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진퇴유도(進退有度) (2)
[해형, 그 소녀는 누군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라고, 큰 소란. 관병에 섞여 황하문 친구들과 함께 성내로 들어갈 기회야.]
오소민의 전음을 들었고, 부상한 수십 명의 관병을 황하문 제자들이 업는 사이에 일행이 끼었다는 걸 확인했다.
기민한 조치.
해원기 혼자만, 아니, 해원기에게 대뜸 검을 휘두른 낯선 소녀도 있지만. 오소민은 해원기에게 맡길 걸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해원기 역시 전음을 듣자마자 오소민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해서.
별서에서 비천무영 황정리를 가장했으나, 여기서는 이미 본래 모습을 노출한 상태. 관병이 상대가 아니라면 거리낌 없이 손을 쓸 수 있고, 동창과 주구들이 놀랄 실력을 보이면 대단히 당황하게 될 터. 비천무영만 경계하다가 그에 버금가는 고수가 또 나타난 셈이니까.
동창이 제남에서 수작을 부릴 여력을 주지 말라는 의미다.
물론 해원기는 낯선 소녀뿐 아니라 동창 주구들의 표적이 된다. 그래도 손발을 묶는 장애가 없는 이상 혼자서 몸을 빼지 못할 리 있나.
그런 오소민의 믿음.
증명단을 모르기에 해원기 혼자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해원기는 그 믿음이 고마웠다.
흥륭이 입게 될 피해, 염상단이 겪을 고초. 해원기의 초조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일을 나누는 데 주저하지 않는 친구.
나를 알기(知己) 때문이다.
해원기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렸다.
“얘기는 조금 후에 해야겠군요. 우선 방금의 오해부터 풀겠습니다. 북악의 검은 훔친 게 아니라 그 명맥을 보존해 올바른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의지. 이제 돌려드립니다, 십육식(十六式) 복룡검을.”
아주 낮은 음성. 전음도 의어전성도 아니지만, 오직 증명단에게만 들려주는 말소리.
그리고 성큼 앞으로 나서는 해원기를,
증명단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
방금의 오해는 아마도 검광과 검영으로 검강지기를 시전했을 때 그 흐름을 끊었던 해원기의 직도황룡을 가리킬 것이다. 호중객잔에서 자신이 펼친 적이 있지만, 그 위력은 천양지차. 그 때문에 검법을 훔친 악도로 여겼거늘.
돌려준단다. 복룡검식을.
증명단 자신이 사부에게 배운 건 십이식(十二式)에 불과했는데.
홀쭉이, 근근계교가 미심쩍은 표정을 뒤로 돌렸다.
“소령주(小嶺主), 그냥 잡으면 되오? 저거, 어째 내력이 심상치 않은 듯.”
더벅머리에 허름한 차림, 가슴팍에 동그란 철판 하나 매단 젊은 놈이 거침없이 다가오니.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를 느끼기 전에 일단 영 내키지 않는다.
“맞아. 아무리 어린 것들이라도 그렇지. 뭐 저리 당당하게 나오누?”
뚱뚱이, 일모불발도 찜찜한 느낌을 대뜸 지껄여서. 소령주라 불린 학사 차림의 젊은이가 인상을 썼다.
워낙 급한 지시라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두 명을 데리고 왔으나 본래 미덥지 않은 자들이다.
인색이선은 무슨. 인색이귀(吝嗇二鬼)가 본래 이름, 그나마 일모불발과 근근계교란 명호는 그대로 대는 게 신기한 수전노다. 동해안에서 회계산(會稽山) 부근까지, 그 일대를 근거지로 온갖 흉악한 짓을 해대던 강도지만, 무공이 뛰어나고 수단이 철저해서 강호에는 그다지 소문이 나지 않았던 자들. 사형제 간이라고 하면서 누가 사형인지도 모르고, 어디 출신인지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단지 시재여명(視財如命), 재물을 목숨처럼 탐하고 도리 따윈 내던진 작자들이라 쉽게 부려먹을 도구로 여겼으나. 그만큼 조금만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꽁무니를 빼기 일쑤.
