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61화 (62/410)

제16장 조양신문(朝陽神門) (1)

태산을 돌아 태안현(泰安縣)으로 빠져나오는데 한 식경이 걸렸다.

좁은 계곡을 이리저리 통과하느라 발길이 늦어진 게 아니라, 대묘(岱廟) 뒤쪽을 통해 고을로 향할 때까지 다들 새로 일행이 된 거한을 힐끔거리느라 시간을 잡아먹은 셈.

해원기가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도 그저 정중한 포권, 간단한 인사말조차 하지 않았고. 뭘 물어도 답을 하는 법이 없다.

그저 일행의 목적지를 듣더니 훌쩍 기다란 자루 하나를 꺼내 들곤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기이한 인물.

오보혜의 작은 눈에는 경계심이 어렸고, 증명단은 호기심이 부쩍 일어난 모양이지만,

오소민은 어지간히 답답한지, 거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아예 해원기 옆으로 붙었다.

“석, 성이 석이라고 했지요. 그냥 이렇게 막무가내로 떠나도 되오? 그 계곡에서 몇 년을 지냈다던데. 아니, 그 수많은 돌을 다 놔두고, 그건 뭐로 조각한 걸까. 해형에게 들으니 이전엔 노산에 있었다고, 그럼 노산에서도…….”

참았던 질문이 와르르 쏟아지다가,

거한이 똑바로 바라보는 바람에 말이 막혔다.

“당신은 해 대형, 친구. 내 이름, 악송령(岳松齡). 얘기는, 앉아서.”

여전히 짧게 끊는 말투. 그래도 해원기의 친구니까 제대로 이름을 밝히는 것이고, 이렇게 서서 떠들 생각은 없다는 뜻인가 본데.

뜻을 헤아리는 오소민보다 증명단이 대뜸 고개를 내밀었다.

“에? 해 사부가 석형이라고 했잖아요. 아니, 친구라면서 성도 몰랐단 말이에요?”

따지는 말보다 해원기 역시 고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상황.

“악형이었구려. 한 번도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어서 그냥 내 맘대로 석형이라고 불렀지. 별수 없었으니까.”

“해 대형, 이해를. 공부가 부족해, 이름도 없었소.”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악형의 이름을 알았으니. 그럼 공부가 끝났습니까?”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거친 수염이 양쪽으로 미묘하게 움직인다.

그게 비로소 이름을 밝힌 이 거한이 슬쩍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걸, 오보혜가 겨우 알아차렸다.

“이거 참!”

오소민이 결국 탄성을 토하며 머리를 흔들 수밖에.

그나마 대화라도 되는 건 해원기뿐이다.

과묵해도 정도가 있지, 어지간히 입을 열지 않고, 말이라곤 기껏해야 몇 음절. 그렇다고 그게 또 그다지 무례하게 들리지 않으니.

포기하려던 오소민이 다시 말을 붙였다.

“그럼, 악형. 악형은 원래 그렇게 말이 없었소?”

거한, 악송령의 머리가 해원기에게서 오소민으로 돌아왔다.

“아니요.”

대답은 해주지만 그걸로 끝.

오소민이 맥빠진 표정을 하자, 이번에는 증명단이 용기를 낸다.

“그럼 왜 말을 안 해요? 친구라면서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요. 공부가 부족한 거랑 이름이 없는 게 무슨 상관이지?”

따르르르 질문이 이어지지만, 그래 봤자다.

악송령은 묵묵히 증명단을 내려다보기만,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아서. 지켜보던 오보혜가 침착하게 정리를 시도했다.

“원래는 말을 했다가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되도록 입을 열지 않기로 했었다. 그래서 말이 서툴러졌다. 이건가요?”

그제야 악송령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고,

그 모습이 또 의젓하게 감탄하는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한다. 오보혜의 총명함에 덕을 봤다는 건가.

한숨이 나올 것 같지만, 오보혜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해 대협이 오면서 간단히 설명했지만, 우리는 미리 신분을 감출 준비까지 했어요. 악, 장사(將士)도, 음, 어차피 말씀이 없는 분이니. 우리는 그냥 악 사부라고 부를게요. 해 대협, 아니, 해 사부의 조수인 걸로. 괜찮겠죠?”

짜놓은 연극에 일행이 늘었으니 배역을 새로 맡겨야 한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장사’라는 예스러운 호칭까지 써가면서.

악송령이 다시 머리를 끄덕이곤, 서슴없이 해원기가 멘 짐을 잡아당겼다.

“아, 이건…….”

“그렇죠. 조수라면 짐을 지는 게 맞죠. 해 사부, 넘겨주세요.”

오보혜의 작은 눈이 반짝 빛났다.

말이 없어 둔하게 보기 쉽지만, 이 악송령이란 사내, 나름 기민한 데가 있다.

해원기가 할 수 없이 짐을 건네주곤,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미안합니다, 악형. 괜한 일에 휘말리게…….”

