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평분주야(平分晝夜) (3)
막돼먹은 말투 대신에 존대. 그리고 사안의 무게를 파악하는 직감과 그에 필요한 무공을 얻으려는 결단.
처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증명단의 면모에.
‘영특하고, 고수가 될 만하다.’
해원기가 내심 감탄했다. 의지가 굳은 소녀다. 비록 비통과 살기가 어우러진 눈빛이긴 해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않나.
새삼스럽게 해원기가 자신의 처지에 빗대보고 증명단의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누구든 자신의 가족과 지인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면 그 비분을 참을 수 없을 터.
해원기는 가족이 없다.
소멸해가는 일족을 위해 기르던 매와 함께 팔렸던 과거. 그 일족도 북해(北海)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주어진 운명이라고 체념하며 사라졌다고 했다.
매를 부리는 법을 가르쳐준 할아버지도, 오랑캐로 몰려 쫓겨난 부모도, 중원인과 여진족에게 수모를 당하던 친척들도 이제는 없다.
나중에 사부에게 일족의 뿌리가 아마도 흑치(黑齒)였을 거라는 걸 배웠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고죽(孤竹)의 묵태(墨胎)든 북해의 흑치든, 다 아득한 옛날얘기. 사부가 굳이 묵(墨)이란 성을 주지 않은 것도 얽매이지 말라는 뜻.
중화든, 동이든, 말을 타든, 낙타를 타든. 사람은 다 사람.
그렇게 차별을 잊고 같이 살아가면 그만이다.
강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과 어울려, 그들을 도우면서 같이 살아가는.
그래도 가족은 아니다.
해원기가 말이 없자 증명단이 포권을 풀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눈이 젖은 걸 보이는 게 창피했고,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
“그런데, 해 대협은 혹시, 혹시 우리 항산과 연관이 있나요?”
오해가 많이 겹치긴 했어도 서로 알게 된 인연, 그러나 그 인연만으로는 해원기가 복룡검식을 다 아는 것과 그걸 그냥 전수해주는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증명단의 좁은 견식으로는 태원부의 통판으로 있는 이언처럼 사부의 지인이나 뭐 이런 관계여야 납득할 일.
해원기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아,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단정적일까요. 과거에 사문의 어르신께서 오악검(五岳劍)의 정수가 사라지기 전에 따로 보존해두었던 적이 있으셨답니다. 언제라도 올바른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주라는 말씀도 남기셨지요.”
“오악검을? 전부?”
돌렸던 고개가 금방 돌아온다. 휘둥그레진 눈에는 눈물 대신에 가득한 호기심.
소녀는 소녀다. 조금 전의 비분과 살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렇습니다. 서악(西岳)과 중악(中岳)의 검은 이미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증 낭자가 세 번째가 되겠군요.”
증명단이 눈을 깜빡거리며 손가락을 꼽았다.
“서악이면 화산(華山), 중악이면 숭산(嵩山)이니까. 화산파와 소림사, 그럼 태산과 형산에는 후인이 없었다는? 아니, 화산파야 그렇다 해도 소림사가 중악의 검이었나? 스님들이 무슨 검이람. 영 어울리지 않잖아, 요.”
급한 성격대로 말이 빨라지다가 그래도 끝에는 존대를 붙인다.
항산. 북악의 검을 계승한 자라서 다른 오악검에 크게 흥미를 느끼는 모양.
해원기에겐 차라리 이런 대화가 더 편하다.
“소림에도 선검(禪劍)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정도의 검학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오악검을 들었죠. 물론 오악의 검이 가장 뛰어나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무당(武當)은 오악에 들지 않아도 그 검학의 경지가 극히 높으니까…….”
“삼청도검(三淸道劍)을 말하는 거죠? 지나치게 도리를 따지는 고리타분한, 제대로 익히기도 어렵다던데.”
“으흠,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군요. 하지만 고리타분하다고만 말하기는 좀. 오악의 검이 정도 검학을 대표한 것도 각기 지고한 이치를 바탕으로 하는 점에선 마찬가지. 소위 상승검학(上乘劍學)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그거야 어차피 내공심법이 맡는 거잖아, 요. 검법에 맞는 심법으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검기를 발할 수 있고, 일단 기를 터득하면야 그다음은 내공만 강화하면 되니까.”
