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8화 (49/410)

제12장 진퇴유도(進退有度) (4)

제남의 서쪽 성문에 관병과 황하문 제자들이 모여 웅성대는 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훤하게 밝힌 많은 횃불과 어두운 하늘을 가리키며 황신 대비를 가지고 실랑이를 거듭하는 이들. 그중에 오소민 일행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해원기와 증명단이 눈치채지 않게 성벽을 넘었다.

백문량의 지시 때문인지 더는 관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관병과 황하문 제자들은 전부 성문까지 물러난 상태.

해원기가 캄캄한 하늘을 올려보며 짧게 혀를 찼다.

“좋지 않군.”

해원기를 따라오느라 꽤 힘이 들었던 증명단이 어리둥절했다.

“뭐가? 들키지 않았잖아.”

오는 내내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게다가 증명단이 슬쩍 복룡검식에 관해 물었다가 전음으로 계속 구결을 설명해주는 바람에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 전력으로 경공을 시전하면서 동시에 전음까지 사용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해도, 보통 고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해원기.

증명단은 이 답답한 사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란 걸 민감하게 깨달았다.

뭐, 그렇다고 말투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렇게 관병과 황하문 형제들이 성으로 모이면…….”

“사람이 많아지면 손 쓰기 어려울까 봐? 황하문은 같은 편이라며?”

엉뚱한 오해는 이제 그만. 해원기가 얼른 말을 이었다.

“황신의 경계가 소홀해집니다. 자칫하다간 무고한 양민들이 피해를 볼 테니. 음,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증명단이 의외의 대답에 눈만 깜빡거렸다. 흥륭을 노리는 동창과 싸운다더니, 갑자기 무슨 황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서두른단다.

어처구니없는 소리지만, 증명단도 슬슬 해원기라는 사내의 성격을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예의를 갖추어 말을 높인다. 물어보면 반드시 답을 해주긴 하는데 그 뜻을 당장 알아듣기는 어렵다.

고구마 백 개를 삼킨 듯이 답답하기 그지없으나.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무공뿐 아니라 그 내력도 신비 그 자체.

항산의 늙은 사부가 세상에는 별별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숨어 지내니 행사에 조심하라고 당부했을 때에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하산할 때의 기억을 되살리던 증명단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썹을 올렸다.

“어? 혹시 분서현 쪽에 간 적 없나? 산서의 분하 근처에.”

얼마 전에 들었던 소문,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비웃었던 그 얘기가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하나 이미 서두르기로 결정한 해원기는 벌써 시선을 돌렸다.

“증 낭자, 지금부터는 섣불리 손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습니까?”

물어보면 반드시 답을 해주더니.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서 증명단이 얼떨떨.

“제 일행을 만날 때까지는 바짝 뒤를 따르세요.”

해원기는 딱히 증명단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 동쪽을 가리키곤 바로 골목을 향하는 통에 증명단이 인상을 쓰면서도 그대로 따라야 했다.

해원기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기에 문득 떠오른 헛소문에 대한 생각은 접어둔 채.

아직은 낯이 익지 않은 사이고, 더욱 깊어지는 어둠 탓에. 증명단은 해원기가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이라는 걸 알아볼 수 없었다.

바위처럼 딱딱해진 해원기의 얼굴.

철부지 소녀가 버릇없이 반말로 떠든다고 기분 상할 리 없고, 전음으로 복룡검식을 강해하느라 힘이 들어서도 아니다.

약속했던 복룡검식 십육식의 전수. 십오식은 구결도 설명하지 못했고, 마지막 한 초식은 아예 시연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파에서 실전된 검법을 되찾는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그 심정을 이해하기에 어떻게든 짬을 냈으나.

경공을 펼치는 동안 가슴은 납덩이를 올린 것처럼 무거웠다.

자신의 바보짓으로 눈앞에서 놓친 자들. 동창의 음모를 저지하고 흥륭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를 그렇게 소홀히 대하다니.

자신의 유치하고 멍청한 대처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무림. 그래도 한 가지만은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비록 사부가 스스로 과거의 모든 일을 봉인토록 했고. 해원기는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라고 했지만.

해원기에게도 자기만의 맹세가 있기에.

과거의 망령.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고. 그 처리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동해삼사의 후예인 인색이귀.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나온 백문량이란 자. 소령주라는 호칭이 만약 오보혜가 말했던 반룡령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썩어빠질 망령들이 동창의 그늘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는 의미가 된다.

해원기가 외면한 시간, 사부가 온 힘을 기울여 되찾은 무림의 평온이 다시 혼란스러워질지도.

어리석은 놈!

자책과 부끄러움이 갈수록 심해져서.

사부가 크게 꾸짖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환청처럼 들리는 쉰 목소리.

“허어, 주인께서 심하셨네. 우리 소주(少主)는 타고난 심성이 고와서 차마 박하게 하질 못하는 겝니다. 병기는 흉기요, 살생은 죄업. 어찌 경솔히 검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소주는 살기 따위 없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요.”

