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검왕출세(劍王出世) (2)
처음 발견한 건 아무래도 개와 돼지를 자칭한 남녀.
막혼의 실력을 바닥까지 알았다는 자신감으로 생포에도 여유가 넘치는 판이었고, 마침 호수를 정면으로 보는 방향이었기에.
그리고 막혼의 도주를 막으려고 뒤에서 포위를 조이던 복면인들이 그다음이었다.
그들도 나름 상당한 수련을 쌓았으며, 주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에 등진 호수에서 물결이 이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무공을 익혀 근력과 지구력만 느는 게 아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감각, 즉 오감이 훨씬 영활해지고. 내공이 깊어갈수록 오감을 넘어 일종의 예감 같은 걸 지니게 된다. 이른바 육감. 고수일수록 굳이 손을 섞지 않아도 어떤 싸움이 될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이유인데.
개라는 중년인과 돼지라는 여인, 서른 명의 복면인이 한결같이 뭔가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대명호는 그게 호수라는 걸 의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끈할 뿐.
그 위에 은은한 비췻빛이 두 개 떠오른 건 착각일지도.
그러나 매끈한 호면 위, 가는 선이 겹쳐져 면이 되고, 그 면이 출렁여 물결인 걸 깨닫는 순간에.
두 개의 비췻빛이 사람의 눈이란 걸 겨우 인지했으나.
믿을 수 없었다.
북극묘는 이름 그대로 대명호의 북쪽 기슭에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남쪽은 호수에서 가장 폭이 넓은 곳, 직선으로 백여 장이 훨씬 넘는 거리다.
좌우의 전각에서 땅바닥으로 내려올 때 기고한 신법을 보였던 남녀. 검과 원반을 병기로 쓰면서도 경공에 특히 심혈을 기울여 그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었는데.
물 위, 백여 장이 넘는 물 위를 달린다고?
가까운 거리라면 한두 번 물을 차서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경공에다 전력을 기울였을 때 얘기지만.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거리. 평지처럼 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요, 더구나 그 속도가 평지보다 더욱 빨라지고 있으니.
물을 차는 게 아니다. 수면을 때리는 게 아니다.
협봉검을 든 청의 중년인이 검봉에 피워올렸던 강환이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등평도수(登萍渡水)……?”
수면 위로 펼쳐진 수초의 잎을 밟고 물을 건넌다는 경지. 백여 장이 훨씬 넘는 대명호엔 어울리지 않는다. 늪이나 연못이 아니잖나.
거의 동시에 원반의 회전을 멈춘 홍의 여인도 입을 딱 벌렸다.
“일위도강(一葦渡江)? 아니.”
갈댓잎 하나에 올라 장강을 건넌다는 전설의 경공. 하지만 스스로 그 말을 부정하는 건, 무서운 속도로 닥쳐오는 인물의 발에 갈댓잎은커녕 작은 나무껍질 하나 붙어있지 않은 걸 발견했기 때문.
촤아아아아.
그냥 달리고 있다.
한데 수면이 이상하게 출렁거린다. 땅에서 힘차게 달리면 지면이 파이듯, 수면을 달리면 물이 파여야 하거늘.
달리는 인물의 뒤쪽으로 물보라가 거칠게 솟구쳐야 맞거늘.
물이 앞으로 밀려든다. 조수처럼 험하지도, 파도처럼 거칠지도 않고 부드러운 물결이 되어.
물이 그 인물을 밀어내고 있다.
발이 닿을 곳의 물이 먼저 뭉쳐서, 발이 닿자마자 용수철처럼 밀어내고.
수기(水氣)를 전한 후에는 부드럽게 풀어져 좌우로 물러선다.
왕이 납시도다.
제신(諸臣)은 힘을 다해 받들어 모시고, 삼가 그 위엄에 조용히 물러날지니.
끝까지 예를 갖추어 공경히 머리를 숙일지라.
보병(寶甁)의 감로(甘露)가 예 있으매,
감히 천손지보(天孫之步)를 업고 길을 여나이다.
물거품이 속삭이는 소리는 절대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이 벌어진 입으로 믿지 못할 경공 이름을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그 인물이 호숫가에 이르러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솨아아.
돌연히 일어나는 광풍. 땅을 휩쓸어 흙과 돌이 마구 날려서 단숨에 서른 명의 복면인을 휘감는다.
“헛.”
누구의 복면에서 나온 헛바람일까.
