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산중기인(山中奇人) (2)
증명단은 자신이 바보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했다.
황부의 후원, 가산으로 둘러싸인 공터. 황부의 뒤쪽은 천불산(千佛山) 절벽을 담장으로 삼았기에 남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
요 이틀간 증명단이 복룡검식을 연습하는 장소로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가산 모퉁이에 딱 붙어서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공중을 휘도는 두 개의 인영, 눈이 휙휙 돌아갈 지경이다.
‘뭐, 뭐야. 분명히 손발이 오가는데 어떻게 부딪치는 소리 하나 안 나?’
갑자기 해원기와 황정리가 찾아와선 비무를 시작했다.
비무.
남의 비무를 제대로 관전한 적이 드물지만, 증명단 자신이 검강지기를 터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검을 쓰는 자, 눈이 날카로워야 한다.
굳이 사부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항산을 내려온 후론 무엇이든 눈에 새기는 데 게으르지 않았는데.
이런 비무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시작도 하자마자 엄청난 속도에 둘 다 아예 발을 땅에 대지도 않는 듯,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섬광이 교차하고, 경풍이 회오리치건만.
소리도, 경력의 여파도 없다니.
‘비룡(飛龍)은 황룡칠절 중에서 가장 독특했다고 하시더니. 과연.’
해원기도 사부의 말을 떠올렸다.
은신, 잠행, 그리고 술법. 당년에 사부를 비밀리에 보좌했던 황룡칠절이 하나같이 뛰어났던 부분. 그러나 막내인 비룡만은 여기에 경공을 중심으로 한 무공에도 공을 들였다고.
한참 전의 일이다.
화표학익(華表鶴翼)이란 인세에 드문 보의(寶衣)를 걸치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소년은 그새 중년에 접어들었고.
비천무영이란 외호로 불리며 당세에 손꼽히는 고수가 되었다.
비천은 그 경공이 뛰어나다는 뜻이요, 무영은 손이 빨라 보이지도 않는다는 의미.
과연 황정리의 공세는 심상치 않다.
지면에서 일 장가량 뜬 상태로 공중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칼날 같은 경풍을 토하는 손이 얼마나 빠른지 수십 개로 불어난 듯하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도 발을 땅에 디디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기 어렵고, 경공 자체로도 상당한 내력을 소모한다. 그런 까닭에 고수들은 경공과 중수(重手)를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사용하기 마련.
그러나 황정리는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 전혀 땅을 딛지 않는다. 기묘하게 놀리는 발이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라도 되는 듯, 계속 공중에 머물면서도 거침없이 내뻗는 손에선 매서운 기운이 점점 강해지니.
해원기 역시 신속하게 대응해야만 했다.
바람을 다루는 법은 풍뢰동에서 익혔고, 사부의 벗이었던 표풍부운이 전한 풍운결(風雲訣)도 배웠으며.
육 년간 쾌체 일을 하면서 그 안의 핵심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도 짐작하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황정리의 공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피한다.
사부의 뜻.
황정리가 어째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냉랭하게 대했는지 이해했지만, 사부의 뜻을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왜 사부는 과거의 흔적을 다 지우도록 했을까.
왜 해원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림을 떠나도 되었을까.
구구한 설명으로 답할 일이 아니다. 아니, 해원기가 무림에 나설 결정을 하기 전이었다면 혹시 가능했을지도. 하지만 무림에 나서지 않았으면 황정리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
피잇.
머리칼 몇 가닥이 끊겨나가는 통에 해원기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 이런 생각을 할 때인가. 비무 도중에 딴생각에 빠지다니.
‘무인의 예가 아니다.’
사부가 알았다면 크게 혼이 났을 터. 비무는 절차(切磋),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 어찌 정진할 수 있으랴.
양손의 모았던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면서 두 발이 엇갈리자.
휘리릭.
검왕수의 오행지력(五行之力)이 황정리의 무수한 손 그림자를 내치면서 돌풍이 확 일었다.
공중을 헤엄치며 폭우처럼 손을 쏟아내는 황정리, 지면을 미끄러지며 돌풍으로 뒤집는 해원기. 한 사람은 위, 한 사람은 아래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기묘한 광경.
그러나 황정리의 신쾌한 공격에 해원기는 아무래도 방어에 좀 더 치중하는 처지.
아무리 황정리의 공격을 쳐내고 피해도 손 그림자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씩 더 많아진다.
살상의 결투가 아니라 기예를 겨루는 비무라고 해도 갈수록 힘이 더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
해원기가 거의 같은 속도로 대응하자 황정리의 신수는 더욱 빨라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공중을 누비는 신형은 이미 신출귀몰(神出鬼沒), 위치를 찾을 수도 없고, 허실이 뒤섞인 손 그림자는 해원기의 주위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
반면에 황정리에 못잖게 움직이던 해원기의 신형은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다.