새파란 애송이 남녀를 두고도 이 지경이다.
“두 분이 누군지 이름도 들은 적이 없을걸요. 아무리 당당해도 황정리에 비하겠습니까? 약속했잖아요, 황정리를 잡으면.”
달래듯 말을 받자,
“아아, 그랬지. 황정리를 잡으러 왔지.”
“허허, 황정리가 아니라서 그만 김이 빠졌나. 어험.”
인색이귀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돌아왔다. 거액의 상금, 그 약속을 떠올리며 의욕이 난 얼굴. 그런데도 선뜻 나서질 않으니.
소령주가 일부러 인상을 펴 보였다.
“황정리가 아니라고 두 분 수고를 잊겠습니까. 힘써주시면 조금이라도 감사를 표해야죠.”
억지로 짜증을 참는 게 역력하지만. 그러건 말건, 인색이귀의 얼굴이 환해진다.
“수고는 무슨. 십 분의 일만큼 힘쓰면.”
“십 분의 일만큼 받으면 되지.”
희희낙락. 챙길 금액까지 정하는 소리를 주고받는다.
그러고 보니 황정리가 아닌 자를 상대하는데 돈푼이라도 받으려고 흥정을 했던 듯.
해원기는 안중에도 없다.
해원기가 이 한심한 광경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오른손을 들었다.
“손을 쓰겠소.”
참으로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들의 추태. 그러나 그 대화에서 황정리를 충분히 상대할 자신을 보였다.
천하에는 별별 괴이한 자들이 있고, 상대를 겉으로 평가하는 건 금물.
청강지력을 바탕으로 신왕공을 끌어올렸고, 십대검상 중의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증명단에게 약속했다. 오직 복룡검식으로만 싸울 작정.
치이잉.
수도처럼 꼿꼿하게 편 손끝에 새파란 검의 형상이 석 자 길이로 뻗고, 검극에선 불똥이 튀기듯 섬광이 번뜩인다.
실제의 검과 가장 유사한 본연검(本然劍). 검이 이루어지자마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인색이귀를 동시에 베어 나갔다. 비스듬한 검신이 그리는 완만한 원, 섬광은 머리를 노리지만 기세는 바닥을 휘감으니.
“경, 경기칩룡(驚起蟄龍)?”
증명단이 자신의 벌어진 입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깨닫지도 못했다.
복룡검식의 제일식. 단순히 상대를 검세 안으로 유인하기 위한 기수식이랬는데. 시작부터 검광과 검영이 두 명을 한꺼번에 압박한다.
“뭐, 뭐야?”
“검기? 무슨!”
진짜 놀란 건 직접 겪는 인색이귀. 받을 돈을 헤아리던 둘이 이 기겁할 공세에 화들짝 뛰어오르며 주판과 저울대를 휘둘렀다.
과연 황정리를 잡는다고 자신할 만한 실력이랄까. 보이지 않는 검영까지 눈치채고 검광을 튕겨내려 한다.
좌라락, 띠리링.
주판알과 저울추가 가볍게 울지만, 하나는 차곡차곡 층을 더하는 경력, 또 하나는 이리저리 풀어내는 흐름. 보기 드문 기공의 힘이다.
하나 해원기의 검은 어느새 뒤집혀 빙글빙글 돌아갔다. 검광이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면서 기세가 구름처럼 퍼져나가고.
[상승의 검법은 모두 내공의 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박룡쇄운의 비결이 바로 그 내공의 요체. 용이 실(實)이라면 운이 허(虛), 허실을 구분하지 않고 갈마드는 간극을 검으로 짚어야 하지요.]
증명단의 귀에 해원기의 해설이 차분하게 전해진다.
짜르륵.
