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평분주야(平分晝夜) (2)
“그래서, 에, 이번이 처음으로 무림에 나선, 거, 무림출도다?”
고개를 끄덕이는 해원기를 보며 오소민이 입술을 깨물어 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속이 부글거려서 욕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너무나 한심스러워 탄식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강호와 무림을 구분하고.
사람을 해치는 무림인이 되기 싫었단다.
무공을 익힌 무인이되 무림인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능력을 갖추길 원해서 무인이 되었다?
당최 답답한 소리지만, 또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무공을 익혔다고 누구나 무림인이 되는 게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휴, 이 고구마 같은 친구…….’
생각 같아서는 당장 알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지만, 입에서는 불쑥 다른 말이 나왔다.
“해형의 사부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음?”
난간에 기댄 채 해원기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사부.
이제는 다 밝혀진 신분. 자신의 사부가 누군지 아는 오소민이 이렇게 묻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내 뜻대로, 원하는 대로 살라고 하셨지.”
그랬다. 사부는 그렇게만 말씀하셨었다.
‘남을 돕는 무림인이 되겠다.’
그것이 처음 사부를 만났을 때 세웠던 목표였다. 사부는 자신의 바람을 반드시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했었고.
하지만 한해 한해 커갈수록, 무공을 배워갈수록 그게 확실히 무엇인지 자신도 모호해져만 갔다. 풍뢰동의 기연까지 이어진 후론 더욱.
사부, 두 분 사모, 어린 여동생, 그리고 노복을 자처한 교 노인. 함께 사는 행복한 삶이면 족했으니까. 그저 열심히 배우고 익히기만 하면 된다.
심부름으로 처음 세상 구경을 했을 때도 도대체 자신의 무공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었다.
사부는 세상에서 무섭고 엄한 사람으로 알려졌다지만, 제자에게만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어서.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크게 꾸짖은 적이 없었고, 그저 특유의 저음으로 조용히 잘못을 일러주시기만.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아라. 사람은 다 천성이 다르니 그 성취 또한 다르기 마련. 네 사조께서도 이 사부에게 똑같은 걸 기대하지 않으셨단다. 원기도 잘 알지 않느냐, 사부는 특히.”
따뜻한 미소로 말을 대신했어도, 어찌 모르랴.
천생살기. 그 무서운 저주. 고죽 전래의 원혼이 담긴 귀왕검(鬼王劍)을 단번에 발현시킬 만큼 공포스러운 힘이다.
제자를 겁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기에, 사부는 얼른 말을 이어갔다.
“네 사조께선 너처럼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셨단다. 마(魔)가 아니면 굳이 살기를 일으키시지 않으셔서, 그게 바로 전설로 전해지는 신령검도(神靈劍道)의 요체지. 원기는 아마 사부보다 사조의 검도에 더 어울릴 것이고. 아니, 그것도 옳은 말은 아니구나. 네 사조든, 이 사부든. 누구와 닮을 필요는 없다. 원기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거라.”
그런 사부 덕에.
그때는 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치기(稚氣)였을 뿐.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바뀐 게 없다.
무림에 나설 걸 결정했으면서도, 북극묘에서 상대를 제압했으면서도. 자신의 손에 묻은 피가 거북스럽기만 하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남을 돕는 무림인, 사람을 해치지 않는 무림인. 그렇게.”
해원기의 회상에 상관없이 바로 말을 받는 오소민.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거려서 해원기의 미간이 살짝 주름을 잡았다.
남을 도우면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흥륭과 황하문을 구하려고 동창의 수십 명을 해쳐야 했거늘.
말이 되지 않아서 고민하는 중에 기껏 친구라고 털어놓으니까 이런 대답.
“허. 그게…….”
“아하! 여기들 계셨구먼. 다들 워낙 바쁜 척을 해서 그러려니 했더니만, 두 분은 노닥노닥이셨네?”
불쑥 튀어나온 얼굴 하나.
증명단이 찻잔을 홀짝거리며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았다.
깜빡 잊었었다. 아침 식탁에 증명단만 혼자 남겨놓았단 걸.
해원기가 걸터앉은 난간 옆에 냉큼 기대는 자세에 오소민이 살짝 인상을 썼지만.
증명단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 증 낭자, 식사는 잘 했습니까?”
해원기가 건네는 인사에도 찻잔을 후후 부는 딴청.
“에, 그러니까 흥륭황가의 가주, 황하문의 문주, 용문세가의 대소저, 기절했던 양반이 비천무영 황 대협, 그리고 이쪽은 개방의 순행장로시라고. 어마어마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는 판인데.”
하나하나 헤아리다가 고개를 해원기에게 홱 돌린다.
