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평분주야(平分晝夜) (1)
해원기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너무나 강대한 위력. 북극묘 전체가 검기의 숲에 휘말릴 줄은 몰랐다.
관도에서 반룡령의 소령주로 의심되는 자와 인색이귀가 기괴한 술법으로 도주한 이후,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이 사전에 대책을 마련하게 했지만.
먼지를 흩트리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는 척하며 조심스레, 또 꼼꼼하게 설치한 검기가 과했던가. 그나마 미리 막혼을 계단 아래로 물리도록 한 게 다행.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거꾸러지는 복면인들이 이상한데.
우선은 첩형이다. 동창의 고관, 그를 놓쳐서는 안 된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뚜벅뚜벅 후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험한 꼴을 보긴 싫겠지? 내 너에게 몇 가지 물을 것이 있다.”
계속해서 신왕공을 운용하고 검왕오형을 시전하는 동안, 해원기의 신기(神氣)는 더욱 고양되어 걸음 하나, 말 한마디에 무서운 위세가 담긴다.
살기가 거의 없는 해원기를 위한 사부의 고심이란 걸 아직 깨닫지 못했으나.
눈이 휘둥그레진 첩형이 어깨를 떨다가 급히 옆을 가리켰다.
“머, 멈춰라. 여, 여기…….”
“인질이란 거냐? 치졸하구나. 동창의 첩형대인께서.”
첩형이 어느 정도 높은 자리인지 모르지만. 처음에 수하들을 거느리고 막혼을 조롱할 때와 비교하면 참으로 천박한 모습.
머리를 저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은 해원기의 발이 후전의 입구에 닿자.
“흥륭의 가주와 총관이야! 더 다가오면 두 놈의 멱을 따버릴 테다.”
두 손을 번쩍 든 첩형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우아한 몸짓도, 낭랑한 목소리도 다 어디로 갔는지. 옥빛이 환한 두 손은 흉하게 접혔고, 뒤집힌 목소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듯.
해원기가 멈추어섰다.
결국, 본색이 드러난다.
자신이 거느리고 온 수하들. 서른 명의 복면인과 십이지(十二支)를 하나씩 이름으로 삼은 넷, 그리고 같은 환관일 위 소감까지. 누구 하나 돌볼 생각 없이 오직 자신만이 도주할 작정이었고, 그 진이 파괴되자 인질을 방패로 삼는다.
사세가 곤궁해지면 자연히 그 본성이 나타나는 법.
황상을 들먹이며 우아한 체, 여유만만한 체하던 건 전부 겉치레일 뿐. 신통한 무공을 지녔으니 차라리 한번 승부를 결할 만도 하건만.
한심스럽다.
해원기의 눈에서 차츰 신광이 사라지면서, 음성도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첩형대인, 그 경옥 빛의 신공이라면 한번 붙어볼 만하지 않을까?”
장거리 쾌체 일을 한 지 육 년.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엿보았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그래도 의리를 지키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버티던데.
이 얼마나 추한 꼴인가. 흥륭의 두 사람을 인질로 내세우는 꼬락서니에 어쩐지 맥이 풀릴 지경.
해원기에게서 풍기던 위세가 줄어서일까. 첩형의 면사 위 눈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거침없이 다가들던 걸음이 멈췄고, 금방 손을 쓸 것 같지도 않으니.
이 인질이 자못 쓸모가 있는 모양. 확인을 위해 다시 협박해 보는데.
“본관의 말을 듣지 못했느냐? 썩 물러서지 않으면 이 두 놈의 팔을 하나씩 부러뜨…….”
지잉.
돌연 시야를 가리는 희미한 빛. 자신의 바로 곁에 있던 인질들의 모습이 흐릿해져서 황망히 손을 내밀었지만.
펑.
“헉.”
어깨를 울리는 충격에 첩형이 헛바람을 삼켰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저 괴물 같은 젊은 놈이 그새 무슨 수작을?
그러나 해원기를 쳐다보기 전에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얼이 빠졌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진을 수정해 뒤집어씌우느라 더는 늦출 수가 없군요. 소주…해 대협, 저희는 괜찮습니다.”
멀찌감치 후전 밖에서 들리는 듬직한 목소리는 분명히 얼마 전에 흥륭의 총관이라고 인사를 올리던 자의 것. 첩형이 급하게 둘러보지만,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인질들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이제 이 후전에는 첩형 혼자만 남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후전 구석까지 몰린 첩형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휘익.
미풍과 함께 해원기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이르고. 뭐라 말 한마디 꺼내기 전에 전신이 마비된 첩형이 바닥에 쓰러졌다.
“후.”
해원기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첫 싸움. 무사히 끝났나.
