(信物)이랍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쇳조각, 앞에는 산과 바다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뒤에는 둥근 원 가운데 조양이라는 글자가 양각되었다.
오소민이 화들짝 놀란 티를 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고, 처음 만나는 사이에 이 무슨. 제가 어찌 받겠습니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까.
조규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이것도 다 인연, 오 공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요. 아무것도 아니니 그저 웃으며 받아주시길.”
“에, 그럼. 염치없지만. 후훗.”
말은 겸양해도 손은 벌써 철패를 집어 들고서 흡족하게 만지작댄다.
조규헌이 좌우를 둘러보곤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이거 저희 휴식 시간이 다 된 모양입니다. 오 공자 일행도 식사를 마저 해야 하거늘, 제가 오래 붙잡았군요. 그럼.”
청년 셋도 함께 찻잔을 들어 예를 표하니.
오소민이 그제야 황망하게 철패를 내려놓고 손을 모았다.
“고맙, 고맙소이다. 에, 그럼.”
아직 뜨거운 찻잔을 조규헌 들처럼 쥐고 인사할 재주는 없다.
경망스러운 답례에도 조규헌과 학생 셋은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떠나니. 유사(儒士) 뺨치는 언행과는 대조적으로 기특한 병기가 등 뒤에서 반짝거린다.
“하, 이거 참!”
마지막으로 조규헌 귀에 들릴 정도로 흥이 난 감탄까지 터뜨리고 나서야.
오소민이 가만히 두 손을 얼굴 앞에 펼쳤다.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두 눈. 조금 전까지의 경박함은 이미 사라졌고.
다시 자리에 앉는 일행.
증명단은 인상을 쓴 채 갸웃거리고, 오보혜는 탁자에 놓인 철패를 유심히 쳐다본다.
무표정한 악송령, 그리고 해원기는 조규헌이 나간 입구 쪽을 향했다.
반점 주인과 점소이가 문까지 배웅하는 걸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