사부에게 야단이라도 맞을라치면 부리나케 뛰어나와 말리던 노인. 살생의 굴레에서 수라와 같은 삶을 살았기에 흉터 자국으로 뒤덮인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해원기에게만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던.

‘미안해요. 교 노사.’

그 수라검(修羅劍) 교악(喬岳)도 육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사부도, 교 노인도 지금 해원기에게 말을 걸었을 리 없다. 그저 가슴 깊이 묻었던 기억들이 불쑥 고개를 들었을 뿐.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증명단이 뒤를 따르는 것도 잊을 뻔했다.

“여봐, 요. 어딘지 알고 가는 건가?”

해원기의 뒷모습에서 뭔가 무거운 느낌을 받았나. 말투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제남은 오래된 성시(城市), 크고 작은 집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골목으로 들어서자 방향조차 깜깜하다.

해원기가 속도를 늦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남은 몇 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흥륭황가의 저택은 천불산(千佛山) 부근. 일단 은밀하게 근처까지 갑니다.”

관도를 달리던 것과는 다르다. 건물이 밀집한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꼬부라져 가고, 불을 밝힌 곳이 적지 않아서. ‘은밀하게’란 게 생각보다 어렵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해원기가 은근히 얄밉지만, 티를 내기 싫어서 증명단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 대답해주는 말투가 상당히 딱딱하다.

‘뭐야, 귀찮아하는 건가? 아니면 심통을 부리는 건가. 오해라고 했지만, 아직 확실히 해명된 게 아니라고.’

같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뻣뻣한 느낌. 그러나 불만을 표시할 여유가 없다.

관도를 달릴 때도 겨우 따라갈 경공을 펼치더니, 이 복잡한 골목 안에서도 거침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해원기의 발뒤꿈치마저 놓치겠다.

정신없이 얼마나 뛰었을까.

“엇차.”

갑자기 우뚝 서버린 해원기의 등에 부딪힐 뻔해서. 터져 나오려던 탄성을 삼키며 증명단이 좌우를 살폈다.

탁탁탁.

비로소 귀에 들리는 소리.

미로 같은 골목 안이라 어느 방향인지 분간하진 못해도 확실히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증명단이 살짝 긴장했다.

특이한 환경, 설마 이런 곳에서 누가 덤벼들까? 비록 검강을 연성한 그녀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서 반응이 단순하다.

잠심침령과 동시안으로 이미 위치와 형상까지 파악한 해원기가 빠르게 왼쪽으로 돌았다.

담장 사이에 숨겨진 골목, 몸을 옆으로 해야 간신히 지나갈 아주 좁은 곳에서 조그만 그림자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에구머니! 헉, 허억.”

해원기가 입구에 있어서 놀랐는지. 움찔하더니 숨을 몰아쉬는데.

“엥? 꼬마, 거지?”

증명단이 해괴한 모습에 오히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열 살쯤 되는 나이, 키도 작고 바짝 마른 데다가 더러운 거적때기를 머리까지 뒤집어써서, 내다 버린 쓰레기더미로 착각할 정도.

증명단이 희한하게 보든지 말든지. 꼬마 거지가 헐떡이면서도 해원기를 올려다보았다.

“성은 해 씨, 장거리 쾌체라고 사기 치는 바부탱이. 헉. 마, 맞죠?”

“그래. 너는 제남의 소개(少丐)구나.”

무공도 익히지 않고 맨발로 골목길을 달려온 꼬마의 희한한 질문에.

해원기의 굳었던 얼굴에 겨우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이런 식으로 신분을 확인할 친구는 단 하나. 오소민과 연락이 닿았다.

호반에 있는 거대한 누각. 높이가 칠 층이나 되어 낮이라면 대명호(大明湖)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편액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제남분타 소개의 연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단숨에 달려온 북쪽의 초연루(超然樓).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아서 퇴락한 이 누각에서 오소민이 북쪽을 가리켰다.

“호수 너머 저곳이 북극묘(北極廟)야. 제남에 들어와서야 흥륭의 가주와 황하문의 문주가 저곳으로 초청된 걸 알았지. 공 형제와 장칠이 사정을 알아보려고 뛰어나갔네. 벌써 냄새가 나지?”

해원기가 달고(?) 온 증명단은 한 차례 쓱 훑어본 게 전부. 구석에서 황정리를 돌보도록 한 오보혜에게 붙여놓고는 일단 급한 일부터 얘기한다.

대략 백여 장 거리.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을 잠시 살핀 해원기가 동시안을 풀었다.

“별다른 동정이 없군. 재작년에 대명호를 온 적이 있는데, 북극묘가 그나마 큰 건물이긴 해도 높은 나리들이 올 곳일까? 흥륭의 황부(黃府)와도 꽤 먼데.”