아무리 철저한 수련을 받았어도 이런 황당한 광경과 이어지는 광풍에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진형이고 뭐고 눈도 뜨지 못하고서 비틀거리느라.
자신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북극묘까지 길을 훤하게 틔워준 것도 깨닫지 못했고,
이 엄청난 바람에도 호숫물이 물방울 하나 날리지 않았단 건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광풍이 사라졌을 때는 이미 북극묘의 담장까지 밀렸고,
신비의 인물은 벌써 막혼의 곁에 이르렀다.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 서른 명의 복면인보다 더 확실하게 지켜본 자. 무경박사라 불린 인영이 겨우 비틀어진 목소리를 흘렸다.
“백사십이 장, 아무런 타력의 도움도 없이 건넌다? 무력답수(無力踏水)? 그건 그냥 몽상에 불과……!”
후전의 지붕 위, 가장 높은 곳에 있으니 호수를 가로지른 거리까지 재었던 모양.
그의 안목은 남들보다 훨씬 높아서 ‘등평도수’나 ‘일위도강’을 넘는 경지를 읊조리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그저 꿈같은 소리, 허망한 상상으로 치부했었는데.
그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을 더욱 크게 떠야 했다.
막혼의 곁에 이른 인물이 벼락같이 손을 휘둘러서.
번쩍.
순간적으로 명멸한 빛, 마치 검광 같고.
그 검광에 그대로 베인 막혼이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꺾고 있었다.
검? 검이 어디 있지?
아니, 이 신비한 인물이 무력답수라는 꿈같은 경공으로 등장한 이유가 막혼을 베기 위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초연루 안.
다들 북극묘 쪽을 향한 채 넋이 빠진 것 같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오소민도, 오보혜도, 그리고 증명단도.
조금 전.
문청을 부수며 막혼이 나타났고, 전각의 지붕 위에 그림자들이 일어서자. 유심히 보던 해원기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해형, 왜……?”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난 여전히 어리석어. 몇 번이나 굳게 결심을 하고도 말이야. 쓸데없는 고집에 지나치게 얽매여서, 흠, 자네 말대로 난 바보지.”
엉뚱한 소리를 하는 통에 오소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먼 거리이긴 해도 기척을 감추느라 창에 바짝 엎드려 있었는데, 갑자기 일어나선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그러나 해원기의 얼굴을 올려보며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바다처럼 깊은 두 눈, 그 속에 보일 듯 말 듯 한 빛이 어렸고. 수염 자국이 짙은 입가엔 쓰디쓴 미소 하나가 매달렸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진 않아도 이 ‘바부탱이’가 이렇게 쓸쓸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오소민에게 그 미소를 보인 것도 잠깐.
해원기의 시선이 황정리 옆을 향했다.
“증 낭자, 오해를 풀고 나서 귀파의 얘기도 듣고 싶군요.”
증명단이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네서 얼떨떨했다. 한참 오보혜에게 그간의 사정을 묻고 있는 판에.
게다가 ‘귀파’라. 복룡검식을 전해준다지만 남의 문파에 웬 관심?
증명단이 되바라진 말대답을 하기 전에.
“오 소저, 나를 언제나 아껴주시던 분이 예전에 세가의 산장에 머문 적이 있다고 하셨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오보혜도 작은 눈을 깜빡거렸다. 사태가 갈수록 급격히 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거운 책임감에 증명단과 말을 나눌 생각도 들지 않는데. 지금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산장? 어느 산장인지도 밝히지 않고서 가보고 싶다는 뜻인가?
총명한 그녀도 말뜻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리고 해원기가 창틀에 발을 올렸다.
“오형, 장거리 쾌체는 이제 끝일세. 언젠가 불리관(不理館)에서 밥 한 끼 먹으려 했건만. 결국, 무림에 나가게 되었어. 아, 참.”
오소민의 둥그렇게 뜬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불리관을 어찌 아는가? 개방에서 그 허름한 밥집 이름을 아는 이는 셋뿐. 하지만 마지막으로 힐끗 돌아보는 해원기의 얼굴을 홀린 듯 보느라 붙잡고 물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형의 여덟 사부님은 나를 모르시나? 탁 소숙이 어지간히 소문을 냈다더니.”
조금 전의 쓸쓸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비췻빛이 완연한 두 눈이 신기하고, 허술한 차림새의 전신에선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기세가 넘실댄다. 덕주에서 오두막을 통째로 무너뜨릴 때도, 별서에서 모습을 감추고 손을 쓸 때도. 엄청난 실력을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런 기세를 드러내진 않았었다.
