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검왕출세(劍王出世) (3)
지잉.
강환이 미친 듯이 진동해 협봉검이 회초리처럼 흔들리고.
키킥.
톱날 같은 강기를 머금은 십자윤반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서너 개로 불어난 듯.
순식간에 해원기의 좌우로 달려들던 둘, 술자령의 속도가 순간 빨라져 돌연 그 신영이 다섯 개로 불어나 정면을 덮치면서, 해자령의 기척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귀를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과 눈을 어지럽히는 환영. 어느 게 진짜고 어디를 노리는지 모른다.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텐데.
두 눈에서 서서히 신광(神光)을 발하기 시작하는 해원기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지붕 위를 가리켰던 오른손을 내리다가 왼손과 슬쩍 엇갈려 양쪽으로 펼치자.
따당!
쇳소리와 함께 환영이 모조리 사라진 술자령이 정전까지 주르르 밀려나고, 좌측에선 뒤로 돌려던 해자령이 허둥지둥 원반을 쥐느라 두 번이나 재주를 넘었다.
“으으윽.”
“뭐, 뭐야?”
협봉검의 강환이 희미해지는 것보다 술자령의 소매가 어깨까지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팔뚝에선 가는 핏줄기까지 비치니. 지독한 경력이 전해져서 검을 붙잡느라 기를 쓰는 중이요. 해자령의 십자윤반은 한쪽 귀퉁이가 우그러져 제대로 회수하지 못할 뻔했다.
검강이든 윤강이든 힘을 쓰기도 전에 쇠망치에 두들겨 맞은 듯하다.
재단경위를 가볍게 시전한 해원기가 다시 정전 지붕 위를 보았다.
“과연 독공(毒功)이 음유한 경력 속에 스며있군. 그나저나.”
술자령과 해자령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오른손이 천중을 거머쥐듯 원을 그리고 왼손이 그 중심을 꿰뚫었다.
“말 참 안 듣는구나.”
끼이이잉!
귀를 찢는 굉음. 발검제형이 거대한 돌풍을 이끌고 곧장 정전 위를 무찌르자, 지붕의 인물이 다시 자세를 낮추며 서둘러 두 손을 쳐들었지만.
쾅!
지붕이 통째로 부서져 폭삭 주저앉는 바람에, 술자령과 해자령이 앞뒤 가릴 틈 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 두 손을 휘두르는 대로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구르고 전각 하나가 무너져내린다.
와아.
그런 소리라도 지를 법한데.
우두머리들이 맥없이 밀려나는 광경을 빤히 보면서도 끼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복면인들. 정전 지붕이 내려앉자마자 자신들이 나왔던 좌우의 전각 쪽으로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자들. 어중간한 길이의 검을 뽑아 든 채로 싸움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뒤로 빠진다.
해원기 역시 복면인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양손을 나누어 뿌옇게 피어오르는 먼지를 향해 연거푸 흔들어댔다. 복면인들보다는 당장 상대하는 자들이 우선이라는 걸까.
캄캄한 밤중에 무너진 지붕에서 쏟아지는 먼지까지. 시야가 확보되고도 손을 몇 차례나 더 뻗었다.
와자작.
좌측에 해자령, 우측에 술자령. 먼지를 함빡 뒤집어쓴 몰골인데. 그 가운데 또 한 명이 뻣뻣하게 일어섰다. 정전 지붕 위에 있던 자, 복면인들처럼 흑의 경장 차림이지만, 뾰족한 코와 턱이 예리해 보이는 중년인. 새의 부리처럼 삐죽 나온 입을 꽉 다물고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데, 그만이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해원기가 손을 내리면서 시선을 모았다.
“금종조(金鐘罩)에 금계독립세(錦鷄獨立勢)라면 충격을 전부 체외로 전가할 수 있지. 물론 계조경(鷄爪勁)을 연성해야 하고. 그럼 너는 닭이냐?”
수풍정을 버티고, 발검제형에도 손해를 보지 않은 이유.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을 무효로 하는 호신기공과 그 힘을 외부로 이전하는 기예를 전부 알아본다.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이 개와 돼지였으니 당연히 닭이냐고 물은 것.
뾰족한 인상의 중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와 달리 상당히 과묵하지만, 자신의 무공을 단번에 알아보는 해원기에게 내심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해원기가 다신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십자윤반? 원월륜(圓月輪)이겠지. 던지기보다는 근접전에서 권(圈)처럼 사용하는, 기형도(奇形刀). 은형환인(隱形環刃)은 왜도(倭刀)의 비전이지만.”
