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57화 (58/410)

제15장 산중기인(山中奇人) (1)

황일이 논의를 주지해서 밀실의 분위기를 다잡았지만, 겁표의 사안을 설명하는 건 꽤 어지러웠다.

해원기가 먼저 입을 열었고, 중간에 증명단이 끼어들었으며, 덕주에서 벌어진 일부터는 또 오소민이 보충해야 했으니까.

그나마 오소민이 말솜씨가 있어서 간명하게 줄인 덕에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고.

“덕주에 있는 귀 전장의 황 관사께서 황 대협을 만나도록 손을 써주신 거죠. 강호 곳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요. 그렇게 된 겁니다.”

별서 이후는 지금 밀실에 모여앉을 때까지의 상황. 한 시진 남짓한 설명이 끝났다.

황정리와 오보혜가 비로소 해원기와 오소민이 별서로 온 이유를 알게 되어서 심각한 얼굴이 되었고, 황일도 미간에 주름을 몇 개나 잡았다.

괴상한 사안이다.

밀실이 잠시 조용해지자, 해원기가 한쪽 눈썹을 문지르며 탄식을 흘렸다.

“후, 제가 무지해서 일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진자현 일당도 전부 독사했으니 그나마 있던 실마리까지 잃은 셈이죠. 그래도 어떻게든 증 낭자를 도와 무고한 희생의 흉수를 찾고자 합니다.”

황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당연한 일입니다. 증 낭자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요. 그런데 상당히 수상한 사안이로군요. 혹시 다른 단서는 없을까요?”

“황장촌 사람들이 독으로 피살된 것과 진자현 일당의 독사가 어떤 연관이 있을지. 그래서 약왕당에 물어볼 생각입니다.”

“아, 단목(端木) 당주라면. 과연.”

황일의 미간이 좀 펴지지만, 오보혜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

“제세성수(濟世聖手) 단목정(端木正), 단목 대협이요? 요 몇 년간 거의 만난 사람이 없다던데, 막무가내로 찾아간다고…….”

약왕당이 있는 대별산(大別山)은 하남의 남쪽. 용문세가도 자주 찾는 편이어서 사정을 알고 하는 말인데.

지혜롭다는 오보혜도 하던 말을 흐리게 되었다.

증명단이야 아직 세상 물정 모를 풋내기라 약왕당의 제세성수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겠지만.

황일뿐 아니라 황정리와 오소민 역시 아무렇지 않게 동감을 표하고 있으니.

놀라운 무공을 지닌 이 더벅머리 청년. 무공만이 아니라 그 내력이 참으로 신비하다.

황정리가 오보혜의 의아함을 풀어주려는 듯,

“단목 대협은 의술과 아울러 지혜도 뛰어나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해 대협은 그간 연락을 취했는지?”

이미 아는 사이라는 의미를 담아 묻는 말인데.

해원기가 어색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매년 선물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번이 처음 찾아가는 겁니다.”

씁쓸하게 이지러지는 입매. 그 안에 자책이 담긴 걸 아는지 황일이 얼른 입을 열었다.

“넷째의 서신을 받았잖으냐. 이런 사안이 아니었다면 굳이 찾지 않으실. 으흠, 그나저나 이 수상한 사안에도 동창이 관련되었군요. 상보감 장인태감의 낙향이라, 확실히 경사에서 십이태감 중의 하나가 파직되었다는 소문은 있었습니다만. 겁표에 동창이 끼어들고, 하북팽가의 팽조린이 천호랍시고 직접 나왔다니.”

황정리에게 슬쩍 타박을 주곤 바로 화제를 되돌린다.

그 공손한 태도가 또 이상하지만, 오보혜도 일단 당면한 문제에 집중했다.

다들 밝히지 않는 걸 억지로 따질 필요는 없다. 오소민도 우연히 마주쳤다면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새북 장풍보의 보주, 컴컴한 소문이 있긴 해도 덕주까지 도적질하러 왔고. 똑같은 아홉 개의 상자를 나눈 후에는 부리나케 도주, 뒤를 밟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건. 두려웠다는 뜻이겠죠. 그러나 공표로까지 의심되는 표행을 치밀한 계획으로 겁탈해놓고 물주나 표국의 추적을 예상했을까요? 덕주에서 마차를 미끼로 삼은 것이나 팽조린이 나섰으면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 모두 잃은 물건을 되찾으려는 행동 같지 않네요. 이 겁표에는 의문이 적지 않아서 처음부터 다시 따져보아야, 상보감의 장인태감부터 시작해야겠어요. 그리고 그 아홉 개의 상자, 해, 대협, 혹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뛰어난 분석이다. 얘기로 들었으면서도 상리에 맞지 않는 모순을 금방 파악한 오보혜.