열세.
하나 해원기의 얼굴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고, 두 발을 문득 멈추더니 왼손이 크게 원을 그렸다.
활짝 펴진 손바닥.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리 빠르지 않은 동작. 그러나 미풍을 달래듯 돌아가는 손을 따라 황정리의 손 그림자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음.”
황정리가 짧게 신음하며 공중에서 벼락같이 휘돌았다. 중첩하던 자신의 힘이 지워지기 전에.
손 그림자가 와르르 모여들어 단숨에 해원기의 머리를 노린다.
여전히 무서운 속도.
그러나 해원기는 그리던 원을 멈추지 않고 그저 왼손을 살짝 움켜쥐더니, 오른손을 불쑥 치켜세웠다.
왼손은 손가락이 전부 굽은 모양, 오른손은 굳게 쥔 주먹. 왼손은 느리게 돌아가고 오른손은 빠르게 뻗는다.
팍.
가벼운 소리 하나.
황정리가 거꾸로 두 번이나 제비를 넘고서 바닥에 내려서고, 해원기는 삼 장이나 주르르 밀려나는데.
파르르르.
새로 갈아입은 흑의경장이 강풍을 맞닥뜨린 것처럼 맹렬하게 펄럭이고, 더벅머리까지 전부 뒤로 넘어가 이마가 훤하게 드러난다.
평소 표정 그대로의 얼굴. 강풍과 함께 밀려온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던 두 손을 정중하게 모았다.
“양보를 받았습니다.”
거리를 벌리고 내려선 황정리는 조금도 바뀐 곳이 없지만.
창백해진 안색에 잔뜩 찡그린 미간. 잠시 해원기를 보다가 한숨과 함께 포권으로 답례한다.
“후.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승부가 났다.
“에?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요?”
정신없이 몰두했던 증명단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일 만큼 어이없는 광경.
양보를 받았다. 승양(承讓)이란 말은 겸손하게 이긴 걸 표현하고, 진 사람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지만.
해원기가 이기고 황정리가 졌다고?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바닥에 내려선 황정리와 달리 해원기는 삼 장이나, 그것도 바람에 휘말려 먼지까지 삼키면서 물러났거늘.
처음부터 관전하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증명단으로서는 도무지 모를 소리.
비무의 승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황정리가 힐끗 증명단을 보다가 손을 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팔성(八成)이었어도 첩영열풍경(疊影烈風勁)이 이렇게 파해되긴 처음이군요. 무슨 수법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무거운 음성. 증명단만이 아니라 황정리도 모른다는 거다.
첩영열풍경은 황정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스스로 창안한 무공. 비천무영이라 불리게 된 성명절기(成名絶技)이요, 그 유래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비무에 전력을 기울이는 건 무인으로서의 예. 우상이었던 옛 주인의 제자와 겨루면서 힘을 줄인 것 외에는 조금도 여지를 두지 않았는데.
옛 주인이 즐겨 쓰던 맨손에서 검기를 뿜어대던 검형수도 아니었다.
해원기도 마주 다가오며 어색하게 가슴팍의 판과를 만졌다.
“처음엔 좀 당황했습니다. 황 대협이 너무나 빨라서 따라가기에. 음, 일단 황 대협을 묶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다가.”
옆에서 보고 있는 증명단이 조금 걸리는 눈치. 그러나 황정리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부른다.
“증 낭자도 이리 와서 듣는 게 좋겠소.”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증명단보다. 해원기가 깊은 눈으로 다시 황정리를 쳐다보았다.
단순한 비무라고 해도 당세의 고수인 비천무영이 패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는 황정리.
무공이 높아서 고수라 불리는 게 아니다.
상대의 체면을 생각해 어색해하던 해원기도 마음이 상쾌해져서.
“황 대협의 장영(掌影)이 점증하면서 공간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더군요.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 경풍을 끌고 쏟아지는 손은 전부가 실체지만, 그 흔적인 그림자는 상대가 피하든 막든 여력을 고스란히 남겨둡니다. 제가 쳐낸 오행지기조차 끊어먹어서 전혀 연계되지 않기에 중첩이란 걸 알았고.”
설명이 자세해진다.
“그 십지(十指)가 과연 오행지기였군요. 첩영장(疊影掌)이 제 의지보다 빠르게 모여들었습니다.”
“빨라서 묶을 수 없다면 더 빠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오행지기를 뿌린 후엔 제 움직임을 조금씩 늦추었습니다. 어차피 공중을 차지한 황 대협은 위에서 공격할 테니까. 압력이 가중되자 힘을 한 점에 모이게 했는데.”
