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진퇴유도(進退有度) (3)
진(陣).
본래는 형태를 갖추어 배치한다는 뜻이다. 주변의 형세를 살펴 그것에 맞게 설치하면 출입(出入)이 자유롭고 공수(攻守)에 편리하다. 그래서 진을 ‘친다(布)’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기초 위에서 적을 소수로 분단하고 아예 길을 잃게 만드는 원리를 진도(陣圖)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림에서의 진은 좀 더 다양한 의미를 지녀서. 다수의 능력을 높이기 위한 합격진(合擊陣)이나 적을 혼란하게 만드는 미혼진(迷魂陣), 기공의 힘을 증대하는 기공진(氣功陣)에 심지어 괴이한 술법을 부리기 위한 술법진(術法陣)까지 있고. 이를 실전에서 펼칠 때는 진을 ‘연다(開)’라고 부르니, 그 공효를 즉각 개시하기 위함이다.
고로 개진(開陣)에는 그 효력을 입으로 외치기 마련이고, 이를 진결호령(陣訣號令)이라 한다.
진결호령.
본연검의 검상이 절반이나 줄어들고, 맥을 못 추던 인색이귀가 돌연 공력이 폭증한 이유. 그건 바로 ‘중기귀생’이라는 진결호령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다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창한 양주(楊朱). 그 이론을 무공에 받아들여 악행을 일삼았던 자들이 아득한 과거에 있었다고. 동해의 해적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생명을 해친 사악한 망령들. 마땅한 응보를 받았지만, 대단히 기특한 공부를 지녀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사부가 자세히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검 하나만을 알기에 제자에게 가르칠 게 부족할까 염려해서였을까. 기억조차 하기 싫을 과거를, 되새기면 고통스러울 뿐인 지난 일들을. 마치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게 전해주곤 했었다.
제자가 박대정심의 목표를 이루길 바라면서.
복룡검식은 이미 십오식. 하나의 초식만 남았지만. 해원기는 증명단을 위해 시연한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잊었다.
인색이귀 둘이 펼친 이 괴이한 기공진. 상대의 공력을 훔쳐 자신의 힘으로 삼는 중기귀생의 비결이다.
“동해삼사(東海三邪)의 후예였더냐!”
쿵.
한 소리 꾸짖는 호통에 산자경과 구혼력을 합치던 인색이귀가 몸을 떨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진을 열었거늘, 공력을 빼앗긴 상대가 이렇게 무거운 호통을 치다니. 심지어 진세 밖의 증명단과 소령주의 어깨까지 움츠러든다.
그리고.
사라라랑.
안개처럼 흩어지는 본연검 대신에 해원기의 손끝에 기이한 형상이 어렸다. 한 필의 비단이 풀리듯, 길이는 삼 척. 오광이 두루 어렸으면서도 물속에 잠긴 듯 은은하다.
복룡검식을 펼칠 때에는 자세의 중심을 맞추기만 하던 왼손이 이 신묘한 느낌의 형상을 마주 잡았다. 마치 양손으로 수건을 팽팽히 잡아당긴 것처럼.
그렇게 보인 것도 착각이었을까.
중기귀생의 진 안에서는 어떤 기운도 다 뺏기게 마련. 해원기의 양손이 신묘한 형상을 뺏기기 싫은 것처럼 번개같이 교차했다.
좌아아아아.
귀를 찢는 굉음.
막 중기귀생으로 공력을 회복한 인색이귀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진 안에서 이런 굉음이 생길 수가 없거늘.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춰온 둘이 머뭇거릴 틈도 없이 한꺼번에 고함을 질렀다.
“칭타관쇄(秤砣串碎)!”
“산자탄화(算子彈花)!”
근근계교의 저울대가 흐릿해지면서 저울추가 돌연 백여 개로 바뀌어 우박처럼 쏟아지고, 일모불발의 주판에선 만개한 주판알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기공진이 장악한 공간이 전부 인색이귀의 전력을 다한 강기로 뒤덮여서,
누가 누군지 분간도 가지 않는데.
한 줄기 가로로 뻗는 선, 또 한 줄기 세로로 내리는 선.
그 가로 선에 우박이 죄다 박살이 나고, 세로 선에 해일이 쩌억 갈라져 버렸다.
퍼펑!
“커억.”
“우엑.”
공간이 쪼개지는 폭음 속에 나가떨어지는 인색이귀, 둘이 동시에 토한 핏줄기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뿌려지고.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해원기가 종횡으로 뻗었던 두 손을 다시 갈무리하는 광경이 드러났다.
검왕오형의 두 번째, 재단경위(裁斷經緯).
인색이귀의 강기뿐 아니라 중기귀생의 기공진까지 모조리 잘라버렸다.
파락.
이미 꺼진 화톳불이 맥빠진 불씨를 날렸지만, 소령주는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한 채.