“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주는 이가 없고. 다들 어지간히 예를 차리는 걸 보면 아는 건 분명하고.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라.”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증명단으로선 여전히 해원기가 누구인지 감을 잡기 어렵겠지.
해원기가 뭐라고 답을 하기 전에 오소민이 키득거리며 먼저 끼어들었다.
“크크, 당신은 누구예요? 라고 물으면, 저는 해원기입니다. 그럴걸. 여기 제남이 군고구마로 유명한데, 그 고구마 대장이 이 친구야. 아, 잘 되었네, 내 보니까 증 낭자는 나이답지 않게 호탕한 말투니까 어울릴 것 같기도. 아흠, 난 거지들이나 보러 가야겠군.”
일부러 기지개를 켜는 게 뻔히 보이지만.
그렇게 툭 던져놓곤 오소민이 일어나 가버리자, 증명단이 콧등을 찡긋거렸다.
천방지축의 제멋대로인 성격. 항산에서 내려와 거침없이 지냈던 그녀로선 처음 겪는 상황이다. 기민하고 영특한 성격이라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으나, 가만히 구경만 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다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만으로 속이 부글거리는 판.
특히 저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과 제대로 말을 나누지 않고, 꼭 이런 식으로 따돌리곤 해서.
그렇다고 장로가 방파의 상황을 보러 간다는 데 불만을 표할 수도 없는 노릇.
눈이 세모꼴이 되려다가 해원기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증 낭자에게 위해를 가할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증 낭자가 만난 분들이 보장할 정도의 신용은 있고요.”
증명단의 눈매가 스르르 풀리는 건 식곤증 때문이 아니다.
오소민의 말대로. 과연 고구마 대장. 어쩌면 이렇게 고리타분한 말을 잘도 늘어놓는지.
“아아, 알았어요. 그럼 일단 해 대협이라고 부를게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그럼…….”
막혼 때문이다. 흥륭의 가주 형제들도 남들 앞에서 ‘소주’라고 불러 해원기를 불편하게 하는 거보다는 훨씬 낫다고 여기는지 다 ‘대협’이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해원기가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으려다 이어지는 증명단의 말에 안색을 바로 했다.
“나는 다른 것보다 독에 관해 확인하고 싶어요.”
비로소 생각났다.
이 어린 아가씨가 왜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자신을 찾아 달려왔는지.
흉수로 오해했던 이유.
풀어야 할 문제가 아직 많은데 자신의 답답한 심정에만 매달릴 때인가.
“모두 죽었고, 중독 증상이. 음, 호중객잔에서 태원까지 어떻게 이동했는지 자세히 알려주겠습니까?”
“왕삼숙이 가장 멀쩡한 편이었으니까 덩치 큰 이 전령을 메고, 장이숙은 팔이 불편해서 지게로 조정이란 놈을, 왕포쾌가 진자현을 업게 했지. 그런데 태원에 이르러 통판대인과 연락을 취하고 쉬는데, 왕삼숙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더란 말이야. 처음엔 진자현이 납치해올 때 수작을 부렸나 싶었다가, 에, 문득 왕포쾌가 지나치게 조용한 걸 깨달았, 죠. 그런 와중에 통판대인이 왔고. 음, 이언(李彦)이라는 통판대인은 본래 사부님의 지인, 의술에도 숨은 조예가 있는 분이라 대번에 중독이란 걸 알아보셨어요. 그러면서 확인해보니까.”
진자현 일당이 다 죽어있더란 거다.
평소의 막돼먹은 말투를 어떻게든 순화하려고 애쓰는 증명단의 설명이 계속되지만, 해원기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진자현 일당이 중독되었다면 자신이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십대검상과 달리 제탁지검은 신왕공에 본래 부여된 능력, 잠심침령과 동시안이 주변의 독기를 즉각 파악하면 자연히 발동한다.
황장촌으로 떠나기 전까지 한 점의 독기도 없었거늘.
“…통판대인이 이 북룡포에 피독(避毒)의 효능이 있는 걸 가르쳐주었거든. 그래서 모조리 불타버린 황장촌에 희미하게 독기가 잔류한 걸 알았지. 황장촌에 간 사람은 당신, 에, 해 대협이잖아요. 그러니까 흉수로 판단할 수밖에.”
“왕노삼은? 괜찮습니까? 이 대인이 구하셨나요?”
“아니. 그냥 나았어. 아, 저절로 나았어요. 음, 이 대인 말로는 미리 영약을 먹어서 독기가 힘을 잃었다나. 영약은 무슨. 그러고 보니 그것도 이상하네.”
증명단도 비로소 이상함을 느끼고 머리를 갸웃거린다. 자신이야 북룡포로 독기를 막았다 해도,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장이숙은 왜 멀쩡했을까.