신공을 풀면서 긴장까지 풀어져 허탈한 채 잠시 바닥에 쓰러진 첩형만 쳐다보았다.
대단한 무공을 갖춘 고수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인 건 처음. 비무(比武)가 아니다. 더구나 그냥 이기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구하기도 해야 해서. 신경을 이만저만 쓰지 않았다.
그리고.
무림출도(武林出道).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스스로 무림에 나서기로 한 결정. 과연 피를 묻혔다. 되도록 살상을 피하고 싶었지만, 상대를 해치지 않고 제압하기에는 기량이 부족하다.
실력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라면 원하는 대로 구속할 수 있어도, 고수라 불릴 정도가 되면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극복하는 비결은 오직 박대정심.
아직 멀었다.
“해 대협.”
복잡하게 엮이는 여러 상념. 마침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른쪽 기둥 옆에 한 사람을 기대어놓고 일어선 인물. 황의 장삼에 둥그런 포건(包巾)을 쓴 의젓한 차림, 주름진 얼굴에 긴 수염이 적잖은 나이인데 해원기를 보는 눈에는 격동의 빛이 가득하다.
처음 보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 덕주의 전장을 관리하던 황륙과 닮은 인물이 정중하게 손을 모았다.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음, 흥륭상단의 총관을 맡은 황량(黃梁), 둘째입니다.”
황륙보다 몇 살 더 많은 나이, 인사하는 목소리는 차분하며 내용은 간결하다. 이미 해원기를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아는 모양.
해원기가 마주 포권의 예를 취했다.
“해원기입니다. 가주께서는?”
기둥에 기대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흥륭의 가주, 황칠일 터.
“괜찮습니다. 그냥 몽혼약을 써서 데려왔으니까 돌아가 쉬면 깨어날 겁니다. 저들을 안심시키려고 가주에게 참으라고 했었지요. 시간이 좀 필요했기에.”
해원기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흥륭의 총관인 황량, 그냥 맥없이 끌려온 게 아니라 이미 대처할 준비를 했었고. 간명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다.
“맏형이 염상단을 이끕니다. 용문세가에서 온 차상은 저희의 무공이 별 볼 일 없다고 여겼는지 그리 강하지 않은 약을 풀더군요. 어차피 흥륭을 고스란히 집어삼킬 심산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저들의 역량을 파악하려고 가주와 제가 순순히 따랐고, 황부(黃府)에선 맏형이 태세를 바꾸어 저희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다만 막 문주가 휘말릴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섣불리 발동할 수 없었고요.”
“막 문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관부와 얽히기 싫어하는 무림문파, 막혼이 굳이 초청에 응한 건 그래도 흥륭을 염려해서이다.
해원기가 슬쩍 입구 쪽을 보자, 황량도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의기남아. 저희가 누구인지 밝힌 적은 없으나, 항상 고맙게 대했지요. 이번에 또 은혜를 입었군요.”
황룡칠절에 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가 극히 적다. 막혼의 윗사람들 역시 흥륭에 그 칠절이 있는 줄 모를 테니.
해원기가 포권을 풀고 바닥을 가리켰다.
“불쑥 전음이 들려 조금 놀랐습니다. 용케 저를 알아보고 진도를 맞춰주어서 크게 도움을 받았지요.”
황량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미 덕주에서 연락을 받았기에 만나길 기대했었던 젊은 주인. 멀리 떨어져 함부로 간섭하지 않으려 해도 인연이 닿길 바랐었다.
“과거에 멀리서나마 주인의 위용을 본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검기를 지면이나 공간에 설치하는 기예, 뭐, 맨손을 검으로 쓰는 분이 그분 외엔 없잖습니까. 막 문주의 목소리도 들었고요. 그래서 감히 먼저 말씀을 드렸고 바로 황도진세(黃道陣勢)를 방어로만 바꾸었던 겁니다.”
아련한 추억. 은신과 잠행, 그리고 술법으로 비밀리에 주인을 받들었었다.
그 주인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다르다.
“조금 걱정했습니다. 황도음부진결(黃道陰符陣訣)은 너무 어렵고, 제가 펼친 검기가 어디까지 미칠지 몰라서. 다행이군요.”
어색하게 머리를 긁는 모습.
고오하고 냉엄했던 주인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황량이 새삼 추억에서 벗어날 때,
“누구냐!”
“자, 잠깐. 막 문주, 우린 적이 아닙니다.”
입구에서 들리는 고함에 대화가 끊어졌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기 시작할 때지만 여전히 어두운 날씨.
막 식사를 마치고 회랑(回廊)으로 나오던 오소민이 난간에 기대어 선 해원기를 보았다.
