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산중기인(山中奇人) (4)
증명단이 새삼스럽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정말 산이 없네요. 황부의 뒤, 그 천불산인가 하는 것도 사실 산이라 부르기 민망한 크기고. 그냥 죄 밭이네, 밭.”
대첨산에 숨겨진 호중객잔에서 살다가 다음에는 항산에서 수련. 산서 쪽은 거대한 고원에다 높은 산에서만 지냈으니, 처음 보는 산동의 평야가 신기한 모양이다.
밭도랑을 막 빠져나오던 해원기가 금방 따라붙었다.
“맞습니다. 산동에는 높은 산이 없죠. 자, 속도를 올릴 참이니 어서.”
훤한 개활지를 지날 때에는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나무나 수풀을 만나면 경공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천불산에서 태산까지 이동할 때의 방법을 그렇게 정했기에 슬쩍 재촉하는데.
증명단이 도리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본다.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돼요?”
“?”
갑자기 또 뭔 얘기인가.
증명단이 멈추는 바람에 앞서가던 오보혜도, 속도를 올리자고 수신호를 보내려던 오소민도 자연히 멈추어 돌아보게 되었다.
“아까 천불산 꼭대기에서 다 털어놨잖아요. 난 열여덟, 오 소저, 아니, 언니는 스물셋, 저어기 장로님은 스물다섯.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되돌아오던 오보혜와 오소민이 똑같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태산의 천황곡을 거쳐 가기로 결정한 후에, 그곳에 머무른다는 해원기의 친구에 대한 질문이 나왔지만.
‘고구마 대장’의 설명은 영 요령부득. 증명단이 답답한지 홱 화제를 돌려 나이를 묻기 시작했고.
대강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으나. 해원기가 막상 나이를 밝히자 다를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여덟이나 먹었다니.
서로 ‘형’을 붙여 부르는 친구 사이니까 오소민과 그다지 차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오소민이 ‘말도 안 되는 동안.’이라고 툴툴대기까지 했었다.
이 막돼먹은 소녀도 일단 함께하기 시작하자 귀여운 구석이 계속 드러나서. 오보혜에겐 ‘언니’요, 오소민에겐 ‘장로님’이라고까지 부르는 게 어색하지도 않은지.
“나이가 제일 많다고 그렇게 무게를 잡으면 힘들지 않아요? 장로님은 친구라고 말을 놓으면서. 뭐, 언니는 명문가의 아가씨라서 그렇다 쳐도. 나야 그냥 막 대해도…….”
“허.”
뭐라고 답해야 하나. 해원기가 의미 없는 탄식을 하는 동안.
가까이 다가온 오소민이 히죽 웃었다.
“음흉한 도적으로 여기고 태원에서부터 득달같이 달려왔건만, 사실은 식구들의 은인이 맞고. 게다가 무공까지 지도를 받고 일행이 되어 긴 여행을 시작했더라. 그런데도 이 바부탱, 고구마 대장께선 영 소 닭 보듯. 흐흐, 겉과 달리 속이 팍삭 늙은 걸 감추려는 수작일까.”
“아하, 그럴 수도. 역시 장로님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셔.”
“에고. 그 장로님 소리도 좀 어떻게 하자. 오 소저가 미리 일러주었잖아. 증 낭자가 아니라, 소단은 검비라고, 검비.”
“그게 영 쉽지 않다고요. 아무리 장로라고 해도 개방이니 거지인데. 거지 보고 공자라 부르라는 거잖아요.”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해원기가 조금 기가 막혀서 오소민과 증명단을 번갈아 보았다.
처음 소 닭 보듯 한 사이는 바로 이 둘 아니던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죽이 맞았을까.
오보혜의 통통한 얼굴이 고소를 머금고 끼어들었다.
“하긴. 호칭 문제는 아까 정한대로 하는 게 좋겠네요. 이런 식이면 금방 파탄을 보일 테니까. 기껏 위장을 준비한 의미가 없죠. 오 장로에겐 지금부터 공자, 존대를 붙이고. 해 대협에게도 사부라고 존대하죠. 두 분은 우리에게 소보, 소단이란 호칭과 함께 말을 낮추세요. 위장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오소민이나 증명단이나 놔뒀다간 화제가 산으로 가기 십상.
오보혜가 얼른 결정을 내리고 한 사람씩 확인의 시선을 보내는 통에 해원기도 꼼짝없이 동의해야 했다.
“아, 소보, 소단. 알았, 다.”
어색한 반말.
“하하, 해 사부, 이제 좀 나이랑 어울려 뵈는구먼.”
“사부, 사부. 태산에선 뭘 먹을 거예요?”
이런 연극에 오소민과 증명단은 당연히 신이 난 듯. 오보혜도 결국 픽, 웃음을 뿜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절반 정도 왔군요.”
태산에 도착하면 아침이겠다.
별빛이 가득 뿌려지는 깊은 밤. 인적도 없는 산동의 평야를 몰래 이동하는 네 사람.
다들 젊어서 시간이 갈수록 긴장감은 떨어지고, 어쩐지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스물여덟.
자신의 나이를 밝히던 해원기조차 그 단어가 낯설었다.
