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산중기인(山中奇人) (3)
다시 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비가 갠 밤하늘은 별이 총총하다.
무수한 별이 박힌 밤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나.
해원기가 망연히 고개를 젖힌 채.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사조(師祖)께서 세상에 이름조차 남겨두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게 본래 사부님의 마음이었다고. 그러나 사부님이 제거하신 천마(天魔), 그의 능력이 너무나 거대해서. 또 벽세(僻世)라는 사수(邪祟)가 끼어들었기에 결국은 세상을 다 짊어져야만 하셨지.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사마(邪魔)를 제거한 대전(大戰)의 공을 전부 탁 소숙에게 돌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강호를 떠나는 사부님의 유일한 부탁.’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기억.
매명은세(埋名隱世). 이름을 묻고 세상에서 숨는다.
오직 인세에 존재해선 안 될 사마를 척결할 뿐, 무슨 명성을 구하겠는가.
공(功)은 물거품이요, 명(名)은 뜬구름이려니.
묵인환(墨仁桓)이란 이름을 모르기에 그저 제멋대로 천외인협(天外仁俠)이라 불렀었다. 하늘 밖에서 왔으리라고.
하지만 사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세가 그러하고 상황이 그러했기에 무림을 이끌어 처절한 싸움을 거듭해야만 했었다.
당장 목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싸움, 그 끝에서 세상을 구한 후에 단 하나 바랐던 것은.
세상이여, 나를 잊어다오. 강호는 그대로 이어지리니, 무림에 다시는 내 이름이 거론되는 일이 없기를.
백년제일검사(百年第一劍士)는 그렇게 사라졌다.
‘천손(天孫)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고죽(孤竹)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너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셨지. 사람을 돕는 무인이 되고 싶다는 그 소원을 기어이 들어주시려고. 하지만…….’
별을 향한 눈이 우울해졌다.
처음 사부를 모실 때 밝혔던 바람. 그러나 사람은 자란다.
어려서 한림학사를 꿈꾸던 아이가 포목점 주인이 되기도 하고, 어릴 때는 장군이 되겠다던 아이가 자라서 포쾌가 되기도 한다.
바라던 것이 성장하면서 차츰 현실에 맞게 변하기 마련.
해원기의 소원도 그랬다.
사람을 돕는 힘을 갖추긴 했으나, 정말로 원했던 것은.
“어이, 해형. 이제 나오는 모양이야. 뭔 유람 가나? 무슨 짐을 저리. 참나.”
툴툴거리는 오소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막 떠오르던 육 년 전의 기억을 지우고서,
몸을 돌린 해원기가 피식 웃었다.
오소민은 깔끔한 백삼 차림. 여전히 개방의 순행장로답지 않게 준수한 한량 같고.
오보혜는 화려한 머리 장식과 의복을 싹 바꾸어서 두 갈래로 땋은 머리에 분홍색 당의. 통통한 얼굴과 어울려 꽤 귀여운데 길게 만 봇짐까지 걸쳐서 얼핏 부잣집 시비(侍婢)처럼 보인다.
반면에 흑룡포에 붉은 머리띠 그대로인 증명단은 대조적으로 강한 인상, 게다가 등판을 다 가릴 정도로 큰 짐을 짊어졌으니.
흑의 경장에 판과를 가슴팍에 매단 해원기까지.
“유랑극단도 아니고.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가산 뒤에 모인 일행의 차림새가 참으로 다채롭다.
오소민이 기가 찬 듯 이리저리 둘러보다 돌연 히죽거렸다.
“뭐, 괜찮네. 명문가의 귀공자 유람이라, 문무쌍비(文武雙婢)를 거느리고 나왔다고 하면 그럴듯하지.”
귀공자는 오소민, 차를 끓이고 응대를 맡는 시비(詩婢)가 오보혜, 짐을 들고 경호를 책임지는 검비(劍婢)가 증명단이란 거다.
당장 오보혜의 눈썹이 일어서고.
“흥, 귀공자? 어울리지 않네요. 그리고 해 대협은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톡 쏘아대지만, 오소민이 어디 만만한가.
“그거야 주방장이지. 귀공자가 집안의 훌륭한 요리사를 대동하고 천하의 진미를 맛보는. 딱 맞잖소? 크큭.”
냉큼 대답하고선 자신도 우스웠나. 키득거리는 오소민을 쏘아본 오보혜가 해원기를 보다가 자신도 얼굴을 풀고 말았다.
“우방건채초계단이었죠. 그건 또 그렇네요.”