“확실히 중원제일 갑부라 간단한 아침도 아주. 어, 해형, 뭐해?”
하늘을 올려다보던 해원기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큰비가 올 것 같아서. 다들 괜찮은가?”
제남 남쪽 천불산 부근의 황부. 흥륭황가의 저택답게 어마어마한 규모고, 아침도 엄청 푸짐하게 나왔는데. 해원기는 거의 먹지 않더니.
오소민이 회랑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응. 황 대협이야 집안 식구니까 알아서 잘 할 테고, 용문의 똑똑한 아가씨께서는 백배사죄에 뒤처리에, 정신이 없겠지. 저 안에서 흐뭇하게 식사를 즐기는 건 증가 꼬맹이뿐이야. 적각개도 만두 입에 쑤셔 넣고 막 문주에게 끌려나갔어. 흐흐.”
오소민의 희한한 웃음에 끌려 해원기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적각개는 개방 방주의 대제자(大弟子), 나이는 비슷해도 오소민이 사숙(師叔)이 된다. 봉두난발에 사시사철 맨발로 다니는 기행(奇行)으로 적각개라는 외호를 얻었다나. 그 정도로 거침없고 제멋대로인 성격인 듯한데 오소민을 만나면서는 꼼짝도 하지 못해서. 오소민 역시 이 사질을 놀려먹는 게 아주 즐거운 모양.
제대로 인사를 나누자마자 황신을 걱정하는 막혼에게 끌려 밖으로 나가야 해서 꽤 아쉬워했었다. 나름 눈치가 빠른 편이니 해원기에게 호기심을 느꼈을 터.
아쉬워한 건 적각개만이 아니었다. 흥륭과 황하문 인원들이 북극묘의 뒤처리를 맡았지만, 진짜 수습은 더 큰 일. 흥륭의 총관인 황량과 염상단을 이끄는 단장 황일은 속에 담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관아를 도는 중이라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증 낭자도 태원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피곤할 걸세. 다들 고생이구먼.”
난간에 걸터앉는 해원기를 보며,
오소민이 희한한 웃음을 끌어 말을 받았다.
“흐흐, 고생은 해형이 했지. 검왕(劍王).”
툭 던지는 생소한 호칭. 해원기의 미소가 씁쓸해진다.
“되었네. 무슨. 어색하게.”
해원기의 고소가 재미있는지 오소민은 더 키득거리고,
“풍화절세, 응양구천. 만검(萬劍)의 지존(至尊)이며 백협(百俠)의 표상(表象). 사부들이 떠들던 소리에 귀가 다 아팠다구. 처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나도 참. 크큭.”
해원기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팔선(八仙) 어르신들은 다 잘 계시지?”
오소민이 소매를 입을 쓱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대사형의 폐관이 끝나자마자 팔선중(八仙衆)은 다시 뿌리로 돌아갔으니까. 십 년이 넘었네그려. 물론 개방에선 그런 과거도 다 지우게 되어있고. 나 역시 개방에 소속된 이후론 팔선중과 아무런 연결이 없어. 알지?”
“대충. 사부님이나 탁 소숙이 가끔 얘기는 해주셨어도 자세한 말씀은 별로.”
“그런 분들이라고 들었네. 당신들의 얘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극도로 피하셨다는 분들이 남 얘기를 하셨을 리 없지. 그거 뭐라더라? 그 능력을 자랑하지 말고, 에…….”
“불벌기능(不伐其能), 불긍기공(不矜其功).”
“그래, 그거. 푸훗!”
자신이 지닌 능력을 자랑하기 말고, 자신이 세운 공적을 내세우지 말라. 오래된 격언을 되새기던 오소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탁 소숙이라. 고금제일무신(古今第一武神)인 천극(天極) 탁 대협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자네뿐일 거야. 하하.”
소숙(少叔)이란 나이 차가 나지 않는 숙부나 막내 숙부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 이미 오십 줄을 훌쩍 넘긴 사람이요, 다른 숙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소숙이라 부르는 건 역시 처음부터 입에 밴 습관이다.
천극(天戟)이란 본래의 외호조차 이미 존경을 담은 다른 글자로 바뀌었거늘.
해원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져서 슬쩍 시선을 돌린다.
“뵌 지 육 년이 넘었네.”
목소리가 무겁고.
오소민이 그런 해원기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친구가 되어서 말투를 바꾸긴 했어도 이렇게 말이 짧지는 않았었는데.
초연루에서 떠날 때 보였던 쓸쓸한 표정보다 더 심란한 모습. 선뜻 말을 걸기 어려울 만큼 낯설지만, 오소민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 ‘바부탱이’. 또 뭘 고민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