해원기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악검은 알면서 소림의 검은 모르고, 무당의 삼청도검이란 어려운 말도 하면서 상승검학에 대해선 개념조차 미숙하다.
이건 모두 증명단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부가 일러준 내용일 터.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가르쳤을까.
“저는 항산의 독문심법을 모릅니다. 항산뿐 아니라 오악검 고유의 내공심법은 하나도 모르죠.”
“에에? 말도 안 돼. 그럼 어떻게 복룡검기, 아니, 검강까지 구현할 수 있지?”
관도에서 돌연히 보여주었던 십오식. 구결을 아직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때 분명히 무지개처럼 검강이 뻗었거늘.
증명단이 펄쩍 뛰며 반말도 돌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검법에 그 요결이 담겨있지 않습니까. 상승검학은 심법과 검법이 따로 떨어진 게 아니기에. 제가 박룡쇄운의 비결을 쓴다고 전음으로 말했었지요.”
“그, 그러니까. 박룡쇄운은 사부가 간신히 되찾은 총원심법(總元心法)의 핵심이라. 당연히, 당연히 총원심법을 익혔으리라고.”
증명단이 더 흥분하는 것과 정반대로.
해원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항산검파가 잃어버린 독문내공의 이름이 총원심법이란 것도 지금 처음 알았으니.
어째 이 소녀랑은 뭘 하든 오해가 끼어든다.
해원기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가 대화가 빠르게 이어지지 않아서.
증명단은 갈수록 안달이 났다.
내공심법을 모르고 복룡검강을 쓴다는 게 당최 말이 되질 않잖아. 이 신비한 해 대협이란 작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해원기가 사부에게 들은 설명을 반복하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려운 문자를 늘어놓는다고 이 말괄량이 소녀가 쉬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북악의 검을 이었는지 그 과정을 아는 게 먼저, 그리고 그에 맞추어 필요한 부분을 가르치는 게 옳다.
“증 낭자, 괜찮다면 낭자의 사부님에 대해 알려주시겠습니까?”
차분하게 묻는 말에 증명단이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답답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 답답한 대화가 의미를 지닌다는 걸 눈치챘기에.
사실 급한 사람은 자신 아니던가.
‘고구마 대장이랬지.’
껄끄럽게 여겨지는 오소민의 말이 새삼 기억난다.
“그러죠, 뭐.”
북룡포를 털고서 아까 오소민이 앉았던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부의 선친이 항산파의 마지막 제자였다고. 어느 날, 문파의 고수들이 다 돌아오지 않았고, 남은 이들이 문파의 무공을 깡그리 들고 떠나버렸단다. 당시에는 어렸던 선친, 그러나 무너진 문파를 되살리려는 의지를 세웠고 백방으로 애를 썼었다.
하나 뭐 하나 제대로 배운 게 없는 주제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산에서 무얼 할 수 있었겠나.
헛된 의지. 헛되게 보낸 시간.
그런데 이 헛된 망상이 그 아들에게 낙인처럼 남아서 아들 또한 북악의 검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단다. 공부를 계속했으면 훌륭한 관원이 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기껏해야 길바닥에서 점이나 쳐주거나 심산의 약초를 내다 파는 하찮은 인생을 살면서도.
항산에 미친 노인, 항산광수(恒山狂叟)라 불릴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항산에 숨겨진 뿌리를 찾아냈지만, 스스로 익히기에는 너무 늦었을 때였고.
마침 어울리는 제자를 찾았으니 이 또한 기연.
항산에 미친 노인은 제자에 미친 노인이 되어 그와 선친이 평생을 바쳐 찾은 모든 걸 제자에게 쏟아부었다.
“진짜 못살게 굴었다고요. 웬만하면 귀찮아서 그만둘 만도 한데. 아주 들들 볶아대서 나중엔 집에도 갈 틈이 없었는데… 몸에 좋다는 건 다 내게 먹이고, 당신은 병이 들어 골골대고. 칫, 엉터리 사부.”
입을 삐죽거리며 증명단이 얘기를 마쳤다.
슬프고 고된 얘기일 텐데 워낙 설렁설렁 얘기해서 오히려 재미있게 들릴 정도. 오랜 전통을 지녔던 문파가 몰락하고, 다시 일어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물론 외부인에게 자세한 내막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증명단의 얘기는 주로 사부와의 추억이었고, 그것도 묘하게 투덜거리는 투.