‘그런가. 스물둘에 쾌체를 시작했었구나. 열일곱에 처음 환정곡(還情谷)을 떠났었고, 일 년 만에 다시 사부님을 뵈러 돌아갔었지.’
증명단이 항산에서 내려온 나이, 그 나이에 해원기는 도로 사부 곁으로 돌아가야만 했었다.
십 년.
개방의 전령전을 받았던 것도, 소금으로 백온옥을 만드는 기술을 배운 것도 다 십 년 전 일.
백성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려면 장거리 쾌체라는 직업이 좋겠다고 세상에 다시 발을 디딘 게 스물두 살. 그러나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 적은 거의 없었다.
지난 세월, 어느새 먹은 나이가 낯설기만 하다.
해원기에겐 가족이 없다.
아니, 십 년 전까지는 있었다.
“자, 이제 좀 지형이 울룩불룩해졌지? 자그마한 동산들이 여기저기 고개를 쳐들고, 에, 소단에겐 우습게 보이겠네. 저 앞을 잘 봐봐, 안력을 높이면 윤곽은 보일 거야. 저게 태산이란다.”
인시(寅時)를 반쯤 넘겼을 때라 하늘은 더욱 어둡지만.
굵은 나무가 뒤엉킨 숲에서 막 나오던 오소민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오는 내내 연극에 맛이 들어서 제법 의젓한 귀공자가 시비를 가르치는 자세가 나오고,
증명단이 오보혜와 함께 나오다가 폴짝 앞으로 뛰어나갔다.
확실히 밭은 줄고 숲이 늘어가는 지형, 여전히 언덕배기로 보이는 조그만 산들엔 눈길도 주지 않고서 증명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 보이는 웅위한 그림자. 평지가 거듭되다가 갑자기 불쑥 치솟아서인지 더욱 우뚝하게 느껴지는 산 그림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헤에, 괴상한 모양이네요. 뜬금없이 치솟아서는. 저게 오악지존(五岳之尊)이라니.”
기묘한 감상.
항산에서 내려온 그녀로선 오악의 으뜸이라는 태산에 상당한 기대를 했을 터. 비록 형상이 특출하긴 하지만 항산에 비하면 규모나 기세가 생각보다 많이 부족하다.
‘오악의 으뜸’이란 게 쉬 믿기지 않는 듯.
커다란 짐을 짊어진 해원기가 마지막으로 숲을 나오면서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해가 뜨는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는 동악(東岳)이라서 그렇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해를 숭상했고, 하늘이 낳았다고 여겼으니까. 그 해가 가는 하늘길을 처음 밝히는 산이라서일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祭天)을 특별히 봉선(封禪)이라고 하는데, 역대의 제왕은 다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했지. 자신이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
“아하, 그래서 천자라고 하는 거군요. 흐음, 혹시 천자가 높은 산에 오르기 싫어서? 킥.”
“뭐 그럴 수도. 그러나 낮은 산이라면 오면서 본 동산들도 많고, 오악 중에 중악인 숭산은 누웠다고 하니까 아예 숭산을 택하겠지. 태산여좌(泰山如坐), 숭산여와(嵩山如臥), 화산여립(華山如立), 형산여비(衡山如飛), 항산여행(恒山如行). 그렇게 많이들 표현하잖냐.”
“항산이야 워낙 구불구불, 꼬이고 꼬인 산세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원.”
“형사(形似)가 아니라 신사(神似)란다. 이 너른 산동 평야에 홀로 단정히 앉아 바다를 향한 근엄함. 그걸로 충분하지.”
해원기의 반말도 많이 늘었지만.
오소민과 오보혜 모두 해원기의 해설을 귀담아들었다.
증명단이 농을 섞든 말든, 간결한 대화 속에 되도록 많은 걸 가르쳐주려 애쓰고. 그 견해가 또한 정심해서 배울 바가 적지 않다.
증명단은 그것보단 역시 오악검파가 더 궁금해서.
“저기에도 태산검파(泰山劍派)가 있었다면서요?”
오악지존이니 동악의 봉선이니 다 관심이 없다.
그래도 해원기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태산의 그림자에서 더 어두운 동쪽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오악검 중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흠, 실상 태산검파라고 칭하기도 어렵다고 들었다. 대대로 일맥단전(一脈單傳), 멸문되기 전에도 후인이 끊긴 경우가 많았다니. 복룡검식의 몇 초식이 무림에 유전된 것과는 달리 뭐가 태산의 검인지조차 아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산지혼(山之魂), 해지운(海之韻). 역시 심오한 의미를 바탕으로 삼는다.”
해원기를 따라 머리를 돌려봤자 밤하늘에 박힌 별들만 보일 뿐.
증명단이 되레 해원기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오소민과 오보혜도 마찬가지. 오악검 중의 하나가 태산의 검이란 건 누구나 알지만, 그 비결은 생전 처음 듣는다.
항산 복룡검식이 만물복북음(萬物伏北陰)에 뿌리를 두었기에 총원심법을 익히지 않고도 펼칠 수 있다고 했던 해원기.
“태산의 검은 이름이 뭐예요?”
