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진퇴유도(進退有度) (1)
대번에 오해란 걸 알았다. ‘황장촌을 불태운 놈.’ 증명단이 잿더미가 된 황장촌을 들렀고, 해원기를 그 흉수로 여긴다는 뜻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호중객잔의 가족들을 전부 이끌고 떠난 걸 확인했었다. 해원기가 제압해놓은 진자현과 왕 포쾌의 무리까지 끌고 간 건 아마도 태원부에 넘기려는 의도였겠지.
그런데 날짜도 얼마 지나지 않았거늘 태원에서 제남으로 왔다니. 그야말로 부모의 원수를 찾았다고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것 같잖은가.
하지만 한가하게 생각할 틈이 없다.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한 검광이 줄기차게 요해를 노리고, 반면에 눈에 뜨이지도 않는 검영은 전신을 은밀하게 얽어매려 한다.
박룡쇄운의 비결. 항산검파가 오래전에 잃은 정수를 되찾은 복룡검식의 검강지기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무섭게 몰아치니.
그건 바로 살기(殺氣). 자칫 방심했다간 큰 손해를 보게 된다.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린 채 오른손을 크게 내리쳤다.
섬광이 한 줄기 유성처럼 내리꽂히면서,
쩡.
검강지기의 흐름이 단번에 끊기고, 증명단이 충격에 바닥으로 내려서야만 했다.
해원기 역시 거꾸로 한 바퀴를 돌아내리며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금광섬삭(金光閃爍)의 사지태백. 능히 쇠를 꺾고 돌을 부술 능력이지만, 검상을 구현하지 않은 상태로 검강지기를 상대하긴 어렵다.
오해한 증명단을 심하게 대할 수 있나.
저린 손을 풀며 일단 해명을 할 생각.
“잘못 알고 있습…….”
그러나 해원기는 증명단을 너무 낮춰보았다.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검은 학창의가 폭풍처럼 밀려든다.
“이놈잇. 본문 검법까지 훔친, 악도(惡徒)로구나!”
위잉.
묵직한 울림과 함께 새파란 기운이 꿈틀거리며 덮쳐와서,
증명단이 크게 꾸짖는 이유를 따질 틈도 없이 해원기가 어깨를 크게 흔들었다.
숨이 막힐 듯한 기세, 그리고 선명하게 응축된 새파란 기운. 검강지기를 완벽하게 용의 형상으로 승화한 진짜 검강이다.
검강지기는 검강에 이르는 단초,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검강을 이루려면 깨달음과 더불어 견고한 내공의 바탕이 갖추어져야 한다. 즉 이른바 신공(神功)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일단 검강을 이룬 검은 그 자체가 이미 무엇이든 베고 꿰뚫을 능력을 갖췄음이니.
아무리 검왕수라도 손이 멀쩡할 수 없다.
이 예상외의 공격에 해원기가 황망히 표풍결로 몸을 빼다가, 입속으로 혀를 찼다.
‘쯧.’
일단 피하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
수백 년간 정도 검법의 으뜸으로 꼽혔던 오악검(五岳劍). 그 정수를 전부 깨달은 이는 바로 사부.
북악(北岳) 항산의 복룡검식을 처음 강의하실 때 그 원리를 이렇게 일러주셨다.
“만물복북방(萬物伏北方)이니 항(恒)은 바로 상(常)이다. 고로 음종음시(陰終陰始)해서 총원항구(總元恒久)하고. 항산에서 실전된 고유의 내공과 비결이 모두 그 도리에서 시작하기에 이름을 복룡검식이라 붙인 것이란다.”
어려운 단어가 많이 들어갔지만, 일찍이 학문에 공을 들였던 적이 있던 해원기라 대강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 근원. 변화를 전부 불변하는 근원에 그러모아 펼치는 검법. 그래서 용을 묶고, 용이 불러일으킨 구름까지 자물쇠로 채우는 박룡쇄운이 비결이요, 빛이든 그림자든 갈마드는 변화의 허실을 항상 이어지는 바탕에 두는 것이 고유의 내공이다.
간단히 피하려고 마음먹었다간, 도리어 그 검세에 더욱 휘말리게 될 터.
‘하물며 검기성강의 경지잖아.’
풍뢰동의 기초 정도로 어찌 벗어나겠나.
즉각 표풍결을 풀고 양손을 앞뒤로 나누었다. 둥근 원을 그리는 왼팔, 그 원의 가운데를 뚫고 나가는 오른손.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에 엄지손가락으로 힘을 모았다.
우우웅.
오지무극은 토(土), 음종음시의 도리를 누르고. 불러낸 힘은 대풍결(大風訣), 박룡쇄운을 모조리 날릴 셈이다.