그러나 거기엔 정이 있었다.
조금 전의 비분과 다른 애틋한 정.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분이시군요.”
“훌륭하긴 뭐가. 아, 왜 물어봤어요?”
증명단이 대뜸 반박하다가 비로소 이유를 따졌다. 괜히 남의 집안 사정을 물었을 리 없잖나.
해원기가 몸을 조금 틀어 난간 밖을 보았다.
솨아.
그새 제법 강해진 빗줄기. 오른손을 뻗는다.
“전통의 구주정문(九州正門)에는 다 숨겨진 뿌리가 있다. 나무가 부러지고 꺾여도 그 뿌리가 있는 한 언젠가는 다시 거목이 된다. 제 사부님이 일러주신 말씀이죠. 항산의 검은 음종음시, 마침 비가 오니 북수(北水)의 뜻을 더하면 좋겠습니다. 용을 묶고 구름을 가두는 건 형이 없는 곳에 뜻을 두어 형을 갖추기 위함, 전후로 팔식을 둔 것은 총원심법을 항구장원(恒久長遠)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미입니다. 후팔식의 여섯 초식을 찾지 못했기에 그 뜻을 깨닫기 어려웠을 뿐이죠.”
스스스.
검지 하나. 손가락이 빗줄기 속으로 움직이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
“비가 아무리 거세도 기둥이 아니라 방울, 방울을 쪼개도 또 작은 물방울, 심지어 안개가 되어도 결국은 물. 적시는 건 다 똑같지요. 하지만 그 형상은 무궁무진해서 설사 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도 다시 구름으로 돌아갈 뿐, 그 전에 심지어 칠채(七彩)의 홍예(虹霓)로까지 무형을 구현하니, 항구는 불변(不變)이 아니라 무변(無變)일 터.”
십일식, 십이식.
증명단이 아는 십이식을 넘어 무지개 같은 검강을 내쳤던 십오식까지의 변화가 그 손가락 하나에서 그려져.
증명단이 홀린 듯 쳐다본다.
“복룡은 마침내 광영(光影)의 조화라, 유형과 무형도 상통하는 법. 음으로 끝나면 다시 음으로 시작하나니.”
지지직.
구결을 읊는 해원기의 유현한 음성과 함께 손가락 주위의 비가 얼어붙는다.
일지광한으로 보이는 시범. 복룡검강 대신에 수기를 지닌 검지 하나로 그 요결을 전하려는 의도지만.
해원기도 조금 놀랐다.
증명단이 쉽게 이해하도록 비를 이용했는데, 시범을 보이면서 자신도 새삼 깨닫는 부분이 적지 않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건가.’
서리가 되었다가 우박이 되었다가 다시 비로 돌아가서 물안개로 흩어지는.
복룡검식의 십육식 복룡잠식(伏龍潛息).
마침내 후팔식을 다 전해주었는데.
“그 무변이 다시 제일식 경기칩룡으로 돌아가는군요!”
문득 높아진 증명단의 음성에.
해원기의 얼굴이 환해지며 손가락이 그 말대로 경기칩룡으로 바뀐다.
“맞소.”
“전팔식, 후팔식으로 나뉜 게. 박이쇄가 용행운이라고 했었죠. 일단 이루어진 검강지기를 다시 압축해서 더욱 견고한 형상으로, 앗!”
증명단의 말이 갑자기 빨라지자.
해원기가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은 채 눈을 반짝이는 증명단. 정신이 나간 것처럼 그 눈엔 초점이 없고, 북룡포가 저절로 펄럭이는 모습에.
해원기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움직였다. 슬그머니 양쪽으로 벌린 두 팔, 신왕공의 청정한 기운이 회랑에 퍼져서 빗물도 들이치지 못하게.
증명단이 뭔가 깨닫는 순간. 무인에겐 극히 귀한 시간이라 함부로 방해받지 않도록 호법을 서주는 거다.
무학이란 필경 깨달음. 얻기 어려운 기회를 스스로 찾아낸 증명단이 대견하다.
그래서 귀를 울리는 전음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해, 대협.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드디어 깨어났나. 황정리의 무거운 음성.
그 또한 지금이 증명단에게 귀한 순간임을 인지하는 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