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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52화 (53/410)

제13장 검왕출세(劍王出世) (4)

거침없던 해원기의 손이 멈춘 게 마음에 든 모양.

면사를 쓴 인물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호홍, 모산파랑 무슨 관계가 있을꼬? 황하문이나 흥륭, 아무 인연도 없어 보이는데. 누구인지, 여긴 어떻게 왔는지 궁금하구나.”

해원기가 시선을 바로 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거 참. 쯧.”

뭔가 아쉬운 듯 혀까지 차니. 면사를 쓴 인물도 눈을 껌뻑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허름한 몰골의 더벅머리 청년. 특별히 눈에 띄는 용모는 아니지만, 꽤 사내답게 생겼는데 그 표정에 변화가 없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무공을 지닌 고수, 어디 출신이고 어떤 내력일까. 무경박사가 선뜻 밝히지 못하는 걸 보면 용호방에는 기재되지 않았다는 뜻.

십이생초령(十二生肖令) 중의 셋을 잃어도 상관없다. 이런 젊은 고수를 수하에 거두어들인다면 더욱 이익.

그래서 은근히 배경을 더듬어보려고 말을 붙였건만, 엉뚱하게 혀를 찬 건 무슨 의미인지.

해원기가 가볍게 턱을 올렸다.

“소감이든 태감이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다 황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이상한 짓이나 하라는 벼슬이 아닐 텐데. 게다가 데리고 다니는 무경박사란 자가, 흠, 모산파의 무형신검수?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딱하군.”

면사를 쓴 인물의 눈썹이 훌쩍 올라붙었다.

소감과 태감. 황궁의 인물이란 걸 알면 어느 정도 몸을 사리는 게 강호인이다. 무림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은 왕법을 따르지 않는 불량배들, 관을 대할 때 겁을 먹는 게 당연하다.

더구나 당세에는 이미 동창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거늘.

이렇게 한심스럽게 말을 받는 태도는 처음. 낯설고 생경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래서 무경박사를 무지하다고 하는 말에 먼저 신경이 쓰였다.

“딱하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직접 물어봐도 될까?”

“응? 응. 그래, 그래라.”

면사를 쓴 인물이 얼떨떨했다가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그 바람에 막 위기를 벗어난 위 소감도 주춤 밀려나고.

해원기가 고개를 돌려 무경박사란 자를 쳐다보았다.

정면을 대뜸 내주는 인물이나, 그렇다고 바로 시선을 바꾸는 해원기나.

조금 전까지 거친 싸움을 벌이던 건 다 까먹었나.

특히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던 해원기가 또 상대의 수작에 말려든 건 아닐까.

말상. 그냥 길기만 한 게 아니라 이목구비가 이렇게나 말처럼 생긴 사람이 있을 줄이야.

굳이 묻지 않아도 이 무경박사라는 자가 오자령(午字令)인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갑자기 해원기가 쳐다보자 어정쩡한 모습.

“모산파가 본래 무엇으로 문파를 열었는지 아나?”

“그, 그거야. 부주(符呪)로 유명했던 도사가 개파조사니까 당연히 술법…….”

“모르는군. 부적과 주술은 전부 강호에서 남의 이목을 속이려는 수단. 개파조사는 실상 도가의 내단(內丹)에 정통한 자라 아주 특이한 운기법을 찾아냈지. 그래서 모산파의 무공은 장법이든 검법이든 단기(丹氣)를 외부로 끌어내 형성하는 것이 기본이고. 마침내 다섯 손가락에서 쏘는 지력을 장심의 장력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탄비오지(彈飛五指)를 무영장(無影掌)으로 고정한다?”

“그 기예는 아는구먼. 현재 무림에 널리 알려진 탄지법(彈指法)과 격공장(隔空掌)의 유래. 그렇다면 이 둘을 합했을 때 어떤 효과를 낳을까?”

“탄지법은 빠르고 예리하지만, 즉발(卽發)이 요령이고, 격공장은 반면에 강하고 무겁지만,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곳에 지발(遲發)하니까. 허!”