제남 지리를 안다는 말. 오소민이 조금 묘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해형이 나보다 낫구먼. 난 이쪽은 별로 오지 않아서. 음, 제남에서 황하문은 동쪽, 흥륭은 남쪽에. 관아는 성 가운데니까 이 대명호 북극묘는 영 어설픈 위치야. 더구나 포정사니 지휘사니 어마어마한 직함이 나왔었는데, 관병이나 포쾌 하나 보이지 않는 게 말이 되나. 제남분타를 맡은 적각개(赤脚丐)도 일단 흥륭을 떠나지 못하게 되어서 거지들을 성 곳곳에 풀어놓았더라고.”

그 덕에 소개를 통해 연락할 수 있었던 거다.

“뭘 노리는 걸까? 간세가 흥륭에서 수작을 부릴 시간을 번다기에는 좀.”

가주와 문주를 관청에 잡아두는 게 오히려 좋을 텐데. 오소민이 제남에 들어와 바로 흥륭으로 가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우선 장칠과 공 형제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걸세. 흥륭의 염상단과 황하문 총당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아, 자네 쪽은 어떻게 되었나?”

“음. 내가 바보짓을 해서. 조금 더 알아볼 게 있었는데 놓쳤어. 오 소저가 말했던 반룡령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후.”

해원기의 굳어진 표정과 짧은 한숨. 오소민이 눈썹을 올렸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깊은 자책이 느껴져서 놀려먹을 생각이 들지 않고, 그 눈에 오보혜의 얘기를 듣는 증명단이 들어왔다.

“저 꼬맹이 때문인가?”

해원기의 입가에 어린 쓰디쓴 웃음. 머리를 가로저으려는데.

“아니…….”

펑!

돌연히 터지는 폭음. 고개를 돌리자마자 북극묘의 문청(門廳) 지붕이 산산이 날리는 게 보이고, 뒤이어 굉량한 웃음이 전해진다.

“우하하하, 이런 같잖은 수작을 감히!”

호숫물이 출렁일 정도의 큰 음성에 노기가 가득 담겼다.

북극묘는 이 장 높이로 쌓은 기단 위에 올린 건물. 돌계단을 올라 문청을 지나면 정전과 후전에 좌우 전각, 종루와 고루까지 격식을 갖춘 구조다.

문청을 부수며 돌계단 위에 고대한 그림자가 서자, 후전 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듣던 대로야. 산동호한(山東好漢)이라 이건가? 하지만 그만큼 시무(時務)에 둔한 멍청이로구나. 황하의 진흙 구덩이에서 뒹구는 것보다야 염상단을 거느리는 게 훨씬 좋잖은가 말이다. 어째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도 구분하지 못하는고? 황하문 철탑거령의 이름은 오늘부로 용호방에서 삭제해야겠구나.”

맑고 높은 음조에 자분자분하게 건네는 말투가 마치 가까운 이에게 속삭이는 듯.

고대한 그림자가 버럭 고함을 쳤다.

“이놈! 사람의 진퇴는 의리에 따라 정하는 법. 네놈은 지금 이 막혼(莫渾)에게 의리를 저버리고 도둑놈이 되라는 것이다. 네놈이 관인(官人)이든 아니든 오늘 그 주둥이를 짓이겨야 속이 풀리겠구나!”

어지간히 큰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황하문의 당대문주, 철탑거령 막혼이었고.

이 고함에 낭랑한 음성이 재미있다는 듯 웃기 시작한다.

“호호홍, 오랜만에 무식한 소리를 들으니 꼭 개가 짖는 것 같아 우습지만. 뭐, 진퇴에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건 병법에 나오는 경구(警句)지. 준비를 충분히 하고 나아가야 이롭고, 예측하지 못한 형세라면 물러나야 불리하지 않다라. 실패한 자에겐 좋은 가르침이 되겠어. 그렇지 않은가, 위(魏) 소감(少監)? 호홍.”

입을 가리고 웃는지 기묘한 웃음소리.

그리고.

북극묘의 정전, 후전, 좌우 전각의 지붕 위에 각각 하나의 그림자가 불쑥 일어났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넷. 그들이 일어서자 북극묘뿐 아니라 대명호 전체에 살벌한 기운이 퍼진다.

절령제사(節令第四) 춘분(春分)

황도(黃道)와 적도(赤道)가 서로 교차하는 것을 분(分)이라고 한다. 태양이 이에 이르러 낮과 밤이 같아지고, 이로부터 차츰 낮이 길어지니, 승분(升分)이라고도 하며, 고대에는 일중(日中)이라 불렀다. 춘분부터 기온이 따뜻해지고 비가 충분히 내리며 햇빛이 환해지니, 겨울을 넘긴 생명이 비로소 성장할 계기를 얻도다.

무엇보다 이때야말로 이른 작물의 파종기라, “춘분에 비 내리니 집집이 바쁘다네, 참외콩 먼저 심고 그다음에 모를 심지(春分有雨家家忙, 先種瓜豆後揷秧).” 한해의 농사가 이로부터 비롯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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