거대한 바람이 용처럼 꿈틀대는 검강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펑!
“흐윽.”
관도에 흙먼지가 풀썩 일고, 그 속에서 간신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증명단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다. 깊게 파인 발자국, 버티질 못하고 물러선 다섯 걸음이 어지럽다.
충돌의 여파에 미친 듯이 휘날리는 용무늬 학창의, 사부가 수십 년을 들여 발굴한 옛 항산파의 진산지보(鎭山之寶) 북룡포(北龍布)가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엉덩방아를 찧는 흉한 꼴이었을 거다. 아니, 북룡포와 같이 전해주신 응운검(凝雲劍)을 놓치지 않은 것만으로 천만다행. 저린 오른팔이 벌벌 떨린다.
방립이 날아간 걸 의식하지도 못해서. 본래 흰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창백해진 걸 어찌 알까.
“증 낭자, 괜찮습니까?”
해원기의 목소리에 겨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지만.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검강이 깨진 여파보다 심적인 충격이 더 크다.
무너진 항산파를 중흥할 천부의 재질, 실전된 무공의 복원, 비전의 영단(靈丹)을 아끼지 않았던 사부의 고심.
무림에서 사라진 문파의 운명을 어깨에 진 그녀이거늘. 정식으로 출도한 이후 처음으로 펼친 복룡검강(伏龍劍罡)이 무참하게 무너지다니.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소녀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낭자의 오햅니다. 지금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제가 뭐 때문에 황장촌을 해치겠습니까? 만약 제가 불측한 마음을 먹었다면 왜 호중객잔에서, 또 증 낭자가 오기 전에. 하아, 난감하군요.”
이 상황에서 말이 조리 있게 나올 리 없다. 해원기가 답답함에 짧은 한숨을 내쉬자,
증명단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괴사가 겹치면서 속았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져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막돼먹은 말버릇과는 달리 영민한 그녀.
확실히 해원기의 말은 그녀가 오는 동안 내심 의혹을 품었던 점이다.
어째서 호중객잔의 식구들을 해치지 않고 구명지은을 베풀었나? 증명단이 불쑥 나타나기 전에 이미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또 객잔을 감시하다 도주한 인물들을 쫓아 황장촌으로 갔었다고 흉수로 봐야 할까? 가난한 화전민과 무슨 원한을 맺었을 리 없다.
하지만.
증명단이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본 낭자가 속을 줄 아느냐? 태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적놈들이 전부 죽었고, 왕삼숙까지 하마터면…….”
억지로 떨리는 손에 힘을 주느라 목소리가 더 높아졌으나.
도중에 등 뒤에서 전해지는 섬뜩한 느낌,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진 해원기의 얼굴.
증명단이 말을 멈추고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잠깐 사이 주위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 왜 둘뿐이지?”
“그러게. 거지 둘까지 넷이어야 맞는데.”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황하문 제자들이 깜짝 놀라 피할 정도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두 개의 형체, 그리고 그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나직하게 전해졌다.
“황신 대비의 인원을 거느리고 일단 성문까지 물러나라는 명이 내렸소.”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화톳불 가의 군관이 바로 손을 흔들며 목청을 키웠다.
“다들 들었지? 황하문도들과 함께 다친 병사들을 부축해서 성문으로 향한다. 빨리 움직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낸 군관. 미리 약속한 바가 있는지 무척 서두르는 모습에 관병들이 바쁘게 부상자를 챙기지만.
관도 양쪽으로 물러난 황하문 제자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뭐야?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아, 그게. 날씨가 영 수상한 판에 황신 대비를 거두라는 게 좀. 게다가 공 향주(香主)도 없고.”
누군가 대답하자 군관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황하문이란 게 기껏해야 무뢰배들의 조직, 황신을 대비한답시고 설친다는 소문만 들었지 직접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뒷골목의 건달들 따위가 말대답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또 저희 두목이 없다는 핑계까지.
어둠 속의 인물에게 눈치가 보여 당장 호통을 치려는데.
“뭣들 하는 건가? 군관 대인의 명을 따르지 않고. 다들 다친 관병들을 업도록 해! 횃불을 나눠 들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형제 몇을 데리고 군관 대인 대접할 걸 찾아보려다가. 어, 저 아래쪽에도 다친 사람이 있잖아. 서둘러, 서둘러.”
황하 쪽에서 불쑥 튀어나와 떠드는 놈이 ‘공 향주’인 모양이다. 어디 진흙탕에라도 빠졌는지 지저분한 모습이고 그 뒤에도 서넛이 더 보여서.
군관이 혀를 차고 손을 내저었다.
“쳇, 됐다. 관도 양쪽으로 나뉘어 빠지도록. 어서!”