“진단력(震斷力)을 높이기 위해 협봉검을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야. 그런데 그걸 진단(震丹)이라 바꾼 건 저 왜도술과 같이 독공을 바탕에 두어서지. 강기를 구상화할 경지면서도 굳이 음유한 독공으로 상대를 철저하게 망가뜨리려는 의도.”
해자령도 술자령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십자윤반이 어떤 병기인지 아는 이가 없었거늘, 진단검강이란 이름도 새로 지은 것이거늘. 모조리 꿰뚫어 보는 데다가.
독공을 겁내지도 않는다.
조금 전에 무경박사가 막혼의 무공을 줄줄이 밝힐 때와 거꾸로 되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섣불리 움직일 마음도 들지 않는다.
자신들의 무공을 전부 아는 자, 저 허름한 외모의 청년이 당최 어떤 수법을 썼는지 감도 잡지 못하겠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을 휘두르기만 하면 검이든 윤이든, 독공이든 강기든 전혀 힘을 쓰지 못하니.
아니,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해원기가 잠깐 등 뒤를 돌아보곤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뒤에 커다란 바위처럼 웅크린 막혼, 이 상황에서도 맘 편하게 운공을 하는 모양인데. 복면인들이 다 물러갔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터.
북극묘의 후전. 복면인들이 빙 둘러서 지키는 저 후전 안에 수괴가 있다.
해원기가 등 뒤로 손을 교차해 뒷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만일을 위해 막혼의 주위에 검기를 심어둔 것이지만, 그 자세는 참으로 고오(高傲)해서.
돼지, 닭, 개가 전부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저 기세에 자꾸 주눅이 든다.
“자, 잠깐!”
후전에서 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예의 낭랑한 음성, 기묘한 웃음기는 다 사라지고 황망함이 가득 담겼다.
“너, 너는 누구냐? 정체가 뭔데 갑자기. 유자령(酉字令)까지 저러면 곤란하잖으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 와중에도 투정을 부리듯 칭얼대는 투까지 섞였지만.
해원기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관도에서 이미 바보짓을 했었다. 아무 이유 없는 대화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연 이 낭랑한 음성이 신호였던지. 해자령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고, 술자령의 다섯 개 환영이 달려드는 속에 유자령이 한 발로 겅중 뛰었다.
키키킥, 지이잉, 파팟.
은형환인의 윤강, 진단검강의 강환, 그리고 금계독립세의 계조경까지. 한꺼번에 해원기의 전신으로 쏟아지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해원기의 뒷짐 진 두 팔이 활짝 펴졌다.
오른손엔 검형이 삼 척으로 뚜렷한 본연검, 왼쪽에는 있는 듯 없는 듯 투명한 유리검. 십대검상의 두 자루를 쥔 채 재단경위.
위이잉.
날과 씨, 수직과 수평이 무수히 교차해 그물처럼 이어지는데. 그 하나하나가 무서운 단열(斷裂)이다.
보이는 검과 보이지 않는 검. 만검천인(萬劍千刃)의 그물에서 검은 보이되 그 날은 보이지 않으니.
콰쾅!
형체는 숨기고 소리만 남았던 십자윤반이 박살이 나고, 협봉검이 강환과 함께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으악!”
“쿠에엑.”
해자령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꾸로 처박히고, 술자령은 폭포수처럼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전력으로 강기를 구상화하던 병기가 산산조각이 나면 그 시전자는 더 큰 충격을 받는 법.
게다가.
떠엉!
“크윽.”
이미 두 발을 다 땅에 댄 유자령, 금계독립세로 충격을 이전할 수가 없다. 계조경은 이미 흔적도 없이 날아갔고, 금종조가 파괴되기 직전. 어떤 검강이나 장력도 능히 막아내는 호신기공인데도, 끝없이 몰아치는 검에는 견딜 수가 없다.
떠엉!
울컥,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는데.
휘리리릭.
돌연 유자령의 머리 위에서 기이한 기운이 튀어나와 검강의 그물을 휘젓는다. 검을 튕기고 날을 밀어서 강기의 그물을 뒤집으려는 회오리.
그건 추침과 각간이 하나로 결합된 원규. 보이는 본연검과 보이지 않는 유리검을 전부 휘감으려 하는데.
“그럴 줄 알았다.”
해원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펼쳤던 두 손을 가슴 앞에 교차했다.
만검천인의 검망이 순식간에 두 줄기로 엮인다.
사부는 대단히 치밀한 사람이었다. 싸웠던 자들이 하나같이 ‘싸움에 대단히 능하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냉혹하고 살기가 넘쳐 무정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해원기에게는 뭐든지 가르치려고 애썼기에. 승부의 관건이 어디에 있는지 그 요결을 세심하게 일러주었다.