해원기가 바로 상자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이 드러나자 다들 묘한 표정이 되고.

증명단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칫, 이거 오리 알 삭힌 거랑 똑같은데?”

여전히 천방지축. 그래도 그 표현이 딱 맞아서 다들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해원기와 한차례 본 적이 있는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렇게 보이지. 근데 돌, 그것도 옥보다 더 매끈한 돌입니다. 특이하다는 것 외에는 무슨 물건인지, 어떤 용도인지 전혀 모르겠고. 상자 아홉 개가 다 똑같나 봅니다.”

도적들이 그냥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

오보혜가 새까만 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홉 개가 똑같아서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면. 아홉 개가 각기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는 뜻. 새까만 돌 자체에 비밀이 있어야겠죠. 일단 상보감을 맡은 장인태감의 이삿짐이라고 알려졌으니 아홉 개의 돌이 평범한 사유물은 아닐 듯한데.”

분석이 예리해도 추리는 추리일뿐.

당장 눈앞의 돌멩이가 뭔지를 모르는 판에 섣불리 단정할 수가 없다.

“겨우 이따위 돌멩이를 훔치려고 그 사달을 벌였단 말이지. 진자현이나 다른 도적놈들 다 멍청한 거 아닐까요?”

증명단이 인상을 쓰며 꺼내는 말에.

비로소 좌중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로 앉았다.

이제는 대강 증명단이라는 소녀가 어떤 성격인지 짐작이 간다. 좋게 말해 발랄, 솔직. 실제는 단순, 과격이랄까. 예쁘장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황일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훤해진 창문을 보았다.

“가주가 돌아오면 상의를 해보지요. 고관대작 중에 선이 닿는 자가 있고, 황궁의 소문도 확인할 방도가 있을 터. 십이태감 중에 파직당한 환관이 상보감 쪽인지, 낙향의 이삿짐을 표행으로 옮겼는지를 알아보고. 경사의 표국에도 수소문을 해보겠습니다.”

오보혜의 제안대로 처음부터 더듬어 단서를 찾을 셈.

“아, 그렇게까지 하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제 일 때문에라도 최대한 연줄을 동원해야 하니까요. 동창이 흥륭을 통째로 삼킬 속셈을 드러냈는데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조정에 아직 바른 신하들이 있고, 저희 형제들… 돈이란 게 또 돈으로서의 힘이 있답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잖습니까. 허허.”

흥륭에 피해가 갈까 봐 신경이 쓰이던 해원기가 입을 다물었다.

황일의 말대로. 동창이 여기서 물러날 리 없다. 중원제일의 부호인 흥륭으로선 따로 방책을 세워야만 하고, 마침 첩형을 억류했으니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속담으로 얼버무린 말. 황룡칠절이 있다.

“오, 크게 덕을 보는군요. 잘됐네, 해형. 황궁이니 경사니, 우리끼리론 어려운 일이라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오소민이 반색을 하며 반기는 통에.

“부탁합니다.”

해원기도 그저 예를 표할 수밖에 없다.

묵묵히 듣던 황정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대별산으로 향합니까?”

말투를 가다듬었어도 여전히 황일보다는 뻣뻣한 음성.

“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약왕당을 찾아가렵니다.”

해원기의 대답에 조금 어색한 얼굴이 되어 황일을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하, 그럼 오 소저의 보호를 부탁드려도 될지. 지금으로선 흥륭에서 사람 하나 빼기도 어려운데. 오 소저도 급히 세가로 돌아가야만 하기에.”

뚝뚝 끊기는 말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를 겨우 한다는 심정이 여실히 보인다.

황정리의 심정이 어떻든, 해원기가 황연히 깨닫는 바가 있어 바로 응했다.

“그렇군요. 당연한 일입니다. 오 소저를 제가 용문세가까지 안전하게 모시…….”

“그럼 또 일행이 되는 건가? 무사히 모셔다드리면 후하게 상을 내리시겠지? 안 그렇소, 용문세가의 천금이신데.”

‘고구마 대장’ 대신에 오소민이 농을 섞어 답하자,

해원기는 머쓱하고, 오보혜는 작은 눈을 똑바로 뜬다.

“개방과는 오랜 친구니까 당연히 충분한 보답을 할 겁니다만. 순행장로께서도 같이 가실 생각인가요?”

“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잖소. 이 고구마, 아니 해형 때문에 끝까지 가볼 생각이라오. 뭐, 낙양은 나한테도 익숙하니까.”

