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장 검왕출세(劍王出世) (1)
막혼이 젊었을 적에는 구층철탑(九層鐵塔)이라 불렸다. 구 척에 이르는 키와 거대한 몸집, 가까이서 마주하면 그야말로 구 층이나 되는 탑을 올려보는 것 같아서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사십 대 후반, 머리를 넘겨 뒤로 묶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으며, 누렇게 바랜 황포를 입어서 그 풍모가 더욱 고대(高大)해졌는데.
뒤로 묶은 머리가 전부 뻣뻣해질 정도로 노했다.
문청을 부수자마자 좌우의 전각에서 몰려나오는 복면인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나오면서도 발걸음 소리 하나 나지 않으니.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들을 미리 배치해두었다는 거다.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으면 바로 제거할 셈.
흥륭의 가주와 총관이 억류되었고, 자신은 엉터리 같은 핑계에 속아 끌려왔다.
상계를 집어삼키려는 추악한 음모도 그렇지만, 감히 무인을 이런 식으로 농락하다니. 황하문은 엄연히 무림의 문파요, 막혼 자신은 그 주인.
세상이 희한해져 황궁의 내시 따위가 윗자리에서 설치게 되었어도, 그건 관복을 입고 녹봉을 받는 자들에게나 통하는 일이다.
강호를 어지간히 우습게 여기는 짓이요.
더구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산동포정사나 제남지부 같은 고관들도 황하가 범람할까 노심초사하는 판에.
뭐? 흥륭의 염상단을 줄 테니 동창의 수족이 되라고?
등에 둘러맨 커다란 널빤지를 대도(大刀) 뽑듯 꺼내 들었다.
“그래! 동창인지 뭔지 전부 두들겨주마.”
부우웅.
한번 휘두르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광풍이 일어 부서진 문청 지붕이 마구 날린다.
다가오던 수십의 복면인이 섣불리 달려들 엄두도 나지 않는 위세.
전각 위에 몸을 세운 네 명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호홍, 재미있겠는데. 위 소감, 잘 들리게 읽어봐.”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또 끼어드는 목소리. 그리고 위 소감이라 불린 자의 대답이 이어졌다.
“네. 대인. 황하문주 철탑거령 막혼. 병기는 목장(木槳), 실제 거룻배를 모는 삿대로 조룡십팔화(釣龍十八划)라는 기예를 쓰지만, 강맹이 지나쳐 절학이라 보긴 어렵답니다. 타고난 체격에 어울리는 외공을 익혀 도검이 들지 않는다는 과장된 평가가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철탑거령이란 외호를 얻진 않았을 터. 한두 가지 숨겨놓은 공부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쯧, 그냥 읽기만 하라니까. 위 소감은 그게 문제야. 머리는 나쁘지 않은데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 자, 잘 보라고.”
위 소감에게 가벼운 핀잔을 준 목소리의 주인공이 손뼉을 쳤다.
짝.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좌우로 갈라져서 막혼을 피해 담장을 넘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움직임, 한 줄로 이어져 북극묘 계단 아래에서 대명호로 이어지는 길을 가로막는다. 총 삼십 명, 이 기민한 동작은 이들이 대단한 수련을 거쳤다는 의미.
그리고 좌우 전각의 지붕에 있던 둘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천천히.
오른쪽의 짙은 청의를 입은 중년인은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밟는 것처럼 한 발씩, 왼쪽의 붉은 경장을 걸친 여인은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기고한 경공을 선보인다.
삿대로 일으킨 광풍까지 가라앉을 정도, 막혼의 인상이 굳어졌다.
삼십 명의 복면인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일 텐데, 굳이 그들을 물리고 나선 남녀. 위 소감이란 자가 자신에 대한 기록을 읽는 것부터 이 둘을 내세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턱.
긴 삿대를 내리며 막혼이 입을 열었다.
“이름을 대라.”
강호의 도리. 싸움을 하려면 이름을 걸어야 하는 법. 문주로서의 풍모를 보이지만.
청의 중년인은 피식 웃으며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이름? 죽을 놈이 무슨. 그래, 난 개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답을 장난처럼 하는데. 홍의의 여인도 품에서 둥그런 원반(圓盤)을 꺼내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럼 나는 돼지.”