화전민 마을에서 얻어먹었던 해원기의 요리. 신비한 무공과 내력, 의외로 답답한 말투. 그래도 같이 하면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같이 고생했던 기억 때문일까. 훨씬 누그러진 오보혜인데.
증명단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어리둥절하다가 겨우 말머리를 찾았다.
“초계단? 해 대협이 요리도 해요? 요리는 제가 하는 줄 알고 재료를 이렇게 잔뜩 가져왔.”
“허. 증 낭자, 그럼 그게 다 먹을 겁니까?”
이번에는 해원기가 기가 막혀 눈을 껌뻑였다.
세상에.
증명단이 짊어진 큰 짐이 설마 식재료였을 줄이야.
“에. 그럼요. 제가 그래도 객잔 집 딸내미잖아요. 항산에서도 요리는 다 제가. 이렇게 네 명이 먼 길을 가는데 든든히 챙겨야죠. 마침 주방에 좋은 게 워낙 많아서. 헤헤.”
자신도 좀 멋쩍은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는 모습에.
“푸핫, 그렇지 흥륭 본가의 주방엔 좋은 게 많지.”
“아유, 거기까지 생각했네요.”
오소민이 웃음을 터뜨리고, 오보혜는 작은 입이 쪼그라들었다.
천방지축의 성격에 막돼먹은 말투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해원기도 그저 빙그레 웃을 수밖에.
오보혜가 사뿐 증명단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부드러운 표정으로 둘러본다.
“증 낭자가 나보다 낫군요.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별로 맘에 들진 않지만, 이것도 미리 정해두는 게 만일을 위해 좋겠어요. 오 장로가 귀공자, 내가 시비, 증 낭자가 검비, 해 대협이 요리사. 남의 눈을 속일 때 유용하려면 일단 호칭에 주의해야 하죠.”
웃음이 그치고 서로 쳐다보는 일행.
맞는 말이다. 이제 흥륭의 본가를 은밀히 떠나 낙양까지, 그리고 오보혜를 안전하게 호송한 후에는 막간산의 약왕당으로 가야 한다.
동창의 이목이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관아뿐 아니라 무림에서 주구가 된 자들이 추적할지도 모른다.
싸움을 두려워하진 않아도 굳이 행적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으니.
꾀가 많은 오보혜답게 미리 준비하자는 뜻.
“앞으로 오 장로를 부를 때에는 공자(公子), 저는 소보(小寶), 증 낭자는 소단(小緞)이라고 하죠. 그리고 해 대협은 에.”
얼핏 생각이 나지 않는데.
“사부!”
증명단이 대뜸 목소리를 높이고,
오소민이 또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크큭, 그렇지. 뭐 사부(師父)나 사부(師傅)나. 해 사부! 딱 요리사 이름이구먼. 하하.”
주방장을 높여 부르는 말이 사부(師傅). 오소민이 오는 도중, 요성의 만홍원에 들러 음식을 가져올 때도 주사야(廚師爺)라고 나이 든 요리사를 존칭했었다.
아직 젊은 해원기에게 주사야는 무리고, 사부라면 가능할 터.
물론 증명단이 무슨 의미로 목소리를 높였는지 뻔히 알지만.
해원기가 머쓱해져서 괜스레 가슴팍에 달린 판과를 문질렀다.
그렇게 귀공자의 호화스러운 유람이 시작되었다.
오밤중에.
후원의 담장 역할을 하는 천불산을 넘는 게 차라리 남의 눈을 피하기 쉽다.
후원에 숨겨진 좁은 길을 통해 천불산 기슭 쪽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인 지 한 시진쯤 되었을까.
증명단이 바로 앞의 오보혜에게 바짝 붙었다.
“오, 소저. 뭐 하나 물어봐도?”
맨 앞에는 오소민이 경교한 신법으로 길을 열고, 맨 뒤에는 해원기가 듬직하게 따라오는 형태. 오보혜는 이미 경험이 있기에 익숙하지만, 증명단은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나 보다.
오보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맞추자,
“다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저기 오 장로랑 뒤의 해 사부랑.”
이렇게 순서를 짠 배경이 나이 때문이라고 여겼나.
“글쎄. 나보다 연상인 것 같은데 물어본 적은 없네요. 두 사람도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던데. 흠, 굉장히 친한 척하죠? 증 낭자는 열여덟?”
증명단이 킥, 하고 웃으려다 얼른 입을 가렸다.
‘친한 척’. 오보혜의 표현이 마음에 들면서, 아울러 이렇게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가 아무렇지 않게 일행이 되었으니.
