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56화 (57/410)

제14장 평분주야(平分晝夜) (4)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제정신을 되찾은 증명단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 해원기가 김이 식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원탁과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방.

회랑 앞에 가산(假山)과 작은 연못이 붙어 있어서 답답해 보이지만, 그만큼 조용히 얘기를 나누기에 어울리는 밀실이다.

오소민과 오보혜도 불려왔고, 깨어난 황정리 곁에는 염상단의 단주인 황일(黃鎰), 즉 과거 황룡칠절의 첫째였던 이가 눈을 지그시 감고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흥륭의 별서에서 일어난 일과 용문세가를 따라온 상인들에 관해선 오보혜가 먼저 간략하게 말을 마쳤고,

해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과는 오소민이 요령 있게 설명을 끝낸 참.

증명단이 끼어들게 된 사정도 해원기가 미리 밝혔으니 들어야 할 얘기는 다 들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흥륭황가의 저택이니 주인은 당연히 황일이요, 나이로도 연장자. 무림으로 따진다면 황정리가 또한 선배라 두 사람이 이 모임을 주도해야 하는데.

황일도, 황정리도 선뜻 입을 열지 않는다.

잠깐의 침묵,

마침내 눈을 슬그머니 뜬 황일이 말문을 열었다.

“두 가지 일이 얽힌 셈이군요. 하나는 용문세가의 방문을 이용해 흥륭을 수중에 넣으려는 음모, 또 하나는 해 대협이 찾는 겁표 사건의 실마리. 얽히게 된 건 이 두 가지 일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 때문일까요.”

시선이 모여들자 황일이 해원기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게 탄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짧게 깎은 머리털과 수염은 전부 하얗게 변해서, 다른 형제들과는 조금 다른 용모. 상인이라기보다는 전장을 오래 누빈 노장(老將) 같은 분위기다.

그 눈이 해원기 옆에 앉은 오소민을 향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소. 오 장로는 어찌 생각하오?”

나이와 배분을 따지지 않고, 대화를 나눌 상대는 오소민이라 여기는가.

오소민도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해원기를 힐끗 보곤 말을 받았다.

“동창이죠. 소문은 드물지 않았으나 동창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행사하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덕주에서 귀 전장의 황 관사에게 들은 것보다 더, 흠, 상계의 일에 무림이, 아니, 저 같은 거지가 입을 놀릴 자격은 없습니다. 하나, 강호가 혼란해지는 걸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상계를 어지럽히는 게 무력이니. 분타주에게 우선 방주께 보고를 올리도록 조치했습니다. 지금이 거지들이 많이 몰리는 때라.”

화제가 중요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염상단의 단주가 풍기는 분위기 때문일까. 오소민도 평소와는 다르게 진중한 말투.

황일이 원탁의 빈 의자를 보았다.

“황신이 무엇보다 급한 일이지요. 막 문주가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 나갔고, 더는 흥륭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듯해서 개방의 형제들도 지금은 황하문을 지원하도록 부탁했소. 마침 관아가 황신을 핑계로 댄 판이라 그들도 뒤로 빼지는 못할 테고. 가주와 총관이 돌아오면 더 확실히 상황을 파악하겠지만, 당분간 섣부른 공격은 없을 듯하외다.”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하고, 오소민도 미간을 좁혔다.

“속단이 아닐지요? 관도에서 길을 막았던 자들, 오 소저에게 들은 바로는 반룡령에서 온 고수들인 것 같아서.”

북극묘에서 적을 일망타진했다고 여겨 방심할 수는 없다. 상대는 당세의 최고 권력이라는 동창.

황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요. 그러나 지금까지 얻은 진술에 의하면 그자들이 독단으로 쳐들어오진 않을 거요. 위 소감이 제멋대로 동원했다니까.”

진술이란 말에 해원기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중간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북극묘의 뒤처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 사람이 얽혔고 사정이 긴박해서 이 황부에 온 후로 뒷얘기를 처음 듣는다.