열 겹이 넘는 경력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동시에,
따라락.
저울대가 검광과 검영을 미친 듯이 헤집었다.
채앵!
손끝에 어린 검형이 진짜 검처럼 쇳소리를 울리지만, 흩어지던 검광과 검영이 불쑥 치솟아 벼락같이 인색이귀를 내리쳤다.
직도황룡. 빛과 그림자를 동반한 본연검은 이미 검강지기. 인색이귀가 전혀 피할 길이 없어서 주판과 저울대를 퍼뜩 쳐올렸다.
퍼펑!
뛰어올랐던 인색이귀가 관도에 떨어져 내라며 충격으로 흙먼지가 확 일어난다.
“흑.”
“이잇.”
헛바람을 삼키고, 이를 악물고. 검강지기를 정통으로 맞았는데 병기조차 깨지지 않았다. 도리어 우스꽝스럽던 인상이 싹 변해서 흉흉한 살기를 내뿜더니. 오른쪽으로 사선을 따라 미끄러지는 일모불발 뒤에, 근근계교가 신형을 납작 낮추며 저울대를 두 손으로 잡는다.
촤아아아.
흙먼지 속에서 언제 손을 썼는지. 수십 개의 새까만 점이 괴상한 각도를 점해 쏟아지고, 진동하는 지면을 타고 무수한 갈고리가 돋아나서. 주판알과 저울 고리를 날린 듯.
그러나 해원기의 손은 갈지자를 그리며 거두어져서, 또 손목을 감아 돌듯 현란하게 움직였다. 무릎을 쭉 편 다리는 오히려 머뭇거리고, 발목을 굽힌 발은 슬쩍 내디뎌서. 풍차처럼 도는 검기가 주판알을 모조리 퉁기는 것만 보이는데 전면의 땅바닥이 산산조각으로 쪼개진다.
[검의 쓰임은 몸을 따르니, 손이 식(式)이면 발은 법(法)을 밟고…….]
그 와중에도 끊기지 않는 해설. 도무지 힘든 기색이 없다.
증명단의 두 눈이 홀린 듯 해원기의 움직임을 쫓았다.
철이 들기 전에 만난 사부, 객잔과 식구들이 그리워 처음에 속을 썩이긴 했으나. 인자한 사부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수련에 몰두했었다. 세월이 가는지도 모른 채. 손바닥이 몇 번이나 갈라지고 손톱이 몇 번이나 빠졌을까.
그렇게 완성한 십이식 복룡검법. 사부조차 자신이 이룬 경지에 닿지 못했는데.
그 복룡검식이 지금 눈앞에서 완연히 다른 위력을 보인다.
검기. 복룡검식은 검기를 이룬 기초 위에 성립하는 상승의 검법. 검기에서 검기성형, 검기성형에서 검강지기를 찾아 마침내 검기성강, 즉 검강으로 나아가니. 검강을 성취한 후에 증명단은 복룡검식을 완성했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저 허름한 사내. 맨손으로 검형을 이루었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능력, 검이 없이 어떻게 검기성형을 하는 걸까. 게다가 검강지기와 검강을 실제 검처럼 차례로 드러내더니. 검식이 거듭되면서 검강이 도로 검기로 돌아가기까지 한다.
검강을 이루면 검기 따위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여겼거늘.
사부도 알려주지 못한 박룡쇄운의 비결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보인다.
귀를 울리는 전음은 이제 아련하게만 여겨지는데.
[용을 본 이 누가 있을까. 그려내는 형상은 그저 마음. 구름은 항상 보이지만, 하나도 같은 게 없는데도 똑같이 구름이라 칭한다. 박이쇄(縛而鎖)로 전팔식(前八式)을 마치면, 용행운(龍行雲)의 후팔식(後八式)이 자연히 드러나는 법.]
말투조차 구결을 읊는 투로 바뀐 해원기의 전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육식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그게 전후 각 팔식으로 나뉜다니.