남자치곤 지나치게 미모를 갖춘 오소민이 놀랍게도 개방의 순행장로요, 오동통하니 귀엽게 생긴 오보혜는 용문세가의 지낭이라 불리는 대소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고. 서로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서 함께 하는 게 참 신기하다.
슬쩍 뒤를 보았다.
“네. 그런데 해 사부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증명단이 웃음을 참은 이유를 짐작하는 오보혜가 미소를 짓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낭이라는 그녀도 당최 모를 부분.
“나도 알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증 낭자는 항산검파를 계승했다고. 북악의 검이 다시 강호에 나온 건 거의 백 년일까. 참 대단해요.”
“에이, 그게 뭐…….”
증명단이 뜻밖의 칭찬에 계면쩍어할 때.
오소민의 가벼운 신형이 되돌아왔다.
“뭘 그리 재미나게 속닥거리누? 요 앞에 낡은 석굴(石窟)이 하나 있는데 잠깐 쉬어갑시다.”
은밀하게 움직이며 앞에서 미리 길을 살피느라 바빴던 오소민 외에는 전부 경공을 자제했기에. 천불산을 넘는데 한 시진이나 걸렸다.
딱히 주의할 점이 눈에 띄지 않으니 잠시 쉬며 다음 행동을 결정할 때.
오보혜가 동의하자, 뒤에 있던 해원기는 말없이 따를 뿐. 증명단 대신에 큰 짐을 짊어지고도 발걸음이 가장 가볍다.
“의외로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어. 태항산에 걸려서 대강 흩뿌린 것이겠지. 올해 황신은 이 정도로 지나갔으면 좋겠네.”
“그래. 황하문도 우리 적각개도 쓸데없이 힘을 뺐으니까. 그 정도는 하늘이 좀 봐줘야지. 그건 그렇고.”
먼저 해원기와 얘기를 나눈 오소민이 오보혜를 향했다.
“별달리 보이는 건 없었지만, 관도를 이용하는 건 역시 지양해야겠죠?”
“제남에서 곧장 남쪽으로. 태산(泰山)을 거쳐 제녕(濟寧)쯤에서 관도를 타면 될 거예요. 곡부(曲阜)까지는 하남보다 강소(江蘇) 쪽으로 빠지는 길이니까.”
태산과 곡부. 일단 정남향으로 이동하다 서쪽으로 길을 꺾자는 제안.
황부에서 이미 한번 검토했던 노선이라 다시 확인하는 셈인데.
오소민이 문득 탄성을 토하며 머리를 홱 돌렸다.
“아! 해형, 태산에 들러야 하잖아?”
갑자기 떠오른 생각. 막 증명단에게 뭔가를 답하려던 해원기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오 소저가 안전하게 세가로 돌아가는 게 먼저일세. 이런 상황에서 내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쓸 수는 없지. 그리고 꼭 정해놓은 약속도 아닌데.”
“이런. 내가 깜빡 잊어서. 음.”
오소민이 인상을 구기며 머리를 긁자, 오보혜는 무슨 일인가 싶어 해원기를 보았고.
증명단이 재빨리 입을 놀렸다.
“이건 또 뭔 얘기예요? 태산에 약속이 있다고, 무슨 약속인데요?”
‘고구마 대장’이 선뜻 입을 열 리 없기에.
오소민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답했다.
“해형의 친구. 그 뭐랄까, 기묘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매년 경칩에서 춘분 때까지 한 번은 만나왔다더구먼. 거의 이맘때, 만약 낙양, 아니 막간산까지 갔다 오면…….”
아무리 빠른 경공을 지녔다 해도, 왕복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거리.
“무슨 친구가 일 년에 한 번만.”
증명단이 이상한 설명에 종알거리지만, 오보혜는 난감해하는 해원기를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가는 길이에요. 춘분이면 대묘(岱廟)에 참배하러 오는 이들도 많죠. 따로 길을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닙니다. 일에는 경중이 있는 법. 그 친구에겐 나중에 다시…….”
“하지만,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신의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강호를 걸으랴. 라고 들었는데.”
종알대는 소리에 해원기의 말이 막혔다.
신의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강호를 걸으랴.
가슴에 콱 박히는 듯한 느낌. 눈빛이 가라앉고 표정이 굳어지자, 눈치 빠른 오소민이 얼른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다들 동의하면 된 거지. 그렇지 않아도 꽤 궁금했다고. 석공이랬나? 벙어리인 줄 알았다며?”
“으잉? 석공에 벙어리라니. 그러면 무림인이 아니에요?”
증명단이 잔뜩 호기심을 품고, 오보혜가 가만히 쳐다보지만.
해원기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일의 경중을 따지지 못한 건 자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