황일이 조금 몸을 틀었다.

“네. 지금에야 조금 정리가 되었군요. 북극묘에 나타난 적도는 첩형 직위의 태감 한 명, 그 보좌인 소감이 한 명, 동창에서 키운 십이생초령이란 수하 중의 넷, 첩형을 호위하는 첩형호위 삼십 명. 태반이 중상을 입었지만, 죽은 자는 하나도 없어서 전부 포박해 황부의 창고에 안치시켰고, 멀쩡한 자들부터 문초를 시작했습니다. 해 대협이 일부러 손속에 여유를 두셨던 모양입니다.”

“아, 그렇군요.”

손속에 여유를 두다니. 상대를 제압하려고 제대로 힘을 조절하지도 못해서 염려했거늘.

그나마 아무도 죽지 않은 게 어쩐지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서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탁에 앉은 이들은 이보다 황일의 태도가 의외.

나이가 지긋한 염상단의 단주. 풍모 또한 만만치 않은 어른이 오소민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대단히 정중한 언행을 보이니.

거의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듯해서 오보혜와 증명단이 똑같이 놀랐다.

유일하게 해원기의 신분을 아는 오소민이 콧등을 찡긋거리며 얼른 화제를 붙잡았다.

“동창이 금의위를 수족으로 부리고, 무림인을 매수해서 주구로 쓴다는 것까지는 들어봤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조직이 어떤지는 잘 모르죠. 혹시 조금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지?”

사전에 이해가 필요한 부분을 짚어서, 황일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주름이 가득하고 검게 탄 얼굴, 뻣뻣하게 보이는 인상이지만, 처음부터 오소민을 대화 상대로 정한 이유가 이거다.

“형님, 제가…….”

“아닐세. 이건 내가 알려드리는 게 맞아.”

황정리가 도우려는 것도 말리면서 원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드디어 만나게 된 ‘소주’. 그리고 자리를 함께한 세 젊은이.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는 귀공자 뺨칠 용모요, 용문세가의 아가씨는 지혜가 뛰어나고, 몰락했던 항산검파를 이었다는 소녀 역시 보통이 아니다.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깨달은 나이. 해원기를 도울 일이라면 막내 아우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동창을 책임지는 환관의 정식 관명은 제독태감, 통칭으로 창공(廠公)이나 독주(督主)라 불린다.

동창이 본디 마음대로 죄인을 잡아 벌을 주려고 만든 조직이기에, 제독태감의 좌우에서 보좌하는 직위로 장형(掌刑)과 이형(理刑)을 각기 두 명씩 두었고, 이 넷을 일반적으로 첩형이라고 한다.

제독태감과 첩형은 제대로 관위를 받은 환관, 그러므로 태감이고, 태감 아래에는 또 직속으로 사환(使喚)하는 소감들이 붙기 마련. 이 소감들이 태감의 지시로 일을 처리하고 실제로 무력을 행사하는 자는 대부분 천호(千戶)급이다.

이번에 북극묘에 나타난 우두머리가 바로 이형의 직위에 있는 유(劉) 태감이었고, 위 소감이 그 직속으로 천호의 역할을 맡았던 것.

짧지 않은 설명이 끝나자마자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천호급이라. 별서를 공격했던 자들은 확실히 금의위의 영반급이었죠. 그러나 금의위가 동창의 수족이 되었다고 해도 소감이 직접 천호를 맡는 건 좀……..”

“오 장로는 황궁에 관해서도 잘 아시는군. 맞소이다. 금의위가 비록 권력에 길들어졌어도 자신들의 지휘 체계를 쉬 바꿀 리는 없고. 그래서 나도 꽤 의아하게 생각했다오. 하지만 그 얘기는 일단 뒤로 미루어야겠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서. 흠.”

황일이 말을 멈추고 시선을 옮겼다.