말처럼 밑으로 처진 하관이 주억거리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어정쩡한 상황이긴 해도 무경박사라는 칭호대로 무공에 관한 얘기에 금방 집중해서,

해원기가 일러주는 내용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답을 얻은 모양.

넓게 벌어진 두 눈을 끔뻑이다가 힘없이 말을 잇는다.

“예리하고 강한 강기가 마친 신검처럼 구현되지만, 어차피 수공(手功). 그러나 즉발을 지발로 묶었기에 그 변화가 극히 단조로울 수밖에…….”

해원기가 맞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고.

이 어이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면사 쓴 인물의 두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별안간 무슨 무학 토론? 그래서 뭐?

말을 흐리던 무경박사가 고개를 숙이며 답을 내놓았다.

“제가 틀렸습니다. 이자의 무공은 무형신검수가 아닙니다. 용서하십시오.”

면사 쓴 인물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사실 ‘모산파’를 먼저 거론한 건 자신. 맨손에서 검형을 구현하고 십이생초령의 셋을 꺾는 능력이라면 오래전에 실전된 절학이어야 가능할 터. 슬쩍 안목을 자랑한 건데.

무형신검수가 아니란다.

신색을 회복한 위 소감이 어처구니없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럼 뭔데?”

면사 쓴 인물이 손을 들어 그 입을 막았다.

무경박사가 알아봤다면 벌써 알려주었을 터. 뭔지 모른다는 거다.

찡그렸던 미간을 펴면서 사뿐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면사를 쓴 인물은 몸매도 그렇지만, 마치 귀한 집 규수처럼 움직임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곱다.

“모산파의 무형신검수보다 더 훌륭한 무공이라는 거구나. 아직 젊은데 이 정도의 고수라니. 좋아, 아주 좋아. 그래, 이름은 뭐고 어디 출신인고?”

더욱 낭랑하게 가다듬은 음성으로 어린아이 대하듯 건네는 말투.

꽤 교양을 갖추어 친밀감까지 들 정도인데.

해원기가 또 혀를 찼다.

“쯧. 어째 다들 똑같을까. 황궁에서 뭘 배웠기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면 먼저 자신을 밝히는 게 도리. 혹시 환관이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알 거라고 여기나? 아니면 그렇게 알아봐 주길 바라서?”

“이런 발칙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호호홍, 되었다. 틀린 말이 아니잖으냐. 젊은이가 저런 패기는 있어야지.”

왈칵 성을 내는 위 소감과 여유롭게 말리는 면사 쓴 인물.

해원기가 여전히 손을 쓸 낌새를 보이지 않으니, 아예 느긋하게 대할 셈. 젊은이의 패기를 칭찬해 들뜨게 하고, 그 앞에 부와 명예를 제시하면 얼마든지 농락할 수 있다.

면사를 쓴 인물이 우아하게 몸을 틀어 북쪽을 향했다.

“아직 젊어서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다만. 이 세상의 지존이신, 황상을 모시는 시신(侍臣)들이 어떻게든 용상(龍床)의 근심을 덜어드리고자 애를 썼단다. 황상께서 이 정성을 갸륵히 여기시어 어의(御意)를 받들 조그마한 기구를 만들어주셨고. 그게 바로 동집사창이지. 이는 내각과도 다르고, 육부와도 다르며, 군부와도 다르니 오로지 황상의 뜻에 따라…….”

“동창의 누군데?”

‘황상’을 입에 올릴 때마다 두 손을 모아 예를 차리는 근엄함도, ‘용상’이니 ‘어의’니 하는 어려운 말도.

해원기의 아무 표정도 없는 질문에 끊겼다.

위 소감이 눈을 치켜뜨고, 오자령의 말상이 굳어지며, 면사 쓴 인물의 면사가 바르르 떨지만.

그래도 그 면사가 천천히 해원기 쪽으로 돌아왔다.

“패기가 아니라 무지일까? 본관이 그 동창의 첩형대인(貼刑大人)임을 알면 좀 달라지려나?”