우우웅.
공간이 울며 떠는 듯하고. 해원기의 손에 어린 검은 어느새 사 척이 넘게 늘어났다. 그게 맨손으로 현현한 검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나.
새파란 검강이 용처럼 꿈틀대며 좌우를 뛰놀고, 그 주위로는 자욱하게 음한지기(陰寒之氣)를 뿌려대서.
정신없이 위치를 바꾸는 인색이귀뿐 아니라 증명단까지 소름이 돋는다. 뒤에 피워놓은 작은 화톳불은 아예 가물가물 꺼질 참. 복룡검식의 검세가 이미 이십 장까지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앞에서 사선으로 움직이던 일모불발의 주판. 주판알로 쏟아낸 산자경(算子勁)은 벌써 백여 개가 어울려 갑옷처럼 전신을 지키고. 뒤에서 횡으로만 오가던 근근계교의 저울대. 갈고리로 긁어대는 구혼력(鉤魂力)은 가시덤불처럼 퍼졌지만.
퍼펑. 콰콱.
복룡의 검강이 스칠 때마다 절반이나 무너진다. 산자경이든 구혼력이든 막기도 급급하고, 음한지기가 퍼지면서 인색이귀의 동작은 눈에 띄게 굼떠졌다. 복룡검식에 시달리느라 공력이 급격하게 소모되어서 음한지기의 침습을 막기 어렵다.
벌써 반 각 전에 끝났을 싸움. 해원기가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걸 마침내 깨달은 인색이귀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하지만 해원기의 얼굴엔 일말의 비웃음도 없이 오직 검을 휘두르는 데에만 공을 들인다.
남에게 가르치는 검. 해원기도 새삼스럽게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아서 오랜만에 몰입하게 되었다.
일모불발의 산자경은 주판알 같은 경기를 암기처럼 쏘아대며 겹겹이 공간을 뒤덮고, 근근계교의 저울대는 갈고리를 사방으로 펼쳐서 운신할 간격을 뺏는 기예. 각각이 다 유래를 찾기 어려우면서 능히 강기를 이루는 기공이라.
경공신법의 대가인 황정리를 구속하기에 가장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경공신법만으로 절정의 고수라고 칭해졌겠는가. 황 대협을 너무 우습게 보는.’
하늘을 날고, 그림자도 남기지 않는 비천무영은 그저 가볍고 빠른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음유한 기운.
본연검의 복룡검강이 무지개처럼 뻗어 나갔다.
십오식 북룡귀명(北龍歸冥). 구결을 설명할 틈도 없이.
쩡!
얼음이 깨지듯 공간이 터지면서 공중에서 그림자 하나가 뱅글뱅글 돌아내린다.
소령주라는 젊은이가 가루가 된 부채를 털어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꼴이요!”
어지간히 놀랐으면서 동시에 치솟는 분을 참지 못한 고함.
그래도 그 덕에 인색이귀가 숨 돌릴 틈을 얻었고, 삽시간에 일모불발과 근근계교가 서로 위치를 바꾸었다.
북룡귀명의 검강이 또다시 무지개처럼 뻗어 인색이귀를 베는데.
치칙.
홀연히 이 척 남짓 줄어드는 본연검. 검강은커녕 음한지기조차 맺질 못해서 인색이귀의 근처에도 닿지 않는다.
근근계교가 앞으로 곧게 내민 저울대. 갈고리가 아니라 저울추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일모불발이 머리 위로 띄운 주판에서는 꽃잎이 펼쳐지듯 산자경이 퍼져나간다. 불그레 혈기를 되찾은 얼굴들. 그 짧은 틈에 어떻게 공력을 회복했을까.
“중기귀생(重己貴生)!”
인색이귀가 한 사람처럼 외치는 소리.
그런데 졸지에 어이없는 상황에 처한 해원기의 눈이 홱 변했다. 처음 보는 무서운 빛을 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