처음부터 밀린 인색이귀. 또 뭔가 조잡한 흥정을 덧붙이려는 줄 알았다. 당금 무림에서 손꼽히는 비천무영을 포획할 능력자들이라서 맘에 들지 않는데도 대동하지 않았나. 쩔쩔매는 꼴이 보기 싫어서 화까지 낸 건 진짜 실력을 보이라는 압박이었다.
중기귀생의 기공진, 저울대와 주판이라는 기형 병기로 강기를 구현하는 진짜 실력 말이다. 유래를 알 수 없는 독특한 기예가 아니라면, 인색한 수전노 따위 부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비천무영이 아닌 하찮은 애송이거늘. 인색이귀가 합공을 했음에도 도리어 피를 토하며 나뒹굴다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선뜻 믿기 어려워서, 손을 거둔 해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저울대는 도법, 주판은 장법. 나름 속임수를 썼으나 이 정도로 황 대협을 이긴다는 건 허풍이지.”
해원기의 깊고 서늘한 눈빛이 나뒹구는 인색이선을 스치고,
“헉, 허억.”
“그, 그걸 어떻게. 큭.”
숨을 몰아쉬는 근근계교나 가슴을 움켜쥔 일모불발이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동해삼사의 후예. 번해수운도(飜海水雲刀)를 숨긴 저울대와 도해만조장(倒海萬潮掌)을 감춘 주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모조리 밝혀내는 이 허름한 젊은이는 누군가. 아니, 그것보다 중기귀생력을 산산조각낸 두 손. 아무것도 없으면서 신검과 같은 위력을 보이는 저 능력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둘을 스친 해원기의 시선이 소령주에게 향했다.
“환관이든 아니든. 이제 너 하나 남았다.”
심한 내상을 입은 인색이귀는 더 움직이지 못할 터. 소령주만 제압하면 현재의 위협은 사라지고, 아울러 동창이 제남에서 꾸미는 짓을 깨뜨릴 실마리를 얻는다.
겨우 정신을 되찾은 소령주가 눈을 껌뻑이고, 붙었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허! 이거 놀라운데. 당신, 아니, 소협은 누구시오?”
바로 앞의 다 꺼진 화톳불 흔적을 손짓으로 날리며 짐짓 차분한 체. 칭호까지 바꾸어 의젓하게 말을 건다.
주위가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해서 해원기의 동시안만이 푸르게 빛나고.
“자신부터 먼저 밝히는 게 예가 아닐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말투. 인색이귀를 쓰러뜨리고도 공력을 풀지 않았다. 동해삼사의 후예를 거느리고 나온 자다. 과거의 망령, 세상의 곳곳에 뿌려졌던 삿된 흔적과 관련되었다면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아, 이런 결례를. 급하게 달려온 초행길이라 경황이 없었구먼. 백문량(白文亮)이라 하오.”
해원기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려 보이나. 평배(平輩)로 대하는 말투에 손도 모으지 않고 이름만 댔다. 신분도 배경도 밝히지 않고서.
말을 하면서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해원기의 뒤쪽에 선 증명단까지 살피면서 말을 잇는다.
“소협이 어디 출신인지 모르겠소만, 저쪽 낭자와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더군. 흠, 어쩐지 나도 같은 경우가 된 듯하니. 이건 전부 비천무영 황정리와 얽힌 문제, 소협을 그의 무리로 간주하는 실수를 했소. 나중에 정중히 사죄할 테니…….”
“시간을 끄는 건 또 올 사람이 있어서인가?”
해원기의 나직한 음성이 백문량이라는 자의 말을 딱 끊었다.
이제 와서 주절주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노련한 척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 그냥 겁이 나서가 아니다.
복룡검식의 십오식 북룡귀명을 평범한 종이부채로 막았던 자가.
백문량이 눈썹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훗, 남의 말을 끊는 것도 실례 아닌가? 뭐, 더 올 사람이 없지는 않아도. 그래서야 내 체면이 서질 않고. 나 자신도 그리 만만치는 않고. 그렇지만 소협의 실력을 보고 나서는 굳이 시간을 끌 의미도 없겠지. 그래서, 나중에, 정중히, 사죄하려니까. 이름이나 알았으면 하는데?”
스스스.
조금 전에 끊겼던 말을 뚝뚝 잘라서 반복하자.
백문량의 주변으로 미묘한 기세가 퍼지기 시작한다.
해원기가 오른손을 들며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무슨 수작을 부리든 단번에 짓밟을 셈, 지유진(地維震)의 발 구름이 관도를 울리는데.
쿵.
그보다 먼저 백문량의 웃음이 터졌다.
“하핫, 그럼 나중에 가르쳐주게나.”
퍽. 퍼퍽.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문량의 전신이 먹물을 흩뿌린 것처럼 터져 어둠으로 화하고, 연달아 인색이귀 역시 똑같이 기괴한 방식으로 사라졌다.
해원기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 백문량도, 중상을 입은 인색이귀도 물거품인 양 꺼져서 흔적조차 없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당신, 해원기라는 이름이었지? 이 작자들은 뭐 하는 물건들이야?”