제승지권(制勝之權)은 비(備)에 있단다.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다음 수를 항시 갖추어놓아야 한다. 때로는 상대의 무공도 참조하고 인용할 때도 있음이라.
검왕오형의 두 번째 재단경위는 본래 사부의 금교전(金鉸剪)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 가위질을 무수한 단열의 검망(劍網)으로 발전시킨 건 과거에 중천검(中天劍)이라 불렸던 자가 이룬 무량검상(無量劍相)이란 기예를 참작해서다. 당연히 금교전으로 되돌릴 수 있고, 그 농축된 위력은 본래의 재단경위를 뛰어넘는다.
그건 사부가 창안한 신마검세(神魔劍勢)의 총화.
오른손의 본연검이 이끄는 날실이 서른세 줄, 예전의 삼십삼천신마봉헌(三十三天神魔奉獻)을 기틀로 삼고.
왼손의 유리검이 움켜쥔 씨실이 서른세 줄, 이 또한 대천세계신마난무(大千世界神魔亂舞)로 어우러진다.
그 두 손이 교차하는 순간,
번쩍.
섬광이 폭발하며 원규가 뚝 부러졌다.
“허억.”
별서를 공격했던 자, 위 소감이라 불린 자가 전신을 꼬면서 뒷걸음치는 게 보였고.
펑!
뒤늦게 터지는 굉음, 유자령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삼 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해원기가 교차했던 손을 풀며 한 걸음 내디뎠다.
“영사태화의 신법도 기특하지만, 그 경옥(瓊玉)과 같은 신공이 참 신통하군. 네가 위 소감이면 저 안에 있는 자는 태감이냐?”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神魔共武)에 뇌정결을 섞었거늘. 금종조가 파괴된 유자령과는 다르게 절반만 남은 원규를 그대로 든 위 소감. 그 전신에 흐르는 옥빛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다.
“으으, 너, 너는. 어째서 비천무영과 같은, 대체 무슨 수법…….”
별서에서 모습을 감춘 해원기와 겨루어본 경험. 그러나 더욱 강력해진 지금의 무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위 소감이 진저리를 치며 말을 더듬지만,
해원기는 굳이 대답을 원해 물었던 게 아니다. 싸우면서 상대에게 틈을 주는 건 어리석은 짓.
유리검이 원을 그리고 본연검이 힘차게 찌른다.
우르릉.
뇌정결을 가득 심은 발검제형이 굉량한 우렛소리를 토하며 위 소감을 정통으로 내질렀다.
아무리 영사태화의 신법이 기특해도, 경옥 빛의 신공이 신통해도. 어둠을 가르고 횡으로 뻗는 번갯불을 어찌 피하랴.
그러나.
위 소감의 전신에 어린 것보다 더욱 환하고 부드러운 옥빛이.
장막처럼 내려오며 뇌정결의 발검제형을 막아섰다.
파라랑.
뇌성(雷聲)이 삽시간에 뭉그러지고, 전광(電光)이 잘게 찢겨 흩어져나간다.
“아따, 참 무섭구나야. 그러고 보니 이거 검이네? 맨손으로 검형이라면, 음, 모산(茅山)이던가? 무경박사.”
낭랑한 음성과 함께 호리호리한 인영이 위 소감 옆에 나타났고.
그 뒤에 허리를 숙인 자의 대답.
“네. 무형신검수(無形神劍手)라는 절학입니다. 그걸 잃고서 모산파가 멸망했습죠.”
후전 지붕에서 관전하다 떨어져 내렸던 인물. 무경박사라는 자다.
해원기가 손을 거두고서 가만히 정면을 보았다.
꽃무늬가 수 놓인 화의(華衣), 날씬한 몸매에 딱 맞도록 옥대(玉帶)까지 갖추어 입었고. 머리에는 옥을 붙인 윤건(綸巾), 넓은 이마에 가는 눈썹, 주름진 눈매가 적지 않은 나이로 보이지만, 눈 아래에는 보라색 면사를 드리워서 용모를 알 수 없다.
그리고 가볍게 얼굴 앞에 세운 손.
환하고 부드러운 옥빛을 토해 진짜 옥으로 만든 것 같은 손.
저 손이 발검제형을 막았다.
이자가 바로 후전 안에서 기묘한 웃음소리를 흘려댔던 장본인. 해원기가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게 의아해 갸웃거리듯.
하지만 그 시선은 앞의 셋과 그 뒤에 모여든 서른 명의 복면인을 거쳐 후전의 내부까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