“무변무제(無邊無際)의 해운파랑검(海韻波浪劍)이란다.”
“아.”
증명단이 짧게 탄성을 냈고. 해원기를 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해원기가 실전된 오악검법을 전부 익혔다는 게 정말이란 걸 이 대답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해원기의 신분을 아는 오소민이야 당연히 배운다는 생각으로 들었지만.
오보혜는 작은 눈을 잔뜩 찡그리고 새삼 해원기를 훑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 사이랍시고 오소민이 ‘바부탱이’니 ‘고구마 대장’이니 마구 놀려댈 정도로 고지식한 사내.
그러나 지낼수록 더 놀라게 된다.
‘태산을 그렇게 해설하려면 상당한 학문을 닦아야 가능하다. 그런 데다가 이미 실전된 오악검도 무불통지(無不通知). 스물여덟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문무를 이렇게 겸비하다니. 누가 가르쳤기에?’
대명호의 초연루에서 의미가 모호한 얘기를 들었고, 그게 중요한 단서인 건 느꼈으나.
여전히 해원기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세가로 돌아가서 그 얘기를 꺼내면 뭔가 알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 오보혜와 달리 증명단은 검법 얘기가 정말 좋은지.
“그럼, 그럼 다른 오악검은요? 다 무슨 비결이고 이름이 뭐예요?”
달라붙듯 졸라대는 통에 해원기가 좀 머쓱했지만.
“음, 음. 화산의 단홍검(丹紅劍)과 숭산 소림사의 수미전단검(須彌栴檀劍)은 이미 주인이 있으니 뭐라고 떠들기 어렵구나. 남악의 검, 형산의 기수검봉(奇秀劍峰)은 기궤다단(奇詭多端)하고 능려다변(凌厲多變)해서 무려 삼십육초(三十六招)나 되니 오악검 중에서 가장 복잡할 거다.”
“꽥. 삼십육초면 그거 배우다 할머니 되겠네.”
증명단이 눈을 치켜뜨며 괴상한 표정을 짓는 통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하하.”
배우려는 자에게 가르칠 수 있음은.
기껍다.
마지막으로 쉰 후에는 모두 경공을 발휘했기에 능히 인시가 끝나기 전에 태산에 이를 줄 알았건만.
해가 훤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서 오소민이 입맛을 다셨다.
“쩝. 이왕이면 태산일출(泰山日出)을 보려 했는데. 북쪽에서 숲을 헤치고 오는 게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는구먼.”
올망졸망하게 여겼던 동산이며 작은 숲에도 길이 나지 않은 이상 금방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빤히 태산을 보면서도 묘시(卯時)를 넘겨서야 태산 아래에 도착했고. 선두를 맡았던 오소민은 조금 지친 듯.
맨 뒤에 있던 해원기가 등짐을 추스르며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 내가 안내하지. 얼른 인사만 하고서 아침 식사를 하세.”
해원기의 약속 때문에 굳이 들른 태산이다.
천황곡의 위치는 이곳 사람이라도 여간해선 찾기 어려운 곳, 천황곡이란 이름도 아는 사람들이 대충 붙인 것이라 해원기가 서둘러 안내를 해야 한다.
해원기가 산세를 가늠한 후에 절벽을 끼고 옆으로 돌았다.
옥황정(玉皇頂) 바로 아래에 갑자기 꺼져 들어가는 지점까지, 길도 없고 난석(亂石)이 험하게 쌓여 보통사람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장소다.
다들 경공을 발휘해 해원기가 밟는 곳을 쫓아 이각(二刻)쯤 이동했을 때.
“호오.”
“와.”
홀연히 탁 트인 전면. 안으로 움푹 파인 좁은 계곡이지만, 가는 시냇물이 흐르고 곳곳에 갖가지 형상의 암석이 즐비한 광경에.
다들 절로 탄성이 터진다.
일행이 곡구(谷口)에 도착하자 해원기가 컴컴한 동굴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석(石)형, 석형. 저 해원기입니다.”
동굴 깊은 곳에서 작은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한 사람이 시냇가로 걸어 나왔다.
당당한 체구, 해원기보다 조금 더 커 보이고 딱 벌어진 어깨에 근육이 우람하다. 낡은 천과 짐승 가죽을 얽은 옷이지만 단정하게 허리띠까지 맸고, 아직 추위가 남았는데도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 얼굴은 온통 점투성이에 쇳덩이 같은 안색과 거친 수염, 긴 머리를 그냥 하나로 질끈 묶은 초라한 차림새.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지, 나타난 거한은 해원기를 향해 두 손을 모으더니 허리를 깊이 숙인다.
참으로 정중한 인사, 흡사 산봉우리가 꺾이는 듯하다.
“오늘, 떠날 셈. 만나서, 다행. 해, 대형(大兄).”
걸걸한 목소리, 그러나 정으로 돌을 때리는 것처럼 뚝뚝 부러지는 말투에.
해원기가 마주 예를 취하든 말든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떠나기 전에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란 뜻이겠지. 말이 어지간히 짧기도 하고.
외모로는 해원기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데도 대형이라고 부른다.
기이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