영약이란 말에 해원기의 눈빛이 슬쩍 빛났다.
객잔 식구들에게 일어난 이상한 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변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실마리를 찾았다.
“약왕당을 다녀와야겠군요.”
“응? 약왕당?”
강호 견문이 짧은 증명단이라도 익히 아는 이름. 박시제중(博施濟衆)으로 아픈 이들과 다친 이들을 고치는 의가(醫家)의 명문이 왜 갑자기 거론되는지.
해원기가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객잔 식구들에게 제가 백초환을 한 알씩 복용시켰습니다. 그중에 진자현 일당과 직접 접촉한 경우는 왕노삼 혼자뿐인 것 같군요.”
“그럼 진자현 일당이 이미 중독되었다가.”
“아닙니다. 제가 떠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중독되지 않았습니다.”
“어? 그럼, 말이 안 되는데…….”
“말이 안 되죠. 그런데도 나중에 중독사 했으니 뭔가 특별한 독술(毒術)이라고 여겨지는군요. 그런 방면의 대가는 제가 알기론 사천당문과.”
“아하! 그렇구나,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복잡한 독술 따위를 써서. 그렇게 비밀스러울 필요가 있을까요?”
특별한 독술, 그리고 비밀.
증명단은 오해를 푼 것보다 사건이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데 집중해서 눈이 반짝반짝해졌지만, 해원기는 침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증 낭자, 조금만 기다려줘요. 어차피 함께 의논할 일이 될 듯하니.”
여러 가지 일을 거푸 겪으면서 어지러웠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의 시초, 바로 아홉 무리의 도적과 아홉 개의 상자.
마음을 흐트러트릴 때가 아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던 해원기지만,
“그런데 황장촌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된 건지, 혹시 알아요?”
증명단이 툭 던지는 질문에 표정이 무거워졌다.
무고한 화전민 스물넷의 죽음. 증명단과 아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하나 숨길 일이 아니다.
“흠, 그건…….”
무거운 표정보다 더 낮아진 음성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후둑, 후두둑.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솨아아.
일단 내리기 시작하자 그동안 참았던 것처럼 금세 거세진 비.
난간에 걸터앉았으니 겉에 걸친 북룡포가 젖지만, 증명단은 움직일 줄 모르고.
말을 마친 해원기도 선뜻 자리를 옮기지 못해서 등이 젖는다.
길지 않은 얘기, 황장촌 사람들이 전부 독살당했다는 소식에 고개를 푹 숙인 증명단의 어깨가 들썩이는 건.
‘후우.’
해원기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기승스러운 소녀, 막돼먹은 말투에 제멋대로인 성격이지만 아직은 어린 소녀다. 당연히 충격을 받았을 터, 격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모양인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주 예전에 우는 여동생을 달래준 기억은 있어도.
‘소유(小柔)가 열한 살이었던가. 그때 이후론 우는 걸 본 적이 없구나.’
일찍 철이 들어 해원기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던 여동생이라.
파삭.
증명단 때문에 떠올렸던 여동생의 기억이 뚝 끊긴다. 증명단이 들었던 찻잔이 깨지는 소리에.
찻물이 튀고 으깨진 찻잔이 가루가 되든 말든, 머리를 확 쳐든 증명단의 눈이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꼭 왕삼숙 때문이 아니라. 황장촌은 우리가 유일하게 맘 놓고 놀러 가던 마을이었죠. 아니, 실제로 우리 객잔은 황장촌의 일부였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입술을 꼭 깨물더니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은다.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일까. 해원기를 향해 예를 취하며 숙이는 고개.
“고맙습니다. 해 대협! 마을 분들도 그 자리에 남게 된 걸 좋아하실 거예요. 언젠가 누가 또 화전을 일구러 올 테니.”
화전(火田)에 기댄 삶이 결국 화장(火葬)으로 끝났다.
“아, 아니요.”
해원기도 급히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사례를 받을 일인가.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할 뿐, 가까운 추억을 지닌 증명단이 이렇게 예를 차리는 게 도리어 뜻밖인데.
예를 마치고도 포권을 풀지 않는다.
“왕포쾌에게 들은 도적질. 이 사안에는 깊은 곡절이 있을 것이고, 흉수는 그 안에 있겠죠. 제 손으로 꼭 흉수를… 부디 제게 약속한 대로 복룡십육식을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해원기를 향한 얼굴은 이미 다부진 결심으로 바위처럼 단단해졌고,
습기를 머금은 두 눈에는 새파란 기운이 떠올랐다.
이미 약속한 해원기가 바로 답하지 못한 건 바로 그 눈. 번들거리는 살기 때문이었다.
해원기가 지니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