어르고 달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이쯤에서 이 젊은 놈의 기를 한번 죽여놔야.

낭랑하던 음성을 잔뜩 낮춘 건 아마도 그런 의도.

그런데도.

해원기는 뭐가 또 의아한지 머리를 갸웃거린다.

갸웃거린다는 건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꺾는 동작. 그 동작을 좌우로 두 번씩 해대면 이건 갸웃거리는 게 아니라 놀려대는 의미가 된다.

첩형이라고 밝힌 면사를 쓴 인물의 눈썹이 슬슬 세워질 수밖에. 이건 젊은이의 패기가 아니라 아예 무지몽매한 망나니가 아닐까.

얼굴 아래를 가린 보라색 면사가 펄럭이고 전신에서 다시 맑은 옥빛이 흘러나오니. 위 소감도 반 토막이 난 원규를 바로 세우고, 오자령 역시 공력을 끌어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세.

해원기가 이 기세를 전혀 모르는지 대담하게 뒤쪽을 돌아보고.

“막 문주, 문주라면 두 걸음만 물러나면 되겠습니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말을 건네더니 그대로 옆으로 섰다.

신분을 밝혔는데도 이렇게 무시하는 태도, 첩형이라는 인물이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손을 쳐드는데.

“첩(貼)은 갖다 붙인다는 뜻이니 첩형은 형벌에다 갖다 붙이는 관직이라. 흉한 이름이네. 하여간 당당히 관명을 밝히는 건 동창에서 높은 자리란 거로군. 잘 되었네.”

해원기의 버릇, 혼잣말.

비스듬히 옆으로 선 채 비로소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번쩍.

형형한 눈빛. 그건 이 깊은 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빛.

밤이 지나고 새벽을 거쳐 마침내 해가 뜨는 그 순간에서야 드러나는 찬란한 광채.

이 신광에 첩형의 쳐들던 손이 절로 멈칫거렸다.

사람의 눈에 어찌 욱일(旭日)의 신광이 어릴 수 있단 말인가. 하나 그런 생각도 잠깐, 해원기의 언행으로 느껴진 굴욕감이 분노로 확 타오른다.

“이 버르장머리!”

우우웅.

옥빛이 크게 일며 거대한 장막으로 떨어져 내렸다.

뇌정결을 담은 본연검의 발검제형을 가로막았던 그 옥빛 장막이다.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에 위 소감이 원규만 부러진 채 물러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이 옥빛 기공 덕분. 첩형의 옥빛은 더욱 부드럽고 거대하며, 수비가 아니라 공세로 나왔다.

원을 그리는 해원기의 왼손, 다섯 손가락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춤추듯 누비고.

비스듬히 서서 허리 뒤에 두었던 오른손이 무서운 속도로 그 가운데를 찔렀다.

또 한 번의 발검제형.

그러나 해원기의 두 눈에 어렸던 신광이 모조리 오른손에 모여들었던가.

정말로 태양이 불끈 솟구치듯 엄청난 광채가 폭발하고.

쾅!

지면이 뒤집히면서 멀리 떨어진 좌우의 전각까지 흔들린다.

“음.”

옥빛 장막이 모조리 걷혔지만, 그 뒤에 여전히 손을 들고 있는 첩형.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손이 빠르게 더해진다. 한 손이 부족하면 두 손으로.

그러나 그 전에 해원기의 찔렀던 오른손이 둥글게 휘어지고 왼손이 그 가운데를 뚫었다.

발검제형의 연발, 무서운 광채가 또다시 폭발한다.

쾅!

“으으으.”

경옥의 광채가 산산이 조각나면서 비칠거리며 물러서는 첩형. 위 소감과 오자령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강한 무공이라도 전력을 다해 발하고 나면 틈이 생기게 마련. 더구나 첩형대인의 신공을 깨뜨리려고 연속으로 힘을 쓴 직후이니.

반 토막 원규를 빙글빙글 돌리는 위 소감이 꿈틀꿈틀 미끄러져 다가오고, 오자령은 단숨에 삼 장이나 높이 뛰어올랐고.