잠시 멈칫했던 해원기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스스로 한심해서 증명단의 막돼먹은 말투에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증명단도 그다지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듯, 대뜸 앞에 서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흐흥, 무슨 사술인지 몰라도 이렇게 내빼려고 주둥이를 놀렸군. 댁은 어수룩하게 당한 거고.”
가슴에 꽂히는 소릴 서슴없이 해댄다.
해원기가 삼켰던 한숨을 힘 빠진 웃음으로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맞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을 했군요.”
“맞아. 바보짓. 상대가 도망갈 기회를 주면 안 되지. 가차 없이 조져야. 아, 잠깐! 당신 말이야.”
지금 이런 소리 할 땐가. 증명단의 표정이 변하자, 해원기도 헛웃음을 거두었다.
할 얘기가 많지만, 시간도 장소도 적절하지 않다.
해원기가 먼저 말머리를 잡았다.
“압니다. 하나 지금은 더 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증 낭자, 혹시 동창이라고 들어봤습니까?”
막 따지고 들려던 증명단이 선수를 빼앗겨서 입을 주억거리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산서대전장이 거금을 빼앗겼었지. 겁쟁이들이 도와준다는데도 벌벌 떨며 쉬쉬하더라고. 태원의 통판 대인이랑 좀 아는 사이인데 건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서. 골치 아픈 것들이잖아.”
이런 말투가 이런 상황에선 훨씬 간략하고 좋았다.
증명단이 동창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여긴 해원기가 빠르게 말을 받았다.
“그 동창이 제남의 흥륭을 노리고 있습니다. 제 친구들이 도우러 갔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짐작할 수 없군요. 잠시 낭자와의 일을 뒤로 미루면 안 되겠습니까?”
포권을 취하며 인상을 굳히자.
증명단이 가만히 해원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호중객잔에선 너무 총망해서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었고. 이제야 이 해원기라는 청년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지만. 캄캄한 밤중이라 여전히 허름하고 누추한 외모만 눈에 비칠 뿐.
그러나 그 태도와 말에서는 외모와 전혀 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인색이귀라는 자들과 싸우며 복룡검식을 시연할 때에는 늙은 사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자상하더니, 지금은 또 간곡하고 진지해서.
마음속에 품었던 의심과 분통도 저절로 가라앉는다.
이상한 사내.
호중객잔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선 또 무슨 일에 끼어든 걸까. 자신이 ‘골치 아픈 것들’이라고 표현했으나, 통판 대인은 절대 동창과 엮이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을 정도. 무림에서 알려진 세력이라도 일문일파(一門一派)로는 상대도 되지 않으니 이제 막 세상에 나온 항산검파로선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절대’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입에 올렸었다.
그런다고 겁을 먹을 증명단이 아니라서. 해원기의 말에 오히려 호기심이 부쩍 일어났다.
동창이라.
“좋아. 하나 그 말만 믿고 댁을 그대로 보낼 수야 있나. 댁과는 따져볼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
“믿어도 됩니다. 시각과 장소를 정하면 일을 끝내는 즉시.”
“아냐. 딴 건 몰라도 복룡검식이 십육식이라며? 그걸 다 보여주지 않았잖아. 어지간히 의뭉스러워야 믿든지 말든지 하지.”
해원기가 포권한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장촌의 변고도 그렇지만, 증명단이 이상한 얘기를 했었다. 진자현을 비롯한 도적들이 태원부에 도착하기 전에 전부 죽었고, 황장촌에서 끌려온 왕대평이 하마터면, 이라고. 비록 진자현에게 힘을 조절하지 못해 심하게 손을 쓰긴 했어도 결코 죽을 정도가 아니었거늘.
게다가 복룡검식까지 더해졌으니 증명단의 믿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증명단이 자신의 검을 등 뒤로 돌리며 건네는 말.
“이렇게 하자고. 본 낭자가 댁과 함께 움직일게. 본파의 검법을 아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고, 틈틈이 오해를 풀 짬도 낼 수 있겠지.”
“아니. 그건.”
이 엉뚱한 제의에 해원기의 모았던 손이 절로 풀렸다. 소령주라 불린 백문량과 인색이귀가 도주했고, 제남 안에는 적어도 별서를 공격했던 환관이 있을 터. 시간이 지나면서 또 어떤 원군이 더해질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 뛰어드는 걸 알고 하는 소리인가.
하지만 해원기는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본 낭자가 항산에서 온 걸 알면서. 본래 구주정문의 하나, 북악의 검이라고. 행협(行俠)이야말로 복룡검식의 근본이랬어. 동창 것들이 못된 짓 하는 걸 놔둘 수는 없지.”
철컥.
응운검을 검집에 넣고 북룡포를 여미며 돌아보는 증명단의 암팡진 표정에.
해원기가 그만 어깨를 늘어뜨렸다.
옳은 말이다. 바른길을 걷는 협사, 그것이야말로 무도를 익힌 목적이요, 해원기 또한 같은 길을 지향하는 바에야.
더는 거절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