황정리의 옆에서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오보혜. 황부에 온 후로 계속 흥륭과 함께 움직였던 오보혜가 작은 눈에 힘을 주었다.

“간세를 끌고 온 격이 된 제가 함부로 떠들 자격은 없습니다만, 동창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달라진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분이 공개되는 걸 꺼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에는 무력을 동원할 때에 되도록 신분을 감추었죠. 금의위라는 수족을 가지고서도 무림인들을 매수해서 거느리려 한 게 그런 이유고요. 하북팽가나 남쪽의 반룡령이란 이름도 그래서 들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감과 태감, 특히 동창의 고관이랄 첩형이 직접 등장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용문세가가 흥륭황가를 방문할 때 따라온 차상(茶商). 직접적인 책임을 지려고 어지간히 신경을 썼던 듯, 오보혜의 말은 보기 드물게 암팡지다.

“두 번째는 상계만을 협박하던 데에서 벗어나 무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희 세가를 이용할 생각부터 별서에 황 대협이 계신 걸 알면서도, 또 황하문의 막 문주까지 억류할 계획이었으니까요. 북극묘에서 생금한 첩형을 더 조사해야겠지만, 환관이 직접 자신만만하게 무공을 드러내고, 또 십이생초령이란 동창 소속의 무인들을 데리고 왔다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동창이 과거와는 다른…….”

“우습게 본다는 거잖아.”

혼잣말이 툭 튀어나온 증명단이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말이 끊긴 오보혜는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단이 감히 입을 열 자리는 아니라도. 이 버릇없는 소녀의 혼잣말이 지금은 딱 맞는 표현이기에.

아무리 산골에 처박혀 살았어도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 흥륭이란 건 안다. 게다가 산서 땅 출신이니 소금이 얼마나 귀한지, 그 소금을 쥔 염상단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녔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 흥륭에 비할 부자라면 산서대전장이나 낙양의 용문세가 정도일까. 어린애들도 아는 얘기.

또 사부를 따라 항산에 들어간 후에는 사부가 어떻게든 무림에 관한 얘기를 일러주려고 애쓴 탓에.

대강 유명한 고수라면 소문으로라도 기억해야 했다.

그런 흥륭 염상단의 단주, 용문세가의 대소저, 비천무영 황정리, 개방 장로 오소민.

한 탁자에 같이 앉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인물들이지만, 천성이 분방한 증명단으로선 얘기가 진행될수록 갑갑함을 참기 어려웠다.

‘뭐가 이리 복잡하담?’

동창의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어차피 환관 나부랭이들 아닌가. 그따위들이 설치는 건 눈에 뵈는 게 없어서겠지.

오보혜의 말에 속으로 생각하던 게 불쑥 입 밖으로 나왔고.

오보혜가 동의해주자 갑갑했던 게 아예 터져 버렸다.

“그렇잖아요. 지금까지 눈치 보며 살금살금 나쁜 짓을 하다가, 점점 겁이 없어진 거죠. 원래 높은 자리에 앉은 것들, 에, 그 환관들은 다 황궁에만 있었으니까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했을 테고. 그러니까 아주 우습게 본 거죠.”

좌르르 쏟아내는 말이 여전히 예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거칠어서.

해원기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증 낭자. 먼저 얘기를 듣고서…….”

“정확한 표현이구먼. 어지간히 우습게 봤다는 거지, 환관 나부랭이가. 그렇지, 증 낭자?”

힐끗 해원기를 째려본 오소민이 말을 채가는데, 그게 하필 속을 콕 짚는 말이라.

증명단이 얼떨결에 ‘응’ 하듯이 고개만 끄덕여댔다.

‘고구마 대장’ 대신에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오소민이 말을 받아준 게 신기하다.