청의 중년인의 검은 폭이 좁은 협봉검(狹鋒劍), 손잡이가 상당히 긴데 끝에는 정말 개의 대가리가 달려 있었고. 홍의 여인이 손에 올린 원반에는 십자 문양이 새겨져 사분면에 하나씩 조그만 돼지가 그려져 있었다.
스스로 개와 돼지를 자처하는 남녀, 그리고 그 병기. 그냥 막혼을 희롱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막혼이 입을 다물고 삿대를 쥔 손에 힘을 넣는데.
비유웅.
홍의 여인의 원반이 낌새도 없이 공간을 뛰어넘어 날아들었다. 부드러운 음향이 뒤늦게 귀를 울리지만, 회전하는 원반에선 닿는 걸 모조리 쪼갤 듯한 기세가 풍기고.
막혼이 급히 삿대를 끌어당기면서 왼손을 포갰다.
펑.
원반을 퉁겨내자마자 벌떡 일어서는 삿대가 청의 중년인의 허리를 후려치고, 막혼의 발이 빠르게 엇갈렸다.
퉁겨낸 원반이 되돌아가기는커녕, 공중을 휘돌아서 도로 막혼의 머리로 떨어지고, 청의 중년인의 좁다란 협봉검이 거침없이 삿대를 마주 때리니.
퍼펑.
막혼이 좌우로 겅중거리며 삿대를 갈지자로 거칠게 흔들었다. 고대한 체구에 커다란 삿대, 진짜 격랑을 다루려 삿대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휘이잉.
다시 광풍이 일면서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을 한꺼번에 휘감으려 한다. 그러자 청의 중년인이 협봉검을 흔들며 불쑥 앞으로 나섰다.
협봉검은 폭이 좁다뿐이지 날의 두께는 오히려 두꺼워서 연검처럼 휘청거리지 않는데, 광풍을 맞이하는 그의 검이 매미 날개처럼 파닥거리고. 기어이 삿대를 뒤쫓아 꿰뚫는다.
따앙! 찌익.
쇳소리와 찢겨 날리는 황포 조각.
막혼이 어느 틈에 왼쪽 소매를 찢고 돌아가는 원반을 힐끔 보곤 삿대를 횡으로 눕혔다.
“원반 안에 은형륜(隱形輪)이 있군. 치졸하다.”
분명히 피했다고 여겼는데 하마터면 왼팔이 당할 뻔했다. 원반에 무슨 수작을 부렸음을 즉각 알아챘고. 협봉검에서 전해지는 경력을 막아내느라 공력을 끌어올린 게 도움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막혼의 모습에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도 잠시 손을 멈춘 채.
그리고 후전 위에 선 자에게서 묵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보법, 겸용한 조룡십팔화도 강맹에만 치우친 건 아닙니다. 단순한 나무토막에 불과한 삿대로 진단검기(震丹劍氣)를 버틸 수 없고, 십자윤반(十字輪盤)에 피육의 상처조차 남지 않으니. 철탑은 철옹진기(鐵甕眞氣)를 가리키는 말이군요.”
관전하며 막혼이 펼친 기예를 살폈던가.
낭랑한 목소리가 또 기묘한 웃음을 덧붙였다.
“호호홍, 역시 무경박사(武經博士)라니까. 위 소감, 어서 적어놔.”
즐거운 연극이라도 보는 듯. 흥이 나서 콧소리가 더 거북하게 들리지만.
막혼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상대는 자신의 공부를 환하게 알아보는데, 자신은 개와 돼지라는 자들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모른다.
진단검기, 십자윤반. 다 처음 듣는 이름이요, 무경박사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다. 자신을 회유했던 환관, 여인처럼 면사로 얼굴 아래를 가린 자는 자신을 무슨 놀잇감으로 여기는 모양. 분기가 치솟고 여기서 시간만 보낼 수도 없기에.
공력을 잔뜩 끌어올려 삿대를 내리찍었다.
“이놈!”
철옹진기가 주입된 삿대가 태산이 무너지듯 쏟아지고, 막혼의 두 손이 번갈아 손잡이를 두드리니.
촤아아아아.
삿대가 부러질 것처럼 흔들리면서 무지막지한 경기가 노도처럼 달려든다.
“쳇.”