검강을 구현하는 해원기의 맨손, 하나는 검형이 뚜렷하고, 하나는 투명하단 걸 이미 알고 있다.

영사태화의 신법과 경옥 빛이 어린 원규가 유형이든 무형이든 검강지기를 흩트려버릴 터. 공중으로 치솟은 오자령이 미친 듯이 양발을 내차며 떨어져 내렸다.

푸파파팍.

순식간에 공중을 뒤덮는 산더미 같은 발그림자. 그게 전부 거대한 힘줄기가 되어 해원기의 머리를 때려 밟는다.

해원기는 아직 왼손을 내지른 자세. 위 소감에 의해 전신이 구속당한 채 오자령의 발차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찰나.

열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였고.

슈왕!

해원기를 중심으로 눈 부신 빛이 원을 그렸다.

환상처럼.

일지광한에서 오지무극까지. 다섯 손가락에 오행을 심어 검형수를 검왕수로 변화시킬 구상은 군림어검대법(君臨御劍大法)에서 나왔다고 하셨다. 사부가 귀왕검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

사부의 검형수는 신왕검형(神王劍形)뿐 아니라 사왕검형(死王劍形)으로 뒤집는 변식도 갖추었지. 사부만이 지녔던 천생살기(天生殺氣) 때문에.

귀왕검이 없이, 또 유달리 살기가 약한 해원기에게는 무리.

그래서 오행제림(五行齊臨)과 오귀전륜(五鬼轉輪)의 비결을 함께 구현할 검형수를 만들려고 했단다. 살기가 여린 해원기가 검을 지니지 않고도 시전할 수 있도록 십대검상까지 부여하면서.

그렇지만 바탕을 군림어검대법에 두었기에 검왕수에 가장 적합한 검상은.

유리검과 본연검이 아니다.

첩형의 무공이 위 소감보다 훨씬 위라는 걸 확인할 때부터 꺼내 든 것은 바로 군림검(君臨劍).

거역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검상이 오행전륜의 비결대로 손끝을 떠나 해원기를 휘돌았다.

검강이 아닌 어검.

콰쾅!

“커억.”

“꿰에엑.”

두 팔이 부러진 위 소감의 손에서 원규가 날아가고, 오자령은 무릎 아래가 가루가 되어 짐승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위이잉.

손끝으로 모여드는 광환(光環). 순간, 해원기의 눈썹이 크게 움직였다.

그사이 후전 쪽으로 신속하게 물러난 첩형. 거리를 훌쩍 벌렸는데도 당황한 눈매가 확연한데.

후전 가운데에 맥없이 주저앉은 두 사람 옆에 이르자마자 면사가 뒤집힐 정도로 소리를 지른다.

“어서 발동햇!”

기다렸다는 듯 후전을 감싼 서른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검을 땅에 박으며 한목소리로 외치니.

“개문(開門)!”

후전 주변의 어둠이 크게 휘돌면서 첩형과 맥없이 주저앉은 두 사람의 형상이 흐려지려 한다.

그러나.

곧바로 해원기의 고함이 이어질 줄 뉘 알았으랴.

한쪽 무릎을 굽히곤 지면을 힘껏 내리치는 손, 광환을 때려 박은 땅바닥이 크게 울고.

우웅.

“어딜 가려고!”

콰콰콰콰콰.

해원기의 고함에 북극묘의 지면이 전부 덜덜 떨다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좌우의 전각이 기울고, 기둥만 남은 정전이 부서지며, 후전 주위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그건 폭우를 거꾸로 뒤집은 것처럼 솟구치는 무수한 검기. 서른 명의 복면인이 죄다 검기에 꿰어 거꾸러지고.

발동하려던 술법이 깨졌다. 둔법(遁法)이든 은문진(隱門陣)이든 기초가 벌집이 되었음에야.

검왕오형의 세 번째. 검림소연(劍林蕭然).

미리 준비해두었었다.

사부의 가르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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