증명단의 반응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오소민이 다시 오보혜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오 소저, 그 두 가지의 원인이랄까. 구름 위에 있던 분들이 당당하게 땅으로 내려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지낭이란 불린 오보혜가 단지 주목만 하진 않았을 터.

증명단 때문에 끊어진 말의 뒤가 궁금하다.

오보혜의 작은 입술이 살짝 물렸다가 열렸다.

“그만한 힘이 생겼기 때문이겠죠. 권력이나 금력이 아닌, 즉 무력. 아직 확실하지 않아 추측에 불과하지만, 첩형과 소감이 황 대협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의 방증이 됩니다. 아, 죄송해요, 황 대협.”

바로 옆에 앉은 황정리를 거론하는 실례를 사과하자.

황정리가 굳은 표정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 소저의 말대로지. 별서를 공격했던 위 소감이란 자, 관도에서 길을 막아섰던 괴인들, 그리고 북극묘에서 흥륭을 겁박했던 첩형. 전부 이 황정리 따위는 눈에 두지도 않았으니까.”

말은 차분해도 섬뜩한 느낌이 든다. 당세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 비천무영이 언제 이런 수모를 겪었나. 분노를 억지로 참는 게 역력한데.

황일의 묵직한 음성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과신과 경시는 무인의 금기다. 별서를 너 혼자면 충분하다고 여긴 것부터 잘못이야. 물론 가주와 형들이 너에게 지나치게 기댄 과오가 먼저다만. 으흠.”

황일이 헛기침으로 말을 줄이고 상체를 조금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형제를 꾸짖는 게 마음 편하지는 않다. 다만, 황룡칠절로서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서 주의를 시켰을 뿐, 얼른 화제를 바꾼다.

대각선에 앉은 증명단은 황일과 나이 차이가 가장 크다.

“증 낭자.”

“네? 네. 황, 단주.”

갑자기 자기를 불러서 증명단이 당황하는데, 황일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괜히 골치 아픈 의논에 모셔서 미안합니다. 조금 전에 속이 시원하게 말씀해 주셔서 새삼 무림의 정기를 느꼈더랍니다. 사실 지금 나누는 얘기는 태반이 상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고, 저 또한 상계에 속한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증명단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아무리 되바라진 성격이라도 상대는 나이 차가 사십 년 가까운, 거의 사부와 같은 연배. 게다가 염상단의 주인이다. 그런데도 대단히 정중하게 꼬박꼬박 존대로 말을 걸어오니, 저절로 몸이 뻣뻣해진다.

“장사꾼도 결국은 구름 아래에서 뒹구는 인생, 같은 강호에서 살아가는 처지지요. 제 아우가 꽤 이름난 무인이라 무림과도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얘기는 무림과도 깊이 관계될 듯합니다. 제가 소개 받기로는 증 낭자는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항산파를 계승하셨다고? 그럼 증 낭자의 말씀을 항산파 장문제자(掌門弟子)의 뜻으로 여겨도 되겠습니까?”

증명단의 눈이 둥그레지고 어깨가 움찔거렸다.

항산파 장문제자.

처음 듣는 칭호지만, 어쩐지 등줄기에 소름이라도 돋는 듯.

비로소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깨달았고, 뻣뻣하던 목이 조금 수그러든다.

황일이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해원기에게 머리를 돌렸다.

“답답한 얘기가 계속됩니다만, 이제 해 대협이 신경 쓰는 문제, 괴이한 겁표에 대해 따져 볼 때입니다. 상계든 무림이든 똑같이 도둑을 논하게 되는군요. 호, 비가 그쳤나 봅니다. 금세 훤해지는 게 밤낮이 같아질 때라. 어젯밤에는 그리 마음을 졸였더니, 지금은 이렇게 든든한 게. 제가 많이 늙었나 봅니다. 허허허.”

북극묘의 밤, 그리고 이 밀실에서 맞는 낮.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황일은 나이답게 노련했다.

해원기가 과거의 주인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란 걸 알기에 화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애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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