그건.
휙.
그대로 호수 위로 몸을 날리는 해원기의 뒷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이런 기세를 뭐라고 부르는지 생각이 났다.
위엄(威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령(神靈)한 위엄이었다.
턱.
뭔가 상쾌한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 느낌, 그러면서 힘이 빠져 막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막 문주, 단전에 이르기 전에 제거했지만, 음경(陰勁)의 여파가 남아서 움직이긴 어렵습니다.”
워낙 키가 큰 막혼이라 말을 건네는 이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막혼의 덥수룩한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더벅머리, 허름한 옷차림, 가슴에 매달린 동그란 철판.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시선이 그 얼굴에만 꽂혔다.
비췻빛이 희미해진 깊은 눈매, 단정하면서 사내다운 생김새. 십 년 만에 보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푸, 풍화절세(風華絶世)…… 해, 해 대협!”
막혼이 목구멍에서 겨우 끄집어낸 목소리에 해원기가 살짝 미소를 보냈다. 아직 소년이었을 때도 이 거한은 자신을 대협(大俠)이라고 불렀다. 꼭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우기면서.
해원기가 막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돌렸다.
“회포는 나중에 풉시다.”
제탁지검을 휘둘렀던 손이 이번에는 맑고 바른 기운을 전해서,
막혼이 바로 입을 다물고 몸을 웅크렸다. 이 청정(淸正)한 기운으로 어떻게든 몸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 다른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막혼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분.
건드려선 안 된다고 일컬어졌던 분과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지녔다는 아우분을 사부와 숙부로 모신 사람이 왔다.
누가 감당할쏜가.
해원기의 시선이 계단 양쪽 담장에 붙은 복면인에서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을 거쳐 정전과 후전 지붕에 닿았다.
“무경박사? 오경박사(五經博士)를 흉내 낸 이름 같은데. 무력답수가 아니라 부력답수(浮力踏水)고 무력답공(無力踏空)이지. 경공의 경지를 잘 모르는구나. 올려다보기에 목이 아프니 다들 내려와라.”
차분한 목소리. 그러나 말투가 변했다.
가르치듯, 타이르듯.
그러나.
우웅!
해원기의 말과 함께 어둠이 놀란 듯 울어대고 북극묘 전체가 진동했다.
정전 지붕에 서 있던 인물이 황망히 두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낮추었지만,
퍼퍽.
무경박사라는 자는 살 맞은 새처럼 뚝 떨어지고, 정전의 지붕도 한 치나 가라앉는다. 둘에게만 전해진 무거운 압력. 언제 무슨 수를 썼는지.
해원기의 눈썹이 한쪽만 살짝 올라갔다.
대명호를 가로지르면서 도리어 전신의 공력이 충일해진 건 보병청강의 기운 덕분, 곧이어 광풍결로 복면인들을 밀어내면서 그 힘을 북극묘 위로 올렸다. 수기풍력(水氣風力), 그 여력을 엮어 지붕 위에 선 둘을 가두었으니 소위 수풍정(水風井)이란 거다.
탁 소숙에게 팔괘의 운용에 관해 설명을 들은 적은 있어도 익숙하게 행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펼칠 수 있는데. 서른 명의 복면인을 밀어낸 힘을 기어이 버티는 자.
막혼의 어깨를 짚었던 손이 정전 위를 가리켰다.
“내려오라고 했다.”
여전한 음성. 그저 가리키기만 했는데도 지붕 위 인물이 움찔하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이고, 정면에 있던 자들이 비로소 다급하게 병기를 세웠다.
장풍을 날린 것도, 암기를 쏜 것도 아니요. 수풍정도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도 모두가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술자령(戌字令), 해자령(亥字令)! 어서 쳐라!”
문득 터져 나온 고함. 그건 위 소감이라 불린 자의 당황한 외침이었고.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이 좌우로 미끄러지며 달려들었다.
개와 돼지라더니 그 명호가 정말 술과 해.
술자령의 협봉검에 붉은 강환이 요동치고, 해자령의 십자윤반이 벌어져 톱날이 맹렬히 돌아간다.
눈앞의 청년. 술자령과 해자령도 이 청년의 허름한 외모를 눈에 두지 않았고, 그들이 지닌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러지 않으면 꼼짝도 못 할 것 같은 느낌, 그건 거의 육감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