멀뚱거리기만 하던 황하문도들이 저희 우두머리가 나서자 부리나케 움직여서 트집 잡을 것도 없다. 그나마 어수선하게 소란을 떨지 않고 민첩하게 관도를 비우는 게 어딘가.
“호오, 당대에 와선 그저 철탑거령만 남은 줄 알았더니.”
“과거의 명성 덕일까. 그래도 꽤 기강이 잡혔구먼.”
두 개의 인영이 슬쩍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지 열심히 부상한 관병들을 업느라 바쁘다.
공 향주, 공호정이 나타난 후에 황하문 제자들이 정말 신속하게 움직여서 관병을 업은 수십 명이 관도에서 사라지자.
줄어든 화톳불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왼쪽은 푸짐하게 살이 찐 몸매, 오른쪽은 반대로 비쩍 마른 체형의 오십 대 인물들.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똑같이 고급스러운 금의를 걸쳤고 입을 뾰족하게 내민 박한 인상이라 마치 형제처럼 보였다.
왼쪽의 뚱뚱이가 뒤를 힐끗거리며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설마 새까만 옷 입은 여자애가 용문의 꾀주머니?”
좌르륵.
손에 든 건 산반(算盤)이라 불리는 조그만 주판. 뭐로 만들었는지 새까만 구슬들이 경쾌한 소리를 내고.
오른쪽의 홀쭉이도 손을 들어 증명단의 뒤를 가리켰다.
“비천무영 황정리라기엔 너무 허름한데.”
끼릭.
그 손에 들린 건 또 어린아이 주먹만 한 추가 매달린 저울대. 역시 온통 새까만 색이고 끝에 달린 갈고리가 달랑거린다.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둘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뻔히 오보혜와 황정리를 노리고 왔다는 뜻.
이상하게 바뀐 분위기에 증명단이 눈만 껌뻑거리고, 해원기는 다시 침착해진 표정으로 화톳불 뒤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한 명이 더 있다.
뚱뚱이와 홀쭉이의 말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 화톳불 가로 나온 인물.
평정건(平頂巾)에 폭이 넓은 심의(深衣). 각진 얼굴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로 커다란 부채까지 들어서 의젓한 학사(學士)의 풍채를 지닌 젊은이가 끌끌 혀를 찼다.
“쯧쯧, 비천무영의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무림 곳곳에 꽤 인연이 있는 거로 조사되었잖습니까. 급한 대로 방수를 구해서 미끼로 삼거나, 정탐 혹은 연락을 시도했을 수도 있죠. 일단 두 분이 제압하세요. 뭐든 나올 겁니다.”
서른이 될까 말까. 그런데도 앞에 나온 둘보다 윗자리인 듯.
뚱뚱이가 어색하게 짧은 목을 꺾었다.
“그럴 시간이 있었을까? 기껏 황정리를 기대하고 나온 우린데.”
“어린 것들 잡으려고 둘이 손을 써? 에이, 그건 우리 인색이선(吝嗇二仙)에게 너무 손해라.”
홀쭉이도 영 불만스러운 눈치.
그러나 학사 차림의 젊은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부채를 촤락 펼치기만 한다.
그걸로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전달되었는지.
뚱뚱이가 입맛을 다시며 한 걸음 나섰다.
“보자. 산동 땅에다 새파란 애송이 둘. 우리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터라 일단 소개는 해야 흥정이 붙겠다. 나는 일모불발(一毛不拔)이란 외호를 쓰고, 저기 마른 친구는 근근계교(斤斤計較)라고 부르지. 어린 것들에게 같이 손을 쓰긴 민망하니까 너희가 우리 중에 한 사람을 고르는 게 어떨까?”
일모불발.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솜털 하나 뽑지 않는다.
근근계교. 자질구레한 것까지 이득이 되는지 좀스럽게 따진다.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외호고, 그래서 둘을 합쳐 인색이라는 단어가 붙는가 보다.
증명단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려다가,
“참 듣기 거북한 이름이로군. 역시 동창의 주구인가? 그럼 가운데는 젊은 내관(內官)이겠구나.”
가까이서 들리는 말소리에 인상을 쓰며 옆으로 비켜섰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해원기가 화톳불 가의 젊은이를 가리키고,
그 눈매에 단호한 위엄이 담겼기 때문에.
아직 의심이 풀리지 않았고, 좀전의 충격도 남아있는 증명단. 그러나 관병들이 왜 관도를 막았는지,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해괴한 작자들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용문의 꾀주머니? 비천무영 황정리? 인색이선과 동창의 주구라. 게다가 내관은 또 뭔가.
뭐가 뭔지 헷갈리지만, 해원기에서 문득 느껴지는 엄숙한 기세. 이유는 몰라도 자신과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