개봉과 낙양은 개방이 번갈아 총단을 두는 곳. 오소민 역시 남쪽으로 내려갈 이유가 있지만.

이 두 사람은 아직도 대화에 가시가 돋쳤다.

용문세가의 천금과 개방의 순행장로가 서로 노려보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잃은 해원기.

그러나 분위기를 아예 살피지 않는 천방지축은 거침없이 끼어든다.

“나, 저도, 저도 따라갈 거예요. 해 대협, 저랑 약속한 게 있어서. 약왕당은 저하고 먼저 얘기했다고요.”

벌떡 일어나면서 손까지 쳐드니.

그만 실소가 나온다. 나이답게 귀여운 구석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일행은 넷이 되었다.

이틀.

황부는 바쁘게 돌아갔어도, 해원기 일행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길 떠날 준비를 착실히 했다.

첩형이 직접 수하를 거느리고 나왔는데 실종이 된 판이라. 분명히 제남 전체에 이목이 쫙 깔렸을 터. 마차나 말을 이용해서 그 이목을 끌 이유는 없었고, 앞으로의 여정을 대비할 필요도 있었다.

해원기와 오소민이라면 풍찬노숙(風餐露宿)도 별일이 아니지만. 부잣집 아가씨와 성질 급한 소녀를 데리고 가야 하잖나.

그래도 중원제일 부호 흥륭황가의 본가. 귀한 대접을 생전 처음 받아서, 옷가지까지 말쑥해졌다.

새로이 흑의 경장으로 갈아입은 해원기가 후원(後園) 구석을 내다보았다.

황부에서 가장 깊숙한 별채. 네 사람이 각각 방 하나씩을 써서 식사가 끝나면 각자 자기 볼일을 보기 편하고, 그만큼 소모한 기운을 빠르게 되찾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오보혜는 가주와 마지막 면담을, 오소민은 적각개를 만난다고 떠나서.

증명단이 복룡검식을 연습하는 걸 혼자 구경하는 중.

천방지축에 막돼먹은 소리를 내뱉긴 해도, 무공을 익히는 데에는 대단히 열중하는 소녀다. 해원기에게 복룡십육식의 검공요결(劍功要訣)을 배워서 얻은 깨달음. 그걸 어떻게든 스스로 체득하려고 이 이틀간 틈만 나면 검을 휘둘렀다.

‘사부가 항상 단삼황기(丹蔘黃耆)를 식용토록 하고 비장한 영단까지 복용시켰다더니. 단순하지만 근기(根基)를 제대로 다지는 비방. 오성(悟性)과 열의가 뛰어나서 나이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었다.’

스승의 정성만으로 고수가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서야 영단보약과 신병이기가 무슨 소용 있으랴.

증명단의 나이는 이제 열여덟. 사부를 만난 지 팔 년이라지만, 실제로 입산수련은 육 년밖에 되지 않는다. 채 십 년도 되지 않는데 검강을 연성했다는 건 세상에 드문 경우. 증명단이 무재(武才)라는 의미다.

이틀 동안 무공을 가르치면서 간간이 얘기를 들었고. 증명단이 해원기를 대하는 태도도 확연히 달라졌다.

‘본성은 순진하지. 산골에서만 지냈으니.’

똑똑.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 황정리가 굳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다.

“황 대협.”

해원기의 인사에 황정리도 손을 모았다가 풀며,

“새벽에 떠날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잠시 얘기나 나누자고 찾아왔습니다.”

딱딱한 언행.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해원기를 대하는 게 변하질 않았다.

황룡칠절의 막내지만, 지금 흥륭에서 무력의 핵심은 계속 무림에 있었던 황정리. 당세에 절정고수로 꼽히는 비천무영이 맥없이 업혀 다니기만 했던 사실이 걸려서일까.

차탁(茶卓)을 사이에 두고 앉고서도 얼른 말문을 열지 않는다.

해원기가 가만히 기다리자, 비로소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눈빛이 어쩐지 우울하다.

“의미 없는 일일 수 있으나.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렵사리 꺼내는 말머리. 해원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간다.

“왜 무림을 버렸습니까? 왜 주인의 뒤를 잇지 않았습니까? 강호가, 무림이 주인을 잊는 걸 어찌 보고만…….”

일단 입을 열자 속에 담았던 게 격하게 쏟아져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

해원기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리다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런가. 황정리의 가슴에 걸렸던 건 이것이었나.

이유는 알았지만. 해원기도 감정이 복잡해져서 선뜻 말을 받지 못했고.

둘이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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