악송령이 얼른 손을 들어 그 말을 막는다.

“해 대형, 내 친구. 가볍소, 이 등짐.”

또 수염을 움직여 미소를 머금고는, 자신이 지니고 온 긴 자루를 받침대 삼아 짐을 등에 메는데. 솜씨가 꽤 좋다.

“난 조수. 낮춤말.”

게다가 해원기가 자신에게 존댓말 하는 것까지 주의하라고 하니.

오보혜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해원기에게는 진정으로 대하는 듯하고.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인다.

대묘. 사당이라는 글자를 썼지만 흔하게 보이는 조그만 규모가 아니다.

해원기가 증명단에게 설명한 것처럼 태산은 천자가 직접 봉선의 예를 치르는 곳. 그 태산의 산신을 모신 사당이라, 웬만한 절이나 도관보다 훨씬 격식을 갖추어서 크기와 기세가 엄청나다.

더구나 춘분 때이니 참배하러 오는 백성들이 이른 새벽부터 모여들고.

일행이 대묘 앞으로 나오자 벌써 많은 노점이 빼곡하게 이어져 참배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향화(香火)요, 지전(紙錢)이요!”

“전지화(剪紙花)예요, 전지화.”

“차와 간식거리 드세요!”

참배에 쓰이는 용품부터 각종 먹을거리까지.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방을 구경하기 바쁜 증명단을 빼고. 다들 조금 난감해졌다.

생각보다 훨씬 시끌벅적해서 그야말로 야단법석.

오소민이 슬쩍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며칠 전에 봄비가 적당히 내렸으니 이럴 법도 하지. 뭐, 황신으로 걱정하기보다야 훨씬 낫구먼. 그나저나 우린 끼니를 때워야지?”

밤을 도와 제남에서 태산까지 왔다. 다들 무공을 지녔고 오면서 틈틈이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래도 따뜻한 음식과 차가 필요하다.

증명단이 ‘끼니’라는 소리에 와락 몸을 돌리더니,

“해 사부,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

이제야말로 기껏 꾸민 연극을 제대로 써먹을 때라고 여겼나. 신이 나서 묻는 말에 해원기가 목을 조금 뽑았다.

“우리가 모두 다섯이니 좁은 곳은 어울리지 않고. 공자, 저쪽이 괜찮아 보입니다.”

시끌벅적한 대묘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리 크지 않은 이 층 건축, 지붕에 높이 꽂은 깃발에는 ‘태안삼미(泰安三美)’라고 쓰여있다.

고지식한 해원기가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는 게 신기해서,

오소민이 히죽 웃으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삼미라니. 새벽 댓바람부터 이쁜이들 만날 생각은 없는데. 설마 기루는 아니겠지?”

처음 만난 곳이 기루 골목이었기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고구마 대장’이 정색을 하면서,

“원, 엄한 말씀을 다. 태안은 예로부터 물, 배추, 두부가 깨끗해서 이걸 태안삼미라고 한답니다. 두부연(豆腐宴)에 전병(煎餠)을 곁들이고, 판율(板栗)이 박힌 백고(白糕)로 입가심을 하시면 아주 만족하실 겁니다.”

굽실, 머리까지 조아리는 통에 할 말을 잊었다.

장단을 맞춰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역할에 몰두한 모양.

‘이 바부탱이가…….’

지나치게 진지한 해원기를 째려보는 오소민 대신에 증명단이 손뼉까지 쳤다.

“와, 역시 해 사부네! 그럼 빨리 가봐요.”

그리고 당장 앞장서는 해원기를 쫄랑쫄랑 따라가려 해서 오보혜가 얼른 그 옷자락을 잡았다.

“소단, 우린 공자님을 모셔야지. 흐유.”

해원기가 움직이면 조수역인 악송령이 당연히 뒤를 따르고,

그 뒤에 오소민, 그리고 오소민 뒤로 시비 둘이 졸졸 좇아가야 그림이 된다.

역할을 맡은 건 좋은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할 줄이야.

오보혜가 끝내 한숨을 참지 못했고,

오소민이 다시 히죽거리며 점잖게 걸음을 떼었다.

짐꾼 둘 앞세우고, 여종 둘 거느린 엄연한 공자님 행차시다.

진주상차(進酒上茶). 술은 드린다고 하고, 차는 올린다고 한다.

왜 그럴까?

태안삼미라는 깃발을 건 반점은 꽤 오래된 듯. 술과 차, 그리고 간단한 냉채가 오른 식탁도 상당히 낡았지만.

그렇게 촌스럽거나 저속해 보이진 않았다.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냐?”

슬쩍 속삭이는 오소민에게 해원기가 살짝 웃어 보였다.