홍의 여인이 슬쩍 혀를 차는 게 무슨 신호일까. 앞에 나선 청의 중년인이 협봉검을 빠르게 찌르고, 그 검극에서 돌연 붉은 기운이 툭 튀어나왔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 공. 아니, 그 공 같은 게 또 매미 날개처럼 요동쳐서 제대로 공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쩌릉!
쇠가 부러지는 굉음, 막혼의 삿대가 쩍 갈라지고 그 사이로 소리도 없이 원반이 파고들었다. 더구나 막혼이 원반을 보는 순간에,
철컥.
십자문양으로 나뉜 사분면이 한 치나 벌어지면서 톱니 같은 형상이 우박처럼 쏟아지니. 검기가 아닌 검강, 원반은 은형이 아닌 윤강. 전부가 철옹진기를 깨려는 강기 무공이다.
하나 막혼도 이미 삿대 손잡이를 번갈아 잡을 때부터 준비했던 한 수가 있어서.
활짝 편 손바닥을 엇갈리며 그대로 검강과 윤강을 움켜잡았다.
콰앙!
문청이 통째로 날아가고 북극묘의 앞뜰이 폭발했다.
막혼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발밑의 돌계단이 부서지는 걸 느끼면서도 억지로 버티고 서야 했다.
삿대는 산산조각이 났고, 비장의 한 수로도 강기를 완전히 꺾지 못해서 황포 아랫자락이 걸레쪽이 돼버렸다.
“과연 거령장(巨靈掌)을 익혔군요. 그러나 화후(火候)가 구성(九成) 정도라 신장(神掌)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령신장의 비결은 아주 귀합니다. 대인?”
후전에 선 자, 무경박사라는 자가 떠드는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검강과 윤강을 대부분 거령장으로 깨뜨렸지만, 그 강기 안에 한 줄기 기이한 기운이 담겨서 내부를 흔들기 때문. 철옹진기가 외부는 쇳덩이처럼 지켜도 경맥에 파고드는 기운을 막진 못한다.
두 눈을 크게 뜨고 흙먼지 속을 노려보지만, 청의 중년인과 홍의 여인은 뭔가를 기다리듯 공격을 멈추었고.
“호홍, 쓸모가 있는 비결이란 거군. 그럼 사로잡아야지. 그렇게 해.”
허락이 내리자 비로소 손을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협봉검 위에 매달린 붉은 구슬, 거령장에도 밀리지 않는 강환(罡丸)이 섬뜩하게 빛을 비추고.
이리저리 돌려대는 십자윤반의 테두리에는 하얀 톱날이 실제처럼 이빨을 드러낸다.
막혼과 달리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 막혼이 비로소 이 남녀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철옹진기도, 거령신장도 강기 무공의 상승에 속하는 비결, 이렇게 당하는 건 대성(大成)했느냐는 차이다.
개와 돼지를 자처하는 남녀. 소문도 들은 적 없는 자들이지만 보기 드문 절정의 고수고.
철탑거령을 무너뜨릴 충분한 실력과 자신을 갖추고서, 무공 내력을 알아내려고 시간을 끌었다니.
막혼은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 어떻게든 흔들리는 내부를 억누르면서 공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서른 명의 복면인이 조금씩 접근하는 걸 알았으나, 어차피 도주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산동호한. 황하에 기대어 살아가는 거친 삶. 강호의 무인이 어찌 구차한 꼴을 보이랴. 사부와 사숙이 돌아가신 후에 황하문을 이어받았고, 제대로 무공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나 노력을 게을리하진 않았었다.
딱히 죽음이 두렵지는 않지만.
막혼이 어두운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한 가지 걱정. 잠시 그쳤던 비가 더 크게 내리면 황하의 범람이 걱정될 뿐이다.
그런데.
삐잇.
눈이 닿지 않는 새까만 하늘 끝에서 얼핏 새 울음이 들린 것 같았고.
다가오던 개와 돼지(?)의 눈이 커지면서 걸음이 느려진다. 게다가 기민하던 복면인들까지 어수선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마침내 막혼이 눈앞에 적을 두고도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촤르르르.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이거늘. 거울처럼 잔잔해야 맞을 호수에 고운 파문이 연달아 밀려드는 광경. 그건 마치 엎드려 절하듯 옹송그리는 무수한 물결들이었고,
그 물결을 타고 한 사람이 호수를 가로질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