“장법으로 바꾼 줄 알았더니 손가락이 구부러져서. 조법(爪法)으로 보였습니다만.”
“쳐낸 오행지기를 장심(掌心)으로 묶어 끌어당긴 겁니다. 지법도 장법도 조법도 아니지요. 사람을 잡을 수 없으니 발출한 힘을 잡는 식으로.”
가운데 서서 번갈아 두 사람을 쳐다보던 증명단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지법도 장법도 조법도 아니라고요? 그럼 뭘로, 아니, 오행지기가 끊겨 먹혔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황 대협의 첩영장을 묶어요?”
황정리 덕에 얻어듣게는 되었으나.
들어도 모르겠으니 답답한 노릇.
그녀의 견식과 조예는 아직 들어서 이해할 수준이 아니다.
황정리가 미간을 모았다가 다시 해원기를 보았다.
“오행지기를 심어놓은 거로군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럼 마지막에 열풍경을 깨뜨린 주먹도?”
“네. 권법이 아닙니다. 지는 검봉(劍鋒), 장은 검척(劍脊), 조는 검신(劍身), 권은 호수(護手)의 응용일뿐이죠.”
“으음? 그게 전부 검…….”
이번에도 증명단이 먼저 중얼거렸지만, 말을 맺지 못한다.
검의 날카로운 끝, 두께를 결정하는 중심, 날을 이루는 몸체, 그리고 손잡이를 보호하는 부분. 검을 구성하는 각 부분을 수법으로 썼다니.
응용이란 단어를 쓸 수나 있는지.
황정리는 당연한 얘기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탄식을 흘렸다.
“허어, 첩영장과 열풍경을 만들고 다시 하나로 엮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건만. 역시 검주(劍主)의… 부족한 점을 짚어주시지요.”
침중해진 얼굴과 말투.
중간에 말을 흐렸으나, 깍듯하게 말을 높여서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 그러나 증명단은 무공 설명에 정신이 팔려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건 제가 미리 황 대협의 바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첩영장은 음부결(陰符訣), 열풍경은 황도경(黃道經)에서 비롯되었겠지요. 술(術)에서 공(功)을 창안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 다만 본래 음양이 하나인 도리를 허실의 표리로 나누어 쓰기에… 음. 감히 한 말씀 드리면, 쾌지(快遲)와 집산(集散)이 한결같이 다르지 않아서, 공(功)이 도리어 진(陣)에 취약할 수 있다고. 예전에 사부님께 들은 적이 있군요.”
“아.”
황정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황룡칠절이 배운 것은 황도음부진결(黃道陰符眞訣). 그걸 아는 이라곤 가르친 사람과 주인으로 모셨던 분뿐. 그러나 주인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고, 그저 칠절이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만 보았다.
그런데도 첩영열풍경이 어떻게 창안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약점까지 짚어내는 건.
바로 무리(武理)를 깨우쳤기 때문. 설사 듣고 배운 것이라도 짧은 비무 속에서 파악하고 짚어낼 수 있음은 해원기가 이미 이치에 통달했다는 방증이다.
“가르침에 감사…….”
“아, 이러면 제가. 그만 안으로 들어가죠.”
다시 예를 취하려는 황정리를 말리며 후원을 떠나려던 해원기가.
비로소 증명단이 멍하니 선 걸 발견했다.
“증 낭자도 같이 갑시다.”
이제야 말이 들리나. 증명단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목이라도 다친 것처럼 삐꺽거린다.
“음양이 하나, 허실의 표리. 그거 광영의 조화나 유무가 상통한다는 얘기와 통하죠?”
눈이 기묘하게 반짝거리고, 목소리까지 이상하더니.
해원기가 뭐라고 답하기 전에 희미하게 미소까지 머금는다.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해원기와 황정리를 보지도 않고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모습.
황정리가 가만히 해원기의 소매를 끌었다.
“가시죠. 증 낭자는 또 기연을 얻었나 봅니다. 후훗.”
흐뭇한 웃음과 함께 얼굴이 환해져서 비무의 패배는 다 잊은 듯. 해원기가 다시 한번 증명단을 살펴보곤 몸을 돌렸다.
[과거에 저는 검주포무(劍主布武)에 직접 참가하지 못한 걸 한스럽게 여겼습니다만. 오늘 소주 덕에 깨달음을 얻었군요. 역시 주인께선 사람들이 떠받드는 게 싫으셨던 겁니까? 소주에게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시고.]
가만히 귀에 전해지는 황정리의 전음.
한바탕 비무를 치르고 나서 나름대로 원망이 풀렸는가.
바른 답은 아니었으나 아주 많이 틀린 것도 아니다.
해원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