“나오면 알겠지만, 그리 많은 게 아닙니다. 두부연(豆腐宴)이라고 해도 백채두부탕(白菜豆腐湯)을 중심으로 두부환자(豆腐丸子)를 곁들이고 연소두부(軟燒豆腐)와 끓인 우유를 더한 정도. 양이 많아도 두부라 속이 편하지요. 또 태안의 전병은 춘권과 비슷하지만 아주 얇고 가늘며 훨씬 부드럽답니다. 마지막에 밀삼도(密三刀)라고 꿀을 입힌 보리 떡도 괜찮지만, 그건 본래 강소(江蘇) 쪽 음식. 그래서 태산 근처에서 나는 조그만 밤을 박은 흰떡을 더 시켰습니다.”

점소이가 꼼짝 못 하고 주문을 받은 이유.

처음 보는 손님이 아침 일찍 들어와선 태안의 명물을 척척 시켰으니.

그러나 오소민은 한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런 설명을 듣자고 속삭였던 게 아니잖나. 이 ‘바부탱이’는 눈치도 없어서. 기껏 친구끼리 말 놓은 걸 다 까먹은 모양.

눈치 없는 사람 또 있다.

“공자님, 돈 걱정해요? 떠날 때 듬뿍 주는 것 같던데, 그 황 단주님이…….”

“쉿!”

오보혜가 질색하며 조잘대는 증명단을 흘겨보았다. 이런 철딱서니.

기껏 연극을 하면서 흥륭 얘기를 꺼내면 어쩌자는 건가.

오소민이 정신을 차리고 의젓하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자. 음식 나오기 전에 간단히 한잔하자꾸나. 악 사부는 오래간만에 나오는 셈이니 해 사부랑 같이 기념 주, 너희 둘은 차로 술을 대신하고.”

어차피 이 연극의 주체는 오소민 자신.

일행을 자연스럽게 이끌려면 먼저 나서야 한다.

해원기가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그렇군요. 그럼 공자께 먼저, 그리고 악형.”

증명단이 술병에 입맛을 다시긴 했지만, 오보혜와 자신의 잔에는 차를 따르고.

해원기가 술잔을 들어 가볍게 예를 취했다.

“청(請).”

정중한 권주에 이어 시선이 마지막으로 악송령에게 향했다.

오소민이 왜 한잔을 말했는지 그 뜻을 안다. 일 년에 한 번씩 만났다는 친구, 악송령이 마침내 공부를 마치고 산을 떠나게 되었고, 선뜻 해원기를 따르면서 일행이 되었으니. 둘 사이의 회포를 풀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들도 자연히 첫 잔의 의미를 이해했고, 악송령이 마주 일어나 다시 고개를 숙인다.

“다 해 대형 덕분. 감사하오.”

역시 해원기에게는 좀 다르다.

훌쩍.

다들 잔을 비우자, 시켰던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다지 배가 고픈 편이 아니었는데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다들 조용해지기 마련.

이 반점에는 손님도 더 들지 않아서, 일행이 간간이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밖엔 들리지 않는다.

세 번째 술잔을 비우고서 오소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에, 악형. 나와 여기 두 사람도 해형과 함께 한 건 얼마 되지 않소. 괜찮다면 악형 얘기를 조금 들려주겠소? 친구인 해형도 악형 이름을 몰랐고, 음, 해형은 말솜씨가 영. 알죠?”

요리도 다 나왔고, 점소이도 보이지 않고.

다시 악형이라고 부르는 건 굳이 연극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악송령이 수염에 묻은 술 방울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해 대형, 답답하오.”

과묵해서 짧게만 말하는 이가 대뜸 동의하는 소리에. 오보혜도 입을 가렸고, 증명단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송령이 음식 접시 중의 하나를 살짝 당기며 해원기를 본다.

“본래 내주(萊州) 출신, 해적과 왜구 때문에, 어려서 군역(軍役)에 끌려갔소. 외팔이 영감님과 불목하니 노릇. 그 영감님이 도사(導師)? 그런 이름을 댔구려. 부대가 다 전멸, 나 혼자 노산에 들어갔고. 영감님이 일러준 걸 찾으려고 다시 태산. 그러다 해 대형, 만났소. 후.”

오랜만에 말이 많아서 숨이 찬지 짧은 한숨이 붙는데.

해원기까지 처음 듣는 악송령의 신세 내력. 간결하지만, 역시 금방 알아듣기는 어렵다.

“그럼 그 공부라는 게 도사를 자칭한 영감님이 알려준 거로구먼. 같은 산동이라도 노산에서 태산까지는 아득하게 먼데. 대체 무슨 공부기에?”

가장 궁금한 것. 오소민이 슬그머니 상체를 내밀며 묻지만.

악송령은 당긴 접시에서 손을 떼지 않고 짧게 답했다.

“도(刀).”

모두의 시선이 그 접시에 모였다.

보리 떡 세 조각을 칼 모양으로 빚어 꿀을 더한 요리, 밀삼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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